중계동성당 게시판

슬픈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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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자 [stellara] 쪽지 캡슐

2002-12-28 ㅣ No.3227

*흑산도 아가씨의 이모 이야기

 

제 친정 어머니는 자매가 넷입니다. 그중 저희 엄마가 큰 딸이고 슬픈 이야기의 이모는 딸 중에 세번째 이지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 하지만 몇가지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당시 어른중 개화가 되셔서 어린 시절 당신이 보고 온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어린 기억에 새벽이면 시조를 읊으신 소리를 듣고, 늦은 밤 단소를 부시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 소리는 애잔한 소리로 제 안에 흐르고 있지요.

멋진 할아버지는 딸들의 이름도 멋지게 지어 주셨나봐요.

원조 흑산도 아가씨 우리 엄마는 초님(첫딸), 둘째 딸은 또 딸이니까 또녜, 세째 딸은 병례, 막내 딸은 아님(끝)이라고 지어 주셨어요. 우리네 민초들의 서정성을 보는것 같지 않으세요?

 

둘째 이모는 흑산도 사리라는(은모래가 너무 아름다운곳)으로 출가 하였는데 이모부는 어린 기억에 언제나 부재중이었고 이모는 항상 혼자 집을 지켰던것 같아요. 아이도 없었는데 마도로스 였던 이모부는 배를 타지 않을때는 부산 등지에 계셨고 머언곳의 새색시를 잘 챙기지 않은듯 했어요. 가끔 다녀가시곤 하셨지만 언제나 그 이모는 혼자였었고 주변의 시댁 식구들과만 왔다 갔다 하며 사셨어요. 이모 중 제일 예쁘고 똑똑한 여성이었는데 마음 고생을 그때 부터 많이 하시고 사셨나 봅니다. 도시에 살다 친정 가신 엄마 치마자락 잡고 따라간 외갓집( 그땐 제 밑의 막내가 태어나기전 이어서 제가 막내만이 누리는 호사와 사랑을 듬뿍 받았던 시절이기도 했는데 )가면 엄마는 또 둘째 이모 보러 산넘고 산넘어 사리라는 곳에 한나절 다리품을 팔아 저를 데리고 찾아 갔어요.

"까만 콩" 이라며 어릴때 까무잡잡한 저를 별명으로 부르곤 하셨는데 아이가 없어서 무척 사랑해 주셨어요. 은모래 가득하던 곳으로만 기억납니다.(본당 신부님은 까만 개구리? -혼나는것 아닐찌...용서해 주시옵소서. 이 불충한 신자를... 저는 까만 콩, 또 누구 까만 뭐 없으신지요? 성당에서 저 보시더라도 신부님 혼내지 마세요.)

 

세월이 흘러 담보짐 싸서 서울로 서울로 올라온 후로는 그 이모 볼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어느날 엄마 말씀이 이모가 이혼을 했고 그때 이모는 임신중 이었대요. 다녀간 이모부는 당신의 자식이 이모의 뱃속에서 자라는것도 모르고 모질게 모질게 이모 혼자만 두고 부산으로 가  새 살림을 차렸대요. 홀로 된 이모는 너무도 기가 막혀 아기는 절대로 주지 않으려고 알리지도 않은체 홀로 낳아서 키웠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자기 아빠만 닮았는지 모른다고 어머니는 피는 못속인다고 두고 두고 하셨지요. 마흔이 넘어 핏줄을 가지게 된 이모는 친정 동네로 옮겨 와서 그 아이와 의지해 세월을 사셨어요. 오로지 딸 하나에 의지하고 그 아이 교육과 나이 많아 낳은 자식이기에 당신이 유고시를 위하여 억척스럽게 일하시고 저축 하시곤 하셨지요. 여름에 오징어 말리는 일을 맡아하고 (흑산도에서 바다바람 맞으며 말리는 오징어는 짜지 않고 맛이 아주 일품이지요. 언제고 한번 맛볼수 있는 기회가 오면 같이 드시도록 하겠습니다)) 공사장 돌나르는 일도 열심히 하셨어요. 아이는 곱고 순수하고 지극한 효녀로 성장하였어요. 고등학교는 목포라는 곳으로 유학하여 여상을 졸업하고 별이 세개인 회사에 근무하게 되어 그 어머니를 흐뭇하게 하였고 주변 사람들을 미소 짓게 했지요.

 

 

그래 그래 그아이가 스물 일곱살인가 결혼이야기가 자주 거론 되고 아주 아름답게 성장한 그 아이를 보며 엄마와 이모들은 둘째 이모가 이젠 보람이 있구나 하며 기뻐하고 신랑감 물색에 열심이셨어요. 별이 셋인 회사를 그만두고 목포의 어느 본당의 사무원으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지금도 가슴이 아파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어느날 걸려온 전화는 그 아이의 세상에서의 부재를 알려 왔습니다.

사촌집에 방하나를 빌어 자취하며 출퇴근 했는데 연수가기로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그녀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통화도 안되어 그애의 집을 방문한 분이 그아이의 사고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촌 남동생은 출장차 집을 비웠고 그 아이 혼자서 빈 집에 며칠째 지내왔대요. 누군가가 노리고 침입하여 그 불쌍한 아이를 하늘 나라로 보내 버렸어요.

급히 딸이 있는곳으로 오신 슬픈 우리 이모는 딸의 처참한 모습에 기절하시고....근무하던 본당에서의 장례 미사는 통곡속에 모든 신자들의 눈물을 흘러 내리게 하고 신부님들, 수녀님들, 그아이를 아끼던 모든 분들의 오열속에 치러졌어요.

 

믿고 의지하며 삶의 보람으로 살아오신  우리 이모, 성모님의 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똑같은 아픔을 겪으셨어요. 가버린 그 동생의 본명은 말가리다 입니다. 작년 여름 20년만에 아버지 산소를 찾아볼겸 우리 부부는 흑산도에 갔다가 슬픈 이모를 외갓집에서 만났습니다. 제 손을 붙잡고 허망한 마음을 전하신 그분, 하룻밤도 그애 꿈을 꾸지 않는날이 없다고 하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정말 너무도 슬프고 가엾어서 위로의 말이 더 큰 상처가 될까봐 한마디 말씀도 못드리고 손만 잡아 드릴뿐이었습니다. 허깨비 같이 여읜 모습으로 밥 한술도 제대로 못 드시며 가버린 자식을 애타게 애타게 그리워 하셨습니다.

흑산도를 떠나오던날 아침, 이모는 신앙이 무언지 모르시지만 제가 당신딸과 같은 종교를 가진것을 아시고 계셨기애 저에게 봉투 두개를 주셨어요. 그안에는 묵주 몇개와 묵주 반지 몇개가 들어 있었어요. 그 아이가 평소 지녔던 성물이었는데 그 유품을 저에게 주신거지요. 묵주 반지 하나는 슬픈 이모의 손가락에 끼워 드리며 딸을 위해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렸지요.  또한개의 봉투에는 얼마간의 현금이 있었는데 가버린 그아이를 위해 미사를 드려 달라고 하셨어요. 약속했지요. 제가 살아 있는동안에 말가리다를 위하여 기일 미사는 꼭 드리겠노라고...

그리고 불쌍한 그 아이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 드리겠다고...주신돈도 잘 가져 왔습니다. 제가 알아서 미사 봉헌 하겠다고 하면 저에게 폐 끼친다고 더 힘들어 하실 그분의 성격을 잘알기에 잘 받아 왔습니다.

칠십이 넘으신 그 이모께 가능하다면 당신의 딸이 믿었던 주님을 믿어 보시라고 말씀 드렸는데 그 연세에 혼자 세례를 준비하실수 있으려는지... 가까이 계시면 저라도 도와 드리며 의지가 될 수 있으련만....  그 애 가버린지 이제 2년... 그애 생각 무뎌질 시간은 얼마나 걸리까요. 어쩌면 무덤까지 가지고 가실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닷바람 소리는 몹시도 큰데 창문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가 딸애의 음성일까 하며 그애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요.

 

내일쯤 우리 슬픈 이모께 안부의 전화라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새해 선물로 드리려고 사둔 겨울 내의 한벌도 내 마음과 함께 부쳐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마음도 함께 넣어 주실거지요?

 

흑산도 아가씨 스텔라가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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