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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장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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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영 [mymoon] 쪽지 캡슐

2004-03-12 ㅣ No.2934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관한 뉴스를 라디오로 들으며

차를 몰고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은 천호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며칠 전부터 3개 차로 중 1개 차로의 아스콘 공사를 하기 위해 막고 있다.

 

천호대교에 막 진입했을 때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와서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하여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2개차로는 분명히 막지 않았는데

내 앞쪽의 몇몇 차량이 방향지시등을 켜고 하나 둘씩

다른 차선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앞차가 빠져 나가고 보니 내앞 차선은 텅비어 있고

대신에 차량통제용 빨간색 삼각뿔이 차선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강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공사장 쪽의 삼각뿔이 밀려온 것이다.

 

나는 어릴 때 도덕책에 나오는 [장님] 이야기가 생각 났다.

"옳지, 저 삼각뿔을 들어보면 그 밑에는 금덩어리가 나를 위해 놓여 있겠지."

 

어떤 원님이 길에다가 큼직한 돌을 갖다 놓고 그 밑에 금덩어리를 숨긴 다음

그 돌을 치우는 사람에게 주기로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돌을 피해 갔지만

앞 못보는 장님이 그 돌을 치우고 금덩어리를 가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내가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운 다음 차문을 열고 내리려 하니

뒤 따라 오는 차들도 그냥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차가 고장 난 줄 알고 줄줄이 내차를 피해서 또 차선을 바꾸었다.

 

나는 얼른 삼각뿔을 공사장으로 옮기고 나서 다시 차를 몰았다.

내 뒤에 있던 차들도 기분 좋게 내 차 뒤를 따라서 달려오는 걸 보니

나 하나의 작은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어 흐뭇했다.

 

하지만 삼각뿔 밑에는 천원짜리 종이돈 한장도 놓여있지 않았다.

나중에 하느님이 로또복권 당첨권으로라도 보상해 주시려나???

 

친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갑자기 말을 중단했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나서 친구 하는 말,

"야, 네가 갑자기 말을 안해서 나하고 전화하다가 사고 난 줄 알았잖아?

하여간 너는 역~씨 문명영(문명승)이야. 짜~슥. 너 같은 놈 세상에 없을 거야."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날 저녁 퇴근 길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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