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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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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요한 20,19-23)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자 사도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다. (사도 2,1-11)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고 한다. (1코린12,3ㄷ-7.12-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요한 20,19-23)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사도2,1~11)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4)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차'로 번역된 '에플레스테산'(eplesthesan)은 루카 복음에는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본문까지 포함해서 5번 나오는 등 오직 루카의 문헌에만 12번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는 '(정한 날이) 다 차다'(루카1,23: 2,6: 21,22), '(어떤 감정의 상태가) 가득하다' (사도3,10; 5,17; 13,45; 루카4,28; 5,26; 6,11)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문에서는 '프뉴마토스 하기우'(pneumatos hagiu; the Holy Spirit)와 함께 쓰여 '성령이 충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에플레스테산'(eplesthesan)의 단수형인 '에플레스테'(eplesthe)의 경우에는 루카 복음 1장 41절과 67절 등에서도 '성령 충만을 받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위의 용례를 종합하면, '에플레스테산'(eplesthesan)의 원형 '플레토'(pletho)는 '어떤 상태가 가득 찬 상태'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단어가 본문에서와 같이 성령과 관계되어 사용되면, '성령이 가득하여 어떤 다른 생각이 전혀 침범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성령께 사로잡히면 성령께서 원하는 일만 하게 된다.
이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의의를 살펴본다.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께서 사람안에 내주하시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해서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에서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코린토 1서 12장 3절의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 내용과 비교하면, 사도 베드로가 성령에 의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전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잉태케 하셨고(마태1,18),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던 시메온 위에도 임재해 계셨었다(루카2,25). 따라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사건의 의의는 최초성이 아니고 특유성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개별적이거나 한시적 봉사를 위한 성령의 역사와는 달리 총체적이고 집단적 봉사를 위한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이전의 어떤 성령의 역사와도 비교될 수 없고, 그 이후에 임하는 어떤 성령 충만의 사건과도 비교될 수 없는 특유의 사건이다.
성령께서는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나(루카1,13~15) 또한 오늘날에도 충만하게 역사를 하시지만, 오순절의 성령 충만 사건은 다른 어떤 사건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회 설립을 위한 유일한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에 이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미리 예언되었고(요한 14,16~18. 26~27; 루카 24,49) 그 예언에 따라 성취된 구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다. 오순절날에는 성령께서 강림함으로써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성령세례(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의 7성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물세례를 성령세례라 부르고, 가톨릭은 7성사가 있으므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안수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와 성령충만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여기서는 개신교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하는 관계로 헷갈리지 않게 그대로 따라서 설명한다. 우리 가톨릭은 성세성사(물세례)와 성령충만(성령안수; 성령세례)으로 구분함을 잊지말기를 바란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일회적이고, 성령충만은 반복적이라는 데서도 밝혀진다. 성령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가 죄로 인해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된 관계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작을 표시하므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성령세례(물세례; 성세성사)를 받은 자에게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상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것은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다(사도 4,8.31; 에페5,18). 또한 성령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죄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이고(38.40.41절),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교회 선익을 위한 봉사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령 임재와 충만의 증거를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가시적이고 가청적인 증거로 보여 주셨고(사도2,2~3), 성령이 임한 후에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각국의 언어로서의 방언을 행하게 하셔서 성령충만의 외적인 표지을 보다 확실하게 또 다시 보이신 것이다.
오순절날의 새로운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과 사도 바오로의 서신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은 동일한 면과 다른 면을 가지고 있기에 잘 식별되어야 한다. 동일한 면은 두 방언이 모두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며, 방언을 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즉 오순절의 방언의 경우에 사도행전 2장 13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고, 코린토 1서 14장 23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이 두 방언의 차이점은, 오순절날의 방언은 실제 사용되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으로서 그 외국어를 알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사도 바오로 서신의 방언은 실제 사용되는 외국어가 아니므로, 해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해석하여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성령강림대축일 복음(요한20,19~23)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2)
'숨을 불어넣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퓌세센'(enephysesen; he breathed on them)은 '엠퓌사오'(emphysao)의 부정(不定) 과거 능동형 3인칭 단수이며,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온다.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는 창세기 2장 7절의 창조사업을 위한 문맥에서, 그리고 에제키엘서 37장 9절의 민족의 회복을 위한 문맥에서 사용된 단어가 요한 복음 20장 22절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위한 문맥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에 있다면, 구약 성경의 두 구절은 생명이 없었던 자나 생명을 잃은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일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2절에서는 육적인 생명과 전혀 관계가 없고 오로지 영적인 생명을 상징하는 성령을 부여하는 문맥에서 사용된 점이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아포스톨로스'; apostolos)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영적인 능력으로서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는 복음 전파 사명을 수행해야 할 사도들에게 '죄사함의 권한' 위임을 위한 성령 수용의 명령이 내려진다.
여기서 '성령을 받아라'에 해당하는 '라베테 프뉴마 하기온'(Labete pneuma hagion; Receive the Holy Spirit)에서 명령형이 사용된 것은 성령을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성령'에 해당하는 '프뉴마 하기온'(pneuma hagion; the Holy Spirit)에 원문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은 사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격적인 측면보다는 성령의 은사, 즉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한 능력을 받는 부분을 강조한 것으로서, 바로 위의 요한 복음 20장 23절의 '죄사함의 권한'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받아라'에 해당하는 '라베테'(labate; receive)는 '람바노'(lambano)의 명령형 과거 2인칭 능동 복수이다. 그런데 번역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존재인 성령을 '받아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라' 또는 '머물게 하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과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당신 자신의 죽음이 성령을 오시게 하기 위함임을 밝히셨고 (요한14,16~19), 요한 복음 20장 22절을 보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에 사죄권 위임을 통해 그 약속을 다시 확인시키셨으며,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때에 성령을 실제로 본격적으로 보내셨다(사도1,9) 성령송가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빛 그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일할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때에 위로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