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성당 게시판

세례받은 것은 후회가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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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sjjbernardo] 쪽지 캡슐

2002-01-12 ㅣ No.1452

 

 

2002,1,13 주님 세례 축일 복음 묵상

 

 

마태오 3,13-17 (세례를 받으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로부터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그러나 요한은 그분을 말리며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제게로 오시다니요?"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지금은 이대로 하시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그제서야 요한은 그분(뜻)대로 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즉시 물에서 올라오시니 마침 [당신에게] 하늘이 열리고 또한 그분이 보시니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당신 위에 이르렀다. 이 때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하였다.

 

 

<묵상>

 

저는 세례 받았을 때의 기억이 없습니다. 때어난지 일주일만에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렸을 적에 성당을 다닌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고,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고등학생이 되어서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 성체를 처음 모셨을 때의 감격이란 지금 돌아보아도 제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성당을 다니지 않았던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에도 저는 세례명이 있다는 것에 대해 알게 모르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벨라도(베르나르도를 예전에는 줄여서 이렇게 불렀지요)인지 빌라도(성서에 빌라도는 나와도 벨라도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 어렸을 적 빌라도가 나중에 회개해서 성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첫영성체를 하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히 대학생으로서 주일학교 교사, 청년 활동, 그리고 학생 운동을 하면서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세례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몰랐다면...’,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왜 부모님께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에서 세례를 받게 해서 뒷날에 이렇게 고민하게 만드는 것인지...’ 등의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세례받은 이로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삶, 헌신적인 삶, 자신을 내어놓는 삶, 생명을 걸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순교의 삶이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불의를 보고 자신을 내어놓아야 할 때, 인간적인 망설임 속에서도 끊임없이 저를 끌어당기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제발 놓아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과 갈등이 생길 때, 왜 내가 참아야 하는지, 왜 내가 당해야 하는지 불만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면서도 주님의 십자가가 자꾸만 눈을 가리면, ’제발 그 십자가를 치워버리십시오’ 라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을 몰랐다면,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텐데, 하느님을 아는 것이, 세례를 받은 것이 하나의 족쇄처럼 저를 옭아매는 듯한 생각에 힘겨워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례가 내 인생의 자유를 앗아간 족쇄였던가. 결코 아닙니다. 세례는 하느님 당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나약한 한 인간에 대한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당신 관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고픈 하느님의 아름다고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단 한번의 세례이지만, 세례받은 이로서 때때로 후회가 들 때, 신앙인의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라는 주님의 음성은 온 가슴 후비며 파고듭니다.

 

세례받은 사람으로서 세례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아니 어쩌면 매순간 인간적인 많은 것들을 잃게 만듭니다. 눈앞의 이익, 현실적인 즐거움, 포기하기 어려운 욕망...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가치들을 되찾게 해줍니다. 참사랑, 봉사, 헌신, 희생... 그리고 이를 통한 참된 삶 자체를 말입니다.

 

머리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세례받은 것이 후회가 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오히려 아직도 세례받은 사람으로서 세례받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사랑의 음성으로 자기 자신을 자극하시는 주님께, 그리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받은 것이 후회가 될 때,

 

세례받았을 때를 돌아볼 수 있기를...

그 때의 감격을 가슴에 다시금 보듬기를...

그 때 들었던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그 때 가졌던 자신의 담담한 다짐을 되새기기를...

세례받은 이로서 가지고 있는 빼앗길 수 없는 꿈을 생각하기를...

갈등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과 함께 살고자 애쓰는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방관하지 않고 나를 당신의 품 안에 안으시려는 하느님의 안쓰러운 모습을 바라보기를...

 

그럼으로써 매일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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