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진 자료실

[성당] 대전교구 해미 무명순교자 성지 성당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06-11 ㅣ No.1059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해미 무명순교자성지

생매장터에 성전 우뚝- 6월17일 봉헌식

 

 

(사진설명)

1. 전국 신자들의 정성으로 건립된 해미무명순교자성지 성당은 해미 읍성을 현대화한 모습으로, 순교 역사를 한국적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다.

2. 대성당 내부. 상단벽은 퇴색한 나무창살을 써서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한 상단벽은 지상의 덧없음을, 밝은 분위기의 하단벽은 생매장 구덩이를 통한 영원한 삶을 상징한다.

3. 순례자들이 천주학쟁이들을 한꺼번에 밀쳐 넣어 죽인 둠벙 둘레를 돌며 14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다.

 

 

믿음의 선조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한 거룩한 땅, 해미 무명순교자 성지. 연중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이 '믿음이 고향'을 오랜 만에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전과 다른 모습을 금세 발견한다. "어, 언제 저런 성곽같은 건물이 생겼지. 높은 탑 같은 것도 그 옆에 있네." 이름모를 수천명이 생매장당한 터 위에 이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성전이 세워져 17일 오전 11시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한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2시간을 달리다 해미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5분 정도 더 가면 무명순교자 기념성전이 보인다. 일반 성전 모습과는 외형부터 다른 이 성전은 해미 순교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충남 서산시 해미 지역은 조선시대에 군인들이 주둔했던 진영(지금의 해미읍성)이 있어서 내포 지방 국사범이 잡히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해미진영이 1790년대부터 100여년 동안 이어진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잡아들여 처형한 숫자는, 병인박해 때만 1000여명으로 기록되고 있으니 수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워낙 많은 천주교 신자를 죽이다 보니 잔인한 여러가지 처형 방법이 동원됐다. 진영 내 감옥 옆 호야나무 가지에 매달아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고, 서문 밖으로 끌어내 돌다리 위에서 자리개질을 치거나 여러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였다. 서문 밖에는 항상 천주학쟁이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수백년된 호야나무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자리개돌도 보존되어 순례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많은 천주학쟁이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진영 밖 해미천변 들판에 큰 구덩이를 파고 십수명씩 생매장하고, 둠벙에 묶인 몸을 밀쳐 죽이기도 했다. 하느님과 함께 한 삶이었기에 이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외교인들은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었고 지금은 그곳이 '여숫골'로 불리고 있다.

 

이곳 생매장터 위에 1년 10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된 해미성지 성전은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 이런 순교 역사를 한국적 이미지로 담으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화강석을 사용한 성곽 모습의 외형은 읍성을 현대화한 것이고 그 옆에 35m 높이의 탑은 망루이다. 둥근 원형은 생매장 구덩이의 의미와 완전성을 나타내는 원의 의미를 합한 것으로 순교자들이 생매장 구덩이를 통해 천국으로 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자 모습의 기와 지붕은 영원한 쉼터를 의미한다. 성당 건축은 필건축사무소 유창렬(야고보)씨가 맡았다.

 

성당 입구부터 전통적 모양의 나무 대문을 사용했으며, 200평 면적에 700석 규모의 대성당 내부 벽은 상단과 하단을 뚜렷이 구분했다. 퇴색한 나무창살를 써서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한 상단벽은 지상의 덧없는 세상을, 밝은 모습의 하단벽은 생매장 구덩이를 통한 영원한 삶을 상징한다. 제대벽은 분청사기를 사용했다. 은은한 분위기의 내부와 잘 어울리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최영심(빅토리아) 씨가 디자인하고 성베네딕도회 조 플라치도 수사가 제작했다. 청동으로 제작한 14처는 김상미(헬레나)씨 작품.

 

50평에 180석 규모의 소성당은 편안하고 포근한 분위기다. 소성당 벽은 모두 나무창살이고 천장 중앙도 창호지를 사용했다. 이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12기둥은 12사도를 기초로 교회가 세워졌듯이 전국의 수많은 이들의 정성어린 봉헌금으로 성전이 건립됐음을 드러낸다. 건축비는 50억원 소요됐다.

 

성전 뒷쪽에 위치한 유해참배실은 지름이 15m의 대형 묘지 모습이다. 유해참배실에 드러서면 이 지역 여러 순교 장면을 재현한 대형 그림이 정면에 걸려있고 순교장면 14처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동양화가 상선규(안드레아)씨가 묵상하며 그린 14처 그림 중 마지막 장면은 생매장 순교터에 빛이 쏟아내리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절정을 이룬다.

 

대형 그림 뒷쪽 작은 방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 유해는 1935년 서산본당 범베드로 신부가 이곳에서 발굴해 30리밖 서산본당 상홍리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셨던 것으로, 유해 발굴 당시 뼈들이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어 생매장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95년 원위치로 안장하면서 썩지 않은 뼈 조각들은 더 썩지 않도록 보존 처리해 이 유해참배실에 모신 것이다.

 

대전교구는 85년 해미본당을 설립, 성지성역화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2001년 안상길 신부를 성지 전담사제로 발령내어 해미본당에서 분리시켰다. 성전을 건립하느라 몸무게가 14kg이나 빠졌다는 안상길 신부는 "해미무명순교자성지 주인은 전국 신자들"이라며  성지와 성전 관리, 운영에 신자들의 정성어린 후원을 부탁했다.

 

문의:041-688-3183

 

<평화신문, 제727호(2003년 6월 8일), 이연숙 기자>



741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