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무척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어요

인쇄

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4-11-24 ㅣ No.3242

멀리 남십자성이 바라다 보이는 인도네시아. 칼리만탄(보르네오섬) 최남단에 한국말로는 "차돌"이라는 뜻의 Batulicin(바뚜리친)이라는 조그만 항구가 있습니다. 약 40년전엔 그곳에 단지 4가구 18명이 왕새우잡이를 하며 살았는데 제가 근무했던 회사가 해병대 상륙사단 출신 120명의 한국인을 뽑아 원시림을 벌채하여 가져오는 원목개발을 하면서부터 차츰 인구가 늘고, 그 회사가 규모를 늘여 제재소, 합판공장, 시멘트공장을 지으면서 현재는 인구 7만명의 도시로 발전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1980년부터 85년까지 그곳에 근무했는데 그 당시 현지인 종업원이 약 3천명, 그리고 그들을 통솔하는 한국인직원이 약 60명 정도였습니다.

회사에서는 현지인 종업원들을 위해 전기및 상하수도 시설(당시만 해도 그 나라에서는 첨단시설이었죠, 자체발전기로 전기를 썼으니까)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 학교, 회교사원등등 거의 완벽한 복지시설을 갖추었는데 교회 만은 못짓게 하는 거에요.

당시 한국인 기독교(개신교) 신자가 20명 정도 됐는데 저도 그 당시는 개신교 신자였거든요. 

한국인 신자들이 모운 돈으로 예배당을 하나 지었습니다.(언젠가 이 난에 "내가 개종을 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그 이야기를 쓴 적이 있습니다만) 제가 대표로 그곳 관할 군수와 주지사를 만나 어렵사리 기독교 교회 건축허가를 정식으로 받아서 지었는데 회사측에서는 현지인종업원 및 그곳 주민 90%가 모스렘(회교도)이라는 점 때문에 그랬는지 명의를 회사 이름으로 하지 말라하여 제 이름으로 허가를 내서 짓다 보니 결국 한국인교인 대표 권태하 본인 소유처럼 됐어요.

 

그런데 제가 개종을 결심한 후부터 현지인 천주교 신자(약 200명)들에게 주일 날 미사장소로 그 교회를 사용케 했고, (그곳으로 일하기 위해 찾아들어온 슐라웨시, 모나도, 프로레스, 티모르 사람들은 대부분 16세기 서구제국의 영향으로 천주교신자가 많았습니다) 90년대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의 현지화 정책에 따라 한국인 쿼터가 차츰 줄어드는 바람에 결국 현재는 한국인이라고는 총책임자급 2명 밖에 없게 돼서 그 교회는 이제 천주교 성당으로 서의 구실 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개신교신자는 한국인 외에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며칠 전 그 교회가 완전히 불에 타서 없어졌다는 소식을 어제 낮에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목사 사택으로 지었던 사제관까지 몽땅 탔답니다. 

몇달 전부터 노사관계가 불거지면서 신부님이 감실을 철수하시고 딴 곳에 기거하셔서 다행이라 하지만 제 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제가 그곳에 있을 때도 노사관계가 터지면 회교 교인들이 대부분인 현지종업원들이 걸핏하면 교회 유리창을 두드려 부시고 자꾸만 예배당에 불을 지르려 했었거든요.

그나마 오래 버텼다 생각되기도 하지만 불에 타서 없어졌다 하니 왜 이리 가슴이 쓰린지...

비록 내 혼자 마음이긴 했겠지만 때때로 '그래도 내 이름으로 된 성당이 이 세상에 하나 있다'하는 생각도 했고, 또 애착이 가서 인도네시아에 갈 적마다 꼭 그곳에 들러오곤 했는데 그것도 1996년이 마지막 본 것 같네요.

 

밤 늦도록 옛 사진첩을 꺼내 상냥식이며 준공식, 성탄축하예배 등 사진을 보며 추억에 젖다가(그래서 꿈자리까지 뒤숭숭하여) 새벽에 일어나 이 글로 내 성당건물을 그곳에서 혹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보다 훨씬 가슴 아파할 그곳 신자들을 생각하며 주님께 봉헌 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74 2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