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9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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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08-14 ㅣ No.66

1.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나라

예수님은 하느님의 문제들이나 신비들을 풀이하시는 신학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이기고 나서 갈릴래아에서 ꡒ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ꡓ(마태 4,17). ꡒ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ꡓ(마르 1,15)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부터 ꡒ하느님 나라ꡓ는 예수님 설교의 핵심이 됩니다. 하시는 모든 일들도 그 나라가 왔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시며 그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그 나라의 이해와 선포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지만 이 세상에도 있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이 나라에 속합니다.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습니다. 제외된 사람이 없고 특진이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에 들어오기 위한 조건 하나를 세우십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이 나라를 선택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삶과 맞지 않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과 용서가 있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하느님은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강제와 힘으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다스리시고 잘못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십니다. 많은 비유를 통해 ꡐ용서가 있는 나라ꡑ라고 알려주십니다. 죄인이라도 용서를 받는 기쁨과 희망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봉사와 섬김의 나라입니다. 서로를 위해 사는 나라, 누가 누구의 위에 있지 않은 나라,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면서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계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높은 사람이 되려면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ꡒ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ꡓ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인권과 자유를 지키는 나라입니다. 서로 존중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나라입니다. 전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여 가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나라를 위해 생명까지 바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나라가 와야 됨을 말씀하시고 가까이 와 있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아울러 이 나라와 맞지 않는 죄와 악을 없애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욕심, 사람을 차별하고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불의, 사람을 죽이고 평화롭지 않게 하는 전쟁 등… 이런 악들을 고발하고 없애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과 같이 교회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있는 도구일 뿐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교회가 아니며,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으면서 이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차별당하지 않고 속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단죄하는 교회보다는 죄에서 해방시키고 용서와 사랑과 기쁨을 전달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참봉사를 함으로써 사람들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인정과 섬김을 바라면 예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 신문을 들면서 사회에서 도움과 봉사가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사회의 아픔과 문제들을 자기의 아픔과 문제로 삼아야 합니다.

신자들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다른 신자들에게 봉사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계급을 찾고 다른 신자들의 인정과 섬김을 바라는 삶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사는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어떤 일을 맡을수록 봉사와 섬김의 정신으로 살아야 될 것입니다. 봉사와 섬김은 ꡒ내 말을 따르라ꡓ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신자들의 ꡐ발을 씻는ꡑ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지만 그 상징이 되어 그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_문요섭․요셉 신부


2.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

우리 신앙선조 순교자들을 기리는 순교자 성월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한국교회는 1984년 103위 성인이 탄생된 이래 다시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동료순교자(123위)와 한국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와 김범우 토마스 등 126위의 시복시성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우며 은총 충만한 세월을 사는 것입니까.

일찍이 떼르뚤리아누스(Tertullianus)는 ꡒ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ꡓ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3백 년 넘게 모진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이 쇠잔해지지 않고 박해의 칼날을 휘두를수록 오히려 더 널리 퍼져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역시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 물려준 신앙 유산의 토대 위에 오늘의 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참모습(일찍이 우리들이 세례 때 은총․활력 넘치고 기쁨에 찼던 아름다운 얼굴)을, 잃어버린 자화상을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순교자들은 신분, 가문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떠돌다가 심산유곡에 자리잡고 교우촌을 이루어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로 은총과 기쁨과 평화 가운데 사셨습니다.


성모님의 사랑 속에 지상여정을 걷고 계신 단원 여러분!

근년에 교회 내 뜻있는 이들로부터 200주년 이후 우리의 순교신심이 퇴색하고 실종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들어, 그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먼저 성인위에 올림받으신 103위 순교성인 한분 한분을 바라보며 생각해 보십시오. 2백 년 가까운 세월을 격해 있지만 같은 주님의 은총과 평화 가운데 여전히 신앙적인 믿음과 통교(通交,Communio)가 가능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200년 역사 가운데 전반부 100년 동안의 압제하에서는 물론이려니와 6․25전쟁 때 숨져간 유명무명의 순교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에 앞서 가며 피로써 신앙을 지킨 이가 얼마나 되는지요.

신앙 자유를 누리는 지금 여전히 일상적인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고 이웃 전교에 힘 없으며 냉담자 회두(回頭)에 미약한 자신을 감히 우리의 선대 순교자의 삶에 대비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신앙과 목숨을 맞바꾸어야 하는 직접적인 피의 순교(赤色殉敎)의 기회가 당장에는 주어지지 않는 듯 보이지만 우리의 일상(日常)가운데 불림받은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 신자이기에 감당해야 할 고난(苦難)과 역경(逆境)이 가로놓여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순교의 기회이며 내적 순교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수도자(修道者)들이 이미 천상적인 것을 위하여 지상적이고 현세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데서 철두철미 자신을 죽이고 청색순교(靑色殉敎)를 작정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Hic et Nunc) 우리들은 백색순교(白色殉敎)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 대전에 한 가족으로 살아가시는 형제자매 여러분!

앞서간 순교자들의 그 뜨거운 피가 내 가슴속에, 내 혈류 속에 맥맥이 흐르고 있지 아니합니까. 순교자 한분 한분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분들의 나이를 따져보고 그분들의 직업과 직분을 헤아려 그분들의 환희에 넘친 최후의 환한 얼굴을 오늘의 신앙인, 나의 얼굴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그분들의 열정이 나의 열정이 되고 그분들의 정신이 나의 정신이 되며 그분들에게 참으로 소중하였던 신앙이 나에게도 참으로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신앙인 순교자들이시여!

천상영복을 누리시며 저희들과 저희 나라의 복음화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_최홍길 레오 신부


3.겸손되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여러분은 힘든 일이 생길 때 어떤 모습으로 극복합니까?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ꡐ나는 가장 힘들 때 누구에게 의지하려고 하는가?ꡑ

사람들은 인사할 때 흔히 ꡒ건강하세요ꡓ라고 합니다. 건강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건강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병이 들 수도 있고 나이 먹으면 예전 같지 않은 체력으로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도 힘에 부쳐 엄두를 못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건강을 주시는 분은 과연 누구십니까? 한시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숨결이 과연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ꡒ너는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어떻겠는가? 하루아침에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다 잃어버리고 그나마 있던 돈도 다 떨어져서 길거리로 내몰린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단 몇 푼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다면 과연 누구를 찾을까?ꡓ

우리 자신에게 가장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봅시다. 인생에서 겪었던 많은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우리 자신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응답을 해왔던가 새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전 세계 여러 나라의 ꡐ행복지수ꡑ란 것을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은 강대국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1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가 1등이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행복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돌이켜볼 때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영적 독서(준주성범 2권 10장)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ꡒ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신의 낙은 세상의 모든 쾌락과 육체의 오락을 초월한다.ꡓ ꡒ영혼의 낙은 덕에서 우러나오고 하느님께서 깨끗한 마음에 내려주시는 것이니 오로지 기쁘고 영예스러움이다.ꡓ

그런데 이런 영혼의 낙은 우리 인간이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시는 데 가장 방해되는 것을 지적합니다. ꡒ정신 자유가 바르지 못한 것과 과도히 자신을 믿는 것ꡓ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준주성범의 저자는 ꡒ하느님께서 즐겨 위로의 은총을 내려주시지만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ꡓ고 지적합니다.

배은망덕이란 말도 있듯이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입은 은총을 누가 주시는지 알려 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 채 자신의 틀 안에 머물고자 합니다.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거늘 우리는 그 인생의 의미도 깨닫지 못한 채 허무한 인생의 굴레에 집착하려는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어려움에 처했다면 실망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나의 어려움으로부터 멀리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금이라도 편안하다면 교만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감사드리십시오. 만약에 겸손하지 않다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ꡒ고상한 것이라 해서 거룩한 것이 아니고 유쾌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다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ꡓ 이 경고의 말씀이 우리를 겸손의 길로 초대합니다. 진정으로 감사드려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삶이 겸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느님의 은총이 가르쳐줍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로 돌릴 줄 아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사는 모습입니다. 겸손되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모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아멘.

_윤병길 세례자요한 신부


4.레지오 단원과 성체

레지오 교본에서 영성체에 관한 절(節)을 읽어보면 참으로 인상적이며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체는 모든 레지오 단원들의 성스러움과 사도직의 중심이며 원천입니다. ꡒ성체는 은총의 중심이며 샘이다. 그러므로 성체는 레지오 단원의 활동 계획을 지탱하는 바로 그 머릿돌(중심축)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열정적인 활동을 한다고 하여도 그 활동의 주된 목적이 성체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다스리시도록 해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는다면 우리가 설사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체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시며 그 마음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여 사람들이 그분과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주로 성체이다.ꡓ ꡒ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ꡓ(요한 6,51~52).


모든 레지오 활동의 주된 목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성체를 모시도록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성체가 레지오에 있어 그 초석과 같이 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성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몸과 피, 영혼과 신성의 실존(實存)입니다. 성체가 레지오의 초석이 되는 까닭은 우리 안에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는 성체의 힘 때문입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면 우리들이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 안에 모시게 되며 또한 그분의 심장이 우리 안에서 뛰게 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하고 성체조배를 할 때에 그분은 몸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들은 그분이 베푸시는 성삼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한없이 크시고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체를 모실 때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그 넉넉하심은 놀라울 뿐입니다.

나는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ꡒ성체를 묵상할 때에 우리들의 마음은 놀라운 믿음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신비뿐만 아니라 사람이신 그분의 신비에 관한 믿음입니다. 성체 앞에 서면 시편의 다윗의 말이 저절로 음송(吟誦)됩니다. ꡐ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그를 돌보십니까?ꡑ 하느님이 자신을 사람이 먹을 양식으로 주신다면 그분이 보시기에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가치가 있는가! 우리들의 심장을 오직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다면 그 안에 얼마나 넓은 공간(空間)을 감추고 있는가! 오, 하느님! 당신께서 우리들을 몸소 지으셨습니다.ꡓ

레지오 단원 중에 누가 어떤 분을 성체 앞으로 인도한다면 그 레지오 단원은 인성으로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그분을 인도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레지오 단원에게 이것보다 더 근본적이며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 영혼이 그 타는 갈증에 시원한 샘물을 찾은 것이 되며,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진실로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 우리들은 바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차려주신 식탁에 초대받아 먹고 마시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바로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체 안에서의 예수님의 실존은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물리적으로 혹은 우리와 그분 사이의 거리가 멀거나 혹은 가까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ꡐ그리스도의 몸ꡑ의 중개(仲介)를 통하여 사람의 사람에 대한 어떤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일치입니다. 영성체는 그분의 육적 현존을 통하여 중개(仲介)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우리들과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우정의 성사입니다.

마리아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우리들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그분과 서로 부족함이 없는 벗이 되어주기만을 바랍니다. 우리들 역시 이 목표를 좇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진실한 헌신과 사랑을 실천하고 마리아와 하나되어 마리아와 함께 사도직에 나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ꡒ마리아는 신자들을 성체 앞으로 인도하십니다.ꡓ 이것이 레지오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_맥그리거  신부 /김차희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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