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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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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16

[교리 해설] 성령을 믿으며
 
하성호
 
 
겨울 바닷가에 갔다. 약간의 비린내를 풍기며 콧잔등을 시리게 하는 바닷바람이 몸 깊숙이 파고든다 한없이 평온하고 행복한 순간이다. 신선한 공기가 내 기분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바닷가에 서면 팔을 활짝 펼치며 심호흡을 하게 된다. “아, 정말 좋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절로 난다. 내가 생명의 공기를 마신 탓일까!
 
 
성령에 대한 고백의 위치
 
사도 신경의 세 번째 부분은 성령에 관한 것으로 교회와 우리 구원의 관계를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러므로 사도 신경이 고백하는 내용은 우리의 삶 안에 성령이 현존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의미가 이해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말하듯 성령의 현존을 말함으로써 우리의 삶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고백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곧 성령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현존하시는 존재 모습이라 하겠다. 인간의 몸에서 혼이 빠지면 한낱 시체에 불과하듯이, 하느님 백성인 교회도 성령이 없으면 한낱 이익 단체에 불과할 것이다.
 
성령에 관한 신앙 고백의 목표는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현존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사에 대한 신앙 고백이라 하겠다. 이런 바탕에서 제3부의 내용은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라고 이어진다. 원래 ‘모든 성인의 통공’은 주님의 몸에 의하여 ‘하나인’ 교회로 묶어 주는 성찬의 공동체성을, ‘죄의 사함’은 세례를 의미한다. 이 두 성사가 교회를 이루는 기초이기에 신경의 제3부는 성령의 역할과 결부시켜 보아야 한다.
 
 
‘영’(성령)에 대한 구약의 사상
 
사도 신경의 고백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 ‘영’(성령)에 대해 성서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영’(靈)을 가리키는 히브리 용어는 ‘루아’(ruah)이다. 이는 생명의 힘을 내포한 숨결, 공기 또는 바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루아’라는 용어는 감각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바람과 감각 기관으로 느끼지 못히는 영적인 힘의 두 요소를 동시에 내포한다. 공기를 호흡한다는 것은 생명의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원초적인 인간 경험이다. ‘결국 그 생명의 힘은 하느님의 창조적이고 생활하게 하는 힘이다. 또한 사람에게 숨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산 이와 죽은 이를 구분하므로 숨결은 생명의 힘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느님이 숨결(얼)을 인간에게서 거두시면 인간은 죽고 만다.
 
생명과 창조의 힘으로 루아를 이해한다면 그 다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인간을 포함한 전우주적 의미)의 관계를 루아라는 말이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야훼의 영’(ruah Yahwe) 을 통하여 하느님 이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이 성서의 사상이다. 세상과 단절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느님과 단절된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야훼의 영’이 하느님과 세상 사이를 열어 주신다.
 
하느님은 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심으로써 그 역사를 구원의 역사가 되게 하신다. 특히 유배 이후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백성을 새롭게 해주시고 그 백성의 역사를 이끌어 주시길 청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야훼의 얼’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 자신의 생생한 현존을 의미한다.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어 갈 인물들을 뽑아 당신의 영을 부어 주셨는데, 이를 ‘영의 도유’로 보았다.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1사무 16,13). 왕에게 부어진 도유는 점차 메시아 사상과 결부된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이사 42,1). 하느님의 영과 하느님의 종의 관계에 대한 사상은 신약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중요한 사상이다.
 
 
성령에 대한 신약의 이해
 
루아에 대한 구약성서의 의미를 바탕으로 신약성서의 성령에 관한 사상을 이해하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얼)을 통하여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기 때문에, 결정적인 메시아의 시대는 바로 하느님의 영이 새롭게 활동함으로 도래한다. 이러한 사상이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드러난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 1,8). 성령을 통하여 메시아의 때가 도래하였고 하느님은 세상과 결정적 관계를 맺으신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르 1,10). 예수님은 ‘주님의 도유’(성령의 도유)를 받은 이로서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안에 성령이 현존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은 구원의 업적이 된다. 인간에게 생명과 구원을 결정적으로 베풀어 주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복음서들은 성자께서 인간이 되신 육화와 성령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에 있을 하느님의 구원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말씀의 육화와 성령의 임재로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공관 복음의 승천 기사와 요한 복음의 빠라끌리또(협조자)이신 성령의 약속으로(요한 14,15; 16,8) 예수 시대와 교회 시대가 구분되는데,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성령은 예수님의 지상 대리자로 여겨진다. 이제 ‘협조자’이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시고, 공동체를 이끌어 가신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 공동체를 관리하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업적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을 영구히 보증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동시에 초대 교회가 성령을 체험한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결부되어 있다. 승천하신 뒤 성령을 보내고 마지막 때를 시작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 믿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시고,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해짐으로 하느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초대 교회의 이해이다(사도 2장 참조). 사도 바오로도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관계를 말한다(1고린 12; 로마 12,4-21).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은 교회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우주에 걸쳐 활동을 하신다(로마 8,8-25). 구원 역사의 목표는 전우주적이기 때문에 성령의 활동은 모든 제한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성령은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하느님의 개방성과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구체적인 현존이라 하겠다. 천지 창조 때부터 끊임없이 우주 만물(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을 성화시키고 생활케 하기 위해 성령은 역사하신다.
 
우리는 숨을 쉬고 있다. 우리의 숨결이 과연 성령을 호흡하는 것일까? 성령을 호흡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힘을 받을 것이고, 성령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영)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에제 36,26 이하).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하느님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되었고, 묵은 나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런 사람이 바로 성령으로 쇄신된 사람이다.
 
또한 세상의 새로운 창조를 위해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숨을 거두어 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29-30)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오소서, 성령이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고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주의 성신을 보내소서, 온 누리가 창조되리라. 또한 온 땅을 새롭게 하시리라.”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터지는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개탄도 하고 한탄도 한다. ‘얼빠진’ 사람들이 깃대를 잡고 흔드니 그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얼이 충만하고 정신이 제대로 든 이가 깃대를 잡게 될 때, 그 사회는 올바른 사회가 된다. 이 세상에 하느님의 얼이 충만한 세상이 되도록 우리 자신부터 성령의 인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겠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몇몇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교회가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된다. ‘몇몇 뛰어난 지도자라 자처한 이들은 교회를 결국 자신들의 권리 보호의 아성으로 만들거나 심지어 갈기갈기 분열시킴으로써 교회를 파괴하였다. 성령이 이루시는 일치는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 가능함을 망각하지 말아야겠다. 교회의 ‘얼’이신 성령이 충만할 때 교회는 비로소 명실 상부한 주님의 교회가 되고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될 것이다.
 
 
하성호 요한 신부는 1982년 대건신학대학(광주 가톨릭 대학)을 졸업, 사제가 되어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교에 유학하여, 성체성사에 관한 논문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구대교구 지좌본당 주임과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을 지내고, 현재 대구 가톨릭 대학교 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199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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