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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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간 토요일 7/6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왕위 찬탈 사건을 주요 소재로 삼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법과 노력을 다 기울이는 모습이 어떤 때는 스릴이 넘치고 멋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윤리와 인격은 사라지고 맙니다.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탐욕 그 자체가 윤리나 정도를 넘어서고 제외시키는가 봅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작은 아들 야곱과 그 어미 레베카가 아버지 이사악을 속이고 큰 아들 에사우가 받을 상속을 가로채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사악이 죽을 때가 되자 가문의 상속을 의미하는 축복을 할 시기가 됩니다. 그래서 큰 아들을 불러 아비가 좋아하는 동물을 잡아다가 음식을 만들어 오라고 명합니다. 에사우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잘하는 사냥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에사우가 나가자 마자 그 어미는 쌍둥이 아들 형제 중에 자신이 편애하는 둘째 아들 야곱에게 에사우처럼 꾸며 에사우의 냄새가 나게 하고, 미리 만들어 놓은 남편 이사악이 좋아하는 음식을 들고 들어가게 합니다. 이를 모르는 이사악은 축복과 상속을 받을 에사우를 제쳐놓고 야곱에게 축복과 상속을 넘겨주게 됩니다(창세 27,1-29 참조). 이 기사를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허락하실까? 심지어는 나쁜 일을 저지르는 죄인을 선택하신 것처럼 보일까? 그리고 왜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까? 하느님은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주 하느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몹시 아파하시면서도 그 일 자체로 벌을 내리지는 않으십니다. 그 대신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이 차지했다고 여기는 권력이나 재물 때문에, 그 권력이나 재물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갇혀 버립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나 재물의 굴레에 갇혀 답답하고 고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실제로 야곱은 에사우를 속여먹은 죗값으로 도망을 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십사여년 동안 종처럼 살다가 거기서도 결국 범죄자처럼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쫓겨납니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형 에사우가 무서워 제대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비굴하고 비참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주 하느님은 야곱도 에사우도 편애하시거나 특별히 따로 무슨 힘을 실어주지 않으십니다. 단지 야곱이 도망자로 살아가면서 힘겨운 나날에 매달리고 울부짖을 때 그 가련한 처지를 가여이 보시고 그 생애를 보호해주실 뿐입니다. 또한, 얼핏 보기에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여길 수 있는 에사우에게도 조금 반항기 섞인 비뚤어진 생을 살고자 했던 것으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그를 막지 않으시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이 경우에 주 하느님께서는 야곱이나 에사우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정하고 결행하여 그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맞아들이고 살도록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 죗값을 갚으면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 12장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