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불가사의한 30년 결혼 생활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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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헌 [dhsong] 쪽지 캡슐

2002-12-29 ㅣ No.2378

 

나와 내 아내의

불가사의한 30년 결혼 생활에 대한 고찰

 

                                         박범신

 

윤회를 믿는 불가(佛家)에서는, 이승에서 부부의 연(緣)으로 맺어지기란 상상을 뛰어넘는 오랜 기간 동안, 상상하기 힘든 인연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말한다. ’결혼제도는 이미 용도 폐기되어야할 대상’이 되었노라고. 부부로 산다는 일에 대한 작가 박범신의 단상이다.  

 

 

아주 오래 전 아내와 연애할 때,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오뎅인 줄 알았고,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찐빵인 줄 알았다. 우리들은 그래서 주로 오뎅 백반집 아니면 찐빵집에 들러 식사를 하곤 했다. 우리가 단골로 드나들던 오뎅백반집과 찐빵집은 값이 쌌으나 실내 인테리어가 매우 아늑하고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물론 가난한 청년이었다. 사랑은 뜨거워도 호주머니는 늘 비어있다시피 했기 때문에 데이트 비용도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젊은 애인이었던 아내는 내 형편을 환히 아는지라 행여 내 자존심이라도 다치게 할까보아 짐짓 자신은 찐빵을 참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 그 만한 싼값으로 그만큼 우아하고 깔끔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오뎅백반 집밖에 없었으므로 오뎅 백반을 좋아한다고 짐짓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사실은 오뎅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결혼한 다음, 젊은 아내는 걸핏하면 오뎅국을 밥상에 올리곤 했는데,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 수 없이 오뎅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실토하고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연애시절은 은폐가 가능했다.

그러나 결혼은 다르다. 한솥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서 매일 함께 자면서 누구의 며느리나 사위가 되고 또 누구의 어머니나 아버지로 살아가야 하는 결혼이란 철저히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은폐나 추상이 깃들 수 없다. 모든 건 잔인할 정도로 낱낱이 드러나고 대비된다. 그런 점에서 결혼 생활이란 피차 상대편의 은폐된 것, 미화된 것, 추상화된 것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날의 연속이다.

 

어떤 땐 이 여자가 내가 연애했던 처녀 적의 그 여자가 맞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고, 어떤 땐 너무도 낯선 얼굴에 충격을 받고, 할 수만 있다면 결혼을 되물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 물론 그 점은 여자 쪽도 그럴 것이다.

아내와 결혼한지 어언 30여 년.

 30여 년의 긴 세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온 끝에 얻은 확실한 결론의  하나는 ’우리 부부는 대부분 서로 안 맞는다는 것’이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마찬가지다. 이렇게 서로 맞지 않으면서 지난 30여 년을 도대체 어떻게 함께  살아왔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많다. 앞으로도 살면 살수록 안 맞는 부분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함께 사는 일이란 마치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찾아내고 쌓아가는 일인 것 같다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30여 년이나 함께 살면서 찾아낸 ’안 맞는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가령

1)아내는 붉은색 옷을 좋아하는데 나는 아주 싫어하고

2)아내는 아기자기한 꽃무늬 커튼을 좋아하는데 그 역시 나는 아주 싫어한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할 정도다. 그렇다면 지난 30여 년 우리가 거쳐온 수많은 방들의 벽지와 커튼은 어떠했던가. 벽지와 커튼을 고를 때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싸웠거나, 겉으로 싸우지 않았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했거나, 그래서 상처받았을 것이다.

음식도 그렇다. 아내는 예컨대

3)국수나 만두 같은 것들도 좋아하지만 내게 밀가루 음식은 주식일 수 없다.

4)아내는 튀김류를 좋아하고 나는 담백한 나물류만 찾으며

5)아내는 음식을 먹는 시간이  행복하지만 나는 그냥 할 수 없이 통과해야 되는 의례적인 시간에 불과하다.

6)아내는 과일을 한없이 먹을 수 있는데 나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7)아내는 국 건더기 때문에 국을 먹지만 나는 건더기엔 관심 없고 국물 때문에 국을 먹는다.

8)배추 김치나 총각 김치도 쭉쭉 찢어서 거드럭거드럭하게 먹어야 아내는 제 맛이 난다 하고 나는 칼로 정갈하고 깡똥하게 잘라 놓아야 먹는다.

 어디 음식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침대를 바꾸면서 몇 차례나 말다툼을 했고  급기야는 들여놓은 침대 매트를 바꾸는 소동까지 치러야했다. 디자인이야 뭐 기호가 서로 달라도 그럭적럭 맞춰간다 할 망정  몸의 구조와 매트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은 심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이를테면 푹신한 매트에서 자야 아내는 아침에 몸이 상쾌하다 했고 나는 푹신한 매트에서 자고 나면 허리가 아팠다. 그러므로 제 몫 편하게 하려면 침대도 둘, 침실도 둘로 나누어 써야 할 참이다.

10)아내는 걸핏하면 덥다면서 얇은 이불을 찾고 나는 여름에도 두툼한 이불이 좋으며

11)아내는 까글까글한 침대 시트를 좋아하는데 나는 까글까글한 질감의 시트는 아주 질색이다.

12)아내는 독주(毒酒)를 선호하고 나는 기피한다.

13)아내는 러브스토리를 좋아하지만 나는 영화든 연극이든 러브스토리를 극도로 싫어하므로, 우린 함께 공연이나 영화구경을 하기 어렵고 또 술 마시기도 어렵다. 어떤 땐 영화관 앞까지 가서 각각 다른 영화를 보고 나오기도 한다

14)아내는 운동을 좋아하고 몸이 유연하여 춤도 잘 추는데 나는 운동을 아주 싫어하고 춤추기는 잼병이다.

15)아내는 또 초저녁잠이 많고 나는 새벽잠이 많으며

16)아내는 늘 변비를 하고 나는 늘 설사를 한다.

 아이들을 다룰 때도 그렇다.

17)아내는 스무 살이 넘은 아이들의 할 일까지 가로맡아 해주어야 직성이 풀리는데 나는 한사코 아이들에게 맡기라는 주장이고,

18)아내는 아이들의 장점을 먼저 보고 나는 아이들의 단점을 먼저 본다. 아이들 문제로 싸우는 일은 평생 반복된다.

19)나는 일반적으로 먼저 화를 내고 아내는 일반적으로 사과를 먼저 한다. 부부 싸움 끝에 화해의 차 한잔을 마실 때조차

20)아내는 클래식한 꽃무늬 찻잔을 꺼내고 나는 한사코 담백하고 모던한 현대식 찻잔을 꺼내든다.

 

무엇보다 속도의 문제는 심각하다.

21)가령 내가 밥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을 때 아내는 식사의 반도 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며

22)내가 살 물건을 결정하고 지갑을 꺼낼 때 아내는 그 옆의 다른 물건값을 물어보고 있고

23)내가 외출 준비를 끝내고 나와, 차의 시동을 켤 때 아내는 느릿느릿 화장실로 가고 있다. 변비인 아내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해도 내겐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매사가 다 그러하다. 삶을 살아내는 개인적인 속도감에 있어 아내와 나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 예컨대 아내는 매사에 이번이 아니면 다음이 있다는 식이고, 나는 매사에서 다음 차가 설령 있다하더라도 이번 타야할 차가 막차라는 식이다.

24)설거지조차도 아내는 설거지감을 쌓아두고, 쉬었다 할 요량을 곧잘 하지만 나는 도시 그 끝을 보지 못한다.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장신구, 좋아하는 가구 스타일도 맞는 게  하나도 없다.

 

25)아내는 자유분방해 뵈는 집시풍의 의상을 좋아하는데  나는 아내가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기 바라고

26)아내는 크고 뉘앙스가 강해 뵈는 장신구를 선호하지만 나는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스타일이 좋다.

27)아내는 고전적인 가구를 좋아하지만 나는 가구만은 모던한 것을 갖고 싶어한다.

 

얼마전에 새로 들여 놓은 식탁 의자 때문에 또 한바탕 말싸움을 했다. 다음날에도 화해도 할 겸 드라이브나 나가자고 했더니

28)아내는 냉큼 물가를 따라서 가자고 했고 나는 숲 깊은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29)아내는 여지껏 내가 예쁘다고 말하는 여배우가 예쁘다고 동의해준 적이 한번도 없을 뿐만아니라,

30)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 연기자를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31)차를 타면 음악을 듣는 게 좋은데 아내는 한사코 오디오를 끄라고 야단이다.

한도 끝도 없다

 우리 부부의 경우, 서로 안 맞는 걸로 말하자면 100까지 가는 건 물론 200까지 가는 것도 식은 죽 먹기처럼 쉽다. 30여 년 동안 찾아서 쌓아온 것이니 얼마나 많겠는가.

그 대신 맞는 건 참 적다.

적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적으니, 이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백일홍을 나도 좋아한다는 것, 남편 바람  피우던 과거지사를 자랑스럽게 떠벌리곤 하는 여배우 아무개 씨를 내가 싫어하고 아내 역시 싫어한다는 것 정도.

그렇다면 이게 뭔가

백 번 다시 생각해봐도 아내와 나는 헤어져야 옳다. 헤어지지 않고 함께, 그것도 수십년 씩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의 삶이나 다름없다. 그렇게도 맞는 건 없고 서로 맞지 않는 건 지천이니 어떻게 하루인들 함께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참 이상하다.

30여 년간 살아온, 잔인한 만큼 서로 잘 맞지 않는  아내하고 앞으로도 30여 년은 더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급적 함께 죽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어떤 순간은 싸우고 어떤 순간은 억지로 맞추면서 살아온 지난 세월이 아주 행복했었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껏 서로 맞지 않으나 좋은 친구로 넉넉하게 살아낼 자신이 있으니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아내와 내가 잘 맞을 거라고 희망을 품고 사는 것도 아니다. 짐작하건대 죽을 때까지, 여전히, 아내는 변비를 자주, 나는 설사를 자주 할 터이다. 그렇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의 시험을 통과해내고 오래오래 함게 걸어가는데 필요한 것은 깊은 이해와 연민이지 스타일에 꼭 맞아야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함께 살면 서로 안 맞는 건 오히려 많아지지만 안 맞는다는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는다. 이 가을을 넉넉하고 향기롭게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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