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동성당 게시판

신경철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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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용 [20autumn] 쪽지 캡슐

2002-07-22 ㅣ No.2334

님의 글처럼

말씀대로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기엔 너무 부족한 우리입니다.

신앙인은 항상 딜레마에 빠집니다.

사회에서 배운대로 약삭빠르게 대처해야 할지,

아니면 교회에서 배운대로 우둔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지.

말씀대로 살려 살려 해도 노력의 결과나 소산은 바로 보이지 않고,

성서말씀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오히려 눈에 보이는 풍요를 누리고 성공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지치게 되고, 회의스럽고, 심지어는 교회에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공감합니다.

 

순수한 신앙이 생활고를 해결해주기는 어렵습니다.

신자수의 증감에 따라 운영 여건이 달라질 수도 있는 교회와는 달리,

평신도에게 있어서 삶과 말씀은 항상 멀게만 느껴질 법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적 보상과 이승에서의 풍요를 바라고 주님을 섬기지는 않습니다.

’주님 말씀 따라 살면 이승에서도 혹시나 이렇게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그저 보이지않는 주님앞에 사람이 혼자 그려보는 기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생활고에 배신감을 느껴 교회를 비판할 게재가 없습니다.

애초에 교회는 그런 것들을 신자들에게 제시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교회는 공산주의처럼 지상에서의 풍요로움을 나눈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씁쓸합니다.

 

 

형식에 얽매인 교회가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2000년을 내려온 교회에 형식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하와 모짜르트의 정통 클래식, 장엄한 미사곡.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기타 온갖 조형 작품들.

다 형식에서 비롯된 인간의 창조물이지요.

성모상에 목례하기, 신자들끼리 인사나누기, 봉사자들의 안내..

다 형식이지만

그것들이 필요한 까닭은 형식속에 더 중요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이 없다면 반만년 이어져온 한국사회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방예의지국이 존재하는 이유는

형식을 중요시 했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으스러져라 천배를 올리는 불교신자,

목 터져라 하나님을 불러대며 눈물을 쏟는 개신교 신자,

사원을 향해 하루 세번 절을 하는 이슬람교 신자.

이런 마음을 표현하는 행동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그 누구를 향한 믿음도 없이

자기 자신만을 믿는 사람이거나,

타 종교를 오로지 비방만 하는 그릇이 적은 신앙인일겁니다.

교회에서는 헌금이 없어도 빈손을 바구니에 넣어 봉헌하는 척하라고 가르친 적 없습니다.

그것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개인의 행동일 뿐입니다.

초등부 어린이들은

가끔 헌금을 잊고 안가져왔을 경우

대열에 서서 주님앞에 나아가 손을 모으고 목례를 하며

희생된 자신의 마음을 봉헌합니다.

 

누구를 지칭하시고 싶은지는 모르겠으나 특정인을 비난하시는 부분은

되도록 삼가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강도와 도둑...

너무 추상적이라 어떤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왕 쓴말씀 하시는거

좀더 날카롭게 해주심이 어떠할지요?

 

그리고,

예전보다 우리본당에 신부님이 한분 덜 계시는 이유는 분가(分家) 때문입니다.

응암동이 신사동, 녹번동 성당으로 나누어졌기에

신자수도 감소한 것이고,

그러므로 교구에서 응암동으로 파견되는 신부님들 수도 줄어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투쟁해서 신부님 한분을 더 모셔오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자조의 탄성은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님의 말씀이 허공을 맴도는 말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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