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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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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01 ㅣ No.163

[저는 믿나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김혁태


예수님의 전 생애는 마냥 슬펐을까요?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라는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은 예수님의 일생을 압축해 놓고 있습니다. 그분은 30여 년의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마지막은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물론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이는 사도신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고백에서 그분의 죽음에 대한 고백으로 곧바로 넘어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나 이 시작과 마지막은 언제나 그 사이의 삶을 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탐구는 오늘날 신앙인뿐만 아니라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사로잡는 흥미로운 관심사입니다. 이른바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이나 서적들, 또는 ‘나자렛 예수’라는 제목이 들어간 수많은 책들이 이런 관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두 “실제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을 풀려고 매달리고 있지요.


복음서의 예수님

그런 물음에 답하고자, 사임하신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도 근래에 「나자렛 예수」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유년기, 이렇게 3부작으로 펴내셨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강조하셨듯이, 우리가 알고 만날 수 있는 예수님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 특히 무엇보다 ‘복음서의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들이 묘사하고 전해주는 예수님이 역사적인 예수님, 곧 실제 예수님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시 유다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예수님을 알고 만나서 그분과 친교를 이루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성경을 제쳐두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성경 안에서, 특히 복음서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로써 알게 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은 단순히 역사적 한 인물의 그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것은 먼저 모두, 나자렛 예수라는 역사적 한 인물의 말씀과 행적들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는 사람이 되시어 이 땅 위에서 사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하느님 아들’로서의 말씀과 행적들입니다. 곧 그분의 인성은 그분의 신성의 표지이자 도구, 곧 ‘성사’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515항 참조).

달리 말해, 예수님의 전 생애는 ‘신비’입니다. 신비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 예수님의 신성이 전적으로 깃들어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나자렛 예수라는 한 인간의 그것이면서, 동시에 남김없이 모두 강생하신 말씀의 역사적 표현들입니다. 그분은 참인간이시면서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나자렛 예수에 대한 수많은 탐구가 예수님의 일생을 그저 한 위대한 사상가나 종교가의 것 정도로 해석합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많은 사례가 그렇습니다.

복음서는 영웅전이나 전기가 아닙니다. 복음서들이 제시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느님께서 몸소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으로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만 옳게 읽힙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물론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 생애의 주요 순간들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고 하느님의 계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합니다. 아니, 차고 넘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2,3).


십자가라는 말씀

따라서 예수님의 일생을 마감하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도 여느 인간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아니 그것은 먼저, 온전히 한 인간 나자렛 예수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유일무이한 특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시어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그러시다니…!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2-23).

죽는다는 것은 하느님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인간의 철학으로 다풀 수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십자가를 향해 던졌던 돌직구처럼, ‘하느님이시라면 적어도 이러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의 힘”(1코린 1,18)이고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입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5).

도미니코 성인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수많은 신학책에서보다 십자가라는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말하자면 끊임없이 바라보고 읽고 해석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또는 ‘십자가라는 말씀’(1코린 1,18 참조)이 천국의 키워드입니다.


역사적인 상황과 더 깊은 차원

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줍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예수님의 체포와 처형에 연루된 이들, 예수님의 체포와 신문 과정, 사형 선고의 근거, 십자가형의 과정 등, 이런 역사적 상황들을 잘 살펴봄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모든 것에 대해 다 살펴볼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574-598항 참조). 이는 책 하나를 쓰고도 남을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내재한 더 깊은 차원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지닌 영성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599-623항 참조).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그분을 죄에 넘겨주신 하느님의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랑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빚어내는 구원의 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사건을 우리는 성주간에 수난복음을 봉독하면서 좀 더 특별한 방식으로 만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연루된 유다 지도층, 제자들, 백성들, 로마 권력, 그리고 신문과 처형의 역사적 과정을 드라마의 장면들처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또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 나의 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과연 어느 누가 이 모든 것을 이끌어가시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을 다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하튼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고백하는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는 십자가 사건의 역사적 차원을, “저희를 위하여”는 영성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을 가리키는 말로 보면 좋을 듯합니다.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

나자렛 예수님의 생애가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판가름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2000여 년 전 팔레스티나에서 짧은 생애를 산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선포합니다. 곧 나자렛 예수님의 전 생애와 죽음이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을 위한 절대적 구원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어 몸소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물의 주님이신 분께서 분열과 부조리로 얼룩진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낮추시어 거기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하느님 단절이라는 죽음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내리시어 그 자리를 하느님 쪽으로 열어놓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자기 낮춤과 헌신’ 그리고 ‘우리를 위하심’이 예수님의 전 생애의 존재방식이고 행동방식입니다. 이는 그분의 강생에서 시작되고 십자가 죽음에서 정점에 도달했지만, 그분의 전 생애를 관통합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무이한 중개자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김혁태 베드로 - 전주교구 신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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