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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 죄를 짊어지시려고??? - 히브리 9,28 [성경_번역오류] [교리학습_구속교리] 112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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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7 ㅣ No.1151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다음은 "새 번역 성경" 히브리서 9,28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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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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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죄를 짊어지시려고"로 번역된 번역 표현이,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의(dogma)인 "통공 교리"에 대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의 전통적 가르침 안에서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2. 죄를 짊어지다???

질문 1:

히브리서 9,28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로 번역된 표현에서, "짊어지다" 라는 표현의 (i) 세속의 사전적 의미 및 (ii) 신학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2-1. 위의 질문 1에 대하여 세속의 사전인,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다음과 같은, "짊어지다" 라는 동사의 설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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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짊어지다

「동사」

[1]【…을 …에】

짐 따위를 뭉뚱그려서 지다.
¶ 배낭을 등에 짊어지다/볏섬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르다.

[2]【…을】

「1」빚을 지다.
¶ 그는 빚을 잔뜩 짊어졌다./패전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짊어지게 되었다./빚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나중에 무슨 수로 갚아 보겠나? 칠룡이 같은 사람은 돌아간 아버지 술값까지 짊어졌으니까.≪심훈, 상록수≫
「2」책임이나 의무를 맡다.
¶ 중책을 짊어지다/국방의 의무를 짊어지다/우리는 조국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새로운 세대이다./제 한 몸 치레도 어려운 판에 식구를 짊어져서 시달리고 지친 젊음들의 행렬이었다.≪마해송, 아름다운 새벽≫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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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만약에 히브리서 9,28에서의 "짊어지다"의 의미를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첫 번쨰 의미로 해석하여, "많은 사람의 죄를 머리/어깨에 짊어지시려고"로 생각하면, 다음의 레위기 제16장에 등장하는 소위 말하는 "속죄 염소(scapegoat)"의 역할을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예를 들어, 구약 성경의 본문 내용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유다교측으로부터 조롱을 받을만큼 (일부 유다인들을 실제로 그렇게 조롱을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크게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게시자 주: 다음의 레위기 제`16장 전문에 대한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NAB(New American Bible)의 해당 절들을 병기하였으며, 일부 표현들을 굵게 하거나 혹은 색깔을 입힌 것은 게시자가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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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레위기 제16장 전문

속죄일

1 After the death of Aaron's two sons, who died when they approached the LORD'S presence, the LORD spoke to Moses
1 아론의 두 아들이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갔다가 죽은 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and said to him, "Tell your brother Aaron that he is not to come whenever he pleases into the sanctuary, inside the veil, in front of the propitiatory on the ark; otherwise, when I reveal myself in a cloud above the propitiatory, he will die.
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형 아론에게 일러, 휘장 안쪽의 성소, 곧 궤 위에 있는 속죄판 앞으로 아무 때나 들어왔다가 죽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구름 속에서 속죄판 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3 Only in this way may Aaron enter the sanctuary. He shall bring a young bullock for a sin offering and a ram for a holocaust.
3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는 속죄 제물로 바칠 황소 한 마리와 번제물로 바칠 숫양 한 마리를 가져온다.

4 He shall wear the sacred linen tunic, with the linen drawers next his flesh, gird himself with the linen sash and put on the linen miter. But since these vestments are sacred, he shall not put them on until he has first bathed his body in water. 
4 그는 거룩한 아마포 저고리를 입고 그 안에는 맨몸 위에 아마포 속바지를 입는다. 그리고 아마포 띠를 매고 아마포 쓰개를 두른다.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다. 그는 물로 몸을 씻고 나서 이것들을 입는다.

5 From the Israelite community he shall receive two male goats for a sin offering and one ram for a holocaust.  
5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공동체에게서, 속죄 제물로 바칠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바칠 숫양 한 마리를 받는다.

6 "Aaron shall bring in the bullock, his sin offering to atone for himself and for his household.
6 아론은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로 황소를 바쳐,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7 Taking the two male goats and setting them before the LORD at the entrance of the meeting tent, 
7 그런 다음 숫염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주님 앞, 만남의 천막 어귀에 세워 놓는다. 

8 he shall cast lots to determine which one is for the LORD and which for Azazel.
8 아론은 그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는데, 제비 하나는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제비는 아자젤(*)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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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성경 주석: 칠십인역과 대중 라틴 말 성경은 이 낱말을 '희생 염소' 로 이해하였다. 이 밖에 어떤 번역본들은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나, 불모지를 돌아다니는 귀신의 이름일 가능성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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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e goat that is determined by lot for the LORD, Aaron shall bring in and offer up as a sin offering.
9 아론은 주님을 위한 제비가 뽑힌 숫염소를 속죄 제물로 바친다. 

10 But the goat determined by lot for Azazel he shall set alive before the LORD, so that with it he may make atonement by sending it off to Azazel in the desert.
10 아자젤을 위한 제비가 뽑힌 숫염소는 산 채로 주님 앞에 세워 두었다가, 그 위에서 속죄 예식을 거행하고 광야로 아자젤에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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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성경 주석: 이 의식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21절 참조. 이와 비슷한 의식들이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이 의식들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하는데, 하나는 부정과 죄를 다른 생물이나 물건에 이전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생물이나 물건을 없애는 것이다 (21-2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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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us shall Aaron offer up the bullock, his sin offering, to atone for himself and for his family. When he has slaughtered it, 
11 아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로 황소를 바쳐,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그는 먼저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황소를 잡는다. 

12 he shall take a censer full of glowing embers from the altar before the LORD, as well as a double handful of finely ground fragrant incense, and bringing them inside the veil,
12 그런 다음 주님 앞 제단에서 숯불을 향로에 가득 담고,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으로 가득 퍼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 

13 there before the LORD he shall put incense on the fire, so that a cloud of incense may cover the propitiatory over the commandments; else he will die.
13 그 향을 주님 앞에서 숯불에 놓아, 향 연기가 증언 궤 위에 있는 속죄판을 덮게 한다. 그래야 그가 죽지 않는다. 

14 Taking some of the bullock's blood, he shall sprinkle it with his finger on the fore part of the propitiatory and likewise sprinkle some of the blood with his finger seven times in front of the propitiatory.
14 그러고 나서 황소의 피를 얼마쯤 가져다가, 손가락에 찍어 속죄판 동쪽 위로 뿌리고, 또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속죄판 앞에 일곱 번 뿌린다.

15 "Then he shall slaughter the people's sin-offering goat, and bringing its blood inside the veil, he shall do with it as he did with the bullock's blood, sprinkling it on the propitiatory and before it.
15 이어서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서, 황소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속죄판 위와 속죄판 앞에 뿌린다. 

16 Thus he shall make atonement for the sanctuary because of all the sinful defilements and faults of the Israelites. He shall do the same for the meeting tent, which is set up among them in the midst of their uncleanness.
16 이렇게 그는 성소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정과 허물,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잘못 때문이다. 그는 또 부정한 그들 가운데에 있는 만남의 천막을 위해서도 같은 예식을 거행한다. 

17 No one else may be in the meeting tent from the time he enters the sanctuary to make atonement until he departs. When he has made atonement for himself and his household, as well as for the whole Israelite community,
17 그가 성소에서 속죄 예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들어왔다 나갈 때까지, 아무도 만남의 천막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그는 자신과 자기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18 he shall come out to the altar before the LORD and make atonement for it also. Taking some of the bullock's and the goat's blood, he shall put it on the horns around the altar,
18 그러고 나서 주님 앞에 있는 제단으로 나와, 그것을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데, 먼저 황소의 피와 숫염소의 피를 얼마쯤 가져다가, 제단을 돌며 그 뿔들에 바른다. 

19 and with his finger sprinkle some of the blood on it seven times. Thus he shall render it clean and holy, purged of the defilements of the Israelites.
19 그리고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제단 위에 일곱 번 뿌린다. 이렇게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정을 벗겨 제단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한다.

20 "When he has completed the atonement rite for the sanctuary, the meeting tent and the altar, Aaron shall bring forward the live goat.
20 그는 성소와 만남의 천막과 제단을 위한 속죄 예식을 마친 다음, 살려 둔 숫염소를 끌고 온다. 

21 Laying both hands on its head, he shall confess over it all the sinful faults and transgressions of the Israelites, and so put them on the goat's head. He shall then have it led into the desert by an attendant.


21 아론은 살려 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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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성경 주석: 이는 손 하나를 얹는 것과는 다르다(1,4 각주 참조). 두 손을 얹음으로써 백성의 죄를 '희생 염소' 위로 완전히 이전시키는 것이다. 이 염소는 이제 더 이상 희생 제물로 쓰일 수 없고, 광야로, 곧 아자젤 귀신과 일반적인 악마들의 거처로 여겨졌던 곳으로 인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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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Since the goat is to carry off their iniquities to an isolated region, it must be sent away into the desert.
22 그러면 그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불모지로 날라 간다. 이렇게 그 숫염소를 광야로 내보낸다.

23 "After Aaron has again gone into the meeting tent, he shall strip off and leave in the sanctuary the linen vestments he had put on when he entered there.
23 그러고 나서 아론은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와, 성소에 들어올 때 입은 아마포 옷들을 벗어 거기에 놓아둔다. 

24 After bathing his body with water in a sacred place, he shall put on his vestments, and then come out and offer his own and the people's holocaust, in atonement for himself and for the people,
24 그는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은 다음, 본래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자기의 번제물과 백성의 번제물을 바쳐,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25 and also burn the fat of the sin offering on the altar.
25 속죄 제물의 굳기름은 제단 위에서 살라 연기로 바친다.

26 "The man who has led away the goat for Azazel shall wash his garments and bathe his body in water; only then may he enter the camp.
26 숫염소를 아자젤에게 놓아 보낸 이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는다. 그런 다음 진영 안으로 들어온다. 

27 The sin-offering bullock and goat whose blood was brought into the sanctuary to make atonement, shall be taken outside the camp, where their hides and flesh and offal shall be burned up in the fire.
27 성소에서 속죄 예식을 거행하려고 피를 받았던 황소와 숫염소, 곧 속죄 제물로 바친 황소와 속죄 제물로 바친 숫염소의 나머지는 진영 밖으로 내다가,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불에 태운다.

28 The one who burns them shall wash his garments and bathe his body in water; only then may he enter the camp. 
28 이것들을 태운 이도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는다. 그런 다음 진영 안으로 들어온다.

29 "This shall be an everlasting ordinance for you on the t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every one of you, whether a native or a resident alien, shall mortify himself and shall do no work.
29 이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규칙이 되어야 한다. 일곱째 달 초열흘날에 너희는 고행을 하고,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본토인이든 너희 가운데에 머무르는 이방인이든 마찬가지다. 

30 Since on this day atonement is made for you to make you clean, so that you may be cleansed of all your sins before the LORD,
30 바로 이날이 너희를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너희는 주님 앞에서 너희의 모든 잘못을 벗고 정결하게 된다. 

31 by everlasting ordinance it shall be a most solemn sabbath for you, on which you must mortify yourselves.
31 이날은 너희에게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다. 너희는 고행을 해야 한다. 이는 영원한 규칙이다.

32 "This atonement is to be made by the priest who has been anointed and ordained to the priesthood in succession to his father. He shall wear the linen garments, the sacred vestments,
32 기름부음 받고 자기 아버지 대신 사제직을 수행하도록 직무를 받은 사제가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그는 아마포 옷, 곧 거룩한 옷을 입고, 

33 and make atonement for the sacred sanctuary, the meeting tent and the altar, as well as for the priests and all the people of the community.
33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만남의 천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고, 사제들과 회중의 온 백성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한다. 

34 This, then, shall be an everlasting ordinance for you once a year atonement shall be made for all the sins of the Israelites." Thus was it done, as the LORD had commanded Moses.
34 이렇게 한 해에 한 번씩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너희의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라.”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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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만약에 히브리서 9,28에서의 "짊어지다"의 의미를 오로지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의미로만 해석하여, 글자 그대로 오로지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다" 혹은 많은 사람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나 의무를 지다"로만 이해하게 되면, 그 의미에 있어, 히브리서 9,28의 전후의 문맥과는 상반되는,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대속(代贖)"의 개념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히브리서 그리고 더 나아가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 즉 "하늘 나라의 도래(the coming of the Kingdom of Heaven)"가 변형/왜곡/축소되어 구약 성경의 내용에 포함되는 데에 본의 아니게 도움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에,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신인이신, 특히 멜키체덱의 품계를 이어받은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통공(communion, 하나 됨)에 있어서의 고유한 역할, 즉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이 원죄(original sin)를 범하기 이전의 원 질서(original order)의 상태로의 회복(restoration)[원 질서의 상태에 적합(fittingness, conformity, 적응)한 참여, 즉,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reconciliation)]를 위하여, 당신께서 중재자로서, 세례자 요한에게 하셨던 당신의 명령에 의하여 당신께서 첫 번쨰로 받으셨던 바로 그 동일한 세례(Baptism)를 우리들에게 받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당신께서 (i) 사람에게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행하시고, 그리고 (ii) 성부(Father)께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행하시는지에 대하여, 독자들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중대한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결국에,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하면서도, 중재자로서의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믿음(Christian faith)이, 유다교의 믿음 및 이스람교의 믿음과 어떤 중대한 신학적 차이점이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게 되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는 경우들에는, 예를 들어, 일부 개신교측에서 주장하는, 소위 말하는, "대속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가 있을 것입니다.

게시자 주:
(i) 이 글에서 "대속 교리"의 영어 표현을 "the doctrine of substitution" 으로 나타낸 것은, 여기를 틀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국내의 일부 개신교측에서 괄호 안에 그러한 영어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ii) 그리고 "the doctrine of substitution"이라는 표현은 가톨릭 교회 교도권에서 사용하지 않는 표현으로 파악이 되고 있으며, 국내의 개신교측 용어인 "대속 교리"에 대응하는 정확한 영어 표현이 무엇인지 저도 아직은 모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어로 "substitution(대체, 대역)"으로 번역되는 표현을 국내의 일부 개신교측에서 "대속(代贖)"으로  번역하였다면, 이것은 용어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iii) 다른 한편으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88년 10월 26일 수요일 일반 알현 교리 교육 강론 말씀은 다음과 같은 지적들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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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aud19881026en.htm

(발췌 시작)
...

This explains the "substitutive" character of Christ's redemption in the name of all and for all.

이것은 모든 이의 이름으로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속량, redemption)"대역(代役)적(substitutive)" 특징(character)을 설명합니다.

...

As can be seen, St. John offers us the authentic interpretation of the other texts on the substitutive value of Christ's sacrifice, in the sense of the universality of redemption.

확인될 수 있듯이, 성 요한은, 이 구속(속량, redemption)의 보편성의 의미에 있어, 그리스도라는 희생 제물의 대역(代役)적 가치(the substitutive value)에 대한 다른 본문들에 대한 진정한 해석(authentic interpretation)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

As we said above, no human being could carry out the work of redemption by offering a substitutive sacrifice "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 (cf. 1 Jn 2:2).

위에서 말해졌듯이, 어느 인간(human being)도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1요한 2,2) 어떤 대역(代役)적 희생 제물(a substitutive sacrifice)에 의한 구속(속량) 위업(the work of redemption)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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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따라서, 위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속량, redemption) 위업의 한 특징이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대역(代役)적인(substitutive) 것이며, 그러나, 역으로, 피조물인 인간(human being) 어느 누구도 대역(代役)적인 희생 제물로써,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속량) 위업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피조물인 인간(human being)이 봉헌하는 대역적(代役)인 희생 제물들, 즉 염소 등의 가축들로 이루어진 희생 제물들은 구약 성경 시절에 하느님께 대단히 많이 봉헌되어졌으나, 아무런 효능/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예를 들어, 히브리서 제9장에서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v) 무슨 말씀인고 하면, 예를 들어, 잡신인 몰록(Molech)에게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가축으로 대신하는 것에서 출발한(창세기 22,13"대역(substitution)" 이라는 개념은, 가나안 및 근처 지역의 이민족들과 구분되는 구약 성경에 근거한 한 개의 개념(concept)이나, 그러나 "진정한 구속(속량, redemption)" 은 신약 성경의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실천 위업들에 근거한, 특히 구약 성경에서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대단히 새로운, 초자연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vi) 그러므로 그 신학적 내용에 있어, 여전히 구약 성경의 개념인 "대역 개념(the concept of substitution)" 에만 머물러 있는, 소위 "대속 교리(doctrine of substition)" 로 불리는, 일부 개신교측의 교리는, 구약 성경 본문 및 신약 성경 본문이 가르치는 개념인, 그리하여 가톨릭 보편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져 온 개념인, "구속(속량) 교리(the doctrine of redemption)"와는 결코 동일할 수가 없습니다.

(vii) 이는, 본질(essence)의 어떤 특징(a character) 한 개가, 본질 그 자체와 동일함을 자동적으로 그리고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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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부터, 새 번역 성경 히브리서 9,28에 있는 우리말 번역 표현인 "짊어지시려고"에 상당한 신학적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새 번역 성경 히브리서 9,28에 있는 우리말 번역 표현인 "짊어지시려고"번역 오류 혹은 번역 미숙이라는 생각입니다.

3.
지금부터는, 이 번역 오류 혹은 번역 미숙을 바로잡기 위하여 신뢰할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을 비교/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3-1. 다음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포함하여, 여러 영어본 성경 (개신교측 성경 포함)들의 히브리서 9,28 전문입니다. 초판의 출판 연대순으로 나열하였으니, 특히 이들 본문들 사이에, "짊어지시려고"에 대응하는, 선택된 번역 단어들에 있어 어떠한 눈에 띄는 변화가, 16세기 이후에언제 누구에 의하여 발생하였는지를 주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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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3-1-1. Clementine Vulgate (1960년대 중반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
28 sic et Christus semel oblatus est ad multorum exhaurienda(*) peccata : secundo sine peccato apparebit exspectantibus se, in sal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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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은 소장 중인, 1977년판, Cassell's Latin-English & English-Latin Dictionary에 주어진 라틴어 동사인 exhaurio 에 대한 설명이며, 괄호 안의 우리말 번역은 번역자가 한 것이다:
exhaurio: (1) to draw out(뽑아내다), to remove(제거하다), to take out(얼룩 따위를 빼다) (2) to drain dry, empty out(물기를 빼다, 완전하게 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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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Douay-Rheims Version
28
So also Christ was offered once to exhaust(*) the sins of many. The second time he shall appear without sin to them that expect him unto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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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exhaust... That is, to empty, or draw out to the very bottom, by a plentiful and perfect redemption. (Challoner)

(*) ...을 빼내다(to exhaust): 즉, 풍부하고 완미한 속량(redemption)으로써, 비우다, 혹은 바로 바닥까지 뽑아내다(제거하다) (Challo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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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King James Version (1611년)
28
 So Christ was once offered to bear the sins of many; and unto them that look for him shall he appear the second time without sin unto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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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King James Version으로 불리는 이 영어본 성경은, 수장이 영국의 왕이 되어버린 영국 성공회측에서, 로마 교황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마련된 영어본 성경이다. 이 번역본이 마련될 때에, 그 이전에 이미 영어로 번역이 되어 널리 애용되고 있었던 Douay-Rheims Version 을 많이 참고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본 성경들 중에서 bear라는 동사를, 히브리서 9,28에서의 문제의 동사의 영어 번역표현으로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바로 이 번역 용어의 사용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한 것은 아래의 제5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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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RSV(1950-60년대, Revised Standard Version)
[28] so Christ, having been offered once to bear the sins of many, will appear a second time, not to deal with sin but to save those who are eagerly waiting for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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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이 영어본 성경은, 1611년에 초판 발행된 King James Version 영어 성경을 현대 어법에 맞게 update 한 것이며, 그 작업은 개신교측 및 가톨릭측 성경 학자들이 공동으로 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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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NAB(New American Bible) (1970년 초판 발행,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
28 so also Christ, offered once to take away the sins of many,* will appear a second time, not to take away sin but to bring salvation to those who eagerly await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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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B 주석: [9:28] To take away the sins of many: the reference is to Is 53:12. Since the Greek verb anapher? can mean both “to take away” and “to bear,” the author no doubt intended to play upon both senses: Jesus took away sin by bearing it himself. See the similar wordplay in Jn 1:29. Many is used in the Semitic meaning of “all” in the inclusive sense, as in Mk 14:24. To those who eagerly await him: Jesus will appear a second time at the parousia, as the high priest reappeared on the Day of Atonement, emerging from the Holy of Holies, which he had entered to take away sin. This dramatic scene is described in Sir 50:5–11.

(졸번역)
[9,28]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시려고(take away): 이 언급은 이사야서 53,12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어 동사 anapher?"없애다(take away)" "거두어들이다(bear, 받아들이다)" 둘 다를 의미할 수 있기에, 이 저자가 다음과 같이 이들 둘 다의 의미들로 재담(才談, 말장난)을 의도하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스스로 거두어들임으로써 죄를 없애셨다. 유사한 재담을 요한 복음서 1,29에서 보라. 많은 사람은, 마르코 복음서 14,24에서처럼, 포괄적 어의(語義, sense)로 "모든" 이라는 셈족 언어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죄를 없애려고 그가 이미 들어갔던 지성소로부터 나와 다시 나타났듯이, 
예수님께서는 재림(parousia) 시에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이다. 바로 이 극적인 광경은 집회서 50,5-11에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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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TOB (1975년 초판 발행, 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
28
ainsi le Christ fut offert une seule fois pour enlever les péchés de la multitude et il apparaîtra une seconde fois, sans plus de repport avec le péché, à ceux qui l'attendent pour le s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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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1)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TOB(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의 히브리서 9,28에서 사용 중인 enlever 동사에 대한 TOB(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의 주석은 없으며, 그리고 "주석 성경"히브리서 9,28에서 사용 중인 대응하는 동사인 "짊어지다"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도 없다.

(2) 또한 "주석 성경"에서, 요한 복음서 1,29에서 사용 중인 "없애시는" 동사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은 없다.

(3) 그러나,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TOB(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요한 복음서 1,29에서 사용되고 있는, "주석 성경"의 해당 절에서의 "없애시려고" 에 대응하는, enlève 라는 동사에 대한 TOB(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의 주석(j)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인 TOB의 요한 복음서 1,29  enlève 라는 동사에 대한에 대한 주석 원문)
Le verbe grec signifie soulever et, à partir de là, soit porter, prendre sur soi, soit emporter, ôter, faire disparaître. C'est en ce dernier sens que Jn l'utilise habituellement (cf. 2,16; 5,8-12; 10,18; 1 Jn 3,5).

(영어로의 졸번역)
The Greek verb means raise and, from there, either bear, take upon oneself, or take away, remove, get rid of. It is in this last sense that John uses it habitually (cf. 2,16; 5,8-12; 10,18; 1 Jn 3,5).

(우리말로의 졸번역)
그리스어 동사는 '들어올리다' 를 의미하며, 그리고, 거기에서, '(책임이나 의무를) 지다', '자신 위에 짊어지다' 이거나, 아니면 '없애다', '치우다', '제거하다' 를 의미한다. 요한(John)이 이 동사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의미에서 이다(2,16; 5,8-12; 10,18; 1 요한 3,5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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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TOB) 및 "새 번역 성경"에서 실제로 다음을 확인하였다:

(i) 요한 복음서 2,16에서는, "새번역 성경에서 "치워라"로 번역한, "ôter(otez)" 를 사용하고 있고,

(ii) 요한 복음서 5,8-12에서는, "새번역 성경에서 "들다"로 번역한, "prendre" 과 "porter" 를 사용하고 있으며,

(iii) 요한 복음서 10,18에서는, "새번역 성경에서 "빼앗다"로 번역한, 
"enlève" 를 사용하고 있고,

(iv) 1요한 3,5에서는, "새번역 성경에서 "없애다"로 번역한, "enlever" 를 사용하고 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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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Nava Vulgata (1979년,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
28
sic et Christus, semel oblatus ad multorum auferenda(*) peccata, secundo sine peccato apparebit exspectantibus se in sal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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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은 소장 중인, 1977년판, Cassell's Latin-English & English-Latin Dictionary에 주어진 라틴어 동사인 aufero 에 대한 설명이며, 괄호 안의 우리말 번역은, 여기를 클릭하면 사용할 수 있는,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단어 설명 등을 또한 참고하여, 번역자가 한 것이다:
aufero: (1) in gen., to carry away(파괴하다), carry off(이기다), remove(제거하다)  (2) in a bad sense, to make away with(멸하다, 죽이다), carry off(빼앗다), steal(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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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상, 위의 제3-1항에서 살펴 본 바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하였습니다:

3-2-(i): NAB와 TOB 둘 다, 요한 복음서 1,29; 히브리서 9,28; 1요한 3,5에서 동일하게, 우리말에 있어 "없애다"에 등가인, 동사들로 번역하였다(NAB의 경우에 "take away", TOB의 경우에 "enlever").

3-2-(ii) 그러나, 새번역 성경의 경우에 있어, 요한 복음서 1,29 와 1요한 3,5에서는 동일하게, 영어에 있어 "take away"에 등가로 대응하는 동사인, "없애다" 로 번역을 하였으나, 그러나 히브리서 9,28에서는, NAB와 TOP 둘 다의 경우와 달리, 영어에 있어 "bear"에 등가로 대응하는 동사인, "짊어지다"로 번역하였다.

3-2-(iii) NAB 주석은,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그 궁극적 목적이, 죄를 없애려고 들어간 것이지 (그러나 히브리서 10,4.11에서 말하고 있듯이 실제로는 죄를 없애지 못하였음),결코 죄를 짊어지려고 들어간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죄를 없애려고 그가 이미 들어갔던 지성소로부터 나와 다시 나타났듯이, 예수님께서는 재림(parousia) 시에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이다.

3-3. (결론)
그러므로, 이러한 구약 성경에서 대사제속죄의 날에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 행하였던 바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바에 대한 예표(pre-figuration)이었기에, 히브리서에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듯이,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 참 지성소인 하늘(heaven)로 들어가신 것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여 들어가신 것이지, 결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여 들어가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
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끼 이 글에서 살펴본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새 번역 성경" 히브리서 9,28에서, NAB 및 TOB 히브리서 9,28에서처럼 요한 복음서 1,291요한 3,5에서와 동일하게, "없애다"로 번역하지 않고, "짊어지다"로 번역한 것은, 상당히 심각한 번역 미숙 혹은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4.
다른 한편으로, 여기까지 읽고서도 위의 제3-3항에 있는 이 글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거나 혹은 동의하고 싶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위의 결론을 지지하는 몇 개의 문헌적 증거들을 지금부터 추가적으로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4-1.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히브리서 9,28에 대한 해설:

출처 1: http://dhspriory.org/thomas/SSHebrews.htm#95 [주: 영어본]
출처 2: https://isidore.co/aquinas/SSHebrews.htm#95 [주: 라틴어본 및 영어본]

(발췌 시작)
476. – 477. – Then (v. 28) he shows how three things fit Christ. In regard to the first he says, and so Christ having been offered once, in which He agrees with the others. But He differed in two respects: first, since Christ had not descended from Adam by way of human seed, but merely as to bodily substance, He did not contract original sin; consequently, He was not obliged by that statute: ‘For in what day soever you shall eat of it, you shall die the death’ (Gen. 2:17), but He underwent death by His own will: ‘No man takes it away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self’ (Jn. 10:18). Therefore, he says, that he was offered: ‘He was offered because it was His own will’ (Is. 53:7); ‘Christ has died once for our sins’ (1 Pt 3:18). He differs, secondly, because our death is the effect of sin: ‘The wages of sin is death’ (Rom. 6:23). But Christ’s death destroys sin; therefore, he says, to bear [주: 라틴어: exhaurienda] the sins of many, i.e., to remove them. He does not say ‘of all,’ because Christ’s death, even though it was enough for all, has no efficacy except in regard to those who are to be saved: for not all are subject to Him by faith and good works.

(졸번역)

475. - 477. - 그러고 나서 (v. 28) 그는 세 가지 일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적합한지를 보입니다. 첫 번째에 관하여 그는,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 점에 있어 당신께서는 다른 이들과 부합합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면들에 있어 다르셨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씨앗에 의하여 아담의 후손이셨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몸의 본체에 따라서 이셨기에, 당신께서는 원죄에 걸리지 않으셨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당신께서는 바로 다음과 같은 법령에 의하여 의무지워진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기 2,17), 당신께서는 다음과 같이 당신 고유의 의지에 의하여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요한 복음서 10,18). 그러므로, 그는 당신께서 다음과 같이 봉헌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봉헌되셨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고유한 의지이셨기 때문이다' (Douay-Rheims Bible 이사야 53,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들 때문에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Douay-Rheims Bible 1베드로 3,18). 두 번째로 당신께서는 다르신데, 왜냐하면 우리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입니다' (로마 6,23).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파괴하며, 그리하여 그 결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기 위하여(to bear [주: 라틴어: exhaurienda]), 즉, 제거하기 위하여(to remove), 라고 말합니다. 그는 '모두를 위하여' 라고 말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비록 이 죽음이 모든 이들을 위하여 충분하였지만, 구하여질 자들에 관해서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효능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및 졸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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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NAB 본문 전체에 걸쳐 "take(s) away sin(s)[죄(들)을 없애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구속/속량을 예언하고 있는 구약 성경 구절들 신약 성경 구절들 총 10군데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단, 이사야서 29,7에서는 "removal of his sin"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음), 그리하여 예수님 고유의 역할인 속량(redemption, 구속)에 대한 고유의 표현이 이미 되어버렸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다음의 NAB 성경 용어 색인들로부터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인터넷 주소들을 클릭한 후에,
사용 중인 PC의 자판에서,
Ctrl + F 를 누른 후에,
"take away" 혹은 "takes away" 를 입력하면,
"take away sin" 혹은 "take away sins", 혹은 "takes away sin" 혹은 "takes away sins"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4N.HTM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4N.HTM

게시자 주 1: 다음은 "take(s) away sin(s)[죄(들)을 없애신다]"라는 표현이 실제로 등장하고 있는 MAB 구절들 전체의 모음입니다:

NAB
시편 25,18; 이사야서 27,9; 53,12;
요한 복음서 1,29; 로마서 11,27; 히브리서 9,26.28; 10,4.11; 1요한 3,5.

그리고 바로 위의 구절들 중에서, 새 번역 성경의 경우에는 다음의 두 구절들에서 "없애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 번역 성경"
이사야서 53,12 마지막 절에서: "죄를 메고 갔다";
히브리서 9,28: "죄를 짊어지시려고".

게시자 주 2: 위의 용어 색인들을 검토하면, 예를 들어, 16세기에 파문을 받은 후에 가톨릭 교회를 뛰쳐나간 마르틴 루터 자신이 인간적으로 고안한 개신교측의 "의화 교리"와 충돌이 없도록,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통공 교리"와 일치를 이루고 있는 구속/속량 교리를 거부하면서, 대신에, 소위 말하는, 개신교측의 "대속 교리"를 만들어 내었던, 마르틴 루터가 왜 히브리서를 신약 성경의 목록에서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4-3.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연중 제32주일 제2독서(히브리 9,24-28)홀수해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히브리 9,15.24-28)에 포함된 히브리서 9,23-2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입니다. 확실하게 "
죄를 실제로 정말 완전하게 말소하며(really does blot out)"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ot_32.htm 

(발췌 시작)

23-28. In these verses the sacred writer adds some additional considerations to the main line of his argument. His thought centers on linking the sanctuary, the sacrifices which were offered in the Old Testament sanctuary, and the sacrifice of the New Covenant. It was "necessary" for Christ to shed his blood so that men might " receive the promised eternal inheritance"  (9:15), that is, forgiveness of their sins (cf. 9:14). This shedding of blood is also necessary for the "purification" of the heavenly things (9:23). The sacrifices of the Mosaic liturgy purified the things of the old sanctuary and, in some way, pointed to forgiveness of sins (9:9,10). The sacrifice of Christ, on the other hand, really does blot out sin and opens for us the way to heaven itself, giving us entry into that new sanctuary (7:25; 9: 12). But the parallel is not a perfect one, for the old sacrifices were multiple and
were constantly repeated in petition of forgiveness (9:25). The sacrifice of Christ, on the contrary, is a unique sacrifice, because it is eternally effective (7:27; 9: 12). Moreover, whereas the high priest offered a sacrifice not with his own blood but with the blood of animals, Christ offered his own blood in sacrifice. Therefore, Christ has offered himself "once" (7:28; 9:12, 26, 28) in the same sort of way as every man has to die only once and then undergoes judgment. Furthermore, through his sacrifice Christ has passed through the heavens once and for all and will not return to earth to renew his sacrifice. He will not return until the end of time, when he will come in glory.


23-28. 이들 절들에 있어 성스러운 저자는 자신의 주된 논법(line of argument)에 어떤 추가적인 고찰들을 보탭니다. 그의 생각은 성소, 구약 성경 성소에서 봉헌되었던 희생 제물들, 그리고 새 계약의 희생 제물을 연결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9,15)을, 즉 그들의 죄들에 대한 용서(9,14를 참조하라)를 받을 수도 있도록 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시는 것은 "필요"하였습니다. 이러한 피 흘리심는 또한 하늘에 있는 사물(the heavenly things)들의 "정화(purification)"를 위하여서도 또한 필요하였습니다(9,23). 모세의 예배(Mosaic liturgy)의 희생 제물들은  옛 성소(old sanctuary)의 사물들을 정화하였으며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죄들의 용서를 향하여 가리켰습니다(pointed to)(9,9.10). 그리스도라는 희생 제물은, 다른 한 편으로, 죄를 실제로 정말 완전하게 말소하며(really does blot out)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하늘(heaven) 그 자체로 향하는 길을 열어(opens), 그 결과로 [이들 둘은] 우리에게 바로 이 새 성소(new sanctuary) 안쪽으로의 입장을 허락합니다(give us entry into)(7,25; 9,12). 그러나 이 대비(the parallel)는 완미(完美)한(*) 대비(a perfect one)가 아닌데, 이는 옛 희생 제물들은 다양하였으며 그리고 용서의 청원에 있어 끊임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9,25). 그리스도라는 희생 제물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번의 유일한 희생 제물(a unique sacrifice)인데, 왜냐하면 이 제물은 영원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7,27; 9,12). 더구나, 대사제는 자신 고유의 피와 함께가 아니라 동물들의 피와 함께 어떤 희생 제물을 봉헌하였던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희생 제물에 있는 당신 고유의 피를 봉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이 오직 한 번 죽으며 그러고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방식으로 "단 한 번(once)" 당신 자신을 이미 봉헌하셨습니다(7,28; 9,12.26.28). 더 나아가서, 당신이라는 희생 제물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once and for all) 하늘(the heavens)들을 이미 통과하셨으며 그리고 당신의 희생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땅으로 돌아오시지(return)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당신께서 영광 안에서 오실 때인 시간의 끝이 될때까지, 돌아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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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perfect"를, "complete"의 통상의 우리말 번역 용어인 "완전(完全)한" 대신에, "완미(完美)한" 으로 분명하게 구분하여 번역한 신학적 이유는 다음의 글에 있으니 필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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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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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2년 3월 6일]

4-4. 다음은,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성 금요일 제1독서(이사야 52,13-53-12)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입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네 개의 "고통받는 종의 노래"들 중의 네 번째 노래에 대한 대단히 좋은 해설이므로 필독을 꼭 권고드립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goodfri.htm <-- 필독 권유

(일부 발췌 시작) 

52:13-53:12. This fourth Song of the Servant is one of the most commented on passages in the Bible, as regards both its literary structure and its content. From the point of view of structure, it interrupts the hymn-style of chapter 52 (which is taken up again in chapter 54); the style here is more reflective; the theme, the value of suffering. In terms of content, the song is unusual in that it shows the
servant triumphing through his humiliation and suffering. Even more than that--he makes the pains and sins of others his own, in order to heal them and set them free. Prior to this, the idea of "vicarious expiation" was unknown in the Bible. The passage is original even in its vocabulary: it contains forty words that are not to be found elsewhere in the Bible. 

 

52,13-53,12. 바로 이 종의 네 번째 노래는, 그 문학적 구조와 그 내용에 관하여, 성경에 있어 가장 많이 주석된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구조의 관점에 있어, 이것은 (제54장에서 또다시 택해지는) 제52장의 찬미가 양식(hymn-style)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며, 그리고 여기서 그 양식은 더욱 더 재귀용법적(reflective)이며 그리고 그 주제는 고통받음(suffering)의 가치입니다. 문맥의 표현에 있어, 이 노래는 이 종이 자신에 대한 모욕과 고통받음을 통하여 승리함을 보여주는 점에 있어 이례적(unusual)입니다. 심지어 이보다 더, 그는 다른 이들의 고유한 고통(pains)들과 죄(sins)들을, 그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유한 것들로 만듭니다. 이것 이전에, "대속(대신 속죄, vicarious expiation)" 라는 관념은 성경에 있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은 심지어 그 어휘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이 독창적(original)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에 있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40개의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The poem, which is very carefully composed, divides into three stanzas: the first (52:13-15) is put on the Lord's lips and it acts as a kind of overture to what follows --taking in the themes of the triumph of the servant (v. 13), his humiliation and suffering (v. 14), and the stunning effect that this has on his own people and on strangers.

 

매우 신중하게 지어진 이 시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연(聯, stanzas)들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52,13-15)는 주님의 입술들 위에 얹혀지며 그리고 이것은, 그의 모욕 및 고통받음(제14절), 그리고 이것이 그의 고유의 사람들에게 및 이방인들에게 계획 중인 깜짝 놀라게 하는 결과라는, 이 종의 승리의 주제들 (제13절) 안에서 작동중인, 뒤따르는 바에 대한 일종의 서장(序章, overture)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The second stanza (53:1-11a) celebrates the servant's trials, and the good effects they produce. This is spoken in the first person plural, standing for the people and the prophet: both feel solidarity with the servant of the Lord. This stanza has four stages to it: first (53:1-3) it describes the servant's noble origins (he grew up before the Lord like a young plant: cf. v. 2) and the low esteem in which he is held as a "man of sorrows". Then we learn that all this suffering is atonement for the sins of others (53:4-6). Traditionally, suffering was interpreted as being a punishment for sins, but here it is borne on behalf of others. This is the first lesson to be learned by those who see him "stricken, smitten by God, and afflicted", and it marks the
climax of the poem. Thirdly (53:7-9), the point is made, again that he has freely accepted suffering and meekly, offers himself as a sacrifice of atonement (he is like a lamb, like a sheep). His death is as ignominious as the suffering that precedes it. Finally (vv. 10-11a) we are told how fruitful all this suffering is: like the patriarchs of old (the text seems to imply) the servant will have many offspring and a long life and be a man of great wisdom. 

 

두 번째 연(聯, stanzas)(53,1-11ㄱ)은 이 종의 시련(trials)들을, 그리고 이들이 산출하는 선한 결과들을을 경축합니다. 이것은, 이 백성과 이 예언자를 나타내는, 제1인칭 복수로 말해지며, 그리고 둘 다 주님의 종과의 연대(solidarity)를 느낍니다. 이 연은 이 연대를 향하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단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53,1-3) 이 연은 이 종의 고귀한 태생(origins)을 묘사하며 (그는 주님 앞에서 새싹처럼 자랐다: 제2절을 참조하라)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가 "후회/고되들로 이루어진 한 명의 사람(the man of sorrows)"으로서 유지되는, 바로 그 비천한 평가를 묘사합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받음(suffering) 모두가 다른 이들의 죄들에 대한 속죄(atonement)임을 알게 됩니다 (53,4-6). 전통적으로, 고통받음은 죄들에 대한 어떤 벌인 것으로서 해석되었으나, 그러나 여기서 고통받음은 다른 이들을 위하여 거두어들이게 된 것입니다(is borne) (*). 이것이 바로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 로 보는 자들이 배우게 될 첫 번째 교훈(lession)이며, 그리고 이것은 이 시의 절정(climax)을 눈에 돋보이게 합니다. 세 번째로(53,7-9),  그가 고통받음이미 자유롭게 받아들였으며 (has freely accepted) 그리고 온순하게, 자기 자신을 한 개의 속죄의 희생 제물(a sacrifice of atonement)로서 [그는 한 마리의 어린 양(a lamb)과 같고, 한 마리의 양(a sheep)과 같습니다] 제공한다는 주안점이, 또다시, 나타내어집니다(is made). 그의 죽음은 이 죽음에 앞서는 고통받음만큼이나 치욕적(ignominious)입니다. 끝으로 (제10-11ㄱ)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받음 모두가 얼마나 결실이 많은지(fruitful) 다음과 같이 말해집니다:  (이 본문은 다음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옛날의 선조들처럼 이 종이 수많은 후손을 가질 것이고 그리하여 장수할 것이며 그리하여 커다란 지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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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영어로 "bear"로 번역되는 용어의 우리말 번역, "거두어들인다" 에 대한 더 자세한 고찰은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1.htm (참고: 지금 읽고 계신 이 글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히브리 9,15.24-28)의 해설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_m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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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일부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4-5.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나-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나해 연중 제32주일 제2독서(히브리 9,24-28) 중의 제28절과 이 절에 대한 해설입니다:

(발췌 시작)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이사야서 53,12를 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의 죄를 [단지] 떠맡았음을(took on)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 이런 [단순한] 떠맡음은 예수님을 [유다인들이 속죄일(Day of Atonement)에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워서 광야에 버린 염소인] 속죄 염소(scapegoat)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328) 대신에,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지성소(Holy of Holies)를 거룩하게 하였던(consecrated) 그리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 다른 이들이 각자 자신의 죄들에 대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영원한 속죄 제물(sin offering)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 고유의 죄들에 대한 책임을 진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타락 이전에 그러하였던 것과 꼭 같이, 마치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과 꼭 같이, 우리는 하느님과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과의 계약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인류에게 가해졌던 저주(curse)를 예수님께서 이미 거두어 가셨기(has borne)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 존재하였던 상태들을 복구하셨으며(restored),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죄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당신의 이름으로 행동하도록 임명된) 사제들을 통하여 우리의 죄들이 용서받게 되었다는 보증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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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번역자 주: 아마도 사탄을 나타내는 이름일, 속죄 염소(scapegoat)로도 번역이 되어온, 아자젤(azazel)은, 속죄일의 유다교 제식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구약 성경 레위기 16장에만 나온다. 더 자세한 언급은 다음의 NAB 레위기 제16장 주석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b/leviticus1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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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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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바로 이 예수님 고유의 표현은, 예를 들어,

4-6-1. 미사 경본 > 시작 예식 > "대영광송"에서 다음과 같이 교송됩니다:

(이전 생략)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하 생락)

4-6-2. 미사 경본 > 영성체 예식 > "하느님의 어린양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합송되며:

(이전 생략)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이후 생략)

4-6-3. 더 나아가, 바로 이 우리말본 미사 통상문 어디에서도 "죄를 짊어지시는 주님"이라는 표현은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5.
지금부터는,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하여 위의 제3-1항에 연대순으로 나열되어있는 히브리서 9,28을 비교/검토하고자 합니다.

5-1. 다들 잘 일고 계시겠지만, 이 글의 내용 이해에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다음과 같은 약간의 배경 설명을 먼저 드립니다: 영국의 엘리자벳 1세(Elizabeth I) 여왕의 아버지인 헨리 8세(Henry VIII)가 아들을 얻고자 이혼/혼인무효를 허락해 줄 것을 교황청 유관 부서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을 자신으로 삼으면서, 드디어 영국 성공회로 불리는 개신교의 한 분파가 이 세상에 1534년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이 영국 성공회의 성경도, 그동안 사용해 왔던 라틴어본 불가타 성경이 아닌, 영국 성공회 공인 영어본 번역 성경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1611년에 초판 발행된 King James Version 으로 불리는 영어 성경입니다. (이상, 배경 설명 끝).

KJV1611이 출판된 시기 이전의 가톨릭측 성경의 히브리서 9,28에 있어서의 문제의 그 동사는 별다른 이견 없이, "없애다/제거하다"의 의미였음을, 우리는 위의 제4-1항, 제3-1-1항, 그리고 제3-1-2항에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5-2. 그러나, 이 KJV1611을 위한 번역 작업이 시작된 17세기 초 [주: 더 정확하게 1604년KJV1611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에는, 이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하여, 위의 제2항의 시작 부분에서 약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통공 교리를 배척하고 새로운 대안으로서 개신교측에서 소위 말하는 "대속 교리"가 유럽의 개신교 지지자들 사이에 당연히 알려져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5-3. 그러나 문제는, 개신교측의 바로 이 "대속 교리"의 신약 성경적 근거가 애초부터 생각보다도 상당히 빈약하였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개신교측 용도의 영어 성경을 번역을 하여 마련하는 과정에서, 구약 성경 시절의 개념인 "대역(substitution)" 개념을 답습하여 언급하는 표현을 신약 성경의 어느 구절에 넣으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위의 제3-1-5항에 있는 NAB 주석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해당 그리스어 동사의 어원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의미를 알았던 모양인지, 그리하여, KJV1611를 위한 히브리서 9,28을 영어로의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위의 NAB 주석에서 말하는 두 번째 의미를 표현하는 단어인 "take away 혹은 remove"를 번역 용어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그리고 구약 성경의 "대역(substitution)"의 개념의 답습의 신약 성경적 근거로 삼고자, 첫 번째 의미를 표현하는 단어 "bear"를 번역 용어로 의도적으로 선택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제3-1-3항을 필히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필요성이, 마르틴 루터가 신약 성경의 경전들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던 히브리서가 아직까지도 개신교측의 신약 성경 목록에서 제외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들 중의 한 개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5-4. 히브리서 9,28에서 바로 이 "bear"라는 동사의 사용은 1950-60년대에 가톨릭측과 개신교측이 함께 공동 작업하여, KJV1611을 현대의 영어 어법에 따라 개정한 RSV(Revised Standard Version)히브리서 9,28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위의 제3-1-4항을 필히 참조), 그러나 가톨릭측의 주도 하에서 1970년에 초판 발행된 NAB(New American Bible)의 히브리서 9,28에서는, 이 "bear"라는 동사를 번역 용어로 사용하는 대신에, 1611년 이전에 번역 용어로 사용되었던 동사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take away"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위의 제3-1-5항을 필히 참조). 즉, 그동안 잘못 번역되어 왔던 것을 바로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5-5.
마찬가지로, 제가 소장 중인 1973년에 초판 발행된 개신교측NIV(New International Version) 히브리서 9,28에서도, "bear"아니라"take away"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5-6. 그리고 NAB 히브리서 9,28에서 "take away"라는 번역 용어의 사용은, 1975년에 초판 발행된 프랑스어 공동 번역 성경인 TOB에서도 또한 "remove"와 동등한 의미를 가지는 동사인 "enlever" 를 사용함으로써, 그 적절함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위의 제3-1-6항을 필히 참조).

5-7. 그리고 제가 소장 중인 1976년에 초판 발행된 개신교측GNB(Good New Bible) 히브리서 9,28에서도, "bear"아니라"take away"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5-8. 그리고 제가 소장 중인 1977년공동번역 성서의 히브리서 9,28도 들여다 보았더니, "짊어지다"가 아니고, "없애 주셨고"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5-9. 그리고 1979년에 교황청에 의하여 초판 발행된 Nava Vulgata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 히브리서 9,28에서 사용 중인 "auferenda"라는 라틴어 동사 또한,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공식 라틴어 성경인 Clementine Vulgate (1960년대 중반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 히브리 9,28에 사용 중인 라틴어 동사인 "exhaurio"의 의미와 거의 동일합니다. (위의 제3-1-1항제3-1-7항을 필히 비교/검토하십시오).

5-10. 더 나아가, 히브리서 9,23-28에 대한 영어본 나바르 성경 주석서(주: 2000년 대희년 직전에 초판 발행됨)의 해설에서 심지어 "blot out(완전하게 말소하다)" 라는 설명함으로써, NAB 히브리서 9,28에 있어 "take away"라는 번역 용어의 사용이 정당함을 또다시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위의 제4-3항을 필히 참조).

5-11. 그리고 이러한 제5-10항에서의 입증은, 또한 위의 제4-4항에서 발췌한 "... 성경공부 해설서"의 히브리서 9,28의 해설에서도 또한 분명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추가적으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이러한 매우 구체적인 비교/검토의 결과, "새 번역 성경" 히브리서 9,28에서, "없애시고" 혹은 이 표현과 등가의 표현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짊어지시려고"로 번역한 것은 번역 미숙 혹은 번역 오류라는 결론을, 이 글의 결론으로서, 위의 제3-3항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6.
6-1.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 또한 필독 권고

가톨릭 교회 교리저(CCC) 제1476항
전문입니다. 클릭한 후에, 전후 항들도 또한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게시자 주 6-1: (1) 그런데, 위의 제2-1-2항에서 간략하게 말씀드린 바와 관련하여 이 항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출처 찾아보기"에 의하면, 이 항이 히브리서 9,28을 간접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췌 시작)
(기존의 번역문)
CCC 1476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이 영적인 재산을 교회의 보화라고 부른다. “이 보화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쌓이는 물질적인 부요와 같은 어떤 재물의 총화가 아니라, 인류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도록 바쳐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이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무한하고 무궁한 가치가 있는 보화이다.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는 속량 공로가 충만하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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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바오로 6세, 교황령 Indulgentiarum doctrina, 5: AAS 59(196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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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6-2: (2) 바로 위에 발췌된 기존의 우리말 번역문에 상당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i) 바로 위에 발췌된 기존의 우리말 번역문과 (ii) 바로 아래에 제시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번역문과 어디에서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CCC 1476 We also call these spiritual goods of the communion of saints the Church's treasury, which is "not the sum total of the material goods which have accumulated during the course of the centuries. On the contrary the 'treasury of the Church' is the infinite value, which can never be exhausted, which Christ's merits have before God. They were offered so that the whole of mankind could be set free from sin and attain communion with the Father. In Christ, the Redeemer himself, the satisfactions and merits of his Redemption exist and find their effficacy."

(졸번역)
CCC 1476 우리는 또한 성인들의 통공(the communion of saints)이라는 이들 영적 재화들을 교회의 보화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세기들로 구성된 과정 동안에 축적되어 온 질료적 재화들의 총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달리 '교회의 보화'는, 결코 고갈될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들이 가지는, 무한한 가치를 말합니다. 인류 전체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성부(the Father)와의 통공(하나 됨, communion)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은 제공되었습니다. 구속주(Redeemer) 당신 자신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구속(속량, Redemption)에 기인하는 보속(satisfactions)들과 공로(merits)들이 존재하며(exist)(**) 그리고 이들의 효능을 발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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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 6세, 교황령 Indulgentiarum doctrina, 5: AAS 59(1967), 11면.

(**) 번역자 주: 스콜라 철학 용어들인 있음(有, being)과 존재(存在, existence)의 차이점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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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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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신학으로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i) 16세기 초반에 마르틴 루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계속 우기고 있는, 그러나 신학적으로 구약 성경의 내용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 "대속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ion)"와,

(ii) 신약 성경의 말씀들에 확실하게 근거하여,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구속/속량 교리(the doctrine of redemption)"의 커다란 차이점을 읽을 수 있습니다.

(iii) 특히 이 글에서, "죄를 없애신다"는 부분이, 필독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위의 글에서, "우리를 원죄 이전의 상태인 원 은총(original grace)의 상태, 즉 원 의로움(original justice)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restore)"에 신학적으로 대응함을 반드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이들 두 표현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서,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인 우리들을 향한 유일한 역할" 그 자체에 대한 두 개의 다른 표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적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핵심 내용인, 가톨릭 교회의 "통공 교의"의 내용에 관한 것이므로, 여러 번 읽고 묵상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6-3.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위의 제6-2항의 글에 이어지는 글(제목: 천상 상급인 공로들 자체는 타인들에게 양도될 수 없습니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많은 분들이, 지상과는 달리, 천국(천당, 천상 교회, heaven)에는 아무런 불평등이 없을 것으로 추측/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평등은 천상 교회에도 당연히 존재하는데, 이 글은 이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에 또한 읽고 묵상하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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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5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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