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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다섯 개의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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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siyu1715] 쪽지 캡슐

2000-09-04 ㅣ No.1068

부치지 못한 다섯 개의 엽서

이정하

하나

내 마음속 서랍에는 쓰다가 만 편지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고 써내려 가다가, 다시 읽어보고는 더 이상 쓰지 못한 편지.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내 마음 한 조각을 떼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아는지요? 밤이면 밤마다 떼어내느라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는 내 마음을.

아침부터 소슬히 비가 내렸습니다. 내리는 비는 반갑지만 내 마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고여듭니다. 정말 이럴 때 가까이 있었더라면 따뜻한

커피라도 함께 할 수 있을텐데.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텐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듯 쓸쓸한 일인가 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그대를 우연히 보았던 날,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미소지었습니다. 애당초 가까이 가지 못했기에 아무런 원망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몇 걸음 더 떨어져 그대를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팔짱을 낀 채 근처 까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내겐 아픔이었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까르르대며 웃는 그대의 모습을 까페 창문으로 훔쳐보는 것이 내겐

또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아아, 그대는 꿈에도 몰랐겠지요. 그날 밤은

내게 있어 가장 춥고 외로운 밤이었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마음

쓸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그리워하다 나 혼자 괴로워하면 그만, 그대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덤덤해도 됩니다. 애초에 그대에게 짐이 될 생각이

있었다면 나는 내 사랑을 슬며시 들킬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대여, 나로

인해 그대가 짐스러움을 느낀다면 그 자체가 내게는 더한 괴로움이기에 나 혼자만

그대를 사랑하고 나 혼자만 괴로워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그대여, 그대는 그저

모른 척 하십시오. 그저 전처럼 무덤덤하십시오.

다섯

나는 이제, 조금씩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 버리기보다, 조금씩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었습니다. 아껴가며 읽는 책,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했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이던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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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에게 찾아주지 못한 낙서와 편지.... 다들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비록 상대방의 손에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편질 씀으로써 우리는 조금씩 마음을

정리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진심어린 말 한마디가 적힌 쪽지 아니 메일이라도 보내보면 어떨까요?

마음이 참으로 따스해 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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