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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50: 용서는 이기적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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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3 ㅣ No.24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50) 용서는 이기적 선택

뚝 잘라 버려라! 그래야 산다

 

■ 저마다의 끈

모파상의 단편 중에 ‘끈’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서른 살의 한 농부가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한 가닥의 끈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끈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그날 시장에서 지갑이 없어지는 사건이 생겼고, 그날 우연히 이 농부가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는 것을 본 사람에 의해 그는 누명을 쓰고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렇지만 지갑은 곧 발견되었고, 그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농부는 자신이 불공정한 처사를 당한 것에 대한 불평과 자신에게 혐의를 씌운 사람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고 다녔다.

“이 끈이 어떤 끈인 줄 알아요? 이것 때문에 내가 개망신 당했죠. 아 글쎄 말도 안 되는 도둑 누명을 썼다니깐요. 자초지종 좀 들어보실래요? ….”

그 농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한 가닥의 끈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끈에 옭아 매여, 농사짓는 일도 가족도 잊은 채, 자기 연민에 빠져들어 갔다. 결국 자기 연민의 독은 서서히 그를 파괴하였고,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분노를 삭이지 못하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쩌면 이 남자의 비극은 오늘 우리 모두의 슬픔일지도 모른다. 저마다 저런 끈 한 두 개쯤 들고 다니면서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성토하고 있는 형국이 소란했던 2013년 저물녘 우리들의 사정이 아닐까.

말이 쉽지 용서한다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닌 것이 사실이다. 어느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론 시간에 주임 신부가 신자들에게 ‘죄의 용서’에 대해 열강하고 나서 물었다.

“이제 미워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분 손들어 보세요!”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나요?”

다시 묻자, 한 할아버지가 겨우 손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이 든 신부는 큰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됐습니까? 저희에게 말씀 좀 해 주세요.”

할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했다.

“응, 미워하는 사람들 있었는데…… 다 죽었어!”

촌철살인! 우리가 초장수하여 아는 사람이 다 죽어버리기 직전이 아니고서야, 누구에게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 용서는 ‘나’를 위한 이기적 결단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영성가 헨리 나웬은 말한다.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원한이 남아 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칭찬-너그러이 용서한 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는 쾌감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나 역시 용서의 명령을 거절하는 항변을 수 없이 들어왔다.

“나는 절대로 그놈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내가 당한 상처를 생각하면 용서하려고 해도 안 돼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산수를 잘해야 한다. 수학이 아니라 산수! 산수를 잘하면 용서가 좀 수월해 진다. 나는 용서를 못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곧잘 이렇게 말해 준다.

“한 번 계산해 보세요. 만약 미움이 내 맘 속에 있어 품고 살면 누가 잠을 못 잡니까? 내가 잠을 못 잡니다. 그러면 누가 병에 걸립니까? 바로 납니다. 내가 병에 걸리면 이제 누가 일찍 죽습니까? 이것 역시 납니다. 내가 이렇게 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내가 미워했던 그놈이 좋아합니다. 딱 계산이 나오잖아요. 그러니 용서를 안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못하는 것은 이기적이지 못해서 못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결국 용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 놈에겐 아무 득도 되지 않으니 아까워하지 마세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평화롭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번 눈 딱 감고 해 보세요. 그러면 기쁨이 와요! 행복이 솟아요!”

거듭 말하지만,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결단이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안다. 용서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 미움의 해악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만이 유일한 살 길이다. 실용적으로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치기 때문이다. 용서의 길을 몰라서 화병이 들어 죽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독한 미움이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미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용서다.

하버드 대학의 미틀만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심장마비를 일으킬 위험이 두 배나 높다고 한다. 화를 내는 것이 생명의 단축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실험 결과로 입증되고 있다(송봉모, 「회심하는 인간」 참조).

둘째, 용서해야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신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용서’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케 하다’라는 뜻이다.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못하도록 과거에 매달려 수없이 되뇌며 딱지가 앉기 무섭게 뜯어내는 것이 ‘원한’이다.

용서하지 않을 때 스스로 ‘과거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것은 용서를 할 수 있는‘통제권’을 타인, 즉 원수에게 내어주고서, 자기 자신은 상대방의 잘못으로 입은 상처에 대하여 미움의 속박까지 당하는 운명을 자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으로 이민한 한 랍비가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미국에 오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새 나라에까지 히틀러를 품고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치유’받는 최초의,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다. 진실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셋째, 용서가 죄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며 서로가 사는 상생의 길이다. 용서만이 복수와 원한의 사슬을 끊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 가르침에 의거하여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라고 권한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로마 12,14).

용서하기 전에는, 두 개의 무거운 짐이 존재한다. 즉, 한 사람은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한 사람은 ‘원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용서는 그 두 사람을 모두 자유롭게 한다.


■ 용서해야 산다

약 20년 전쯤 <가톨릭신문> 신앙 수기에서 읽은 얘기다. 부산인가에서 살았던 ‘장애인의 신앙’을 전하는 얘기였다. 거의 성인의 삶을 사신 분의 라이프 스토리! 본인이 쓴 것이 아니고 본인의 사망 후 여동생이 수기 형식으로 썼는데, 거기에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여동생이 큰돈을 사기당하고 그 사기꾼을 원망하며 미워하고 또 없어진 돈을 아까워하며 속을 태우고 있을 때, 이를 곁에서 본 언니가 다음과 같이 충고 했다고 한다.

“너는 도마뱀만도 못한 년이다. 봐라! 도마뱀은 꼬리를 밟히면 그 꼬리를 끊고 도망간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왜 그리도 미련하냐? 너를 짓밟고 있는 그 증오 때문에 너는 죽고 말 것이다. 미련 없이 끊어버려라. 뚝 끊어버리고 잊어라. 그래야 산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뚝 잘라 버리라. 그래야 산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3년 1월 1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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