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질투(嫉妬, envy) vs 시기(猜忌, jealousy) 3 1035_시기vs질투 [성경해석] [번역오류] 782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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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vs질투 -3 [122.128.44.*] 2011-04-16 ㅣ No.1038 게시자 주:
언어 장벽, 문화 장벽으로 발생한 이번에 지적드린 용어 번역 오류에 대한 글들 모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작성된 날짜 순서로 차분히 읽고 묵상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참고: 특히, 첫 번째 글이 2011년 4월 6일에 작성되기 시작하였고 두 번째 글이 2011년 4월 9일에 작성되기 시작하였기에, 첫 번째 글의 작성이 적어도 두 번째 글의 작성일인 2011년 4월 9일 오후 11시 38분 이전에 완료되었으며, 그리고 두 번째 글을 굿뉴스 서버 제공의 우리들의 묵상 게시판 등에 2011년 4월 14일 오전 10시 경에 공지하였기에, 적어도 2011년 4월 14일 오전 10시 이전에 두 번째 글의 작성이 완료되었기음을 주목하십시오. ---------- 최초 작성 일자 : 2011-04-15
(굿뉴스 서버 제공의 천주교 묻고 답하기 게시판 제9114번 글 및 성경 묻고 답하기 게시판 제5046번 글)
+ 찬미 예수님
다음은,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설명입니다:
invidia = envy = 嫉妬(질투)
참고:
위의 가톨릭 대사전의 설명은, 현재 사용 중인 국어 사전 혹은 중국어 사전에 실린 것이 아니라, 제가 아래의 글들에서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실린 envy의 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4월 24일]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envy의 정의(definition)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저술인 "수사학(Rhetoric)"에 주어진 envy의 정의(definition)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그리고 envy의 번역 용어로서 기존의 한자 단어인 嫉妬(질투)를 선택한 이유 및 이러한 선택의 판단 기준 등에 대하여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으며, 우리나라 지역 교회의 교도권에 의한 이러한 번역 용어의 선택을 존중하여, 아래의 저의 글들에서도 envy를 嫉妬(질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꼭 유념하면서 아래의 저의 글들을 읽으실 것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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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erriam-Webster Unabridged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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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dia = envy = 嫉妬(질투) Main Entry: 1en·vy Pronunciation: env, -vi Function: noun Inflected Form(s): -es Etymology: Middle English envie, from Old French, from Latin invidia, from invidus envious (from invidre to look askance at, envy, from in- 2in- + vidre to see) + -ia -y -- more at WIT 1 obsolete a : MALICE, SPITE b : OPPROBRIUM, UNPOPULARITY 2 a : painful or resentful awareness of an advantage enjoyed by another, accompanied by a desire to possess the same advantage --------------------
그런데, 다음과 같이 어원이 분명히 다르기에 그 의미도 다른
zlos = jealousy 도
탈출기 20,5 및 탈출기 34,14에서 또한 嫉妬(질투, envy)로 번역한 것에 문제없다???
Main Entry: zeal
Pronunciation: zl, esp before pause or consonant -l Function: noun Inflected Form(s): -s Etymology: Middle English zele, from Late Latin zelus, from Greek zlos zeal, emulation, jealousy; akin to Greek (Doric dialect) zamia loss and perhaps to Old Irish ilid he desires ardently, Russian yaryl furious, Sanskrit yvan aggressor 1 archaic : ardor of feeling taking the form usually of jealousy or indignation zeal -- Ezek 5:13 (Authorized Version)> 2 obsolete : ardent desire especially to do or have something 3 : impassioned eagerness especially in favor of a person or a cause : active enthusiastic interest mounting to fervor 4 obsolete : ZEALOT ====================
이들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들을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들에 대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정의(definitions)들 및
새 번역 성경에서 이들 용어들이 현재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지에 대한 비교/검토 및 분석 결과는,
다음의 글들에 있습니다:
참고: 위의 두 개의 글들을 클릭하여 읽으신 후에, 아래의 질문에 대한 한줄답변들을 읽도록 하십시오. 이어지는 글입니다.
----------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2월 30일 성가정 축일] + 찬미 예수님!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에 발췌한, "새 번역 성경" 번역에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치셨던 (고) 임승필 요셉 신부님의 1998년 6월호 경향잡지 기고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의 발췌문을 잘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는, (i) 위에 제가 말씀드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defined), 영어로는 "envy"로 번역되는 용어의 정의 (definition), 그리고 (ii) 새 번역 성경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정의(definition)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이 영어 표현 "envy" 에 대응하는 원어를, 번역 용어로서 "질투(envy)"로 번역하여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로 가르쳐 오고 있는,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의 번역 용어로서의 "질투(envy)"의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 왜 이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하나, 그러나, 외람된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임승필 신부님께서 제가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을 성경 번역 작업에 종사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계셨더라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 "질투(envy)"와 "시기(jealousy)"의 정의(definition)들을 존중하여, 그리고 신학 대전에 주어진 "envy"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질투(envy, invidia)"라는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또한 존중하여, 아래의 발췌문 중에서, "질투" 대신에 "시기"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또 "시기" 대신에 "질투"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혹시, 만약에 국내의 개신교측 성경에서 "jealousy"를 "시기"가 아닌 "질투"로 번역을 하였기에, 별도의 신학적 고찰없이 이것을 그대로 따라갔다면, 이것은 기존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이미 번역 용어로서 자리잡은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라는 용어와 개념적으로 크게 충돌하는, 명백한 번역 오류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번역 오류라는 지적에 대하여서는, 이 글의 처음부터 말씀드리고 있는 바를 정밀하게 읽으실 것을 거듭 요청합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우리말로의 번역 시에, 개신교측이, 그 태생적 속성상, 가톨릭 교회의 교의(dogma, 믿을 교리)인 통공교리를 부정하는,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교리상의 이유 때문에, 기원후 5-6세기 이후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Protestant" 집단임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특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 정의되고 있는 개념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 용어들의 선정시에, 지금 제가 지적하고 있는 바른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 (발췌 시작) 성서의 세계 : 질투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질투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질투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질투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질투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질투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질투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질투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질투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질투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질투’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질투’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시기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질투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질투"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질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질투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시기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질투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질투’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질투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질투’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질투’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질투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질투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질투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질투하시게 한다. 이 질투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질투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질투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질투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질투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질투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질투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질투’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질투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질투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승필 요셉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이상, 발췌 끝) ----------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i) "envy" 라는 단어와 "jealousy" 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입니다. 이들을 비교/검토하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envy"로 번역된 단어가 "질투"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jealousy"로 번역된 단어가 "시기"로 번역되었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envy = 질투, jealousy = 시기 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발췌 시작) III. 죄의 다양성 1852 Magna est peccatorum varietas. Plures eorum catalogos affert Scriptura. Epistula ad Galatas opera carnis fructui opponit Spiritus: « Manifesta autem sunt opera carnis, quae sunt fornicatio, immunditia, luxuria, idolorum servitus, veneficia, inimicitiae, contentiones, aemulationes, irae, rixae, dissensiones, sectae, invidiae, ebrietates, comissationes, et his similia, quae praedico vobis, sicut praedixi, quoniam, qui talia agunt, Regnum Dei non consequentur » (Gal 5,19-21). 113 1852 La varietà dei peccati è grande. La Scrittura ne dà parecchi elenchi. La lettera ai Gàlati contrappone le opere della carne al frutto dello Spirito: « Le opere della carne sono ben note: fornicazione, impurità, libertinaggio, idolatria, stregonerie, inimicizie, discordia, gelosia, dissensi, divisioni, fazioni, invidie, ubriachezze, orge e cose del genere; circa queste cose vi preavviso, come già ho detto, che chi le compie non erediterà il regno di Dio » (Gal 5,19-21).93 1852 La variété des péchés est grande. L’Écriture en fournit plusieurs listes. L’épître aux Galates oppose les œuvres de la chair au fruit de l’Esprit : " On sait bien tout ce que produit la chair : fornication, impureté, débauche, idolâtrie, magie, haines, discorde, jalousie, emportements, disputes, dissensions, scissions, sentiments d’envie, orgies, ripailles et choses semblables – et je vous préviens, comme je l’ai déjà fait, que ceux qui commettent ces fautes là n’hériteront pas du Royaume de Dieu " (5, 19-21 ; cf. Rm 1, 28-32 ; 1 Co 6, 9-10 ; Ep 5, 3-5 ; Col 3, 5-8 ; 1 Tm 1, 9-10 ; 2 Tm 3, 2-5).
1852 There are a great many kinds of sins. Scripture provides several lists of them. The Letter to the Galatians contrasts the works of the flesh with the fruit of the Spirit: "Now the works of the flesh are plain: fornication, impurity, licentiousness, idolatry, sorcery, enmity, strife, jealousy, anger, selfishness, dissension, factions, envy, drunkenness, carousing, and the like. I warn you, as I warned you before, that those who do such things sha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1852 죄는 매우 다양하다. 성경은 여러 번 죄를 열거하고 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육정의 행동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한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5,19`-21) 93)
----- 93. 로마 1,28-32; 1코린 6,9`-10; 에페 5,3-5; 콜로 3,5-9; 1티모 1,9`-10; 2티모 3,2-5 참조. ----- (이상, 발췌 끝)
----- 그리고 다음은, (ii)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입니다. 비교/검토해 보면, envy = 질투 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발췌 시작) 1866 Vitia possunt statui secundum virtutes quibus adversantur, vel etiam ad peccata capitalia reduci quae experientia christiana, sanctum Ioannem Cassianum 122 et sanctum Gregorium Magnum secuta, 123 distinxit. Capitalia appellantur quia alia peccata, alia vitia generant. Sunt superbia, avaritia, invidia, ira, luxuria, gula, pigritia seu acedia. 1866 I vizi possono essere catalogati in parallelo alle virtù alle quali si oppongono, oppure essere collegati ai peccati capitali che l’esperienza cristiana ha distinto, seguendo san Giovanni Cassiano 102 e san Gregorio Magno.103 Sono chiamati capitali perché generano altri peccati, altri vizi. Sono la superbia, l’avarizia, l’invidia, l’ira, la lussuria, la golosità, la 2539 pigrizia o accidia. 1866 Les vices peuvent être rangés d’après les vertus qu’ils contrarient, ou encore rattachés aux péchés capitaux que l’expérience chrétienne a distingués à la suite de S. Jean Cassien et de S. Grégoire le Grand (mor. 31, 45 : PL 76, 621A). Ils sont appelés capitaux parce qu’ils sont générateurs d’autres péchés, d’autres vices. Ce sont l’orgueil, l’avarice, l’envie, la colère, l’impureté, la gourmandise, la paresse ou acédie.
1866 Vices can b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virtues they oppose, or also be linked to the capital sins which Christian experience has distinguished, following St. John Cassian and St. Gregory the Great. They are called "capital" because they engender other sins, other vices. They are pride, avarice, envy, wrath, lust, gluttony, and sloth or acedia. 1866 악습들은 그와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죄종(罪宗)과 연관시킬 수 있다. 죄종(peccata capitalia)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인과 102)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103)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었다.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 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다. ----- 102. 성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 5, 2: CSEL 13, 121(PL 49, 611) 참조. 103. 성 대 그레고리오, 「욥기 교훈」 , 31, 45, 87: CCL 143B, 1610(PL 76, 621) 참조. ----- 게시자 주: 성 요한 카시아누스(360-435년경)와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540-604년, 재위기간: 590-604년)의 성경 해석법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에 있으니 되도록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이상, 발췌 끝). ---------- (iii) 그리고, 새 번역 성경에 있어서의 이러한 비교/검토는 여기를 클릭하면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위의 (고) 임승필 신부님의 글인 발췌문에서, "질투"를 "시기"로 교체하고, "시기"를 "질투로 교체하면, "질투"와 "시기"에 대한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의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 및 "시기(jealousy)"라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들과 지금과 같은 커다란 개념적 충돌은 없게 됩니다. 즉, 다음의 문장이, 가톨릭 대사전의 "질투(envy)"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3항 및 제1866항의 가르침과 내용적으로 전혀 충돌하지 않는, 즉 일치를 이루는 설명입니다: ----- 성서의 세계 : 시기(jealousy)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시기(jealousy)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시기(jealousy)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시기(jealousy)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시기(jealousy)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시기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시기(jealousy)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시기(jealousy)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시기(jealousy)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시기(jealousy)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시기(jealousy)’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질투(envy)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시기(jealousy)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시기(jealousy)"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기(jealousy)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질투(envy)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기(jealousy)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시기(jealousy)’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시기(jealousy)’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시기(jealousy)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시기(jealousy)하는 이’, 그는 시기(jealousy)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시기(jealousy)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기(jealousy)’라는 것이다. 시기(jealousy)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시기(jealousy)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시기(jealousy)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시기(jealousy)하시게 한다. 이 시기(jealousy)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시기(jealousy)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시기(jealousy)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시기(jealousy)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시기(jealousy)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시기(jealousy)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시기(jealousy)’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시기(jealousy)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시기(jealousy)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리고, 중요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번역 용어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괄호 안에 라틴어 혹은 영어 단어를 병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번역 용어들로서 선택된 한자 단어들의 자구해석만으로는 도저히 번역 이전의 원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상, 내용 추가 끝].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참고: 위의 두 개의 글들을 클릭하여 읽으신 후에, 아래의 질문에 대한 한줄답변들을 읽도록 하십시오. 이어지는 글입니다.
----------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2월 30일 성가정 축일] + 찬미 예수님!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에 발췌한, "새 번역 성경" 번역에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치셨던 (고) 임승필 요셉 신부님의 1998년 6월호 경향잡지 기고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의 발췌문을 잘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는, (i) 위에 제가 말씀드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defined), 영어로는 "envy"로 번역되는 용어의 정의 (definition), 그리고 (ii) 새 번역 성경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정의(definition)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이 영어 표현 "envy" 에 대응하는 원어를, 번역 용어로서 "질투(envy)"로 번역하여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로 가르쳐 오고 있는,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의 번역 용어로서의 "질투(envy)"의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 왜 이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하나, 그러나, 외람된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임승필 신부님께서 제가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을 성경 번역 작업에 종사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계셨더라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 "질투(envy)"와 "시기(jealousy)"의 정의(definition)들을 존중하여, 그리고 신학 대전에 주어진 "envy"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질투(envy, invidia)"라는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또한 존중하여, 아래의 발췌문 중에서, "질투" 대신에 "시기"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또 "시기" 대신에 "질투"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혹시, 만약에 국내의 개신교측 성경에서 "jealousy"를 "시기"가 아닌 "질투"로 번역을 하였기에, 별도의 신학적 고찰없이 이것을 그대로 따라갔다면, 이것은 기존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이미 번역 용어로서 자리잡은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라는 용어와 개념적으로 크게 충돌하는, 명백한 번역 오류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번역 오류라는 지적에 대하여서는, 이 글의 처음부터 말씀드리고 있는 바를 정밀하게 읽으실 것을 거듭 요청합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우리말로의 번역 시에, 개신교측이, 그 태생적 속성상, 가톨릭 교회의 교의(dogma, 믿을 교리)인 통공교리를 부정하는,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교리상의 이유 때문에, 기원후 5-6세기 이후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Protestant" 집단임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특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 정의되고 있는 개념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 용어들의 선정시에, 지금 제가 지적하고 있는 바른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 (발췌 시작) 성서의 세계 : 질투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질투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질투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질투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질투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질투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질투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질투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질투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질투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질투’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질투’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시기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질투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질투"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질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질투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시기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질투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질투’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질투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질투’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질투’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질투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질투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질투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질투하시게 한다. 이 질투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질투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질투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질투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질투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질투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질투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질투’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질투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질투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승필 요셉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이상, 발췌 끝) ----------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i) "envy" 라는 단어와 "jealousy" 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입니다. 이들을 비교/검토하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envy"로 번역된 단어가 "질투"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jealousy"로 번역된 단어가 "시기"로 번역되었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envy = 질투, jealousy = 시기 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발췌 시작) III. 죄의 다양성 1852 Magna est peccatorum varietas. Plures eorum catalogos affert Scriptura. Epistula ad Galatas opera carnis fructui opponit Spiritus: « Manifesta autem sunt opera carnis, quae sunt fornicatio, immunditia, luxuria, idolorum servitus, veneficia, inimicitiae, contentiones, aemulationes, irae, rixae, dissensiones, sectae, invidiae, ebrietates, comissationes, et his similia, quae praedico vobis, sicut praedixi, quoniam, qui talia agunt, Regnum Dei non consequentur » (Gal 5,19-21). 113 1852 La varietà dei peccati è grande. La Scrittura ne dà parecchi elenchi. La lettera ai Gàlati contrappone le opere della carne al frutto dello Spirito: « Le opere della carne sono ben note: fornicazione, impurità, libertinaggio, idolatria, stregonerie, inimicizie, discordia, gelosia, dissensi, divisioni, fazioni, invidie, ubriachezze, orge e cose del genere; circa queste cose vi preavviso, come già ho detto, che chi le compie non erediterà il regno di Dio » (Gal 5,19-21).93 1852 La variété des péchés est grande. L’Écriture en fournit plusieurs listes. L’épître aux Galates oppose les œuvres de la chair au fruit de l’Esprit : " On sait bien tout ce que produit la chair : fornication, impureté, débauche, idolâtrie, magie, haines, discorde, jalousie, emportements, disputes, dissensions, scissions, sentiments d’envie, orgies, ripailles et choses semblables – et je vous préviens, comme je l’ai déjà fait, que ceux qui commettent ces fautes là n’hériteront pas du Royaume de Dieu " (5, 19-21 ; cf. Rm 1, 28-32 ; 1 Co 6, 9-10 ; Ep 5, 3-5 ; Col 3, 5-8 ; 1 Tm 1, 9-10 ; 2 Tm 3, 2-5).
1852 There are a great many kinds of sins. Scripture provides several lists of them. The Letter to the Galatians contrasts the works of the flesh with the fruit of the Spirit: "Now the works of the flesh are plain: fornication, impurity, licentiousness, idolatry, sorcery, enmity, strife, jealousy, anger, selfishness, dissension, factions, envy, drunkenness, carousing, and the like. I warn you, as I warned you before, that those who do such things sha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1852 죄는 매우 다양하다. 성경은 여러 번 죄를 열거하고 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육정의 행동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한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5,19`-21) 93)
----- 93. 로마 1,28-32; 1코린 6,9`-10; 에페 5,3-5; 콜로 3,5-9; 1티모 1,9`-10; 2티모 3,2-5 참조. ----- (이상, 발췌 끝)
----- 그리고 다음은, (ii)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입니다. 비교/검토해 보면, envy = 질투 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발췌 시작) 1866 Vitia possunt statui secundum virtutes quibus adversantur, vel etiam ad peccata capitalia reduci quae experientia christiana, sanctum Ioannem Cassianum 122 et sanctum Gregorium Magnum secuta, 123 distinxit. Capitalia appellantur quia alia peccata, alia vitia generant. Sunt superbia, avaritia, invidia, ira, luxuria, gula, pigritia seu acedia. 1866 I vizi possono essere catalogati in parallelo alle virtù alle quali si oppongono, oppure essere collegati ai peccati capitali che l’esperienza cristiana ha distinto, seguendo san Giovanni Cassiano 102 e san Gregorio Magno.103 Sono chiamati capitali perché generano altri peccati, altri vizi. Sono la superbia, l’avarizia, l’invidia, l’ira, la lussuria, la golosità, la 2539 pigrizia o accidia. 1866 Les vices peuvent être rangés d’après les vertus qu’ils contrarient, ou encore rattachés aux péchés capitaux que l’expérience chrétienne a distingués à la suite de S. Jean Cassien et de S. Grégoire le Grand (mor. 31, 45 : PL 76, 621A). Ils sont appelés capitaux parce qu’ils sont générateurs d’autres péchés, d’autres vices. Ce sont l’orgueil, l’avarice, l’envie, la colère, l’impureté, la gourmandise, la paresse ou acédie.
1866 Vices can b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virtues they oppose, or also be linked to the capital sins which Christian experience has distinguished, following St. John Cassian and St. Gregory the Great. They are called "capital" because they engender other sins, other vices. They are pride, avarice, envy, wrath, lust, gluttony, and sloth or acedia. 1866 악습들은 그와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죄종(罪宗)과 연관시킬 수 있다. 죄종(peccata capitalia)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인과 102) 대 그레고리오 성인의 103)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었다.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 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다. ----- 102. 성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 5, 2: CSEL 13, 121(PL 49, 611) 참조. 103. 성 대 그레고리오, 「욥기 교훈」 , 31, 45, 87: CCL 143B, 1610(PL 76, 621) 참조. ----- 게시자 주: 성 요한 카시아누스(360-435년경)와 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540-604년, 재위기간: 590-604년)의 성경 해석법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에 있으니 되도록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이상, 발췌 끝). ---------- (iii) 그리고, 새 번역 성경에 있어서의 이러한 비교/검토는 여기를 클릭하면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위의 (고) 임승필 신부님의 글인 발췌문에서, "질투"를 "시기"로 교체하고, "시기"를 "질투로 교체하면, "질투"와 "시기"에 대한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의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 및 "시기(jealousy)"라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들과 지금과 같은 커다란 개념적 충돌은 없게 됩니다. 즉, 다음의 문장이, 가톨릭 대사전의 "질투(envy)"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3항 및 제1866항의 가르침과 내용적으로 전혀 충돌하지 않는, 즉 일치를 이루는 설명입니다: ----- 성서의 세계 : 시기(jealousy)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시기(jealousy)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시기(jealousy)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시기(jealousy)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시기(jealousy)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시기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시기(jealousy)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시기(jealousy)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시기(jealousy)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시기(jealousy)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시기(jealousy)’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질투(envy)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시기(jealousy)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시기(jealousy)"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기(jealousy)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질투(envy)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기(jealousy)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시기(jealousy)’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시기(jealousy)’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시기(jealousy)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시기(jealousy)하는 이’, 그는 시기(jealousy)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시기(jealousy)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기(jealousy)’라는 것이다. 시기(jealousy)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시기(jealousy)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시기(jealousy)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시기(jealousy)하시게 한다. 이 시기(jealousy)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시기(jealousy)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시기(jealousy)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시기(jealousy)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시기(jealousy)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시기(jealousy)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시기(jealousy)’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시기(jealousy)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시기(jealousy)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리고, 중요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번역 용어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괄호 안에 라틴어 혹은 영어 단어를 병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번역 용어들로서 선택된 한자 단어들의 자구해석만으로는 도저히 번역 이전의 원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상, 내용 추가 끝].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0 2,128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