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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嫉妬, envy) vs 시기(猜忌, jealousy) 3 1035_시기vs질투 [성경해석] [번역오류] 78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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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vs질투 -3 [122.128.44.*]

2011-04-16 ㅣ No.1038

 
게시자 주:
 
 
언어 장벽, 문화 장벽으로 발생한 이번에 지적드린 용어 번역 오류에 대한 글들 모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작성된 날짜 순서로 차분히 읽고 묵상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참고: 특히, 첫 번째 글이 2011년 4월 6일에 작성되기 시작하였고 두 번째 글이 2011년 4월 9일에 작성되기 시작하였기에, 첫 번째 글의 작성이 적어도 두 번째 글의 작성일인 2011년 4월 9일 오후 11시 38분 이전에 완료되었으며, 그리고 두 번째 글을 굿뉴스 서버 제공의 우리들의 묵상 게시판 등에 2011년 4월 14일 오전 10시 경에 공지하였기에, 적어도 2011년 4월 14일 오전 10시 이전에 두 번째 글의 작성이 완료되었기음을 주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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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작성 일자 : 2011-04-15 
(굿뉴스 서버 제공의 천주교 묻고 답하기 게시판 제9114번 글 및 성경 묻고 답하기 게시판 제5046번 글)
 
 
 + 찬미 예수님
 
다음은,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설명입니다:
 
 
 invidia = envy = 嫉妬(질투)
 
 
질투
한자 嫉妬
라틴어 invidia
영어 envy
 

   죄원(罪源, capital sins)의 하나인데, 한국 천주교회 용어로는 죄원을 ‘칠죄종’(七罪宗)이라 지칭하여 본죄(本罪) 즉 우리 자신이 지은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을 가리키며, ‘질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다른 사람의 우수함, 행운, 성공에 대해 슬퍼하거나 불만을 느끼는 ‘이웃사랑’에 대한 배반죄이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자신에게서 빼앗아간 것이라고 보든지, 어떤 부정이 저질러진 것이라고 느끼든지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질투에 있어 기본적인 것은, 무언가 자신에게서 빼앗아갔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질투는 단순히 타인이 재능이나 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을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고, 확실히 자기가 타인과 동일하게 되고자 하거나, 타인을 앞지르려고 하는 야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성공이 자기에게 재난을 초래하는 경우는 실지로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는 일이 모두 죄스러운 질투가 된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이기심과 냉혹에서 빚어지는 슬픔이 죄악이다(1고린 10:24, 13:4-6, 갈라 15:26, 1베드 2:1). 다른 사람을 앞지르려고 하는 야심은 칭찬하여 마땅한 경쟁심(emulation)이다.

   질투의 어원은 라틴어 ‘invidia’ 또는 ‘invidere’이며, 그 뜻은 ‘곁눈질로 보다’ 또는 ‘의심쩍은 눈으로 보다’이다. 악마의 질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죄와 죽음이 왔고, 질투로부터 최초의 살해가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도 유태인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다(마태 27:18). 질투는 파괴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이기심의 가장 비열한 형식이다. 질투가 애덕(愛德, charity)에 반하는 죄이며, 그 자체가 중죄이지만, 질투의 기본에 완전히 동의했느냐의 여부, 또는 질투의 대상의 대소에 따라서 경중의 차가 있다. 가장 무거운 대죄(大罪)는 타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초자연의 선물, 곧 완덕(完德)을 슬퍼하는 일이다. 사실상 그다지 중대하지 않은 선(善)에 대한 질투는 단순한 소죄(小罪)에 불과하다. 부도덕한 또는 부정한 계획과 희망이 실패함을 기뻐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참고:
 
위의 가톨릭 대사전의 설명은, 현재 사용 중인 국어 사전 혹은 중국어 사전에 실린 것이 아니라, 제가 아래의 글들에서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실린 envy의 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4월 24일]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envy의 정의(definition)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저술인 "수사학(Rhetoric)"에 주어진 envy의 정의(definition)을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그리고 envy번역 용어로서 기존의 한자 단어인 嫉妬(질투)를 선택한 이유 및 이러한 선택의 판단 기준 등에 대하여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으며, 우리나라 지역 교회의 교도권에 의한 이러한 번역 용어의 선택을 존중하여, 아래의 저의 글들에서도 envy  嫉妬(질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꼭 유념하면서 아래의 저의 글들을 읽으실 것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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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erriam-Webster Unabridged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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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vidia = envy = 嫉妬(질투)
 
Main Entry: 1en·vy   
Pronunciation: primarystressenvemacron, -vi
Function: noun
Inflected Form(s): -es
Etymology: Middle English envie, from Old French, from Latin invidia, from invidus envious (from invidemacronre to look askance at, envy, from in- 2in- + videmacronre to see) + -ia -y -- more at
WIT
1 obsolete a : MALICE, SPITE b : OPPROBRIUM, UNPOPULARITY
2 a : painful or resentful awareness of an advantage enjoyed by another, accompanied by a desire to possess the same advantage envy among his brothers -- Willa Cather> envy of the man in the taxi with her -- Hollis Alpert> b envies plural : instances of envious feeling envies -- Hilaire Belloc> c : an object of envious notice or feeling envy of all our friends -- Margaret B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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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음과 같이 어원이 분명히 다르기에 그 의미도 다른
 
zemacronlos =  jealousy
 
탈출기 20,5 및 탈출기 34,14에서 또한 嫉妬(질투, envy)로 번역한 것에 문제없다???
 
Main Entry: zeal   
Pronunciation: primarystresszemacronl, esp before pause or consonant -emacronschwal
Function: noun
Inflected Form(s): -s
Etymology: Middle English zele, from Late Latin zelus, from Greek zemacronlos zeal, emulation, jealousy; akin to Greek (Doric dialect) zamia loss and perhaps to Old Irish amacrilid he desires ardently, Russian yaryl furious, Sanskrit yamacrvan aggressor
1 archaic : ardor of feeling taking the form usually of jealousy or indignation zeal -- Ezek 5:13 (Authorized Version)>
2 obsolete : ardent desire especially to do or have something zeal I had to see him -- Shakespeare>
3 : impassioned eagerness especially in favor of a person or a cause : active enthusiastic interest mounting to fervor zeal upon this task -- C.S.Sydnor> zeal -- Russell Kirk>
4 obsolete : ZEA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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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들을 나타내는 두 개의 용어들에 대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정의(definitions)들 및
 
새 번역 성경에서 이들 용어들이 현재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지에 대한 비교/검토 및 분석 결과는,
 
다음의 글들에 있습니다:
 
 
 
 
참고: 위의 두 개의 글들을 클릭하여 읽으신 후에, 아래의 질문에 대한 한줄답변들을 읽도록 하십시오. 이어지는 글입니다. 
 
 
‘질투[嫉妬]와 시기[猜忌]’의 차이점은?
 
작성자  ㅂㅇㅅ번  호  5048
 
작성일  2011-04-16 오전 8:35:48조회수  34추천수  2
 
소생의 글[5044]에 두 분의 댓글을 보면서 주객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 크게 변질된 부분이 있어
두 분께 묻고자합니다.
먼저 두 분의 성경 사랑, 하느님 영광 드러냄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단도입적으로 질문 드리면, 성경과 외국어의 출처를 떠나 일상적인 용어의 의미,
‘질투[嫉妬]와 시기[猜忌]’에 대해서 답변 부탁드립니다.
사전적인 의미도 중요합니다만 성경적인 것도 중요하고 언어학적인 면도 중요합니다.
다만 우리글로 된 우리말의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있기에
두 분은 이 두 용어가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 세대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그 사용 용도에 대해서
지금의 솔직한 심정으로 간략히 부탁합니다.
참고적으로 소생의 아래 내용을 참조해 간략히 몇마디로 요약해 주시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참조]‘질투와 시기’, 아예 따지려면 우리말의 정의부터 짚자.
여러 기준을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그 기준이 그 기준이고 그게 그거다.
굳이 따지지 않는 게 맘 편하다.
우리말과 한자[漢字] 사이에 오는 문화적인 혼선이리라.
그렇지만 이 두 용어를 정의해 보자. 이것은 전적으로 소생의 판단이다.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질투이고 관련이 없다면 시기이다.
그리고 사랑과 연결된다면 질투이고 아니면 시기다.
이런 관점에서 발생 시기로 봐서 좋은 의미[사랑이 있기에]가 담긴 것이라면 질투이고
없다면 시기이다.
 
 ㅎㅅㄱ ( (2011/04/16) : 님께서 말씀하신 두 사람 중에 제가 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약간 젊은 층(?)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어감상으로는 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사전적으로는 시기의 의미가 질투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은 가급적 이를 분리해서 쓰는 것 같지만 예전 어른들은 시기의 의미를 질투라는 단어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추정됩니다. 
 
 ㅎㅅㄱ ( (2011/04/16) : 그리고 "시기"의 의미를 제외한 질투는 언제나 "3자 관계"에서 사용하는 것이고, "시기"는 양자관계에서 보통 사용됩니다. 
 
소순태 ( (2011/04/16) :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envy" 와 "jealousy" 단어의 정의 들을 전달해 주고 나서, 어느 단어가 나타내는 개념이 더 원초적 감정인지를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jealousy"라고 답변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자어 우리말 "질투"로 불러야 할 지, 아니면 "시기"로 불러야 할 지를 물어보면, 모르겠다는 답변을 합니다. 따라서,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그 근거 제시와 함께, "질투"라고 불러야 할 지, 아니면 "시기라고 불러야 할 지 정하여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소순태 ( (2011/04/16) :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에서 하고 있는, "envy" 와 "jealousy" 단어들의 정의(definition)를 전달해 주면, 이들 두 단어들이 두 개의 분명히 다른 "깊은" 감정들을 나타내는 단어들임에 대하여 대다수의 분들이 잘 이해하더군요. 그러나, 예를 들어, "질투"로 불리는 감정이 "시기"로 불리는 감정으로 발전하는지, 아니면 "시기"로 불리는 감정이 "질투"로 불리는 감정으로 발전하는 지에 대하여서는, 개인 차가 많아, 저도 역시 모르겠다 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저의 두 번째 글 중에서 이미 알려드렸습니다만, 다음의 Wikipedia 에 주어진 이들 두 영어 단어들의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en.wikipedia.org/wiki/Envy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en.wikipedia.org/wiki/Jealousy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기본적으로, 어떤 개념을 나타내는 외국어 단어를 우리말 단어로 나타내고자 할 때에, 만약에 기존의 한자 단어를 번역 용어로서 제시하고자 한다면, 특히 (가톨릭 대사전에서 처럼) (필요하다면 원어 단어를 괄호 등을 사용하면서) 분명하게 병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제가 다루고 있는 종류의 문제가 세월이 한참 가더라도 제대로 해결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순태 ( (2011/04/16) : [그는 소리를 적는 문자(記音文字)와 뜻을 적는 문자(記事文字)를 나누고 기음문자가 훨씬 훌륭한 것이니 한자 대신 국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질문: 그런데, 이런 주장을 누가 하였을까요? 1900년대 초에 최초로 국어 문법 책을 출판하였다고 하는, 국어 문법의 선구자인 주시경 선생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야후 백과사전에 실린 주시경 선생에 대한 글을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주시경&subtype=enc&pk=b19j3559b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이쯤하여, 제가 이번의 주제와 관련하여 올려드린 두 개의 글들을, 다시 한 번 잘 읽도록 하십시오. 글의 중간 중간에 링크 설정한 자료들도 또한 차분히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태까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분들 중에서, 아마도 이해가 되어 그리하여 생각이 달라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런 관점에서 발생 시기로 봐서 좋은 의미[사랑이 있기에]가 담긴 것이라면 질투이고 없다면 시기이다.] <----- 이 견해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이혼 사유가 되었던 "칠거지악"에는 "질투"를 그 중의 하나로 나열하고 있지, "시기"를 나열하지 않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야후 백과 사전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질투&subtype=enc&pk=b21c0235a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칠거지악: 〈대대례기 大戴禮記〉 본명(本命)에 나온다. 칠출지악(七出之惡)이라고도 하는데, 삼종지도(三從之道)와 함께 전통사회의 여성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던 조목이다.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③ 음탕한 것(淫行), ④ 질투하는 것(嫉妬), ⑤ 나쁜 질병이 있는 것(惡疾), ⑥ 수다스러운 것(口舌), ⑦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하 생략)
 
소순태 ( (2011/04/16) : [다만 우리글로 된 우리말의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있기에 이 두 용어가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 세대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그 사용 용도에 대해서 ... ] <----- 이미 저도 이들 두 한자어 단어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더 자상하게 잘 질문하셨습니다.
 
소순태 ( (2011/04/16) : 그리고 주변의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이들 두 한자어 단어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 심지어 전자 국어 사전까지 찾아 보고 나서도, "모르겠다"는 답변을 하더군요.
 
소순태 ( (2011/04/16) : 그런데... 만약에 "사랑"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 "질투"로 불리는 감정이라면, 왜 이 "질투"를 "칠거지악" 중의 하나라고 나열까지 부르면서 단죄하였을까요???
 
소순태 ( (2011/04/16) :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질투(嫉妬/嫉?)"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에 "시기(猜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시기(猜忌)"가 "질투(嫉妬/嫉?)"보다는 더 원초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러한 견해는 또한 다음의 불교의 백팔번뇌의 나열들 중의 한 개에 대한 해설인 듯한 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嫉(질) : 嫉은 남의 잘 되는 것이나, 나보다도 優越(우월)한 것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猜忌心(시기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으로 이는 瞋(진 ; 성냄)을 근거로 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소순태 ( (2011/04/16) : 출처: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59613&logId=3399167
 
소순태 ( (2011/04/16) : 표준 국어 대사전에 실린 "질투(嫉妬/嫉?)" 단어에 대한 설명, 그리고 바로 위의 불교의 백팔번뇌의 나열들 중의 한 개인 "嫉(질)"에 대한 해설인 듯한 글 등을 참고하더라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의한 "envy"를 가톨릭 대사전에서 "질투(嫉妬/嫉?)"로 번역한 것은, 무난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순태 ( (2011/04/16) : 그리고 다음의 자료의 주석에서도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3】어진 이를 해코지하는 것을 이라 하고 재주 있는 이를 시기하는 것을 라 한다. 스스로는 명리를 드러내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예로움은 참지 못하는 것을 嫉妬라 한다.
 
소순태 ( (2011/04/16) : 출처: http://www.google.co.kr/url?sa=t&source=web&cd=29&ved=0CDcQFjAIOBQ&url=http%3A%2F%2Fftp.buddhism.org%2FKorean%2F%25C7%25D1%25B1%25DB%25B4%25EB%25C0%25E5%25B0%25E6%2F%25C4%25A1%25B9%25AE%25B4%25EB%25BF%25AA.hwp&ei=4wCpTYbWNYmKvgPfvJSOCg&usg=AFQjCNGvwG9KAvC9e1lKf1hCEvY3l3idKw
 
소순태 ( (2011/04/16) : 참고: 위의 자료는, 한글대장경, "치문원문대조역-봉선사현진행5" 라고 합니다.
 
소순태 ( (2011/04/16) : 출처: http://www.google.co.kr/url?sa=t&source=web&cd=2&ved=0CCoQFjAB&url=http%3A%2F%2Fftp.buddhism.org%2FKorean%2F%25C7%25D1%25B1%25DB%25B4%25EB%25C0%25E5%25B0%25E6%2F%25C4%25A1%25B9%25AE%25B9%25F8%25BF%25AA%25BA%25BB.hwp&ei=kxGpTarvE4nyvQPZsImTCg&usg=AFQjCNG3uPZUogOG6cJvWLnsWHk59yiC1g
 
소순태 ( (2011/04/16) : 참고: 위의 자료는, 한글대장경, " 치문1차-완성(전문)조행5" 라고 합니다.
 
소순태 ( (2011/04/16) : 구글 검색 key words: "번뇌" "猜忌" "嫉" "한글대장경"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3】害賢曰嫉, 忌才曰妬. 又徇自名利, 不耐他榮曰嫉妬.
 
소순태 ( (2011/04/16) : 【3】어진 이를 해코지하는 것을 이라 하고 재주 있는 이를 시기하는 것을 라 한다. 스스로는 명리를 드러내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예로움은 참지 못하는 것을 嫉妬라 한다.
 
소순태 ( (2011/04/16) : 또한 이 자료의 주석에서도, "질투(嫉妬/嫉?)" 라는 한자어를 설명할 때에 "시기(猜忌)"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기(猜忌)"가 "질투(嫉妬/嫉?)" 보다 더 원초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러한 문헌들의 견해들을 존중하여, 猜忌心(시기심)이 더 원초적인 감정임에 동의하면, 탈출기 20,5 및 34,14에 있는 표현인 "jealous God"을 "질투하는 하느님"으로 번역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13세기 이후부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envy" 와 "jealousy" 로 번역되는 단어들의 정의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서구 문화권에서, 탈출기 20,5 및 34,14에서 "envious God"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상, 많이 부족한 죄인인 자가 추가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한, 따뜻한 그리고 깊은 "형제애"에 감사 드립니다. 오늘 저녁부터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 시작되는군요... 뜻 깊은 "성 주일 및 성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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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2월 30일 성가정 축일]

+ 찬미 예수님!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에 발췌한, "새 번역 성경" 번역에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치셨던 (고) 임승필 요셉 신부님의 1998년 6월호 경향잡지 기고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의 발췌문을 잘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는,

(i) 위에 제가 말씀드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defined), 영어로는 "envy"로 번역되는 용어의 정의 (definition), 그리고

(ii) 새 번역 성경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정의(definition)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이 영어 표현 "envy" 에 대응하는 원어를, 번역 용어로서 "질투(envy)"로 번역하여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로 가르쳐 오고 있는,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의 번역 용어로서의 "질투(envy)"의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 왜 이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하나, 그러나, 외람된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임승필 신부님께서 제가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을 성경 번역 작업에 종사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계셨더라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 "질투(envy)""시기(jealousy)"의 정의(definition)들을 존중하여, 그리고 신학 대전에 주어진 "envy"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질투(envy, invidia)"라는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또한 존중하여, 아래의 발췌문 중에서, "질투" 대신에 "시기"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또 "시기" 대신에 "질투"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혹시, 만약에 국내의 개신교측 성경에서 "jealousy""시기"가 아닌 "질투"로 번역을 하였기에, 별도의 신학적 고찰없이 이것을 그대로 따라갔다면, 이것은 기존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이미 번역 용어로서 자리잡은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라는 용어와 개념적으로 크게 충돌하는, 명백한 번역 오류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번역 오류라는 지적에 대하여서는, 이 글의 처음부터 말씀드리고 있는 바를 정밀하게 읽으실 것을 거듭 요청합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우리말로의 번역 시에, 개신교측이, 그 태생적 속성상, 가톨릭 교회의 교의(dogma, 믿을 교리)인 통공교리를 부정하는,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교리상의 이유 때문에, 기원후 5-6세기 이후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Protestant" 집단임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특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 정의되고 있는 개념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 용어들의 선정시에, 지금 제가 지적하고 있는 바른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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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성서의 세계 : 질투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질투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질투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질투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질투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질투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질투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질투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질투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질투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질투’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질투’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시기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질투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질투"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질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질투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시기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질투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질투’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질투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질투’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질투’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질투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질투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질투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질투하시게 한다. 이 질투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질투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질투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질투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질투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질투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질투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질투’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질투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질투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승필 요셉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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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i) "envy"
라는 단어와 "jealousy" 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입니다.

이들을 비교/검토하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에서,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envy"로 번역된 단어가 "질투"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jealousy"로 번역된 단어가 "시기"로 번역되었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envy = 질투,     jealousy = 시기

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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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III. 죄의 다양성

1852
Magna est peccatorum varietas. Plures eorum catalogos affert Scriptura. Epistula ad Galatas opera carnis fructui opponit Spiritus: « Manifesta autem sunt opera carnis, quae sunt fornicatio, immunditia, luxuria, idolorum servitus, veneficia, inimicitiae, contentiones, aemulationes, irae, rixae, dissensiones, sectae, invidiae, ebrietates, comissationes, et his similia, quae praedico vobis, sicut praedixi, quoniam, qui talia agunt, Regnum Dei non consequentur » (Gal 5,19-21). 113

1852 La varietà dei peccati è grande. La Scrittura ne dà parecchi elenchi.
La lettera ai Gàlati contrappone le opere della carne al frutto dello
Spirito: « Le opere della carne sono ben note: fornicazione, impurità, libertinaggio, idolatria, stregonerie, inimicizie, discordia, gelosia, dissensi, divisioni, fazioni, invidie, ubriachezze, orge e cose del genere; circa queste cose vi preavviso, come già ho detto, che chi le compie non erediterà il regno di Dio » (Gal 5,19-21).93
 
1852 La variété des péchés est grande. L’Écriture en fournit plusieurs listes. L’épître aux Galates oppose les œuvres de la chair au fruit de l’Esprit : " On sait bien tout ce que produit la chair : fornication, impureté, débauche, idolâtrie, magie, haines, discorde, jalousie, emportements, disputes, dissensions, scissions, sentiments d’envie, orgies, ripailles et choses semblables – et je vous préviens, comme je l’ai déjà fait, que ceux qui commettent ces fautes là n’hériteront pas du Royaume de Dieu " (5, 19-21 ; cf. Rm 1, 28-32 ; 1 Co 6, 9-10 ; Ep 5, 3-5 ; Col 3, 5-8 ; 1 Tm 1, 9-10 ; 2 Tm 3, 2-5).
 
1852 There are a great many kinds of sins. Scripture provides several lists of them. The Letter to the Galatians contrasts the works of the flesh with the fruit of the Spirit: "Now the works of the flesh are plain: fornication, impurity, licentiousness, idolatry, sorcery, enmity, strife, jealousy, anger, selfishness, dissension, factions, envy, drunkenness, carousing, and the like. I warn you, as I warned you before, that those who do such things sha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1852 죄는 매우 다양하다. 성경은 여러 번 죄를 열거하고 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육정의 행동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한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5,19`-21)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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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로마 1,28-32; 1코린 6,9`-10; 에페 5,3-5; 콜로 3,5-9; 1티모 1,9`-10;
2티모 3,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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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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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ii)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입니다. 비교/검토해 보면,

envy = 질투

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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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1866 Vitia possunt statui secundum virtutes quibus adversantur, vel etiam ad peccata capitalia reduci quae experientia christiana, sanctum Ioannem Cassianum 122 et sanctum Gregorium Magnum secuta, 123 distinxit. Capitalia appellantur quia alia peccata, alia vitia generant. Sunt superbia, avaritia, invidia, ira, luxuria, gula, pigritia seu acedia.

1866 I vizi possono essere catalogati in parallelo alle virtù alle quali si
oppongono, oppure essere collegati ai peccati capitali che l’esperienza
cristiana ha distinto, seguendo san Giovanni Cassiano 102 e san Gregorio
Magno
.103 Sono chiamati capitali perché generano altri peccati, altri vizi.
Sono la superbia, l’avarizia, l’invidia, l’ira, la lussuria, la golosità, la 2539 pigrizia o accidia.
 
1866 Les vices peuvent être rangés d’après les vertus qu’ils contrarient, ou encore rattachés aux péchés capitaux que l’expérience chrétienne a distingués à la suite de S. Jean Cassien et de S. Grégoire le Grand (mor. 31, 45 : PL 76, 621A). Ils sont appelés capitaux parce qu’ils sont générateurs d’autres péchés, d’autres vices. Ce sont l’orgueil, l’avarice, l’envie, la colère, l’impureté, la gourmandise, la paresse ou acédie.

1866 Vices can b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virtues they oppose, or also be linked to the capital sins which Christian experience has distinguished, following St. John Cassian and St. Gregory the Great. They are called "capital" because they engender other sins, other vices. They are pride, avarice, envy, wrath, lust, gluttony, and sloth or acedia.

1866 악습들은 그와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죄종(罪宗)과 연관시킬 수 있다. 죄종(peccata capitalia)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인 102) 대 그레고리오 성인103)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었다.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 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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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성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 5, 2: CSEL 13, 121(PL 49, 611) 참조.
103. 성 대 그레고리오, 「욥기 교훈」 , 31, 45, 87: CCL 143B, 1610(PL 76, 6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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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성 요한 카시아누스(360-435년경)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540-604년, 재위기간: 590-604년)의 성경 해석법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에 있으니 되도록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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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그리고, 새 번역 성경에 있어서의 이러한 비교/검토는 여기를 클릭하면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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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결론적으로 무슨 말씀인고 하면,

위의 (고) 임승필 신부님의 글인 발췌문에서, "질투"를 "시기"로 교체하고, "시기"를 "질투로 교체하면, "질투"와 "시기"에 대한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의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 및 "시기(jealousy)"라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들과 지금과 같은 커다란 개념적 충돌은 없게 됩니다.

즉, 다음의 문장이, 가톨릭 대사전의 "질투(envy)"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3항 및 제1866항의 가르침과 내용적으로 전혀 충돌하지 않는, 즉 일치를 이루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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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세계 : 시기(jealousy)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시기(jealousy)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시기(jealousy)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시기(jealousy)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시기(jealousy)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시기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시기(jealousy)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시기(jealousy)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시기(jealousy)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시기(jealousy)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시기(jealousy)’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질투(envy)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시기(jealousy)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시기(jealousy)"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기(jealousy)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질투(envy)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기(jealousy)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시기(jealousy)’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시기(jealousy)’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시기(jealousy)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시기(jealousy)하는 이’, 그는 시기(jealousy)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시기(jealousy)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기(jealousy)’라는 것이다.
 
시기(jealousy)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시기(jealousy)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시기(jealousy)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시기(jealousy)하시게 한다. 이 시기(jealousy)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시기(jealousy)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시기(jealousy)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시기(jealousy)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시기(jealousy)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시기(jealousy)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시기(jealousy)’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시기(jealousy)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시기(jealousy)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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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요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번역 용어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괄호 안에 라틴어 혹은 영어 단어를 병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번역 용어들로서 선택된 한자 단어들의 자구해석만으로는 도저히 번역 이전의 원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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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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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참고: 위의 두 개의 글들을 클릭하여 읽으신 후에, 아래의 질문에 대한 한줄답변들을 읽도록 하십시오. 이어지는 글입니다. 
 
 
‘질투[嫉妬]와 시기[猜忌]’의 차이점은?
 
작성자  ㅂㅇㅅ번  호  5048
 
작성일  2011-04-16 오전 8:35:48조회수  34추천수  2
 
소생의 글[5044]에 두 분의 댓글을 보면서 주객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 크게 변질된 부분이 있어
두 분께 묻고자합니다.
먼저 두 분의 성경 사랑, 하느님 영광 드러냄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단도입적으로 질문 드리면, 성경과 외국어의 출처를 떠나 일상적인 용어의 의미,
‘질투[嫉妬]와 시기[猜忌]’에 대해서 답변 부탁드립니다.
사전적인 의미도 중요합니다만 성경적인 것도 중요하고 언어학적인 면도 중요합니다.
다만 우리글로 된 우리말의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있기에
두 분은 이 두 용어가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 세대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그 사용 용도에 대해서
지금의 솔직한 심정으로 간략히 부탁합니다.
참고적으로 소생의 아래 내용을 참조해 간략히 몇마디로 요약해 주시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참조]‘질투와 시기’, 아예 따지려면 우리말의 정의부터 짚자.
여러 기준을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그 기준이 그 기준이고 그게 그거다.
굳이 따지지 않는 게 맘 편하다.
우리말과 한자[漢字] 사이에 오는 문화적인 혼선이리라.
그렇지만 이 두 용어를 정의해 보자. 이것은 전적으로 소생의 판단이다.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질투이고 관련이 없다면 시기이다.
그리고 사랑과 연결된다면 질투이고 아니면 시기다.
이런 관점에서 발생 시기로 봐서 좋은 의미[사랑이 있기에]가 담긴 것이라면 질투이고
없다면 시기이다.
 
 ㅎㅅㄱ ( (2011/04/16) : 님께서 말씀하신 두 사람 중에 제가 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약간 젊은 층(?)에서 단어를 사용하는 어감상으로는 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사전적으로는 시기의 의미가 질투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은 가급적 이를 분리해서 쓰는 것 같지만 예전 어른들은 시기의 의미를 질투라는 단어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추정됩니다. 
 
 ㅎㅅㄱ ( (2011/04/16) : 그리고 "시기"의 의미를 제외한 질투는 언제나 "3자 관계"에서 사용하는 것이고, "시기"는 양자관계에서 보통 사용됩니다. 
 
소순태 ( (2011/04/16) :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envy" 와 "jealousy" 단어의 정의 들을 전달해 주고 나서, 어느 단어가 나타내는 개념이 더 원초적 감정인지를 주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jealousy"라고 답변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자어 우리말 "질투"로 불러야 할 지, 아니면 "시기"로 불러야 할 지를 물어보면, 모르겠다는 답변을 합니다. 따라서,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그 근거 제시와 함께, "질투"라고 불러야 할 지, 아니면 "시기라고 불러야 할 지 정하여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소순태 ( (2011/04/16) :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에서 하고 있는, "envy" 와 "jealousy" 단어들의 정의(definition)를 전달해 주면, 이들 두 단어들이 두 개의 분명히 다른 "깊은" 감정들을 나타내는 단어들임에 대하여 대다수의 분들이 잘 이해하더군요. 그러나, 예를 들어, "질투"로 불리는 감정이 "시기"로 불리는 감정으로 발전하는지, 아니면 "시기"로 불리는 감정이 "질투"로 불리는 감정으로 발전하는 지에 대하여서는, 개인 차가 많아, 저도 역시 모르겠다 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저의 두 번째 글 중에서 이미 알려드렸습니다만, 다음의 Wikipedia 에 주어진 이들 두 영어 단어들의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en.wikipedia.org/wiki/Envy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en.wikipedia.org/wiki/Jealousy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기본적으로, 어떤 개념을 나타내는 외국어 단어를 우리말 단어로 나타내고자 할 때에, 만약에 기존의 한자 단어를 번역 용어로서 제시하고자 한다면, 특히 (가톨릭 대사전에서 처럼) (필요하다면 원어 단어를 괄호 등을 사용하면서) 분명하게 병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제가 다루고 있는 종류의 문제가 세월이 한참 가더라도 제대로 해결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순태 ( (2011/04/16) : [그는 소리를 적는 문자(記音文字)와 뜻을 적는 문자(記事文字)를 나누고 기음문자가 훨씬 훌륭한 것이니 한자 대신 국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질문: 그런데, 이런 주장을 누가 하였을까요? 1900년대 초에 최초로 국어 문법 책을 출판하였다고 하는, 국어 문법의 선구자인 주시경 선생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야후 백과사전에 실린 주시경 선생에 대한 글을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주시경&subtype=enc&pk=b19j3559b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이쯤하여, 제가 이번의 주제와 관련하여 올려드린 두 개의 글들을, 다시 한 번 잘 읽도록 하십시오. 글의 중간 중간에 링크 설정한 자료들도 또한 차분히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여태까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분들 중에서, 아마도 이해가 되어 그리하여 생각이 달라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런 관점에서 발생 시기로 봐서 좋은 의미[사랑이 있기에]가 담긴 것이라면 질투이고 없다면 시기이다.] <----- 이 견해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전통적으로 이혼 사유가 되었던 "칠거지악"에는 "질투"를 그 중의 하나로 나열하고 있지, "시기"를 나열하지 않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야후 백과 사전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http://kr.dictionary.search.yahoo.com/search/dictionaryp?p=질투&subtype=enc&pk=b21c0235a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칠거지악: 〈대대례기 大戴禮記〉 본명(本命)에 나온다. 칠출지악(七出之惡)이라고도 하는데, 삼종지도(三從之道)와 함께 전통사회의 여성들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던 조목이다. 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②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③ 음탕한 것(淫行), ④ 질투하는 것(嫉妬), ⑤ 나쁜 질병이 있는 것(惡疾), ⑥ 수다스러운 것(口舌), ⑦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하 생략)
 
소순태 ( (2011/04/16) : [다만 우리글로 된 우리말의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있기에 이 두 용어가 자라나는 우리 청소년 세대에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그 사용 용도에 대해서 ... ] <----- 이미 저도 이들 두 한자어 단어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더 자상하게 잘 질문하셨습니다.
 
소순태 ( (2011/04/16) : 그리고 주변의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이들 두 한자어 단어들의 차이점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 심지어 전자 국어 사전까지 찾아 보고 나서도, "모르겠다"는 답변을 하더군요.
 
소순태 ( (2011/04/16) : 그런데... 만약에 "사랑"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 "질투"로 불리는 감정이라면, 왜 이 "질투"를 "칠거지악" 중의 하나라고 나열까지 부르면서 단죄하였을까요???
 
소순태 ( (2011/04/16) :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 "질투(嫉妬/嫉?)"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에 "시기(猜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시기(猜忌)"가 "질투(嫉妬/嫉?)"보다는 더 원초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러한 견해는 또한 다음의 불교의 백팔번뇌의 나열들 중의 한 개에 대한 해설인 듯한 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嫉(질) : 嫉은 남의 잘 되는 것이나, 나보다도 優越(우월)한 것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猜忌心(시기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으로 이는 瞋(진 ; 성냄)을 근거로 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소순태 ( (2011/04/16) : 출처: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59613&logId=3399167
 
소순태 ( (2011/04/16) : 표준 국어 대사전에 실린 "질투(嫉妬/嫉?)" 단어에 대한 설명, 그리고 바로 위의 불교의 백팔번뇌의 나열들 중의 한 개인 "嫉(질)"에 대한 해설인 듯한 글 등을 참고하더라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의한 "envy"를 가톨릭 대사전에서 "질투(嫉妬/嫉?)"로 번역한 것은, 무난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순태 ( (2011/04/16) : 그리고 다음의 자료의 주석에서도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3】어진 이를 해코지하는 것을 이라 하고 재주 있는 이를 시기하는 것을 라 한다. 스스로는 명리를 드러내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예로움은 참지 못하는 것을 嫉妬라 한다.
 
소순태 ( (2011/04/16) : 출처: http://www.google.co.kr/url?sa=t&source=web&cd=29&ved=0CDcQFjAIOBQ&url=http%3A%2F%2Fftp.buddhism.org%2FKorean%2F%25C7%25D1%25B1%25DB%25B4%25EB%25C0%25E5%25B0%25E6%2F%25C4%25A1%25B9%25AE%25B4%25EB%25BF%25AA.hwp&ei=4wCpTYbWNYmKvgPfvJSOCg&usg=AFQjCNGvwG9KAvC9e1lKf1hCEvY3l3idKw
 
소순태 ( (2011/04/16) : 참고: 위의 자료는, 한글대장경, "치문원문대조역-봉선사현진행5" 라고 합니다.
 
소순태 ( (2011/04/16) : 출처: http://www.google.co.kr/url?sa=t&source=web&cd=2&ved=0CCoQFjAB&url=http%3A%2F%2Fftp.buddhism.org%2FKorean%2F%25C7%25D1%25B1%25DB%25B4%25EB%25C0%25E5%25B0%25E6%2F%25C4%25A1%25B9%25AE%25B9%25F8%25BF%25AA%25BA%25BB.hwp&ei=kxGpTarvE4nyvQPZsImTCg&usg=AFQjCNG3uPZUogOG6cJvWLnsWHk59yiC1g
 
소순태 ( (2011/04/16) : 참고: 위의 자료는, 한글대장경, " 치문1차-완성(전문)조행5" 라고 합니다.
 
소순태 ( (2011/04/16) : 구글 검색 key words: "번뇌" "猜忌" "嫉" "한글대장경" (클릭하십시오)
 
소순태 ( (2011/04/16) : 【3】害賢曰嫉, 忌才曰妬. 又徇自名利, 不耐他榮曰嫉妬.
 
소순태 ( (2011/04/16) : 【3】어진 이를 해코지하는 것을 이라 하고 재주 있는 이를 시기하는 것을 라 한다. 스스로는 명리를 드러내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영예로움은 참지 못하는 것을 嫉妬라 한다.
 
소순태 ( (2011/04/16) : 또한 이 자료의 주석에서도, "질투(嫉妬/嫉?)" 라는 한자어를 설명할 때에 "시기(猜忌)"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기(猜忌)"가 "질투(嫉妬/嫉?)" 보다 더 원초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러한 문헌들의 견해들을 존중하여, 猜忌心(시기심)이 더 원초적인 감정임에 동의하면, 탈출기 20,5 및 34,14에 있는 표현인 "jealous God"을 "질투하는 하느님"으로 번역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13세기 이후부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envy" 와 "jealousy" 로 번역되는 단어들의 정의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서구 문화권에서, 탈출기 20,5 및 34,14에서 "envious God"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4/16) : 이상, 많이 부족한 죄인인 자가 추가 답변을 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한, 따뜻한 그리고 깊은 "형제애"에 감사 드립니다. 오늘 저녁부터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 시작되는군요... 뜻 깊은 "성 주일 및 성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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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1년 12월 30일 성가정 축일]

+ 찬미 예수님!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에 발췌한, "새 번역 성경" 번역에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치셨던 (고) 임승필 요셉 신부님의 1998년 6월호 경향잡지 기고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의 발췌문을 잘 읽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는,

(i) 위에 제가 말씀드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defined), 영어로는 "envy"로 번역되는 용어의 정의 (definition), 그리고

(ii) 새 번역 성경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 정의(definition)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이 영어 표현 "envy" 에 대응하는 원어를, 번역 용어로서 "질투(envy)"로 번역하여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로 가르쳐 오고 있는,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의 번역 용어로서의 "질투(envy)"의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 신부님께서 왜 이 정의(definition)를 전혀 따르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하나, 그러나, 외람된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에 임승필 신부님께서 제가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내용을 성경 번역 작업에 종사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계셨더라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정의된 "질투(envy)""시기(jealousy)"의 정의(definition)들을 존중하여, 그리고 신학 대전에 주어진 "envy"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위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질투(envy, invidia)"라는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또한 존중하여, 아래의 발췌문 중에서, "질투" 대신에 "시기"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또 "시기" 대신에 "질투"라는 번역 용어를 사용하셨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혹시, 만약에 국내의 개신교측 성경에서 "jealousy""시기"가 아닌 "질투"로 번역을 하였기에, 별도의 신학적 고찰없이 이것을 그대로 따라갔다면, 이것은 기존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 이미 번역 용어로서 자리잡은 칠죄종(七罪宗)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라는 용어와 개념적으로 크게 충돌하는, 명백한 번역 오류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번역 오류라는 지적에 대하여서는, 이 글의 처음부터 말씀드리고 있는 바를 정밀하게 읽으실 것을 거듭 요청합니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우리말로의 번역 시에, 개신교측이, 그 태생적 속성상, 가톨릭 교회의 교의(dogma, 믿을 교리)인 통공교리를 부정하는,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교리상의 이유 때문에, 기원후 5-6세기 이후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Protestant" 집단임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특히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 정의되고 있는 개념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 용어들의 선정시에, 지금 제가 지적하고 있는 바른 반드시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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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성서의 세계 : 질투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질투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질투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질투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질투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질투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질투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질투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질투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질투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질투’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질투’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시기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질투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질투"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질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질투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시기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질투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질투’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질투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질투’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질투’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질투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질투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질투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질투하시게 한다. 이 질투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질투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질투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질투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질투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질투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질투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질투’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질투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질투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승필 요셉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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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i) "envy"
라는 단어와 "jealousy" 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2항입니다.

이들을 비교/검토하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에서,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envy"로 번역된 단어가 "질투"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jealousy"로 번역된 단어가 "시기"로 번역되었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envy = 질투,     jealousy = 시기

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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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III. 죄의 다양성

1852
Magna est peccatorum varietas. Plures eorum catalogos affert Scriptura. Epistula ad Galatas opera carnis fructui opponit Spiritus: « Manifesta autem sunt opera carnis, quae sunt fornicatio, immunditia, luxuria, idolorum servitus, veneficia, inimicitiae, contentiones, aemulationes, irae, rixae, dissensiones, sectae, invidiae, ebrietates, comissationes, et his similia, quae praedico vobis, sicut praedixi, quoniam, qui talia agunt, Regnum Dei non consequentur » (Gal 5,19-21). 113

1852 La varietà dei peccati è grande. La Scrittura ne dà parecchi elenchi.
La lettera ai Gàlati contrappone le opere della carne al frutto dello
Spirito: « Le opere della carne sono ben note: fornicazione, impurità, libertinaggio, idolatria, stregonerie, inimicizie, discordia, gelosia, dissensi, divisioni, fazioni, invidie, ubriachezze, orge e cose del genere; circa queste cose vi preavviso, come già ho detto, che chi le compie non erediterà il regno di Dio » (Gal 5,19-21).93
 
1852 La variété des péchés est grande. L’Écriture en fournit plusieurs listes. L’épître aux Galates oppose les œuvres de la chair au fruit de l’Esprit : " On sait bien tout ce que produit la chair : fornication, impureté, débauche, idolâtrie, magie, haines, discorde, jalousie, emportements, disputes, dissensions, scissions, sentiments d’envie, orgies, ripailles et choses semblables – et je vous préviens, comme je l’ai déjà fait, que ceux qui commettent ces fautes là n’hériteront pas du Royaume de Dieu " (5, 19-21 ; cf. Rm 1, 28-32 ; 1 Co 6, 9-10 ; Ep 5, 3-5 ; Col 3, 5-8 ; 1 Tm 1, 9-10 ; 2 Tm 3, 2-5).
 
1852 There are a great many kinds of sins. Scripture provides several lists of them. The Letter to the Galatians contrasts the works of the flesh with the fruit of the Spirit: "Now the works of the flesh are plain: fornication, impurity, licentiousness, idolatry, sorcery, enmity, strife, jealousy, anger, selfishness, dissension, factions, envy, drunkenness, carousing, and the like. I warn you, as I warned you before, that those who do such things sha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1852 죄는 매우 다양하다. 성경은 여러 번 죄를 열거하고 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육정의 행동을 성령의 열매와 대조한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5,19`-21)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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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로마 1,28-32; 1코린 6,9`-10; 에페 5,3-5; 콜로 3,5-9; 1티모 1,9`-10;
2티모 3,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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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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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ii)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66항입니다. 비교/검토해 보면,

envy = 질투

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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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1866 Vitia possunt statui secundum virtutes quibus adversantur, vel etiam ad peccata capitalia reduci quae experientia christiana, sanctum Ioannem Cassianum 122 et sanctum Gregorium Magnum secuta, 123 distinxit. Capitalia appellantur quia alia peccata, alia vitia generant. Sunt superbia, avaritia, invidia, ira, luxuria, gula, pigritia seu acedia.

1866 I vizi possono essere catalogati in parallelo alle virtù alle quali si
oppongono, oppure essere collegati ai peccati capitali che l’esperienza
cristiana ha distinto, seguendo san Giovanni Cassiano 102 e san Gregorio
Magno
.103 Sono chiamati capitali perché generano altri peccati, altri vizi.
Sono la superbia, l’avarizia, l’invidia, l’ira, la lussuria, la golosità, la 2539 pigrizia o accidia.
 
1866 Les vices peuvent être rangés d’après les vertus qu’ils contrarient, ou encore rattachés aux péchés capitaux que l’expérience chrétienne a distingués à la suite de S. Jean Cassien et de S. Grégoire le Grand (mor. 31, 45 : PL 76, 621A). Ils sont appelés capitaux parce qu’ils sont générateurs d’autres péchés, d’autres vices. Ce sont l’orgueil, l’avarice, l’envie, la colère, l’impureté, la gourmandise, la paresse ou acédie.

1866 Vices can b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virtues they oppose, or also be linked to the capital sins which Christian experience has distinguished, following St. John Cassian and St. Gregory the Great. They are called "capital" because they engender other sins, other vices. They are pride, avarice, envy, wrath, lust, gluttony, and sloth or acedia.

1866 악습들은 그와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죄종(罪宗)과 연관시킬 수 있다. 죄종(peccata capitalia)은 요한 카시아누스 성인 102) 대 그레고리오 성인103) 뒤를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었다.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 죄종은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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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성 요한 카시아누스, 「담화집」 , 5, 2: CSEL 13, 121(PL 49, 611) 참조.
103. 성 대 그레고리오, 「욥기 교훈」 , 31, 45, 87: CCL 143B, 1610(PL 76, 6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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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성 요한 카시아누스(360-435년경)성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540-604년, 재위기간: 590-604년)의 성경 해석법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에 있으니 되도록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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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그리고, 새 번역 성경에 있어서의 이러한 비교/검토는 여기를 클릭하면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드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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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결론적으로 무슨 말씀인고 하면,

위의 (고) 임승필 신부님의 글인 발췌문에서, "질투"를 "시기"로 교체하고, "시기"를 "질투로 교체하면, "질투"와 "시기"에 대한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서의 "[칠죄종들 중의 하나인] 질투(envy)" 및 "시기(jealousy)"라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들과 지금과 같은 커다란 개념적 충돌은 없게 됩니다.

즉, 다음의 문장이, 가톨릭 대사전의 "질투(envy)"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53항 및 제1866항의 가르침과 내용적으로 전혀 충돌하지 않는, 즉 일치를 이루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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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세계 : 시기(jealousy)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시기(jealousy)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시기(jealousy)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시기(jealousy)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시기(jealousy)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시기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시기(jealousy)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시기(jealousy)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시기(jealousy)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시기(jealousy)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시기(jealousy)’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질투(envy)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시기(jealousy)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시기(jealousy)"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기(jealousy)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질투(envy)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시기(jealousy)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시기(jealousy)’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시기(jealousy)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시기(jealousy)’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시기(jealousy)’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시기(jealousy)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시기(jealousy)하는 이’, 그는 시기(jealousy)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시기(jealousy)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기(jealousy)’라는 것이다.
 
시기(jealousy)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시기(jealousy)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시기(jealousy)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시기(jealousy)하시게 한다. 이 시기(jealousy)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시기(jealousy)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시기(jealousy)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시기(jealousy)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시기(jealousy)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시기(jealousy)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시기(jealousy)’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시기(jealousy)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시기(jealousy)’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시기(jealousy)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시기(jealousy)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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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요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번역 용어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괄호 안에 라틴어 혹은 영어 단어를 병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번역 용어들로서 선택된 한자 단어들의 자구해석만으로는 도저히 번역 이전의 원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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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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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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