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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초대합니다- 치명, 그 보랏빛 죽음 (윤지충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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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영 [agnesy] 쪽지 캡슐

2006-07-21 ㅣ No.2339

연극 초대합니다 - 치명, 그 보랏빛 죽음(윤지충 일기)


가톨릭 전문연극인 극단 ‘앗숨(Ad Sum)’ 공연


제목 : 치명, 그 보랏빛 죽음(윤지충 일기)


공연 장소: 서울대교구 명동성당 꼬스트홀

공연 일시 : 2006. 7.25(화) - 7.28(금) 매일 저녁 8시

7.29(토) 오후3시, 저녁8시,
 
7.30(일) 오후3시

공연료 : 성인 7,000원(특별할인가) 학생 :5,000원

문의 : (전국 어디서나 국번없이) 1577-3217

문화를 통한 좋은 신앙의 체험을 위해

한국 가톨릭 문화원에서 기획 제작하였습니다.

좋은 문화체험을 만나고 싶은 많은 분들의 관람을 바랍니다.

한국 가톨릭문화원 산하단체인 전문연극인 극단 ‘앗숨’의

세 번째 정기공연에 초대합니다.

‘사랑 그리고 부활’, ‘Four-Questions’

- 두 번의 정기공연을 통해 연극을 관람하신 분들에게

진한 감동과 기쁨을 안겨주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극단 ‘앗숨’의 세 번째 작품은 ‘치명, 그 보랏빛 죽음’으로

이름 지어진 순교자 윤지충 이야기입니다.

 

*(기획의도 - 연출가의 변)


순교자 윤지충 이야기

-경건하지만 재미없으리라는 편견에 도전한다. 내가 처음 교리 받을 때니까
 
꽤 오래된 일인 듯 하다. 첫 영성체 하기 바로 전, 미리내 성지에 갔을 때

성 김대건 신부님의 뒤꿈치 뼈가 들어 있는 유리 성골함에 친구[親口-입맞춤]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이분의 유골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이 분의 삶을 그대로 산다는 결단인데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미 이 성골함에 친구를 하고 영세를 받은

많은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님처럼 살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나라는 왜 이 모양 이 꼴이 돼가고 있는 것일까?’

하긴 예수님이 다시 오신대도 이 백성들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밝힐

것이 분명하긴 하다.

그리고 이 백성들이 그토록 버리지 못하는 경제적 풍요에 대한 욕심은

그 옛날 김대건 신부님의 어린 육신을 난도질했던 정권유지에 대한 욕심과,

동전의 앞뒷면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시국이, 박해가 판을 치던

당시의 시국과 다를 것도 없다. 바야흐로 망조가 들어가는 위기의 시국임이
 
분명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순교자들의 얘기를 연극으로 꾸미고 싶었다.

모략과 술수임이 분명한 정치판의 일거수일투족에 희비하면서, 내 식솔을

먹이려면 다른 식솔이 굶어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죽기 살기로

돌아들고, 성당의 안과 밖이 별로 바를 바 없이 되어가는 이 세상은 한 마디로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세상이니 그 세상을 살면서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신자가 아닐 것이다.

나는 진정 신자이고 싶고 예수님의 백성이길 원한다. 그러므로 엄청나게

두렵고 예수님이 완전히 열 받기 전에 뭔가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하나의 지푸라기는 우리의 선배 순교자들을 오늘에

되살려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윤지충은 제사 지내기를 거부하다가

참수 당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저간의 사정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이 한 줄만 달랑 읽는다면 윤지충이라는 인물은 억세게 융통성 없는,

대화도 전혀 통할 리 없고 고집이 하늘을 찌르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저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고 자기 목을 내 주다니..

그런 무모한 인간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약식이긴 하지만 명절날 조상께 제를 올리는 것이 허용되고 있으니 그저

제사 때문에 윤지충이 죽었다면 그것은 참 ‘필요 없는 죽음’이 아니냔 말이다.

그게 싫었다. 치명을 결행한 우리의 선조들은 한 사람 한사람마다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을 이유가 있었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사정이 있었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이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엄마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살점을 찢어내는 고민을 한 연후에 그리 했을 것이다. 그런 하나하나의

아픔들을 모두 망각해버리고 그저 ‘우리의 순교자’ 로 묶어 부르며 생각날

때마다 성지나 한 번씩 찾아가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이라 여겼다.

그 정도 가지고는 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세상에서 촛불하나 밝힐 불씨도

만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윤지충의 죽음’이 아니라 ‘윤지충의 삶’을

드러내고 싶었다. 연극 대본인데다가 연출되어야 하는 무대 공연이므로 픽션이

가미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있을법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쓰지 않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앞으로 순교자의 일대기를 공연으로 만든다면

그 때 역시 이 각오를 견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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