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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敎가 아니라 眞理가 인간을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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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기 [p.b.hong] 쪽지 캡슐

2015-03-29 ㅣ No.7862


 


▲ 권이복 남원 도통동성당 주임신부


  깨달음 있어야 믿음 얻고 믿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법

정말 알고 깨달아 믿는 바를 말하는 이에게 귀 기울이고 거짓·탐욕 가득한 직업 말꾼을 가까이 두어선 안 될 일이니 때가 되니 봄이 오고 봄이 오니 어느새 산수유와 매화 향기가 천지에 진동한다.


이제 부활절이 되고 그러고는 석가탄신일이 온다.

몇 년 전 석가탄신일을 며칠 앞두고 내장사를 찾았다. 부임인사 겸 석가 탄신을 경축하는 뜻으로 등(燈)이나 하나 켜드리기 위해서였다. 주지 스님과 처음 만나는지라 나도 우리 평신도 회장을 대동했고 그쪽도 그쪽 처사님 한 분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덕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쪽 처사님께서 불쑥 민감한 말씀을 꺼내는 것이었다."신부님!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된다 하지만 우리 불교에서는 깨달음으로 구원된다고 믿습니다. 하여 저는 미천하나마 깨달아 구원에 이르고자 불자(佛子)가 되었습니다."'아니 누가 묻기나 했나! 실언하시는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아무 말도 듣지 않은 듯 넘기기에는 분위기가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네 처사님. 그런데 처사님께서는 깨닫지 못한 걸 믿을 수 있나요?" 그러자 스님이 나섰다. "어허! 처사님은 괜한 말씀을… 자 드시죠." 하고 나무라자 그제야 제정신이 든 처사님이 "어어 이거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하며 사과하고 다시 좋은 분위기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주지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신부님, 등보다는 석탄일 축하 현수막 하나 걸어 주시죠." "네! 문구를 내 맘대로 골라도 괜찮다면…" "아, 내용이야 신부님 마음대로 하시고요."한참을 고민하는데 금방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이렇게 하자고 했다. "깨달음의 기쁨이 온 누리에 충만하기를." 주지 스님도 매우 흡족해하셨다.




얼마 뒤 잘 아는 교우 한 분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신부님, 내장사에 현수막 걸어드렸지요? 일주문 앞에 턱 걸렸대요." "아, 그래요!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이상하기는요.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모습이 참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예쁘게 봐 주셔서."그리고 그해 겨울 성탄 때엔 절 쪽에서 예수 탄생을 축하한다며 큰 화분을 보내왔다. '깨달음의 기쁨이 온 누리에 충만하기를.' 이런 현수막이 석탄일에 산속 절이 아니라 성탄절에 도심 속 성당 앞에 붙었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요즘 신문에는 종교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자주 나온다. 참으로 답답하다. 어쩌다 우리가 이리되었는가. 세상을 걱정하며 종교가 생겼는데 반대로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고 있으니.문제는 '깨달음'이다. '믿음'이란 깨달음을 전제로 한다. 믿자! 믿어야지! 믿어라! 믿어야 한다! … 아무리 다짐하고 결심해도 안 믿어지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사랑해야 한다고 사랑해지던가! 믿어야 한다고 믿어지더란 말인가. 사람은 아는 만큼 믿을 수 있고, 믿는 만큼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을 어찌 믿고, 어찌 사랑할 수 있는가.


오래전 틈이 나서 어느 사찰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같이 거닐던 주지 스님께 참 유치한 질문을 했다. "스님! 부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오?"
그러자 스님은 자신이 갖고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들며 "신부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되물었다. "그거 휴대전화 아닙니까?" "맞습니다. 휴대전화입니다. 바로 그렇게, '이것이 휴대전화이다' 하고 아는 만큼 그렇게 '인간하처래하처거(人間何處來何處去·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아는 것이 부처입니다."순간 난 깨달았다. 그리고 참 행복했다. 지금도 그때 본 그 빛, 그 깨달음의 기쁨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개운하고 상쾌한 아침, 맑고 빛나는 아침이었다. 왜 하필 그날, 그 아침, 그 말이어야 했을까? 그동안 나는 불교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책들, 그리고 내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이 꽤 있다. 금강경, 반야심경, 육조단경, 법구경….그런데 왜 그 스님의 한마디가 날 깨치게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스님은 알고 있었다. 그 스님은 깨달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진리임을 믿고 있었다. 자신이 깨달아 알고 믿는 바를 자신의 언어로 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은 내 마음을 비집고 내 머리를 꿰뚫어 빛 가운데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그리도 분별력이 없다는 말인가. 소위 진리(眞理)를 말한다는 사람들, 특히 직업적으로 말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그리도 모른다는 말인가.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이 정말 알고 깨달아 믿는 바를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직업적으로 떠벌리고 있는지를 어찌 그리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가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직업적으로 떠벌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그냥 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 이상도 하다.더 이상 가까이하지 말라,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찬 직업 말꾼들과는. 종교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진리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지 그 어떤 종교도 종교 스스로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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