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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해설: 천주를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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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23

[사도신경 해설 6] “천주를 믿나이다” (1) ‘한 분’ 하느님

최영철 알폰소 신부


인간의 온전한 투신은 하느님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이 모든 것을 내걸고 기댈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신실하고, 전능하고, 진실하므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시다. 하느님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본 사항은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앙고백이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들어 있지만 사도신경에는 명확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세례양식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첫 신앙고백은 세례 때에 이루어진다. 신경은 본래 세례성사를 위한 신앙 고백문이었다. 세례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참조) 베풀어지고 예식 중에 성삼위에 대한 고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세례 때 고백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삼위일체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한 분 하느님께 대한 고백 대신에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으로 엮어지게 되었다. 신경은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므로 세 부분으로 짜여있다. 첫째 부분은 “전능하시고 천지의 창조주이신 성부”께 대한 고백, 둘째 부분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께 대한 고백, 셋째 부분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신 성령”께 대한 신앙 고백이다. 신앙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께서 서로 완전히 사랑함으로써 누리시는 친교 안에 우리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신경은 삼위일체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표명하는 기도문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더라도 사도신경의 첫째 항목은 본래 이방인의 다신교와 구분하여 유일신 신앙을 지켜나가던 이들의 신앙고백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경은 유일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찾아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스라엘이 매일 암송할 정도로 중요한 신앙고백문을 인용하여 대답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8 이하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째 계명 및 둘째 계명으로서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하시기 위해 그 근거로 하느님께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의 답변을 풀이하면 이렇다. 하느님과 사랑은 본질상 하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랑의 유일한 근원은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은 다양한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킨다. 하느님의 구원은 피조물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행위로서 모든 것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사랑이 하나인 것처럼 그 본질이 사랑이신 하느님은 유일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쏟아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풍요로운 사랑의 신비이시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사랑하시므로 만물을 지어내셨다. 만물의 근원도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존재도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은 만물의 시작이시고 마침이시다. 하느님은 모든 것에 앞서서 모든 것 위에 사랑받으셔야 할 분이다.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위대함과 위엄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감사하는 삶을 살며 시련 속에서도 늘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2008년 6월 15일 연중 제11주일 가톨릭마산 8면]


[사도신경 해설 7] “천주를 믿나이다” (2) 삼위일체 하느님 (1)


사도신경 자체가 삼위일체께 대한 신앙고백문이다. “천주 성부” “그 외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고백을 뼈대로 엮어졌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곧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이다. 이는 똑같이 유일한 하느님을 믿는 이슬람교(‘알라’) 및 유대교(‘야훼’)와 그리스도교를 구분하는 교리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천주 성부와 같은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는 하느님이라 믿는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또 그렇게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친다. 세례와 신앙으로 인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누리시는 사랑과 친교와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성호경’과 ‘영광송’을 외울 때마다 성삼위 신앙을 표명한다. 기도뿐 아니라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데 ‘이름들(복수)로’가 아니라 ‘이름(단수)으로’이다. 세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모든 점에 있어서 성부와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하셨다.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항상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계시하는 일을 일생 과업으로 삼으셨다. 그분은 언제나 성령께 의지하여 말씀하고 행동하셨다. “성령으로 인하여 나신” 예수님은 성령에 힘입어서만 말하고 행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지상 과업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과 사명을 넘겨주시면서 성삼위와 관련된 유언을 남기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특히 그분의 기도는 성삼위에 대한 계시의 특별한 기회이다. “예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아버지,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씀하셨다”(루카 10,21).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루카 10,2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성령을 자기에게 선사하셨음을 암시하셨다. 성삼위와 관련하여 성령의 파견을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요한 14,16). 그때까지 인간에게 드러나시지 않은 성삼위가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과 행적으로 인해 계시되었다.

우리는 기도 중에 성삼위를 부를 때 ‘성부, 성자, 성령’ 순서대로 한다. 이 같은 순서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성부는 첫째로서 근원이고 시작이다. 성부로부터 성자도 성령도 발하셨고 또한 그래서 만물도 성부로부터 나왔다. 성부를 ‘창조주’로 부르는 이유다. 성자는 둘째이신데, 성삼위의 모든 행적이 성자를 통하여서 실행된다.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이 성자를 통하여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왔으므로 또 성삼위 사업의 실현이므로, ‘구세주’라 불리신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셨으므로 셋째이신데, ‘성화주’라 불리신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성화는 성삼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완성이고 마무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성자의 모든 구원사업이 다 이루어지고(요한 19,30) 나서 세상에 오셨다. 성부‘로부터’ 시작되고 성자‘를 통하여’ 실현되는 모든 일이 성령 ‘안에서’ 마무리되기에 우리는 순서에 따라 성삼위를 호칭하는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2008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일 가톨릭마산 8면]


[사도신경 해설 8] “천주를 믿나이다” (3) 삼위일체 하느님 (2)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삼위’)이시지만 그 본질은 하나(‘일체’)라는 표현이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용어이고 신학이 하느님에 관한 성경의 결론을 철학적 용어를 빌어 표현한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는 구절이 하느님에 대한 계시의 결론이다. 하느님(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두 가지 파견을 통해 계시와 구원을 성취하신 결과로 마침내 성삼위가 알려지게 되셨다. 삼위일체는 계시와 구원이 결정적으로 실현된 결과로 알려진 하느님의 신비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시고 또한 따라서 삼위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즉 구원이란 성부, 성자, 성령께서 누리시는 생명과 사랑과 친교에 동참하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계시는 성자와 성령을 통해 실현된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대한 체험의 결실이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이므로 무엇보다 사랑에 의해서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 사랑은 두 인격체가 상호간의 나눔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고 둘지 서로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둘 사이의 사랑은 제 삼의 존재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나’와 ‘너’의 사랑은 ‘우리’ 안에 귀결된다. ‘나’와 ‘너’는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느님과 맺고 있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기도 중에도 담화 중에도 강조하셨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일치와 친교가 인간들 사이에도 확산되기를 염원하셨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요한 17,21).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 누리시는 일치가 세상 안에 구현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누리시는 친교의 끈이 바로 성령이시다. 이 일치의 끈으로 인간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사랑은 ‘다수’이면서 ‘하나’라 할 수 있다. ‘다수’를 생산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성장시키면서 동시에 그 모두를 ‘하나’로 일치시킨다. 하느님은 ‘삼위’이므로 그분 안에 ‘다수’가 있고, ‘일체’이므로 ‘하나’이시다. 구원이란 다수성을 유지하면서 단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를 배제하고 ‘다수’만 존재하면 분열과 대립만 있을 뿐이다. 반면 ‘하나’만 존재하고 ‘다수’가 완전히 무시되면 독선이나 독재만 있을 따름이다. 삼위일체는 만물을 지탱하는 ‘다수’와 ‘하나’의 바탕이시다. 그래서 만물의 완성이시다. 하느님의 창조는 ‘다수’를 생산하고 성장시키는 행위이고, 종말 심판은 ‘다수’를 ‘하나’로 묶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느님은 “번식하고 번성하여라.”(창세 1,22) 즉 ‘많아져라’는 말씀으로써 창조하셨다. 종말에 하느님은 만물을 당신 안에 하나로 일치시킴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1코린 15,28).

성부는 창조주, 성자는 구세주, 성령은 성화주이시지만 성삼위는 따로 활동하시지 않고 늘 함께 하신다. 성삼위가 창조, 구원, 성화하신다. 성부는 근원이고 시작이시며, 성자는 실현이고 중개이시며, 성령은 완성이고 마무리이시다. 성삼위 하느님이 시작, 과정, 마침이시므로,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묵시 22,13)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한다”(사도 19,28). [2008년 6월 29일 연중 제13주일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교황주일) 가톨릭마산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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