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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송희 [kitty2529] 쪽지 캡슐

2000-07-08 ㅣ No.1370

아내와 빗소리 아내는 비를 무척 좋아합니다.

비가 내리면 바로 창문을 엽니다.

비가 흩날리는 모습을 보기 좋아하지만, 그것보다도 빗소리 듣기를 더 좋아합니다.

예전에 처녀 때는 앞마당에 있는 조그만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아 문을 열어 둔 채 잠이 들었고, 아침에 비가 내리면 그 빗소리가 아까워 학교에 가지 않은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회사 봉고차를 몰고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날 저녁 비가 내렸습니다.

아내와 나는 차를 타고 근처 야산으로 가 차 안의 의자를 모두 펼친 뒤 하늘을 향해 누웠습니다.

그리고는 또닥또닥 천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오래오래 들었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니 하늘이 맑은데도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웬일인고 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호스로 지붕 위에 물을 올려 처마끝으로 빗물처럼 떨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것을 보고 "앞으로 집을 지으면 이렇게 하고 싶어요." 했고, 나는 "그래요. 스물네시간 빗소리가 들리는 집을 지읍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는 시쓰기를 좋아했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시를 참 잘 쓴다’고 칭찬해 주자 그 말 한마디에 수많은 시를 탄생시켰다고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비, 폭우가 쏟아지지 않으면 빗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베란다 가장자리에 양철판을 붙여 빗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만 이 일도 생각 뿐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빗소리를 듣지 못해서 그런지 아내는 시도 쓰지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일상의 아내요, 어머니가 되어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바쁩니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는데 올해는 비가 내릴 때마다 아내의 감성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되었을까’하고 걱정도 해봅니다.

어제는 식사 준비를 하는 아내의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식사 준비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채도 그냥 식탁에 놓는 것이 아니라 싱싱한 것을 고른 뒤 몇 번을 물에 담갔다 꺼냈다 하고, 부추전 하나 부치는 것도 밀가루 반죽하고 부추를 씻고 자르고, 소금을 넣는 것이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기도 그냥 불판에 올려 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냉장고에서 꺼내 녹이고, 썰고, 올리고, 자르고, 양념장에 상추 마늘 준비하고... 빨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탁기에 넣을 옷, 세탁소에 맡길 옷, 손 빨래 할 옷이 다르고, 빤 다음에는 발로 밟고 펴서 물 뿌리고, 다리고, 주름잡고, 걸어 두고... 이렇게 손 많이 가고 신경 쓰이는 식사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하지요. 옷도 위 아래 몇 가지를 거의 매일 갈아 입지요. 또 청소하기 힘든 구석은 왜 그렇게 많은지요.

드디어 아내에게서 빗소리가 멀어진 이유와 시를 쓸 마음이 사라진 이유를 알았습니다.

황동규 님의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 그대에게 해 주려는 것은 꽃꽃이도 벽에 그림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 두고 간장병과 기름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그렇습니다. 꽃꽃이나 그림 달아 주는 일, 옷을 사 주거나 선물을 하는 일, 사랑 얘기가 아니라 이제는 설거지를 해야겠습니다. 그릇을 닦아야겠습니다. 시를 쓰라고 종이와 펜을 내밀 것이 아니라, 빗소리를 들으라고 양철판을 베란다 끝에 붙일 것이 아니라 설거지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 창문 쪽에다 의자 하나를 갖다 놓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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