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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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pious] 쪽지 캡슐

1999-09-18 ㅣ No.616

유홍준교수가 쓴 정직한 관객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광주 비엔날레에서 그런 진득한 정서의 또 다른 한 관객을 만났다. 말씨로 보아 벌교나 장흥쯤에서 오신 듯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대상 수상작인 쿠바의 카초 작품 앞에서 작은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사정을 보아하니 무슨 구경 났다고 비엔날레에 왔는데, 엑스포 같은 것이 아니라 해괴하기 짝이 없어 실망스럽기만 한데 영감님은 어서 빨리 갈 생각은 않고 이 새상 수상작 앞에서 영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카초의 이 작품은 2천여개의 맥주병 위에 빈배를 올려 놓아 쿠바 난민들의 처지를 은유한 것이었다. 한잔 걸치신 것인지 주독이 오른 것인지 코가 빨간 할아버지는 연신 맥주병만 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가자고 보채는 것이었다.

"영감, 인자 그만 보고 가십시다. 오래 본다고 아요? 다 배움이 깊어야 아는 법이제."

"자네는 꼭 날 무시해야 쓰겄는가? 모르긴 뭘 몰러?"

"그라믄, 이것이 뭐다요?"

"뭐긴 다 뭐여, 인생이란 맥주병 위에 떠 있는 빈 배란 말이시."

천연덕스러운 이 할아버지의 해설 앞에 나는 미술평론가로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고단했던 삶과 그 삶 속에 함께 했던 술과, 그 술기운에 실어왔던 꿈과, 그 꿈의 허망을 모두 읽어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인생은 어려운 예술 작품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했나 봅니다. 오늘 많은 성당식구들이 모여 내일 있을 본당의 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성당에서 리허설을 하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성서말씀을 떠들어도 신자들은 본능적으로 성서의 힘을 그리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찾아내고 실천하면서 살고있구나!.

미술전공의 대학교수가 느꼈을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고생하며 봉사하는 사람들과 성극을 만들며 많은 시간 힘들어 했을  이들을 보며, 내 자리를 다시 둘러보게 됩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호강에 겨워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는 내일 본당의 날 기쁘고 즐겁게 합시다. 물론 내일도 비가온다고 하네요. 저는 정말 비오기를 기원하지 않습니다. 믿어주세요. 정직한 배우들의 실력도 기대됩니다. 많이 참여하시기를

-호강에 초쳐먹었던 신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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