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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성서 해석 - 부록 [성경공부] [성경해석] 782_ 교황청 성서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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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7 ㅣ No.1170


< 부 록 >
 
교황청 성서위원회

교회 안의 성서 해석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3년 4월 23일, 레오 13세의 회칙 「섭리의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 발표 100주년과 비오 12세의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 발표 50주년을 맞아, 추기경단과 외교사절단이 모인 자리에서 교황청 성서위원회를 접견하셨다. 이 자리에서 교황께서는 "교회 안의 성서 해석"에 관한 성서위원회의 중요한 문서가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1993년 4월 15일자의 이 문서는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의 서문(1993년 9월 21일)과 함께 (회칙 「섭리의 하느님」 발표 기념일인) 1993년 11월 18일에 발표되었다.

우리말 번역의 대본은 프랑스 말 본문("L'interpr tation de la Bibledans l' glise": La Documentation Catholique, 1994년 1월 2일, 13-44면)과 영어 본문("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 Catholic International, 1994년 3월, 109-147면)이다. 서문과 "I. 해석을 위한 방법과 접근"은 프랑스 말 본문을 영어 본문과 비교하여 옮겼고, 나머지 부분은 영어 본문을 프랑스 말 본문과 비교하여 옮겼다.

성서위원회 문서에 붙이는 서문

"성서 연구(L'tude de la Bible)는 신학의 영혼과 같다." 이것은 교황 레오 13세의 표현을 빌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한 말이다(계시헌장, 24항). 성서 연구는 결코 끝난 적이 없다. 시대마다 나름대로 새롭게 성서 이해를 추구하여야 한다. 성서 해석의 역사에서 역사비평 방법의 이용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 방법 덕택에 성서 분문을 원래의 뜻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 만사가 그렇듯 이 방법 역시 그 긍정적인 가능성과 더불어 몇 가지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말씀의) 원래 의미를 찾는 일은 "말씀"을 완전히 과거로 후퇴시켜 "말씀"의 현재 의미를 더 이상 파악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말씀"의 인간적인 차원만이 실재인 것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으며, 인간적 실재를 이해하고자 애써 마련한 방법만으로는 말씀의 참 저자이신 하느님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profane)" 방법론을 성서에 적용할 때에는 논쟁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진리를 더 잘 깨우치고 개인의 생각을 올바르게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모든 것은 신학에 유효한 공헌을 한다. 이런 뜻에서 역사비평 방법을 신학 연구에 받아들여 이용해 온 일은 바람직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 지평을 축소시켜 우리 눈과 귀를 단순한 인간적 차원 그 이상으로 넓혀 나가지 못하게 묶어두는 것은 무엇이나, 개방을 유지하기 위하여, 배척해야 마땅하다. 그런 까닭에 역사비평 방법이 나타나자마자, 그 올바른 구성과 유용성 문제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으며, 지금까지도 이 논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이런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가톨릭교회의 교도권은 중요한 문서들을 통하여 서너 차례 입장을 표명하였다. 우선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 11월 18일 회칙「섭리의 하느님」(Providentissimus Deus)에서 성서 주석의 방향에 관한 몇 가지 지표를 설정하였다. 당시에는 극단적 자유주의가 교의문제에까지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 13세는 새로운 가능성의 긍정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50년 뒤, 저명한 가톨릭 주석가들의 눈부신 노력 덕분에, 교황 비오 12세는 1943년 9월 30일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을 발표하여, 성서 이해에 필요한 현대의 방법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잘 활용하여 좋은 결실을 얻어내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5년 11월 18일에 내놓은 계시헌장(Dei Verbum) 안에 이 모든 것을 수렴하였다. 계시헌장은 영속성을 지닌 교부신학의 통찰과 현대의 새로운 방법론적 인식을 결합시켜 영구적이고 권위있는 종합적 전망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한편 성서 주석 방법론의 범위는 3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넓어졌다. 구조주의에서 유물론적 정신분석학적 해방론적 주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접근들이 제시되었다. 그밖에 다른 관점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교부들이 한 주석 방법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영성적 성서 해석의 새로운 형태에 길을 열어주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회칙 「섭리의 하느님」 발표 100주년과 회칙 「성령의 영감」발표 50주년을 맞이하여 현상황에서 가톨릭 주석의 입장을 밝혀야 할 임무를 맡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면서 새롭게 구성된 성서 위원회는 교도권의 기구가 아니라,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이다. 그들은 가톨릭 주석가로서 학문적 교회적 책임을 의식하여 성서 해석의 근본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여 교도권의 신임을 얻고 있다. 이 문서는 바로 이러한 틀 속에서 작성되었다. 이 문서는 탐구자들에게 오늘날 사용되는 다양한 방법에 바탕을 둔 총체적 전망을 제시하고, 제반 연구 방법의 가능성과 한계를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이 문서는 성서의 의미를 다루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곧, 역사적 사건의 일회성과 어느 시대에나 동시적인 영원한 말씀의 불변하는 유효성 안에서 인간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이 함께 어우러진 성서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서 말씀은 과거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단순히 과거에만 묻혀있을 수는 없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영원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 말씀은 하느님의 영원성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시간의 길에서 우리를 인도한다. 본인은 이 문서가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참으로 귀중한 도움을 주며,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리라고 확신한다. 이 문서는 1893년과 1943년의 두 회칙과 같은 맥락에 있으며 그 가르침을 풍부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본인은 성서위원회 위원들이 이 문서를 한 단계 한 단계 완성해 나가는 동안 보여준 인내와 노고에 깊은 감사를 보낸다. 이 문서가 널리 보급되어, 성서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 일에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로마에서,
1993년 9월 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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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성서 본문의 해석(L'interpretation des textes)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활발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중대한 토론을 유발하고 있다. 이러한 토론은 최근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생활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사이의 관계에서, 성서의 근본 중요성이 부각되어,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이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밝혀주도록 요청받았다.

가. 오늘날의 문제들

성서 해석의 문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오늘에 와서야 대두된 문제가 아니다. 성서 자체가 그 해석의 어려움을 증언하고 있다. 명쾌한 본문 바로 곁에 모호한 구절들이 도사리고 있다. 예레미야서의 몇몇 신탁을 읽으면서 다니엘은 그 의미를 두고 오랫동안 궁리한다(다니 9,2). 사도행전에 보면 1세기의 한 에티오피아 사람이 이사야서의 한 대목(이사 53,7-8)을 두고 같은 상황에 빠져 해석가를 몹시 필요로 한다(사도8, 30-35참조).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2베드 1,20)고 선언하는 한편, 다른 곳에서는, 바오로의 편지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고 마음이 들떠 있는 사람들이 성서의 다른 부분들을 곡해하듯이 그것을 곡해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불러들이고 있다".(2베드 3,16)고 지적한다.

이처럼 성서 해석의 문제는 오래 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조되었을 따름이다. 성서가 전하는 사건과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날의 성서 독자들은 2천년 또는 3천년 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 해석의 문제는 현대에 와서 인문과학의 발전으로 한층 더 복잡해져 가고 있다. 여러 과학적 방법들이 고대의 본문을 연구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이 방법들을 어느 정도까지 성서 해석에 알맞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두고 교회는 오랫동안 사목적 신중함으로 그 대답에 조심스런 태도를 보여왔다. 그 이유는 흔히 이런 방법들이 나름대로 긍정적 요소를 지니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대는 견해와 연결되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으니, 레오 13세의 회칙「섭리의 하느님」(1893년 11월 18일)에서 비오12세의 회칙「성령의 영감」(1943년 9월 30일)에 이르는 일련의 교황 문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긍정적인 변화는 교황청 성서위원회의 선언 「자모이신 교회」(Sancta Mater Ecclesia, 1964년 4월 21일)와 특별히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계시헌장(1965년 11월 18일)으로 뒷받침 되었다.

이 같은 교회의 건설적 자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갔다. 여러 가지 성서 연구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그 학문적 가치는 학계와 신자들 사이에서 점차 재인식되었다. 그런 가운데 교회일치운동의 대화도 눈에 뛸 정도로 쉽게 풀려갔다. 신학 전분야에 걸쳐 성서의 영향력은 심화되었고 신학의 쇄신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에 대한 관심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점점 높아졌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성서 분야에서 충실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충분한 이유를 바탕으로 불충분하다고 판단하게 된, 비평적 해석 이전의 단계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비평"이라는 학문적 방법이 가톨릭 주석을 포함한 성서 주석에 널리 응용되어 가는 가운데, 이 방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학계 자체 안에서 다른 방법론들과 접근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비평은 "역사비평" 방법이 신앙의 관점에서 미흡하다고 판단하였다. 그 이름 자체가 시사하듯, 본문이나 전승이 시간을 통과하여 곧 통시적(通時的)으로 발전해 가는 역사적 진화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역사비평 방법은 본문을 공시적(共時的)으로 이해하려는 방법들, 곧 본문의 언어와 구성, 이야기의 구조나 설득력 등을 문제 삼는 다른 방법론들과 여러 분야에서 겨루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나아가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통시적 방법론들의 관심은 현대의 전망들, 곧 철학·정신분석학·사회학·정치학 등의 범주에서 본문을 탐구하려는 경향으로 대체되었다. 방법과 접근의 다양화는 한편으로 풍요의 지표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커다란 혼란을 불러들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실제로든 표면으로든 이런 혼란은 학문적 성서 주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논거들을 제공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성서 해석에 대한 제반 갈등을 놓고 볼 때, 성서 본문을 학문적 방법이 추구하는 대로 내맡긴 결과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고 오히려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학문적 성서 주석이 결과적으로 이제껏 아무런 문제 없이 받아들여 왔던 수많은 관점들에 대해 혼동과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부 성서 주석가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사안들과 관련하여 교회의 전통 신앙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동정 잉태와 기적들, 그리고 그분의 부활과 신성에 관한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견해로는, 설령 학문적 성서 주석이 그 같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 삶의 발전을 저해하는 불임성을 그 특징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학문적 성서 주석이 하느님 말씀의 생생한 원천에 더 쉽고 확실하게 접근하도록 하는 대신 성서를 하나의 닫힌 책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는 언제나 문제가 생겨나기 마련이며, 몇몇 전문가들에게만 유보된 기술적 전문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학문적 성서 주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런 전문가들에게 복음서의 말씀을 그래도 적용한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쥐고 있으나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가로막았구나"(루가 11,52; 마태 23,13참조, 「공동번역 성서」대신 「200주년 신약성서」를 따랐음).

결과적으로, 성서 주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학문적 성서 주석의 힘든 노고를 더 단순한 접근으로 대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공시적 독서의 실천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심지어 모든 성서 연구를 포기하고, 오로지 개인의 주관적 영감에 이끌리고 또 그러한 영감을 증진시키기 위한 독서로 이해되는, 이른바 "영성적" 성서 독서를 권장한다. 어떤 이들은 특히 성서 안에서 자신들의 개인적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자신들의 충동적 종교심을 만족시키려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온갖 의문에 대한 답을 직접 성서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또한 자기네가 계시로 받았다고 단언하는 그러한 해석이 유일하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흥종교 단체들도 많이 있다.

나. 이 문서의 목적

그러므로 성서 해석과 관련하여 현재의 상황을 다각도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문제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비평과 불평과 열망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갖가지 새로운 방법과 접근들을 통하여 열린 가능성들을 존중하면서, 마침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서 주석의 사명을 올바로 완수하기 위해 가장 알맞은 방향을 정확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문서의 목적이다.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이 문서가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성서의 특성을 최대한 충실하게 고려하는 성서 해석에 이르도록 합당한 길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위원회는 이 문서에서 성서와 관련하여 제기된 모든 문제들, 예를 들어 영감의 신학과 같은 문제들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위원회의 바람은 성서 본문 안에 실린 온갖 풍부한 내용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탐구하려는 데 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이 다른 무엇보다 앞서 언제나 당신 백성의 지체들을 기르는 영적 양식이 되고, 그들에게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원천이 되며, 마침내 온 인류를 비추는 빛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계시헌장, 21항 참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 문서는
1. 여러 가지 "방법과 접근"1)
을 약술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지적할 것이다.
2. 해석학의 문제점들을 조사할 것이다.
3. 가톨릭 성서해석의 특징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들과 다른 신학 분야들의 관계에 대하여 반성할 것이다.
4. 마지막으로 교회의 삶에서 성서 해석이 차지하는 위치를 고찰할 것이다.


주석:
1.여기서 성서 주석의 '방법'은 본문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학문적 과정 전체를 말하고, '접근'은 특별한 관점에 따라 한 방향으로 진전되는 탐구를 말한다. [△]

I. 해석을 위한 방법과 접근

가. 역사비평 방법

역사비평 방법은 고대 본문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언어로 된 하느님 말씀"인 성서는 그 모든 본문과 사료가 인간 저자들의 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이 방법을 마땅히 받아들이고 활용해야 한다.

1. 이 방법의 역사

역사비평 방법의 현주소를 올바로 파악하려면 그 역사를 한 번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 해석 방법의 몇 가지 요소들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고전문학의 주석가들이 이 요소들을 이용했고, 그 후 교부시대에는 오리게네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 같은 저자들이 그것들을 이용하였다. 물론 그때까지는 역사비평 방법이 덜 세련되어 있었다. 이 방법이 오늘날의 꼴을 갖추게 된 것은 특별히 르네상스시대의 인본주의자들과 그들의 원천에 대한 추구(recursus ad fontes)가 가져온 최종 결실이다. 신약성서의 본문 비평은 공인본(textus receptus)에 대한 집착에서 멀어지게 되는 1800년에 와서야 비로소 하나의 학문 분야로 자리잡게 되지만, 문학비평의 시작은 17세기 리샤르 시몽의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몽은 모세 오경의 내용 안에서 서로 중복되고 대립되는 부분들을 발견하고 그 문체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오경의 본문 전체를 어느 유일한 저자, 곧 모세 한 사람의 작품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장아스트뤼크는 모세가 창세기를 집필하면서 여러 가지 사료(특히 두가지 주요 사료)의 도움을 받았다는 설명으로 전통적인 모세의 오경 집필설에 여전히 안주하였다. 그러나 그뒤를 이어 성서비평은 모세를 오경의 집필자로 내세우는 전통적 주장에 점점 더 분명하게 반대하였다. 본문 안에서 다양한 사료들을 밝혀내는 노력은 오랫동안 문학비평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모세 오경의 편집을 설명하려는 "문헌가설"이 나오게 되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부분별로는 서로 병행을 이루지만 서로 다른 시대에 나온 네 가지 문헌, 곧 야훼계 전승(J), 엘로힘계 전승(E), 신명기계 전승(D), 사제계 전승(P)이 오경 안에서 서로 합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네 문헌 가운데 최종 편집자가 오경 전체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이 마지막 사제계 문헌이었을 것이다. 같은 식으로 비평가들은 세 공관 복음서 사이에서 확인되는 병행과 대립을 동시에 설명하기 위하여 "이출전설"에 의존하였다. 이 가설에 따르면 마태오와 루가는 두 가지 주요 사료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복음을 썼는데, 하나는 마르코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Q라고 불리는 예수 어록이다(이 Q는 사료라는 뜻의 독일 말 Quelle의 첫 글자에서 따온 약호이다). 본질적으로 이 두 가설은 학문적 성서 주석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지만 논의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성서 본문의 연대기를 마련하려는 원의에서, 문학비평 분야는 다양한 사료를 가려내기 위하여 본문의 대목을 구분하고 구성 요소를 분석하는 작업에만 집착하여, 성서 본문의 최종 구조와 실제 본문에 표현된 메시지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편집자들의 작업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비평 주석은 해체와 파괴로 보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주석가들은 당시에 통용되던 비교종교학의 영향을 받거나 철학 개념에서 출발하여 성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을 표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헤르만 궁켈이런 식으로 이해된 문학비평의 폐쇄된 방법론에서 벗어났다. 궁켈은 여전히 오경의 각 권들을 편찬물로 생각했지만, 각 권에 포함된 서로 다른 부분들의 특정한 짜임새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는 각 부분의 문학 유형(예를 들어, "전설"이나 "찬가")과 그 원천의 주변 환경 또는 삶을 자리(Sitz im Leben)(예를 들면, 법률 배경이나 경신례 등)를 정의하고자 고심하였다. 문학유형에 대한 궁켈의 탐구는 마르틴 디벨리우스루돌프 불트만이 공관 복음의 주석에 도입한 "양식비평(Formgeschichte)"과 연결된다. 불트만은 "양식비평" 연구에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어낸 성서 해석학을 혼합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주 양식비평에 대해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평 방법은 그 자체로 보면 결과적으로 신약성서 전승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는 초대교회안에 그 원천을 두고 있고 그 안에서 자체의 꼴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예수님 자신의 설교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선포하는 설교로 옮겨갔음을 더 분명히 밝히는 것이 되었다. 결국 "양식비평"에 "편집비평(Redaktionsgeschichte)"이 첨부된다. 편집비평은 각 복음서 저자의 개인적 기여와 그들의 편집활동을 유도한 신학 방향들을 밝히려는 작업이다. 이 마지막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역사비평 방법의 제반 단계가 더 완전하게 되었다. 곧, 본문비평에서 (사료를 찾는) 해체 작업인 문학비평으로, 그 다음 양식비평 연구로, 마침내 본문의 구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집 분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 저자들과 편집자들의 의도, 나아가 그들이 최초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역사비평 방법은 최고의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2. 원칙들

고전적인 의미에서 역사비평 방법의 근본 원칙들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역사적 방법이다. 성서 본문과 같은 옛 본문에 적용되고, 역사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만이 아니라, 특별히 성서 본문 형성의 역사적 과정, 곧 흔히 복잡하고 장구한 세월을 거쳐 이루어진 그 통시적 과정을 탐구하기 때문에 역사적이다. 저마다 다른 형성 시대에 따라, 성서 본문들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 다양한 범주의 청중이나 독자들에게 말을 한다.

이것은 비평적 방법이다. 오늘날을 독자가 흔히 이해하기 어려운 성서 본문의 의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본문비평에서 편집비평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과정에서 가능한 한 객관적인 학문 기준의 도움을 받아 작업해 나가기 때문에 비평적이다. 분석 방법은 성서 본문을 다른 모든 고대 본문과 똑같이 취급하여 연구하고, 본문을 인간의 언어로 보는 입장에서 해설한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주석가가 특히 본문을 편집비평으로 연구할 때 신적 계시의 내용을 더 잘 파악하게 해준다.

3. 서술

현재의 상태로 발전된 역사비평 방법은 아래와 같은 단계들을 거친다. 오래 전부터 활용되어 왔던 본문비평은 학문적 작업의 길을 터놓았다. 가장 오래 되고 양호한 필사본들의 증언, 이를테면 파피루스 사본들과 고대 번역본들과 교부들의 저서를 통해 전해진 사본들을 바탕으로 해서, 본문 비평은 이미 확립된 기준에 따라 원문에 가장 가까운 성서 본문을 만들어내고자 고심한다.

이렇게 마련된 본문은 (형태론과 문장론의) 언어학적 분석과, 역사 어문학(philologie)의 연구 결과로 얻은 지식들을 활용하는 의미론적 분석을 거치게 된다. 문학비평은 크든 작든 단위 본문들의 시작과 끝을 구별해 내고 그 본문들의 내적 일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중복과 갖가지 충돌들과 그 밖의 다른 표지들이 어떤 본문들의 특징을 드러내 주고 있는데, 이 본문들은 작은 단위들로 나누어서, 여러 사료들에 속할 수 있는 그 소속을 연구한다. 문학 유형 비평은 서로 다른 문학 유형과 각 유형의 기원과 특성들 그리고 그 발전 과정을 규명하고자 한다. 전승비평은 전통의 줄기 속에서 본문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비판으로서, 그 본문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분별하고자 한다. 끝으로 편집비평은 본문이 최종 형태로 굳어지기 전에 거치게 되는 변형들을 연구한다. 이 비평은 본문의 최종 형태를 분석하여 그 고유한 경향을 분별하고자 노력한다. 이전의 과정들이 본문의 기원을 통시적 전망 안에서 설명하고자 했지만, 이 마지막 단계(편집비평)는 공시적 연구에까지 이른다. 여기서는 본문의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들을 비교하고 저자가 동시대인들에게 전달한 메시지를 고려하여, 본문을 그 자체 안에서 설명한다. 이때에 본문의 실용적 기능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연구한 본문들이 어떤 역사적 문학 유형에 속하거나 역사의 사건들과 관련을 맺을 때 비로소 역사비평은 현대적 의미에서 그 역사적 실재를 정확히 규명하려는 문학비평을 보완한다. 성서 계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여러 가지 단계는 바로 이런 식으로 밝혀지게 된다.

4. 평가

역사비평 방법에 대해, 특별히 그 방법론의 현 발전 단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객관적 입장에서 사용된 이 방법은 본래 어떠한 선험적 판단도 배제한다. 이 방법이 선험적 판단을 동반하게 되는 경우는 그 방법 자체 때문이 아니라, 해석의 방향을 정하고 어떤 경향을 보일 수도 있는 해석학적 선택 때문이다.

처음부터 사료들과 종교사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이 방법은 결과적으로 성서에 새롭게 접근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방법은 성서가, 특히 구약의 경우, 한 사람의 특정한 저자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글로 쓰여지기에 앞서 기나긴 전사(前史)를 거쳐 완성된 만큼, 이스라엘 역사나 초대교회 역사와 직결된 문헌들의 복합체임을 입증하였다. 처음에 유다교나 그리스도교 해석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 안에 뿌리를 내린 구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역사적 조건들에 관하여 분명한 의식을 갖지 못하고 전체적인 막연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성서 주석과 학문적 접근 방법의 만남은 불가피하게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학문적 접근 방법은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신앙을 배제했고 때로는 신앙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학문적 방법이 유익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방법이 일단 외적인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되자 성서의 진리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계시헌장, 12항 참조). 「성령의 영감」에 따르면, 성서의 자구적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성서 주석의 본질적인 임무이다. 그리고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본문의 문학 유형을 규명하는 일은 필연적이며(Enchiridion Biblicum, 560면 참조), 이 일을 도와주는 데 역사비평 방법이 큰 구실을 한다.

물론 역사비평 방법의 고전적 사용은 한계가 있다. 이 방법은 성서를 낳은 역사적 상황 안에서만 성서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성서적 계시와 교회사의 나중 단계에서 드러난 의미들의 다른 가능성들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큰 가치를 지닌 성서 주석과 성서신학 관련 저서들의 출간에 기여하였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역사비평 철학 체계와 접목시키기를 거절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성서 주석의 한 경향은 본문의 내용에 관심을 덜 가지는 대신 본문의 형태에 주된 강조점을 두는 쪽으로 역사비평 방법의 방향을 선회시켰다. 그러나 이 경향은 다양한 의미론(낱말과 구절과 본문의 의미론)의 공헌과 본문의 실용적 측면에 대한 연구에 힘입어 수정되었다.

역사비평 방법 안에 본문의 공시적 분석을 도입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고 필요한 작업으로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은 최종 단계의 본문에 표현되는 것이지 본문이전의 편집과정에 표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시적 연구는 성서를 형성한 역사의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서의 풍부한 복합성을 밝혀내기 위하여 필요불가결하다. 예를 들어 계약의 법전(출애 21-23장)은 이스라엘 사회의 정치·사회·종교 상황을 반영하는데, 이 상황은 신명기(12-26장)와 레위기(성법전, 17-26장)의 다른 법령들에 반영된 상황들과 다르다. 역사주의적 경향을 고대의 역사비평 주석 탓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전히 공시적인 주석에 치우쳐 역사를 전혀 무시한 극단적 전도(顚倒)로 이를 대신해서는 안된다.

결국 역사비평 방법의 목적은 통시적 탐구를 통하여 저자들과 편집자들이 전달하고자 한 의미를 밝혀내는 데 있다. 그 밖의 다른 방법과 접근에 힘입어 이 방법은 오늘의 독자에게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성서 본문의 의미에 손쉽게 다가가는 길을 열어준다.

나. 문헌분석의 새 방법들

성서 연구에서 어떤 학문적 방법도 성서 본문의 풍부함을 온전하게 다루기엔 역부족이다. 역사비평 방법이 그 타당성을 아무리 크게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모든 면에서 이 방법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방법은 취급하는 성서 본문들을 여러 가지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모호한 채로 버려두는 수가 많다. 따라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이러저러한 측면을 더욱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과 접근들이 제시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 항목 '나'에서 우리는 최근에 발전된 문헌 분석의 여러 방법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어지는 항목 '다', '라', '마'에서는 다양한 접근들을 간략하게 검토할 터인데 어떤 것들은 "인문과학들"과, 또 다른 것들은 오늘날의 특수 상황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바'에서 우리는 성서 해석의 제반 방법론을 모두 부정하는 근본주의 성서 독서를 다룰 것이다.

우리 시대가 언어학과 문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낸 발전에 힘입어, 성서 주석은 문헌 분석의 새로운 방법들, 특히 수사학 분석, 설화 분석, 기호학 분석을 폭넓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 수사학 분석

사실 수사학 분석 그 자체는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분석을 새롭다고 하는 이유는 이 방법이 한편으로 하나의 "새로운 수사학"을 태동시키고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수사학은 설득력있는 담화를 구사하는 기술이다. 모든 성서 본문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본문이라 할 수 있기에 수사학에 대한 지식은 성서 주석의 기본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수사학 분석 역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문적 주석이란 필연적으로 비판 정신을 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등장한 수많은 성서 연구는 성서 안에 수사학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수사학의 서로 다른 접근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접근은 고전적 그리스-라틴 수사학에 바탕을 두고 있고, 두 번째 접근은 셈족 방식의 본문 구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며, 세 번째 접근은 "새로운 수사학"이라 불리는 현대적 탐구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다.

모든 담화의 상황 안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등장한다. 화자(또는 저자), 담화 자체(또는 본문), 그리고 청중(또는 수신자)이 그것이다. 따라서 고전 수사학은 담화의 특성을 결정하는 세 가지 설득요인을 화자의 권위와 논증의 힘과 청중에게 일으키는 공감으로 구분하였다. 상황과 청중의 다양성은 말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전 수사학은 웅변술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곧, 법정 유형(재판소에서)과 토론 유형(정치 집회에서)과 증언 유형(축제나 경신례에서)이 그것이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수사학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인정하는 성서 주석가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그들은 성서 본문, 특히 신약성서의 일부 측면들을 더 효과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고전 수사학의 특성들을 이용한다.

다른 성서 주석가들은 성서적 문학 전승의 독특한 특성들에 주목한다. 셈족 문화에 뿌리를 둔 이 전승은 대칭의 구성을 뚜렷이 선호하는 취향을 보인다. 이 대칭적 구성 덕분에 본문의 서로 다른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밝혀진다. 다양한 형태의 병행법과 그 밖의 다른 셈족식 본문 작성 과정에 대한 연구는 본문의 문학 구조를 더 쉽게 식별하고 본문의 메시지를 더 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새로운 수사학은 더 전반적인 관점을 견지하면서 단순히 문체의 종류와 웅변 기교와 담화 유형을 검토하는 일 그 이상의 구실을 하고 싶어한다. 이 수사학은 언어를 어떤 식으로 특수하게 사용하면 그처럼 커다란 효과를 내면서 확신을 불러일으키게 되는지를 탐구한다. 그리고 이 수사학은 단순히 형식적 분석에 그치기를 거부하면서 "실제적"학문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토론의 상황에 당연한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새로운 수사학은 청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서 문체와 구성을 연구한다. 이런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새로운 수사학은 언어학, 기호학, 인류학, 사회학과 같은 학문들이 근래에 이룩한 업적들을 활용한다.

성서와 관련하여, "새로운 수사학"은 종교적 확신을 심어주는 언어인 계시 언어의 핵심으로 침투해 들어가, 의사 소통의 사회적 맥락 안에서 그 역량을 발휘하고자 한다.

수사학 분석은 본문의 비평 연구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에, 특히 최근의 진지한 탐구와 관련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분석들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던 결함을 보완하고 원래의 전망들을 재발견하게 하거나 더 분명하게 밝혀준다.

"새로운 수사학"이 언어의 설득력과 확실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성서는 진리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다. 성서는 어떤 특정한 맥락 안에서 의사 소통의 기능을 통하여 주어지는 메시지이며, 논증의 역동성과 수사학 전략을 지닌 메시지이다.

그러나 수사학 분석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분석이 단순히 묘사로 그치고 말 때, 그 결과는 흔히 문체에 대한 관심만을 남겨 두게 된다. 본질상 공시적인 수사학 분석들은 그 자체로 충분한 독립된 방법이 될 수 없다. 성서 본문에 이 분석을 적용시키는 일은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본문의 저자들은 과연 교육을 가장 잘 받은 계층에 속해 있었는가? 그들은 글을 쓰면서 어느 정도까지 수사학의 규범들을 따랐는가? 이미 완성된 본문을 분석하는데에는 그리스-라틴 수사학과 셈족 수사학 가운데 어떤 수사학이 더 적절한가? 성서 본문을 해석하는데 지나치게 전문적인 수사학 구조를 적용시킬 위험은 없는가? 그러나 이런 물음들과 그 밖의 다른 의문점들 때문에 이 분석의 이용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런 의문들은 오로지 이 분석 방법에 분별없이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기를 촉구할 뿐이다.

2. 설화분석

설화 주석은 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전달하는 한 방법을 제시한다. 이때 성서의 메시지는 성서의 특징인 이야기와 증언의 형태, 곧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근본 양식에 부합한다. 사실 구약성서는 그 효과적인 이야기가 신앙 고백과 경신례와 교리교육의 본질이 되는 구원 역사를 제시한다(시편 78,3-4; 출애 12,24-27; 신명 6,20-25; 26,5-11 참조). 그리스도교의 신앙 선포 또한 그 나름대로 네 복음서가 자세하게 전해 주는 사건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되어있다. 교리교육 역시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1고린 11,23-25 참조).

설화적 접근과 관련하여, 분석 방법과 신학적 반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여러 가지 분석 방법들이 수없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 방법들은 고대 설화 양식들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고, 또 다른 방법들은 흔히 기호학과 공통점들을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설화학"에 바탕을 둔다. 설화 분석은 본문의 줄거리와 등장 인물들과 화자가 지니고 있는 관점 등과 같은 본문의 요소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본문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독자를 "이야기 세계"와 그 가치 체계에 몰입하도록 해주는지를 연구한다.

많은 방법들이 "실제 저자"와 "암시적 저자", "실제 독자"와 "암시적 독자" 사이를 구별하려고 한다. "실제 저자"는 이야기를 작성한 사람이다. "암시적 저자"는 본문이 읽혀지는 가운데 그 본문이 (저자의 문화와 기질과 경향과 신앙 등을 통해) 만들어내는 저자의 상(像)을 말한다. "실제 독자"는 본문을 읽거나 듣게 된 첫 수신자부터 오늘의 독자나 청중에 이르기까지 본문에 접근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암시적 독자"는 본문이 예상하고 창출해 낸 독자로서 이야기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실제 저자가 암시적 저자를 통하여 겨냥한 방식으로, 그 이야기에 응답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이고 감성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본문은 실제 독자들(예를 들어 20세기 말에 살고 있는 우리)이 암시적 독자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그 정도에 따라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게 된다. 성서 주석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이 동일화를 쉽게 해 주는 것이다.

설화 분석은 본문의 영향력을 파악하려는 새로운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역사비평 방법이 본문을 어떤 한 시대에 (이야기가 전하는 사실들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공동체의 상황에도)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창문"으로 보는 데 반해, 설화 분석은 본문이 "이야기 세계"의 모습, 곧 어떤 세계상을 자리매김 해주고 독자의 관점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독자가 어떤 가치들을 다른 것들보다 먼저 선택하도록 해준다는 의미에서 "거울"과 같은 구실을 한다고 강조한다.

"이야기"와 "증언"이라는 성서의 특성이 신앙의 동의와 관련하여 함축하고 있는 귀결들을 고려할 때, 거기서 실용적이고 사목적인 해석을 이끌어낼 때, 신학적 반성은 이러한 종류의 연구, 특히 문헌 연구 분야와 연결된다. 이 연구 방법은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서 본문을 흔히 비성서적 범주와 언어로 만들어진 일련의 신학명제들로 축소시키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는 설화적 주석이 새로운 역사적 맥락 안에서 성서 이야기의 고유한 통교 양식과 의미 전달 체계를 복구하여 효과적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바란다. 우리는 "구원을 이야기하고"(이야기의 "정보적"인 면) 그 이야기를 "구원에 따라 이야기할"("실행적"인 면) 필요성을 주장한다. 사실 성서 이야기는 명시적이든지 암시적이든지 어떤 경우에도 독자에게 던지는 실존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성서 주석에서 설화적 분석은 수많은 성서 본문들의 설화적 성격과 잘 부합하기 때문에 분명히 유익하다. 이 분석은 역사적 맥락 안에 놓여 있는 본문의 의미와-이는 역사비평 방법이 정의하려고 애쓰는 의미이다-오늘의 독자를 위한 의미 사이에 가로놓인 통로를 쉽게 건너갈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실제 저자"와 "암시적 저자"의 구분은 해석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설화 분석을 성서 본문에 적용시킬 때 기존의 모델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본문의 특수성에 맞추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본문에 대한 그 공시적 접근은 통시적 연구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접근은 성서의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사상의 교리 정립을 모두 배척하려는 가능한 경향을 피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리 정립을 실천해 온 성서 전승 그 자체와 어긋나고 또 그러한 길을 계속 걸어온 교회 전통과 대립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화의 형태로 전승된 하느님 말씀의 실존적이고 주관적인 효력을 진리 인식의 충분한 판단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기호학 분석

마지막 단계로 고정된 성서 본문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이른바 공시적 방법들 가운데 기호학 분석이 있다. 기호학 분석은 한 이십년 전부터 몇몇 분야에서 대단한 발전을 보였다. 처음에는 일반 용어로 "구조주의"라 불리던 이 방법론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원조로 삼는다. 금세기 초 그가 정립한 이론에 따르면 모든 언어는 정해진 규칙들을 따르는 연관 관계들의 체계이다. 여러 언어학자들과 문학자들이 이 방법론의 발전에 괄목할만한 영향을 끼쳤다. 성서 연구에 기호학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알지르다스 J. 그레마스와 그가 창시한 파리학파를 내세운다. 현대 언어학에 바탕을 둔 접근이나 분석방법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발전되었다. 우리는 그레마스의 방법론을 간단히 소개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기호학은 세 가지 주요 원칙 또는 전제에 기초를 둔다.

내재성의 원칙 : 각 본문은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분석은 본문 전체를 고려하지만 오직 본문 그 자체에만 관심을 둘다. 기호학 분석은 저자, 수신자, 본문이 묘사하는 사건들, 편집사 같은 "외재적" 자료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의미 구조의 원칙 : 의미들은 관계를 통해서 관계 안에서 특히 "차이점"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본문의 분석은 여러 요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대립관계, 상동관계 등)의 조직망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 조직망에서 본문의 의미가 정립된다.

문법 원칙 : 각 본문은 "문법". 곧 몇 가지 규칙이나 구조를 따른다. 담화라고 하는 여러 문장들의 총체 안에는 독자적인 문법을 갖는 다양한 차원들이 존재한다.

한 본문의 전체 내용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설화 차원 :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종결부로 이행되는 변형을 연구한다. 설화 행정(行程)의 내부에서 분석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형되는, 논리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는, 다양한 단계들을 추적해 나간다. 분석가는 각 단계에서 상태를 규정하고 변형을 일으키는 "행역자들(actants)"이 맡은 "역할들" 사이의 관계를 밝힌다.

서술 차원 : 분석은 세 가지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ㄱ) 본문의 의미 작용 요소들(행위자, 시간, 장소)이라고 할 수 있는 형상들을 찾아내고 분류하는 일. ㄴ) 본문이 형상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각 형상의 행정을 추적하는 일. ㄷ) 형상들의 주제 가치들을 찾아내는 일. 이 마지막 작업은 형상들이 주어진 분문 안에서 "무엇의 이름으로"(가치로) 그러한 행정을 따르는지 판별하는 것이다.

논리-의미론 차원 : 이것은 심층 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또한 가장 추상적인 차원이기도 하다. 논리 형식과 의미 형식들이 모든 담화의 설화적 서술적 구조 속에 숨어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하는 분석은 본문의 설화적 형상적 행정의 기본 분절을 움직이는 논리를 규명하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기호학의 사각형"이라고 부르는 도구를 사용하는데, 이 도식은 두 개의 "대립" 명사와 두 개의 "모순" 명사 (예를 들면, 하양과 검정; 하양과 하얗지 않은 것, 검정과 검지 않은 것) 사이의 관계를 활용한다.

기호학 방법의 이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특히 발화(發話) 행위와 본문의 교직성(交織性)에 모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가장 손쉬운 성서의 설화 본문들에 이 방법론이 적용되더니 이제는 점차 다른 양식의 성서 담화들에도 사용되고 있다.

기호학에 대한 이상의 설명과 특히 이 방법이 내세우는 전제들 자체가 벌써 그 공헌과 한계를 가늠하게 한다. 성서 각 본문이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있고 언어학의 정확하고 기계적인 작용 원리들에 순응한다는 사실에 더욱 세밀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기호학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하느님 말씀인 성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성서 연구에 기호학을 유익하게 이용하려면, 이 분석 방법에서 구조주의 철학으로부터 나온 몇 가지 전제들, 이를테면 주체들에 대한 부정과 본문 밖의 준거에 대한 부정 등을 반드시 제거하여야 한다. 성서는 현실 위에 주어진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이 말씀을 하셨고 인간 저자들의 중개로 오늘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신다. 기호학 접근은 역사에 문을 열어야만 한다. 먼저 본문에서 활약하는 행위자들의 역사에, 다음으로 본문 저자들과 독자들의 역사에 문을 열어야 한다. 기호학 분석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가장 큰 위험은 본문의 내용을 형식적으로 연구하는 데 그쳐 본문에서 메시지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기호학 분석이 복잡한 언어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또 그 주요 요소들을 단순한 말로 풀어 가르친다면, 이 분석은 그리스도인들을 성서 본문의 연구에 맛들이게 할 수 있고 또 본문의 형성과정이나 사회 문화적 배경과 관련된 역사적 지식이 없어도 여러 차원의 의미들을 어느 정도 찾아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호학 분석은 비전문 분야의 성서 적응을 위하여 바로 사목상 유용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 전승에 근거한 접근들

이제까지 살펴본 문헌 분석 방법들은 연구 대상 본문들의 내적 통일성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역사비평 방법과 다르다. 그리고 이 방법들 역시, 성서의 각 문헌을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성서 해석에 불충분한 채로 남게 된다. 성서는 상호 관련이 없는 본문들의 집합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거대 전승의 증언들로 이루어진 통일체이다. 성서 주석이 자체의 목적을 온전하게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이 사실을 깊이 새계야 한다. 이것은 바로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여러 접근들이 채택한 전망이다.

1. 정경접근

"정경" 접근은 20여년 전 미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역사비평 방법이 그 끝에 가서는 신학적인 차원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이 접근은 신앙의 명시적인 틀인 성서 전체를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해석의 신학적 임무를 더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경 접근은 성서 정경, 곧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신앙의 규범으로 전수받은 그대로의 성경에 비추어 각 성서 본문을 해석한다. 이 접근은 우리 시대에도 성서를 참으로 유효한 것이 되게 하자는 취지에서 각 본문이 하느님의 유일한 계획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만든다. 이 접근은 역사 비평 방법을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보완하기를 원한다.

이 접근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두 관점이 제시되었다.

브레바드 S. 차일즈는 본문의 최종 정경 형태(성서 각 권이나 총서), 곧 공동체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그 삶을 이끌기 위한 권위로서 받아들인 그대로의 본문 형태에 관심을 집중한다.

제임스 A. 샌더즈는 본문의 최종 형태나 정착된 형태에 주목하기보다 신앙 공동체가 그 규범적 권위를 인정하는 성서의 "정경화 과정" 또는 점진적 발전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정경의 총제가 구성되기 전에 옛 전승들이 어떻게 새로운 상황에서 되풀이 사용되었는지를 조사한다. 신앙 공동체가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는 정경은 고정되어 있으면서 유연성이 있고 다양한 자료들을 함께 포용하면서도 일관성이 있다. 여러 가지 해석학 기법들이 정경화 과정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었고 또 그것은 정경 정착이 완료된 다음에도 계속된다. 해석학 기법들은 주로 미드라쉬 유형으로서 성서 본문의 현실화에 기여한다. 이 기법들은 전승을 현 시대에 맞추는 해석을 요구하면서 공동체와 성서 본문들 사이의 부단한 상호 교류를 촉진 시킨다.

정경 접근은 원초적이고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가치를 마치 그것만이 정통적인 것이라는 듯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처사에 올바르게 반대한다. 영감받은 성서란 교회가 신앙의 규범으로 인정한 바로 그 성서를 말한다. 성서의 정경을 두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성서 각 권이 들어 있는 최종 형태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각 권들이 구성하는 정경의 총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성서 각 권은 정경 전체의 전망에서만 성서일 수 있다.

신앙 공동체야말로 정경 본문들의 해석을 위하여 참으로 적절한 맥락이다. 성령과 신앙이 공동체 안에서 주석을 풍부하게 해준다.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교회 권위는 성서 해석이 그 본문들을 태동시킨 성전(聖傳)에 충실한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계시헌장, 10항).

정경접근은 몇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특히 "정경화 과정"을 규명하고자 할 경우에 그렇다. 정확하게 어느 시점부터 한 본문이 정경이라고 할 수 있는가? 본문의 최종 정착 이전이라도, 공동체가 그 본문에 규범적 권위를 부여하는 그 순간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전승이 (종교적, 문화적, 신학적) 상황의 새로운 국면들에 맞추어 반복되면서도 메시지의 정통성을 보전할 때부터 "정경적" 해석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정경의 성립을 이끈 해석 과정을 오늘날까지도 성서 해석의 척도로 삼아야 하는가?

다른 한편 유다교 정경과 그리스도교 정경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해석상의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그리스도교는 헬라계 유다 공동체에서 권위를 갖고 있던 문헌들을 "구약성서"로 받아들였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히브리 말 성서에 들어 있지 않거나 다른 형태로 들어와 있다. 그러니까 구약성서의 몸체에 차이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정경 해석이 같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각 본문들은 몸체 전체와 연계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파스카 신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비추어 구약성서를 읽는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적 새로움을 가져 오시고 최상의 권위로 성서에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신다(계시헌장, 4항). 이 새로운 의미 부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수적 구성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구세사의 모든 단계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파스카 이전의 정경 해석과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온갖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구약성서에서 그 고유한 의미를 제거하는 일은 신약성서를 그 역사적 뿌리에서 단절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2. 유다 성서 해석 전통에 따른 접근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교 시대보다 4-5세기 앞선 유다 세계에서 최종 꼴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이 시절의 유다이즘은 신약성서의 기원과 초대 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고대 유다이즘의 역사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특별히 쿰란의 발견들로 촉진된 다양한 탐구는 이 시대 전체에 걸쳐 이스라엘 땅에서나 디아스포라에서나 다같이 유다 세계의 복잡성을 부각시켰다.

바로 이러한 세계 안에서 성서 해석이 시작되었다. 유다 성서해석의 가장 오래된 증언들 가운데 하나가 칠십인역으로 알려진 그리스 번역본이다. 아람 말 역 타르굼은 그와 같은 노력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이다. 이 증언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구약성서의 본문을 보존하고 성서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엄창난 양의 학문적 성과를 쌓아왔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오리게네스성 예로니모 이래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주석가들은 성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유다 성서 연구의 덕을 보고자 하였다. 많은 현대 주석가들도 이 예를 따르고 있다.

고대 유다 전승은 특히 칠십인역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이 유다 성서는 적어도 처음 4세기 동안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성서의 첫 부분이 되었고 동방 교회에서는 오늘까지도 이 성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외경 또는 신구약 중간 경서로 불리는 경외 유다 문헌은 그 분량과 종류가 풍성하여 신약성서의 해석에 중요한 원천이 된다. 유다이즘 안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성서 주석 과정은 실제로 구약성서 자체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무엘서와 열왕기의 내용을 재해석하는 역대기가 바로 그것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성 바오로의 일부 성서적 논증을 그 예로 지적할 수 있다. 다양한 형태들(비유, 우화, 시선과 모사, 재해석, 페쉐르,1)관련없는 본문들의 결합, 시편과 찬가, 환시, 계시와 꿈, 지혜문학의 집필)이 구약과 신약, 예수 시대 전후의 유다 전승 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타르굼과 미드라쉬는 초세기 유다이즘 대부분의 설교와 성서 해석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교의 수많은 구약성서 주석가들은 모호한 구절들이나 유례없이 드문 어휘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세와 현대의 유다 주석가들, 문법가들, 사전 편집자들의 작업을 참조한다. 이런 유다 저서들에 대한 참고는 최근의 성서 주석 토론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자주 나타나고 있다.

유다 성서학은 현명하게 이용만 한다면 고대의 기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풍요로움 덕분에 신구약 성서를 주석하는데 커다란 가치를 지닌 도움이 될 수 있다. 고대의 유다이즘은 매우 다양하다. 라비니즘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굳어진 바리사이 형태가 유일한 것만은 아니다. 고대 유다 문헌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있다. 이 문헌들을 서로 비교하기 전에 먼저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유다교 공동체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전체적 유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유다교의 경우, 그 다양한 형태가 있음에도, 언제나 기록된 계시와 구전 전승을 바탕으로 한 민족과 그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종교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의 경우, 돌아가셨다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주님이신 예수께 대한 믿음이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 두 가지 출발점은 성서 해석에서, 수많은 접점과 유사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맥락을 만들어 놓는다.

3. 본문의 영향 비평을 통한 접근

이 접근은 두 가지 원칙에 따른다. ㄱ) 분문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들의 삶에 그 내용을 적용시킴으로써 본문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에 비로소 문학 작품이 된다. ㄴ) 개인이나 공동체 차원에서 일어나고 (문학, 예술, 신학, 수덕, 신비주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화되는, 이같은 본문의 적용은 본문 자체를 더 잘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한다.

예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접근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문학 분야에서 발전되었다. 이 시대는 비평학이 본문과 독자의 관계에 관심을 보일 때였다. 성서 주석은 이러한 연구에서만 소득을 얻을 수 있다. 더구나 철학적 해석학이 그 나름대로 작품과 저자 사이, 작품과 독자들 사이의 필연적인 거리를 강조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같은 전망하에서 성서의 어떤 책이나 어떤 대목이 창출한 효과의 역사(Wirkungsgeschichte)가 해석 작업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독자들의 관심에 영향을 받은 해석의 발전을 가늠하고, 성서 본문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서 전통의 중요한 역할을 평가하고자 한다.

본문과 독자들 사이의 상호 현존 관계는 그 자체로서 역동성을 창출하는데, 그 이유는 본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본문은 개인이건 단체이건 독자에게 호소하게 된다. 독자는 어떤 경우이든 결코 고립된 주체가 아니다. 그는 어떤 사회적 맥락에 속해 있고 한 전통 안에서 살아간다. 독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안고 본문에 다가와 선택을 하고 해석을 가하게 되며 마침내 성서를 읽어가다 직접 영감을 얻어서 더 발전적인 일을 창조하거나 주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접근의 예는 수없이 발견된다. 아가의 독서 역사가 그 좋은 예이다. 이 역사는 아가를 교부 시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였고 중세의 라틴계 수도원들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신비가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어, 이 저술 안에 담긴 온갖 차원의 의미를 더 잘 찾아내게 한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어떤 성서 대목(예를 들면, 마태 19,16-26의 부자 청년 이야기)이 미친 커다란 영향력을 보여줌으로써 그 대목의 의미를 밝힐 수 있고 또 그 의미를 밝히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경향성을 띠거나 거짓된 해석의 흐름이 해로운 영향을 미쳐, 이를테면, 반유다주의나 그 밖의 다른 인종차별 또는 천년 왕국의 환상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예들은 이 접근이 하나의 자율적 규범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분별력이 필요하다. 역사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미친 본문의 영향에 특권을 부여하여 그 해석의 유일한 척도로 삼아서는 안된다.

라. 인문과학을 통한 접근들

하느님 말씀은 스스로를 전달하기 위해 인간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렸으며(집회 24,12 참조), 이 말씀은 성서를 기록한 다양한 사람들의 심리적 성향을 통하여 그 길을 열었다. 따라서 인문과학, 특히 사회학, 인류한, 심리학은 성서 본문들의 어떤 측면들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인문과학 분야에서 각 학문들 자제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조차도 학파에 따라 생각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어떻든 수많은 주석가들이 최근에 이 같은 학문적 탐구에서 괄목할 만한 이득을 이끌어 냈다고들 한다.

1. 사회학 접근

종교적 본문은 그것이 태어난 사회와 맺는 상호 관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사실은 성서 본문의 경우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성서 비평 연구는 성서 전승들이 형성된 다양한 환경의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회-역사적 정보는 정확한 사회학적 설명으로 보완되어야 하며, 이 설명은 각각의 경우에 사회생활 조건들이 미친 영향을 학문적으로 해석하여 준다.

주석사에서 사회학적 관점은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왔다. 양식비평이 다양한 본문들을 형성시킨 사회 환경(삶의 자리)에 바친 관심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성서 전승들이 그 전승을 전달한 사회-문화적 환경의 자취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20세기 초반에 시카고 학파가 초대 그리스도교의 사회-역사적 상황을 연구하여, 역사비평을 이 방향으로 끌고 가게 하는 훌륭한 동기를 부여하였다. 최근 20년(1970-1990) 사이에 성서 본문에 대한 사회학 접근은 성서 주석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구약성서의 주석과 관련하여 이 분야에서 수많은 질문이 제기된다. 예를 들어 역사의 변천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알게 된 갖가지 형태의 사회.종교 조직에 관하여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국가 형성 이전의 시대에 우두머리도 없이 분열된 사회의 민족학적 모델이 과연 연구를 위한 만족할 만한 근거를 제공하는가? 커다란 결속력이 없는 부족 동맹이 어떻게 조직화된 군주 국가가 되고 또 거기서 단순히 종교와 혈통의 유대를 토대로 뭉친 공동체가 되었는가? 군주제도로 이어지는 정치적 종교적 중앙집권화 움직임이 사회 구조에서 어떠한 경제적 군사적 변화나 그 밖의 다른 변화들을 일으켰는가? 고대 근동 지방과 이스라엘의 행동 규범에 대한 연구가 원초의 본문을 재구성하려는 순수한 문학적 시도보다 십계명 이해에 더 효과적으로 공헌하지 않겠는가?

신약성서 주석의 경우에 그 질문들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부활 전에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취한 생활 방식을 두고 이야기할 때, 집도 가족도 재산도 없이 사는 카리스마적 유랑인들의 운동이론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철저한 떠남의 자세와,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이루어진 부활 이후 그리스도 운동의 자세 사이에는 지속성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가? 관련 도시들의 문화가 서로 제각각인데, 우리는 바오로 공동체들의 사회 구조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회학 접근은 주석 작업의 지평을 넓혀주고 수많은 긍정적인 면들을 가져다 준다. 사회학 자료에 관한 지식은 우리가 성서 세계의 경제.문화.종교 기능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데, 이같은 지식은 역사비평에서 필요불가결하다. 사도적 교회의 신앙 증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성서 주석에 맡겨진 임무는 신약성서의 본문과 초대교회의 사회 "생활"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연구하는 철저한 학문적 탐구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모델을 이용하면 성서 시대에 관한 역사적 연구에 획기적인 쇄신 가능성을 보장받게 된다. 물론 그 모델들은 연구하는 실재에 맞게 변형시켜야 한다.

성서 주석에 사회학 접근을 적용시키는데 따르는 몇가지 위험들을 지적해 보자. 실제로 사회학 작업이 현존하는 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면, 사회학의 방법들을 먼 과거에 속하는 역사적 환경에 적용시키려고 할 때 당연히 어려움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 본문과 성서 이외의 본문들이 반드시 당대의 사회 전체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문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사회학 방법은 인간실존의 개인적 종교적 차원들보다 경제적 제도적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2. 문화 인류학을 통한 접근

문화 인류학의 연구를 이용한 성서 본문 접근은 사회학 접근과 가까운 관계에 놓여 있다. 이 두 접근은 인식의 차원에서, 방법의 차원에서 그리고 관심을 기울이는 실재 측면의 차원에서 서로 뚜렷하게 구별된다. 우리가 방금 언급한 대로 사회학 접근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제도적 측면들을 연구하는 반면, 인류학 접근은 언어, 예술, 종교 뿐만 아니라 옷, 장식, 축제, 춤, 신화, 전설, 민족학과 관련된 온갖 것에서 드러나는 다른 방대한 측면들 전체에 관심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문화 인류학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는 인간들(예를 들면, 지중해인들)이 지닌 다양한 유형의 특성을 정의하고자 한다. 이 학문은 시골과 도시의 사회를 연구하고, 특정한 사회가 인정한 가치들(명예와 수치, 비밀, 신의, 전통, 교육 제도와 학교).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지는 방식, 가족과 가문과 혈연 관계에 대한 관념, 여성들의 지위, 제도화된 이원 관계(주인과 고객, 소유자와 소작인, 은인과 수혜자, 자유인과 노예)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인다. 문화 인류학은 성과 속의 개념, 금기,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치르는 통과의례, 마술, 부와 권력과 정보의 원천 등도 고려한다. 이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여러 문화에 공통된 유형론과 모델들이 구성된다.

이런 연구는 분명 성서 본문의 해석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친척 개념, 이스라엘 여인들의 사회적 지위, 농사의례의 영향 등에 관한 연구에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본문들에서, 예를 들자면 비유들에서, 이 접근 덕분에 많은 세부사항들이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 개념과 같은 근본 사상이나 구세사 안에서 인식하는 시간 관념 그리고 초기 공동체들의 형성 과정 등을 이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문화 인류학 접근은 인간 본성 안에 터전을 잡은 성서 메시지의 영구적 요소들과, 특정한 문화 형태에서 나온 우연 요소들을 더욱 분명하게 구별하도록 해준다. 그럼에도 이 접근 역시 다른 특정한 접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계시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는 척도일 수 없다. 우리는 이 접근이 가져온 결과들을 고맙게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심리학-정신분석 접근

심리학과 신학은 서로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무의식의 역동적 구조에 대한 심리학 탐구는 그 연구 범위를 크게 넓혀 놓았다. 그리하여 이 심리학 탐구는 성서를 포함한 고전 본문들을 해석하는 일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게 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탐구 작업은 성서 본문을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하는 데 이바지 하였고 그 결과 활발한 토론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떤 조건 아래서 심리학-정신분석 탐구가 성서를 깊이 이해하는데 공헌할 수 있는가?

심리함-정신분석 연구는 성서 주석에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 그 덕분에 삶의 체험과 행동규범을 다루는 성서 본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종교는 언제나 무의식 세계와 갈등 관계에 있다. 종교는 인간의 충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역사비평이 방법론적으로 펼쳐온 여러 단계는 본문에 표현된 실재를 여러 차원에서 다루는 학문을 통하여 보완될 필요가 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그것들은 성서를 복합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고 계시의 인간적 언어를 해독하는데 도움을 준다.

심리학과,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정신분석은 특히 상징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상징언어는 종교 체험의 영역을 표현할 수 없지만, 진리 문제에 관한 한 가치를 지닌다. 이 때문에 주석가들과 심리학자들이나 정신분석가들의 학문간 공동 연구는 객관적인 토대 위에서 사목으로 확인되는 분명한 이익을 가져다 준다.

주석가들과 심리학자들 사이에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수많은 예로써 확인할 수 있다. 경신례, 제사, 금령의 의미를 밝히는 일과, 성서의 다채로운 표상 언어, 기적 이야기들의 은유적 의미, 묵시적 환시와 환청의 극적인 영역을 설명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공동노력의 필요성은 단순히 성서의 상징 언어를 설명하는 문제가 아니라, 계시와 도전에 대한 상징 언어의 기능을 파악하는 문제이다. 계시와 도전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초현실적" 실재와 만난다.

성서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출발한 주석과 심리학이나 정신분석 사이의 대화는 각 학문 분야의 테두리를 존중하면서 분명히 비판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무신론적 성향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은 신앙의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자격미달이다. 인간의 책임 범위를 규정하는 데 유익한 심리학과 정신 분석이 죄와 구원의 실재를 제거해서는 결코 안된다. 다른 한편으로, 자발적 종교심과 성서적 계시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고, 독특한 사건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 성서 메시지의 역사적 특성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또한 "정신분석 성서 주석"이 단일한 형태를 지닌 것처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사실, 심리학의 여러 분야와 여러 학파에서 나온, 성서의 인각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에 유익한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현존하고 있다. 한 학파의 이러저러한 입장을 절대화하는 것은 풍요로운 공동 노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런 노력에 해를 끼친다.

인문과학은 사회학, 문화 인류학, 심리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른 학문들도 성서 해석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는 그 분야의 역량을 존중하여야 하며, 성서 주석과 한두 가지 인문과학에 모두 정통한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마. 상황 접근

본문의 해석은 언제나 독자의 마음가짐과 관심에 달려 있다. 독자는 어떤 면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다른 면은 부지불식간에 소홀히 한다. 따라서 몇몇 주석가들이 이제까지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한 현대 사상의 흐름에 부응하는 새로운 관점들을 자신의 저술에 채택한다는 것은 당연할 일이다. 이런 경우 주석가들은 비판적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오늘날, 해방 운동과 여성해방론이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1. 해방 접근

해방신학은 함부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이 신학은 1970년대 초에 하나의 신학 운동으로 자리잡았다. 그 출발점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사회.정치 상황 이외에도 교회의 두 가지 큰 사건이었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 제 2차 총회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쇄신 의지를 천명하고 현대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목활동 방향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1968년 메데인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 제 2차 총회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라틴 아메리카의 요구에 적용하였다. 그 움직임은 세계의 다른 지역(아프리카, 아시아, 미국의 흑인)에까지 퍼져 나갔다.

"하나의" 해방신학이 존재하는지를 분별하고 그 방법론을 정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해방신학의 유용성과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성서 독서 방법을 적절히 규명하는 일도 역서 어렵다. 해방신학은 어떤 특정한 방법론을 채택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고유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성서 안에서 신앙과 삶의 양식을 찾는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성서를 읽는다.

해방신학은 본문이 그 자체의 원초적 맥락 안에서 무엇을 말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객관적 해석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 신학은 민중들이 살아가는 상황을 바탕으로 성서를 읽고자 한다. 민중들이 억압의 환경에 살고 있다면 그들의 투쟁과 희망 속에서 민중을 지탱할 수 있는 영양분을 찾기 위하여 성서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말씀의 빛으로 그 현실을 비추기 위하여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쳐야 한다. 이 빛에서 그리스도인의 정통 실천(正行)이 나오며, 이 실천이 정의와 사랑으로 사회를 변혁시킨다. 신앙 안에서 성서는 완전한 해방의 역동적 힘으로 바뀐다.

다음은 이 접근의 원칙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민중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민중의 역사 안에 현존하신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억압이나 불의를 참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까닭에, 성서 주석은 중립적일 수 없으며, 하느님을 본받아 가난한 이들 편에 서서 억눌린 이들의 해방 투쟁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투쟁의 참여는 성서 본문을 억눌린 이들과 갖는 효과적인 연대성의 맥락 안에서 읽을 때에 비로소 드러나는 의미들을 정확하게 부각시켜 준다.

억눌린 이들의 해방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는 성서를 해방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훌륭한 수신자이다. 더구나 성서 본문이 공동체를 위하여 쓰여졌기 때문에 성서 독서를 제일 먼저 맡겨야 할 곳이 바로 공동체이다. 하느님 말씀은 "근본 사건들"(출애굽이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능력, 곧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안에서 같은 사건을 새롭게 재현시키는 그 능력 덕분에 완전히 현실적이다.

해방신학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곧,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고, 신앙의 공동체적 차원을 강조하며, 정의와 사랑에 뿌리박은 해방실천을 절박하게 촉구하고, 투쟁과 희망의 한복판에서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백성의 빛과 양식으로 삼기 위하여 성서를 새롭게 읽는 것 등이다. 또한 강조되는 것은 영감에 가득찬 성서 본문의 충만한 현실성이다.

그러나 참여 자세로 읽는 성서 독서는 위험도 안고 있다. 해방 신학이 발전 과정에 있는 운동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신학에 수반되는 견해들은 잠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성서 독서는 억압의 상황을 강조하고 사회 변혁을 추구하는 실천에 영감을 불어넣는 이야기나 예언의 본문에 집중된다. 때때로 이런 독서는 성서의 다른 본문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편파적일 수 있다. 성서 주석이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주석이 일방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더구나 사회 참여와 정치 참여가 성서 주석의 직접적인 임무는 아니다.

어떤 신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성서 메시지를 사회-정치 맥락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에서 사회 현실에 대한 분석 수단들을 도입하여 거기에 의존하였다. 이런 전망에서 해방신학의 몇몇 갈래는 유물론 교조에 영향을 받아 분석을 하고, 또 이런 틀 안에서 성서를 읽었다. 이것이 특별히 마르크스주의 계급 투쟁 원리와 관련될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난 사회 문제들의 압력 때문에 지상적 종말론이 더욱 강조되었으며, 이는 때때로 성서적 종말론의 초월적 차원들을 손상시켰다.

사회적 정치적 변화들은 이 접근이 스스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게 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교회 안에서 이 접근이 더욱 발전되고 더 많은 결실을 맺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필요한 일은 그 자체의 해석학적 명제들과 방법들, 교회 전체의 신앙과 전통에 대한 긴밀한 결합을 명확하게 해두는 것이다.

2. 여성해방 접근

여성해방 성서해석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여권 투쟁의 사회-문화적 상황 안에서 성서 개정 위원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위원회는 두 권으로 된 [여성의 성서]를 발행하였다(뉴욕, 1885, 1898년). 이 운동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고 특별히 북아메리카의 여성해방 운동과 연결되면서 커다란 발전을 하였다. 올바로 얘기하자면, 여러 가지의 여성 해방 성서 해석을 구분하여야 하는데, 이는 거기에 이용된 접근들이 무척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모든 접근은 여성해방이라는 목표의 추구에서 일치를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해방 성서 해석의 세 가지 주요 형태를 언급할 수 있겠다. 근본 형태, 신정통(neo-orthodoxe) 형태 그리고 비판 형태가 그것이다.

근본형태는 남성의 여성지배(남성중심주의)를 보장하기 위하여 남성들이 성서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서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신정통 형태는, 성서가 약자들의 편에 서는 한, 따라서 여자들 편에도 서는 한, 성서를 예언자적인 것으로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성 해방과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는 본문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방향을 "정경 안의 정경"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비판 형태는 치밀한 방법론을 동원하여 예수 운동과 바오로 교회들 안에서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지위와 역할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이 시대에도 평등주의를 채택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신약성서 저술들에서 대부분 가려져 버렸고, 그뒤로 갈수록 가부장제도와 남성중심주의가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해방 해석은 새로운 방법론은 정립하지 않았다. 이 해석은 현대의 주석 방법, 특히 역사비평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 탐구 기준이 첨부된다.

첫째 기준은 여성해방 운동에서 빌려온 여성해방 기준으로서, 해방신학의 좀더 일반적인 운동노선을 취한다. 이 기준은 의심의 해석을 이용한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승리자들이 기록하였기 때문에, 진리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본문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되고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는 단서들을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기준은 사회학적이다. 이 기준은 성서시대의 사회, 그 시대의 사회 계층, 거기서 여성들이 차지했던 지위에 관한 연구에 바탕을 둔다.

신약성서 저술들과 관련하여, 연구의 목적은 결국 신약성서 안에 표현된 여성의 개념을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초세기 여성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상황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하나는 유다 사회와 그리스-로마 사회의 관습적인 여성 상황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 운동과 바오로 교회들 안에 자리잡은 혁신적인 여성 상황이었다. 거기서는 "모두가 평등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런 견해를 입증하려 할 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본문이 자주 인용된다. 그 목적은 오늘을 위하여 교회 초창기의 여성 역할에 대한 잊혀진 역사를 재발견하려는 것이다.

여성해방 성서주석은 긍정적인 많은 결실을 맺었다. 여성들이 주석 연구에 더 활발하게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흔히 성서 안에서, 그리스도교 기원 역사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현존과 중요성과 역학을 밝히는데 남성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성의 존엄성에 그리고 사회와 교회 안에서 맡고 있는 여성의 역할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현대 문화의 지평은 성서 본문에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게 하고 새로운 재발견의 계기를 마련하게 한다. 여성 특유의 감수성은 남성의 여성 지배를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또 그 정당화를 추구하는 일부 통상적 해석을 밝혀 내고 교정하게 한다.

구약성서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표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연구가 시도되었다. 성서의 하느님께서는 가부장 정신의 투영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이시지만 동시에 모성의 사랑과 자애를 지니신 하느님이시다.

여성해방 성서 주석이 편견을 근거로 삼는 한 성서 본문을 편향적으로 따라서 논쟁적으로 해석할 위험을 내포한다. 그 명제를 입증하기 위하여, 가끔 이 주석은 부득이 침묵(ex silentio)의 논증에 호소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런 식의 논증은 일반적으로 주의를 요한다. 그것은 확고한 결론을 세우기에 결코 충분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성서 본문 안에 감추어진 단서를 찾아내어, 바로 그 본문이 감추려고 했다는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본래 의미의 주석작업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런 시도는 다른 가설을 구축하기 위하여 영감을 받은 본문의 내용을 배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해방 주석은 때때로 교회 내 권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알다시피 논쟁의 대상이고 심지어는 대결의 문제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여성해방 성서 주석은, 자신이 폭로하는 바로 그 함정에 빠지지 않는 한, 그리고 권력은 바로 봉사라는 복음의 가르침 곧 예수님께서 모든 남녀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한, 교회에 유익할 수 있다.2)

바. 근본주의 해석

근본주의 해석은 영감을 받아 쓰여지고 오류가 전혀 없는 하느님 말씀인 성서는 모든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글자 그대로 읽어야 하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자구적 해석"이라는 말을 고지식하게 축자적 해석으로 이해한다. 이를테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역사적 기원과 발전을 고려하는 어떤 노력도 배제한다. 따라서 성서 해석을 위하여 사용하는 역사비평 방법과 다른 모든 학문적 방법을 반대한다.

근본주의 해석은 성서의 자구적 의미에 충실하고자 고심했던 종교개혁 시대에 그 기원을 둔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안에서 자유주의 성서 주석에 반대하는 보루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근본주의"라는 말은 1895년 뉴욕 주 나이아가라에서 열린 미국 성서대회와 직결된다. 이 모임에서 보수적 프로테스탄트 주석가들을 "근본주의 5대 요점"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곧, 성서의 축어적 무류성, 그리스도의 신성, 그분의 동정잉태, 대속 교리, 그리스도 재림 때의 육신 부활이다. 성서의 근본주의 해석은 세계 다른 지역에 퍼져 나가면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생겨난 "축자적 해석"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다. 20세기를 마감하면서, 이런 종류의 해석은 각종 종교집단과 신흥종교들 안에서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갈수록 더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해 가고 있다.

근본주의가 성서에 대한 하느님의 영감, 하느님 말씀의 무류성, 그밖에 근본주의의 5대 요점에 포함된 성서의 진리들을 주장한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진리들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 대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성서적이 아닌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근본주의는 완고한 교리적 입장의 철저한 고수를 요구하고, 그리스도인 생활과 구원에 대한 가르침의 유일한 원천으로서, 모든 질문과 비판적 탐구를 거부하는 성서 독서만을 강요한다.

이러한 근본주의 해석의 근본 문제는 성서 계시의 역사적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강생의 진리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근본주의는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의 긴밀한 관계를 다 회피하려고 한다. 근본주의는 하느님 말씀이 영감을 받아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었고 제한된 능력과 자료를 지닌 인간 저자들이 하느님의 영감 아래서 그 말씀을 기록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근본주의는 성서 본문을 성령께서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불러주시는 대로 받아 적은 기록처럼 다루려고 하며, 하느님 말씀이 다양한 시대에 속한 언어와 표현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근본주의는 성서 본문 안에 있는, 대부분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역사적 상황의 자취를 지닌 기나긴 과정의 소산인 문학 유형과 인간의 사고방식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근본주의는 성서본문에 나오는 세부 사항들의 무류성을 부당하게 주장하는데, 특히 역사 사건들이나 과학 진리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근본주의는 흔히 역사성을 내세울 수 없는 자료를 역사화시킨다. 근본주의는 과거 시제의 동사로 보고되거나 기록된 모든 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상징적 또는 표상적 의미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근본주의는 흔히 히브리말, 아람 말, 그리스 말로 된 성서 본문에 제기된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또한 흔히 오래된 것이건 새 것이건 오로지 하나의 고정된 번역본에만 매달린다. 마찬가지로, 근본주의는 성서 자체 안에 있는 일부 구절의 "재해석(relectures)"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복음서들과 관련하여, 근본주의는 복음 전승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고지식하게도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이 전승의 마지막 단계를 (역사의 예수님의 언행인) 첫단계와 혼동한다. 동시에 근본주의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나자렛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가 가져다 준 충격을 자기네 방식대로 이해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도적 기원과 그 신앙의 직접 표현에 대한 증언이다. 근본주의는 또한 복음 그 자체가 내는 목소리를 변질시키고 있다.

근본주의는 또한 매우 좁은 안목으로 사물을 보려 한다. 그래서 단순히 성서에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낡은 옛 우주관을 실재로 받아들인다. 이런 자세는, 한층 더 폭넓은 관계 개념을 가지고 하는, 문화와 신앙 사이의 대화를 가로막아 버린다. 특정한 성서 본문의 무비판적 독서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 자세는 선입견에 빠진 정치적 사상이나 사회적 태도를 강화시키는데 이바지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전혀 상반되는 인종차별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직 성서만(sola Scriptura)"의 원칙에 집착하여, 근본주의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신앙 공동체 한복판에서 성서와 결합하여 참되게 발전해 온 성전과 성서 해석을 분리시킨다. 근본주의는 신약성서가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꼴을 갖추었고 이 교회의 거룩한 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사실 교회는 신약성서의 본문들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이 때문에 근본주의는 흔히 반교회적이다. 근본주의는 교회 전통의 일부가 된 신조와 교의와 전례 관습 그리고 교회의 교도 기능 자체를 소홀히 한다. 근본주의는 사적 해석의 형태로 나타나며, 교회가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 삶의 영감을 성서에서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주의 접근은 성서에서 삶의 문제에 관한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갖고 다가서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성서가 필연적으로 모든 문제에 관한 즉각적인 해답을 다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는커녕, 경건하지만 환상적인 해석을 내놓음으로써 사람들을 속인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근본주의는 일종의 사상적 자살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근본주의는 성서 메시지의 인간적 한계를 그 메시지의 신적 본질과 무심코 혼동하게 함으로써 현실의 삶 안에 그릇된 확신을 심어준다.

주석:

1. 역자 주 : 사해 두루마리 가운데 몇 가지 문헌들, 예를 들어 하바꾹, 나훔, 이사야에 관한 주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히브리말 용어, 사해 두루마리의 페쉐르는 설화적 미드라쉬, 즉 법적인 성격이 없는 부분의 성서 주석이다. [△]
2. 이 마지막 절의 채택은 19명의 위원들 가운데 11명 찬성, 4명 반대, 4명 기권으로 통과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위원들은 투표의 결과를 본문과 더불어 공표하도록 요청했고 위원회는 이에 동의하였다. [△] 


게시자 주: 위의 글은, 아래의 영문본에서 첫 부분인 "I. METHODS  AND  APPROACHES  FOR  INTERPRETATION" 의 우리말 번역본이며, 나머지 세 개의 부분들의 우리말 번역본은 인터넷을 통하여 아직 입수하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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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를 클릭하면, 말씀하신 자료의 영문본(제목: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을 읽을 수 있습니다.
 
2.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말씀하신 자료의 영문본(제목: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the Church)을 읽을 수 있습니다(미국 EWTN-TV 홈페이지 제공).
 
참고: 영어 번역본을 인터넷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제공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여기를 클릭한 후에, 제34항에 가면,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위 문헌의 독일어, 이탈리아어, 포르투칼어 등의 자국어 번역본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 자국어 번역본들을 인터넷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제공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4. 여기를 클릭하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로부터 위 자료의 우리말 번역본[「교회 안의 성서 해석」(L'interprétation des textes) (1993.4.15)] 을 담은 DVD를 10,000원에 구입할 수 있다는 정보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게시자는 이 DVD를 소장중입니다].

5. 여기를 클릭하면, 위의 문헌에 대한 세 편의 비평의 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상 부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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