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변성(變成)함(becoming)에 있어 연(緣)의 필연성 혹은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 [신학대전용어] 969_토미즘학습 1122_ free_will 은총

인쇄

. [218.55.90.*]

2014-06-16 ㅣ No.1554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들어가면서

1-1. 다음은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32.htm

(발췌 시작)
32 세계: 변화, 우연, 세상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우리는 우주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1:

(1)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전체에 걸쳐, "contingency" 라는 용어가 제32항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고 그리고 "contingent" 라는 용어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FA4.HTM

 

(2) 그리고 다음의 파란색 글자들을 클릭하면 이 용어 "contingency" 와 이 용어의 파생어들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본문 중의 어느 항에서 사용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23 contingencies
     31 contingency
   144 contingent
      6 contingently
      9 contingents

 

(3)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은, 언뜻 보기에, 그 내용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한 우리말 번역문입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운동"으로 번역된 용어(영어로 "movement"로 번역되는 용어), "변화"로 번역된 용어(영어로 "becoming")으로 번역되는 용어), 그리고 "우연"으로 번역된 용어(영어로 "contingency"로 번역되는 용어)들의 의미가, 예를 들어, 영한사전, 한자자전, 혹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설명들이 아닌 것이 커다란 문제일 것입니다.

 

1-2. 예를 들어,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설명들입니다:

 

출처: http://124.137.201.223/search/View.jsp

(발췌 시작)
우연(偶然)

 

「명사」

「1」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우이03(偶爾).

「2」『철학』=우연성「2」.

 

우연-성(偶然性)

 

「명사」
「1」=우성06(偶成).
「2」『철학』어떤 사물이 인과율에 근거하지 아니하는 성질. ≒우연02(偶然)「2」.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2: 시공간이라는 제약을 초월하여 항상 현실태(actuality)로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그분께서 보실 때에, 그분 앞에서, 피조물들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events)들은 필연적(necessary)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는,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단어 설명대로, "우연"하게 발생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므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을 읽고 묵상하면서, 만약에 우리가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단어의 설명대로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제대로 전달되기는 커녕, 오히려 소멸될 것입니다. 


1-3.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분문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신학 대전 분문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contingency" 와 그 파생어인 형용사 "contingent" 는,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개념을 나타내는,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신학 용어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게시자 주 1-3:

(1) (번역 오류) 예를 들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4항, 제295항, 그리고 제599항에서, 영어로 "chance"로 번역되는 용어가 "우연"으로 일관성 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직역 번역되었기 때문에,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에서, 영어로 "contingency" 로 번역되는 용어를 또한 동일한 차용 번역 용어인 "우연"으로 번역한 것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원 개념 훼손"을 야기하기에, 대단히 중대한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contingency" 의 의미를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우연"의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달리 말하여, 이 글은,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우연(偶然) 의 설명으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내용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2) 바로 위의 제(1)항에서의 번역 오류 지적에 대하여서는 또한, 예를 들어, 바로 아래의 제1-4항에 발췌된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과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1-4. 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입니다. 영어로 "contingency" 로 번역되는 표현을, "偶然" 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非必然性" 로 번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chinese/ccc/ccc_zh-t-0026.pdf
(발췌 시작)

32. 世界:由世界的運行、演變非必然性、秩序和美麗,可以認識天主是
宇宙的起源和終向。

(이상, 발췌 끝)

 

1-5. 그리고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necessary"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n/n050.htm

(발췌 시작)

NECESSARY

 

Whatever must be or cannot not be and should be. Various kinds of necessity are the basis for all others. Something may be necessary because it cannot not exist; its essence is to exist. It is in this sense that God is necessary Being. This is a necessity of being. Or something may be necessary in order to verify something else, as a rational soul is necessary to human nature, or four equal sides are necessary to have a square. This is a necessity of essence. Or something may be necessary in order to attain a given purpose or achieve a given end, as it is necessary to eat in order to live. This is a necessity of means. Or something may be necessary because God wills it so and wants humanity to do it, as it is necessary to pray in order to be saved. This is a necessity of obligation or moral necessity. (Etym. Latin necessitas, ne-, not + cedere, to withdraw: that which cannot be other than it is, with respect to itself or with respect to another thing.)

 

필연적인(necessary)

 

반드시 있어야 하는 혹은 있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마땅히 있어야 하는 무엇이든지를 말합니다. 필연성의 다양한 종류들은 모든 다른 사물들의 근거(basis)입니다. 어떠한 사물(something)은,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 없으며(cannot not exist), 그리고 그 본질(essence)이 존재하기(to exist) 때문에, 필연적입니다. 하느님이 필연적 있음(necessary Being)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입니다. 이것은 있음(being)의 한 필연성(a necessity)입니다. 혹은 어떠한 사물은, 인성에 한 이성적 영혼이 필연적이듯이, 혹은 한 개의 정사각형을 가지기 위하여 네 개의 동일한 변들이 필연적이듯이, 그 이외의 어떠한 사물을 확인하기 위하여, 필연적일 것입니다(may).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이번 글에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에서 사용 중인 몇 개의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

2-1.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35항 전문입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catechism_lt/p1s1c1_lt.htm#I. De desiderio Dei

출처 2: http://www.vatican.va/archive/FRA0013/__PB.HTM

출처 3: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A.HTM

출처 4: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

 

(발췌 시작)

II. Ways of Coming to Know God

 

II. 하느님을 알게 되는 방식들

 

31 Created in God’s image and called to know and love him, the person who seeks God discovers certain ways of coming to know him. These are also called 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 not in the sense of proofs in the natural sciences, but rather in the sense of “converging and convincing arguments,” which allow us to attain certainty about the truth.

 

These “ways” of approaching God from creation have a twofold point of departure: the physical world and the human person.

 

31.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그리고 당신을 알고 그리고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하느님을 찾는 당사자는 당신을 알게 되는 구체적인 방식들을 발견합니다.(viii) 이 방식들은, 자연 과학에 있어 증명들의 의미로가 아니라, 그보다는, 우리가 이 진리에 관한 확신을 획득하는 것을 허락하는, "수렴하는(converging) 그리고 설득력 있는 논증들"의 의미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proofs for the existence of God)들이라고 불립니다.

 

창조(creation)에서부터 하느님께 다가가는 이들 "방식들"은 다음과 같은 두 겹의 출발을 가집니다: 형이하학적 세상(physical world) 그리고 인격(human person).(i)

 

32 (라틴어 대본) Mundus: Deus potest, ex motu et efficientia, ex contingentia, ex ordine et pulchritudine mundi, ut origo et finis universi cognosci.

 

32 (프랑스어본) Le monde : A partir du mouvement et du devenir, de la contingence, de l’ordre et de la beauté du monde, on peut connaître Dieu comme origine et fin de l’univers.

 

32 (영어본) The world: starting from movement, becoming, contingency, and the world’s order and beauty, one can come to a knowledge of God as the origin and the end of the universe. (54, 337)

 

게시자 주 2-1: (번역 오류) 바로 위에 발췌된 프랑스어본 및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들을, 위의 제1-2항에 발췌된, 가장 최근인 2004년 경에 처음으로 교황청 홈페이지를 통하여 제공된,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기존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이,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번역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적에 대하여서는, 바로 아래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번역문과도 또한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32. 이 세상(the world): "세상 [잠재력(potency)으로부터 획득된(attained), 실재(reality) 혹은 실체적 존재(실존, 實存, real exisence)인 어떤 상태/행위(act) 쪽으로 임의의] 움직임(movement)(ii)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iii)[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iv), 그리고 질서(order) 아름다움(beautiy)" 에서 시작함으로써, 우리는, 우주(the universe) 기원(origin) 그리고 끝(end)으로서, 하느님에 대한 어떤 지식(a knowledge)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54, 337)

 

          As St. Paul says of the Gentiles: For what can be known about God is plain to them,

          because God has shown it to them. Eve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his invisible

          nature, namely, his eternal power and deity, has been clearly perceived in the things that

          have been made.7

 

          성 바오로(St. Paul)가 이방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

          니다.7

 

          And St. Augustine issues this challenge: Question the beauty of the earth, question the

          beauty of the sea, question the beauty of the air distending and diffusing itself, question

          the beauty of the sky... question all these realities. All respond: “See, we are beautiful.”

          Their beauty is a profession [confessio]. These beauties are subject to change. Who

          made them if not the Beautiful One [Pulcher] who is not subject to change?8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다음과 같은 도전을 제시합니다: 땅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질문하라,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질문하라, 스스로를 팽창시키고

          그리고 확산시키는 공기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질문하라, 창공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질문

          하라 ... 이들 실체들 모두에 대하여 질문하라. 모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보라, 우리

          는 아름답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한 개의 고백[confessio]입니다. 이들 아름다움들은

          변화에 종속적이다(subject to change)(v). 만약에, 변화에 종속적이지 않은 
          분이신, 아름다운 분(the Beautiful One [Pulcher])이 아니라면 누구가 그들을 
          만드셨는지?8 

 

33 The human person: With his openness to truth and beauty, his sense of moral goodness, his freedom and the voice of his conscience, with his longings for the infinite and for happiness, man questions himself about God’s existence. In all this he discerns signs of his spiritual soul. The soul, the “seed of eternity we bear in ourselves, irreducible to the merely material,”9 can have its origin only in God. (2500, 1730, 1776, 1703, 366)

 

33. 인격(the human person): 진리와 아름다움 쪽으로 그의 개방성, 윤리적 선함이라는 그의 감각, 그의 자유로움 그리고 그의 양심의 목소리와 함께, 무한한 것들에 대한 그리고 행복에 대한 그의 갈망함과 함께, 사람은 자신에게 하느님의 존재에 관하여 질문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영혼(spiritual soul)의 표징(signs)들을 식별합니다. "우리 자신들 안에 우리가 품고 있는(bear), 단지 질료적인 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 영원(eternity)의 씨앗인"9 영혼(soul)은 그 기원을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습니다. (2500, 1730, 1776, 1703, 366)

 

34 The world, and man, attest that they contain within themselves neither their first principle nor their final end, but rather that they participate in Being itself, which alone is without origin or end. Thus, in different ways, man can come to know that there exists a reality which is the first cause and final end of all things, a reality “that everyone calls ‘God.’”10 (199)

 

34 이 세상, 그리고 사람은, 그들이 자신들 안쪽에 그들의 첫 번째 원리(first principle)(ix) 혹은 그들의 최종의 끝 어느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고, 그보다는 그들이, 그분 홀로 기원 혹은 끝이 없이 계시는, 거룩한 있음(Being) 그 자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attest). 따라서, 서로 다른 방식들로, 사람은 모든 사물들의 첫 번째 원인이고 그리고 최종의 끝인, "모든 이가 '하느님(God)' 이라고 부르는" 한 실재(a reality)인, 한 실재(a reality)가 존재함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10 (199)

 

35 Man’s faculties make him capable of coming to a knowledge of the existence of a personal God. But for man to be able to enter into real intimacy with him, God willed both to reveal himself to man and to give him the grace of being able to welcome this revelation in faith. The proofs of God’s existence, however, can predispose one to faith and help one to see that faith is not opposed to reason. (50, 159)

 

35 사람의 능력(man's faculties)들은 그로 하여금 한 인격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지식을 알게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분과 실제적 친밀함(real intimacy)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reveal) 것, 그리고 신앙(faith, 믿음, 신덕) 안에서 바로 이 드러내심(revelation, 계시)을 기꺼이 맞이하는(welcome) 것을, 가능하게 하는(able to) 은총(grace)을 그에게 제공하시는 것, 둘 다를 의도하셨습니다(willed).(vi)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the proofs of God's existence)들(vii), 어떠한 방식으로라도(however), 우리를 신앙(faith, 믿음, 신덕) 쪽으로 미리 기울어지게(predispose) 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가 신앙(faith, 믿음, 신덕)이 이성(reason)에 상반되지 않음을 볼 수 있도록 도웁니다. (50, 159)

-----

7 Rom 1:19-20; cf. Acts 14:15, 17; 17:27-28; Wis 13:1-9.

8 St. Augustine, Sermo 241, 2: PL 38, 1134.

9 GS 18 § 1; cf. 14 § 2.

10 St. Thomas Aquinas, STh I, 2, 3.

 

-----

2-7. (vi) 번역자 주:

(1) 다음의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색인(index) 정보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전체 내용이 어떻게 구성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은총(grace)"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6항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2C.HTM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T1.HTM

 

(2)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전체에 걸쳐, 하느님의 섭리와 관련하여, 가장 포괄적인 문맥 안에서, "은총(grace)"의 근본적인 고유한 역할(role)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의하고(define) 또 가르치고 있는 항이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5항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2월 8일]

(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은총"(grace)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 주어진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 등을 학습할 수 있다[게시일자: 2014-06-25]. 꼭 필독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race(은총)의_정의_1555.htm <----- 반드시 필독 권고

[이상, 2023년 2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2-2: (i) 번역자 주: 이 문장 및 이어지는 제32항은, 다음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가르침(St. Augustine, Sermo 241, 2: PL 38, 1134.)을 수용한 것이다:

http://www.vatican.va/spirit/documents/spirit_20000721_agostino_en.html

http://www.vatican.va/spirit/documents/spirit_20000721_agostino_fr.html

 

2-3: (v) 번역자 주: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change"에 대한 설명이다. 특히 "change(변화)""becoming(변성함/성위함)" 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음에 주목하라: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c/c172.htm

(발췌 시작)

CHANGE

 

In general, any newness in a being or any origin of a difference. More properly, it is the passing from potency (or possibility) to actuality, which may be either substantial or merely accidental. Substantial change is creation, which means origin from previous nonexistence; or transubstantiation, which is complete change of a substance; or transformation, which occurs when a new living being comes into existence, when food is changed into the living organism that absorbs it, or when a living being dies. Accidental changes are all others.

 

변화(變化, change)

 

일반적으로, 한 있음(a being) 혹은 한 차이/구별(a difference)의 임의의 기원(origin)에 있는 임의의 새로운 상태(any newness)를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more properly), 이것은 잠재력(potency) [혹은 가능성(possibility)]으로부터, 본체적인(substantial)(#) 혹은 단지 [어떤 사물의 색깔(color) 등과 같은] 부수적인 [특징](accedental)(##) 이들 둘 중의 하나인, 현실태(actuality) 쪽으로, 이행(移行) 행위(passing)를 말합니다. 본체적 변화는, (i) 이전의 비존재(nonexistence)로부터 기원(origin)을 의미하는, 창조이거나, 혹은, (ii) 한 본체의 완전한(complete) 변화를 의미하는, 성변화/본체변화(transubstantiation)이거나, 혹은, (iii) 한 새로운 있음(有)(a new being)이 존재(existence)가 될 때(comes into), 음식이 그것을 흡수하는 살아있는 유기체(有機體, organism)로 변화될 때, 혹은, (iv) 한 살아 있는 있음이 죽을 때, 발생하는, 형체(shape) 혹은 형상(form)에 있어 바꿈(transformation)을 말합니다. 부수적 변화들은 다른 것들 모두를 말합니다.

 

-----

(#) 번역자 주: "본체(substance)" 라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69.htm

(##) 번역자 주: "[어떤 사물의 색깔(color) 등과 같은] 부수적 [특징]이다(accidental)" 라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22.htm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4: (ii) 번역자 주: 영어로 "movement" 로 번역되는 용어를 "[잠재력(potency)로부터 획득된(attained), 실재(reality) 혹은 실체적 존재(실존, 實存, real exisence)인 어떤 상태/행위(a state)(act) 쪽으로 임의의] 움직임(movement)" 으로 번역한 것은, 다음에 발췌한,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motion" 에 대한 설명을 따른 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철학에서의 용어 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m/m321.htm
(발췌 시작)

MOTION

 

In Thomistic philosophy any passage from potency to act. Therefore any change and any acquisition of perfection are motion. Every creature is by its essence subject to motion because it is finite. Only God is the immovable Mover because, while he changes all things, he remains unchanged.

 

움직임/운동/이동(motion/[movement])

 

토미스트 철학(Thomist philosophy)에 있어 잠재력(potency)으로부터 획득된(attained), 실재(reality) 혹은 실체적 존재(실존, 實存, real exisence)인 어떤 상태[즉, 행위(act)](#) 쪽으로 임의의 이행(移行, 다른 상태로 옮아감)(any passage)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임의의 변화(any change) 그리고 완미(perfection)의 임의의 습득(any acquisition)들은 움직임/운동/이동(motion)입니다. 각 피조물은 그 본질(essence)에 의하여 움직임/운동/이동에 종속하는데(subject to motion) 왜냐하면 그것이 유한하기(finite)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당신께서 모든 사물들을 변화시키는 동안에(while) 당신께서는 변화없이 남아 있으시는(remains), 부동(不動) 움직이게 하는 분(the immovable Mover)이십니다. 

 

-----
(#) 번역자 주: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7일]

(1)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potency(잠재력)" 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p/p331.htm

(발췌 시작)

POTENCY

 

The capacity of a being to be, to act, or to receive. Perfectability or capacity for perfection or change. Only creatures are in potency, since God is Pure Act and unchangeable. (Etym. Latin potens, power; potentia, power, ability to be or become or do something.)

 

잠재력(potency)

 

장차 존재할, 행동할, 혹은 받아들일, 한 있음(a being)의 능력/역량(capacity)을 말합니다. 완미 혹은 변화를 위한 완미 가능성 혹은 능력/역량을 말합니다.(##) 오로지 피조물들만이 잠재력의 상태에 있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은 순전한 행위이고 그리고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원. Latin potens, power; potentia, power, ability to be or become or do something.]

 

-----
(##) 번역자 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예를 들어, 다음의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Actus et Potentia"에 대한 설명을 읽도록 하라:

http://www.newadvent.org/cathen/01124a.htm

 

특히, 존재하는(existing) 사물들에 대하여, "real(실제의)" 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개념과 "현실태의(actual)" 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주어져 있음에 주목하라:

 

(발췌 시작)

In scholastic terminology these are now real, but not actual. They exist only as potentiae, which, to manifest themselves, await the proper actualization.

 

스콜라 학파의 용어에 있어 이들은 이제 실제(real)이나, 그러나 현실태인(actual)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명시하기 위하여, 고유한(proper) 현실태화(actualization)를 기다리고 있는, 오로지 잠재력(potentia)으로서 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14년 10월 27일자 내용 추가 끝]

 

(2) "act(행위)" 를 "잠재력(potency)로부터 획득된(attained), 실재(reality) 혹은 실체적 존재(실존, 實存, real exisence)인 어떤 상태/행위(a state)" 로 번역한 것은, 다음에 있는,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 에 주어진 설명을 따른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6.htm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5: (iii) 번역자 주: 영어로 "becoming" 으로 번역되는 용어을 "변성(變成)함"으로 번역한 것은, 다음에 발췌한,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becoming" 에 대한 설명을 따른 것이다. 특히 "change(변화)""becoming(변성함)" 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음에 주목하라: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b/b065.htm

(발췌 시작)

BECOMING

 

To change; to go from one definiteness to another. Becoming is opposed to being, in the sense of a being in the process of becoming something other than what it had been. The terms "become" and "becoming" are current features of process philosophy and theology, which deny that any being, including God, simply exists, but claim that everything is in constant flux and change.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

 

변(變)하여(to change), 그리하여 하나의 명확한 상태(definiteness)로부터 또다른 명확한 상태로 나아감을, 말합니다.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은, 한 있음(a being)이 이미 있어 왔던 바 이외의 어떠한 사물이 되는(becoming something) 과정에 있는 한 있음(a being)이라는 의미로, 있음(being)에 반대됩니다(is opposed to). "변성(變成)하다/성위(成為)하다(become)" 와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 용어들은, 하느님을 포함하여 어떠한 있음(any being)도 단체적으로(simply) 존재함(exists)을 부정하며(deny) 오로지(but) 모든 사물이 지속적인 흐름(flux)과 변화에 있다고 주장하는, 과정 철학(process philosophy)(##)과 신학(theology)의 현행 특징들입니다.

 

(##) 번역자 주: Modern Catholic Dicitonary에 주어진, 이단(heresy)인, "process philosophy(과정 철학)" 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다: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p/p467.htm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5: 따라서,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은,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소위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i) 바로 위에 정의된(defined) "움직임(motion/movement)", 즉, "생기(生起)" 혹은

(ii) 이 "움직임"의 반대 개념, 즉, "소멸(消滅)"

말한다는 생각이다.

(이상, 게시자 주 끝)

 

2-6: (iv) 번역자 주:

(1) 영어로 "contingency" 로 번역되는 용어를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의] 비필연성(非必然性)"으로 번역한 것은, 전후 문맥 안에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강론으로부터 발췌된 바로 아래에 있는 인용문에서 "subject to change[변화에 종속적인]" 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용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은데, 영어본 보다는 프랑스어본을 더 신뢰하여야 할 것이다:

http://www.vatican.va/spirit/documents/spirit_20000721_agostino_en.html [영어본]

http://www.vatican.va/spirit/documents/spirit_20000721_agostino_fr.html [프랑스어본]

 

(2) 그리고 다음의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년)의 저술인 Nicomachean Ethics(윤리학), Book VI - 지성덕(intellectual Virtues)들에 대한 대학 강의용 프린트물에서, 이 저술 중의 내용을 요약한 표에서 "contingent thigns[[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들]" 을, 바로 위의 (1)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things subject to change[변화에 종속적인 사물들]" 과 등가(equivalence)로 언급하고 있는 점을 또한 고려한 것이다:

http://faculty.cua.edu/hoffmann/courses/102_1141/Aristotle_8_EN_6.pdf

http://faculty.cua.edu/hoffmann/courses/309_1141/309_Aristotle_8_EN_6.pdf

http://faculty.cua.edu/hoffmann/courses/102_1141/102.htm

 

(3) 따라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에 의한, 영어로 "contingent" 로 번역되는, 라틴어 용어 "contingo(클릭하십시오)"정의(definition) "contingent things[[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들]" 은, 예를 들어,

 

(i)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년)의 저술인 Nicomachean Ethics(윤리학)을 학습할 때 뿐만이 아니라,


(ii)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을 학습하고, 그리고 또한,

 

(iii) 1992년에 초판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를 포함하여, 교황청 제공의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의 문헌들을 학습할 때에도,

 

대응하는 해당 용어의 정의(definition)로서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

 

(4) 예를 들어, 다음은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대한 설명에서 발췌한 것이며, 이 발췌문에서 "우연적 존재들" 이라는 표현은 영어로 "contingent beings"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이 번역보다는,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있음(유, 有, beings)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일 것이다. 이 발췌문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필자의 판단에 따라 필자가, 필요시 굵게 표시하고 색칠을 하거나, 혹은 괄호 안에 해당 영어 용어를 삽입하였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709
(발췌 시작)
   2. 사상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먼저 피조물의 자율성(freedom)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견해가 신학안에서의 인간 이성의 위치,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전능, 즉 은총과의 관계, 정치 사회에 관한 그의 사상을 결정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게서 독립적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자율적이다. 창조주의 활동은 피조물의 활동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피조물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피조물들이 자율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활동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의 활동에도 불구하고도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활동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비이성적 피조물들인] 자유(freedom, liberty)가 없는 피조물들의 행동은 인과적(因果的)으로 다른 피조물들에 의해 결정되게 하고'[신학 대전 Ia, IIae, q93, a5(클릭하십시오)], '[천사들 및 인간들 등의 이성적 피조물들인] 자유(freedom, liberty)를 가진 피조물들의 행동은 타자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들은 결국 [성령] 하느님에 의해 일어나는 피조물들의 행동이다(2코린토 3,17). 그러므로 자유(freedom, liberty)란 하느님과의 어떤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원인(natural causes)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하느님 능력이 드러남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토마스가 하느님에 대해 가진 사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주안에 있는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actually, 현실태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창조주이시다. 하느님은 당신 피조물의 어느 유(類, genus)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피조물을 서로 대조적인 두 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에 필적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피조물에 원인(cause)이 있고, 또 어떤 것들은 하느님에게 원인을 돌리는 식으로 서로 대조시킬 수가 없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행동한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認知)한다는 것은 곧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구별(differences)들을 함께 초월하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우연적 존재들(contingent beings)’과 따로 구별되어 있는 ‘필연적 존재(necessary beings)’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절대적 근원으로서 ‘필연적 존재’이다. 우연적 존재(contingent beings)은 소멸될 수 있고, [질료적(material)] 가능성(potentiality)이 [형상(form)에 의해] 현실화된(be actualized) 것이다. 우연적 존재(contingent beings)이 쉽게 파괴될 수 있는 것은 이 존재들의 질료성(質料性) 때문이다. 어떤 능동자(efficients, operans) 우연적 사물(contingent things) 형상(形相, form)을 다른 것으로 바꿈으로써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질료(質料, matter)는 형상적(形相的 또는 可知的, 現實的)이 아닌 유형적 사물(bodily things)들 안에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것이 곧 개체화의 원리(piriciple of singularity, 신학 대전, Ia, q14, a11, Ia, q57, a21, Ia, q88, a1)이고, 이 원리에 의해 동일한 형상 또는 동일한 가지성(可知性, intelligibility)을 가진 다수의 개체적 사물(singular things)들이 있게 된다. 개체 사물들은 이들이 가진 물질성 때문에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가지적인(intelligible)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개체 사물도 한 단어의 의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개체적 사물들을 감각 지각으로만 안다.

(이상, 발췌 끝) 

 

2-7. (vi) 번역자 주:

(1) 다음의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색인(index) 정보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전체 내용이 어떻게 구성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은총(grace)"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6항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2C.HTM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T1.HTM

 

(2)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전체에 걸쳐, 하느님의 섭리와 관련하여, 가장 포괄적인 문맥 안에서, "은총(grace)"의 근본적인 고유한 역할(role)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의하고(define) 또 가르치고 있는 항이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5항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2월 8일]

(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은총"(grace)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 주어진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 등을 학습할 수 있다[게시일자: 2014-06-25]. 꼭 필독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race(은총)의_정의_1555.htm <----- 반드시 필독 권고

[이상, 2023년 2월 8일자 내용 추가 끝]

 

2-8. (vii) 번역자 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the proofs God's existence)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증명들은,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 a3 에 제시되어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61.htm

 

2-9. (viii) 번역자 주: 이 구체적인 방식들은 예를 들어,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 및 q13 에 대단히 잘 제시되어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60.htm [신학대전, ia, q1, 성스러운 교리]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87.htm [신학대전, Ia, q13, 하느님의 이름들]

 

2-10. (ix) 번역자 주: 여기서 "the first principle" 은 "하느님(God)"을 말한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116, a3를 참고하라:
http://www.newadvent.org/summa/1116.htm#article3

-----

 

3. 

위의 제2항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첫 문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과 이들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 중에 사용되고 있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학습하였는데, 이어지는 이번 항에서,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핵심 용어인 "contingency" 혹은 "contingent"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3-1.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contingent"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c/c527.htm

(발췌 시작)

CONTINGENT

 

Whatever can be or not be other than it is; that which need not exist. Thus all creatures are contingent beings, since they come into existence out of nothing, and they are changeable realities that depend totally on the sustaining power of God.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contingent)

 

현재의 그 자체와 다른, [해당 시점(時點)에 혹은 장차] 있거나 혹은 있지 않을 수 있는[can be or not be(esse et non esse)], 그리하여 반드시 존재할 필요가 없는(need not exist)[즉, 비필연적(非必然的)], 바로 그 무엇이든지를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thus) 모든 피조물들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있음(유, 有)(contingent beings)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무(nothing)로부터 존재(existence)로 오게 되고(come into),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의 지탱하는 힘(sustaining power)에 전적으로 종속하는(depend totally on), 변할 수 있는 실체(changeable realities)들이기 때문입니다.

 

-----

(*) 번역자 주: 바로 이 용어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2011년 6월 8일자 졸글 중에 발췌 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 하느님께서 존재하심, a3 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61.htm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2.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contingent"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는데, 이 복잡한 설명이 이 글의 독자들을 더 헷갈리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그 출처만을 안내해 드립니다. 그리고 굳이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Oblectively(객관적으로)", 제(2)항 에 주어진 설명을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4331a.htm

 

3-3.  영어 가톨릭 대사전의 용어 설명들 중에서 "Necessity"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는데, 이 설명 중에서 "contingent" 라는 용어 에 대한 설명이 또한 주어지고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6.htm  <----- 필독 권고

 

4.

 

게시자 주 4:

(1) 이번 항에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본문 중에서 "contingency", "contingent beings", "contingent things" , "contingent cause" 가 언급되고 있는 문장들 중의 일부를 구체적으로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 아래의 발췌문들을 차분히 잘 읽어보면, 그 기원이 적어도, 이상주의자인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과는 달리, 경험주의자로 알려진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contingency" 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은, 예를 들어, 형이하학적/물상 과학(physical science)을 포함하는 자연 과학(natural science) 분야와 그리고 자연 과학의 응용 분야로서의 공학(engineering) 분야들이 아닌, "신앙과 윤리(faith and morality)" 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과학/학문(science)인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theology) 분야에서 대단히 유의미한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더 구체적으로, "contingency" 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은, 특히,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는 신앙(faith, 신덕, 믿음)을 위한 "교의 신학" 분야, 그리고 관상적 삶(contemplative life)을 위한 대한 "영성 신학" 분야,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윤리(Christian moality)를 위한 "윤리 신학" 분야 및 "실천 신학" 분야 등에서, 대단히 유의미한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4-1.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14, a13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summa/1014.htm#article13
(발췌 시작)

On the contrary, It is written (Psalm 32:15), "He Who hath made the hearts of every one of them; Who understandeth all their works," i.e. of men. Now the works of men are contingent, being subject to free will. Therefore God knows future contingent things.

 

이와는 달리, "그들의", 즉 사람들의, "심장(hearts)을 다 빚으시고 그들의 모든 행위(works, 일)를 헤아리시는 분이시다" (시편 33(32),15)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일/노동(works)들은, 자유 의지(free will)에 종속하기 때문에[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미래의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들을 아십니다.

 

I answer that, Since as was shown above (Article 9), God knows all things; not only things actual but also things possible to Him and creature; and since some of these are future contingent to us, it follows that God knows future contingent things.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우리가 위(제9항)에서 보게 되었듯이,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현실태적 사물들 뿐만이 아니라 또한 당신과 피조물에게 가능한 사물들을, 모든 사물들을 아시며, 그리고 이들 중의 일부는 우리에게 미래의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미래의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들(future contingent things)을 아심이 뒤따릅니다.

 

In evidence of this, we must consider that a contingent thing can be considered in two ways; first, in itself, in so far as it is now in act: and in this sense it is not considered as future, but as present; neither is it considered as contingent (as having reference) to one of two terms, but as determined to one; and on account of this it can be infallibly the object of certain knowledge, for instance to the sense of sight, as when I see that Socrates is sitting down. In another way a contingent thing can be considered as it is in its cause; and in this way it is considered as future, and as a contingent thing not yet determined to one; forasmuch as a contingent cause has relation to opposite things: and in this sense a contingent thing is not subject to any certain knowledge. Hence, whoever knows a contingent effect in its cause only, has merely a conjectural knowledge of it. Now God knows all contingent things not only as they are in their causes, but also as each one of them is actually in itself. And although contingent things become actual successively, nevertheless God knows contingent things not successively, as they are in their own being, as we do but simultaneously. The reason is because His knowledge is measured by eternity, as is also His being; and eternity being simultaneously whole comprises all time, as said above (Question 10, Article 2). Hence all things that are in time are present to God from eternity, not only because He has the types of things present within Him, as some say; but because His glance is carried from eternity over all things as they are in their presentiality. Hence it is manifest that contingent things are infallibly known by God, inasmuch as they are subject to the divine sight in their presentiality; yet they are future contingent things in relation to their own causes.

 

이것의 증거로서, 우리는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a contingent thing)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식들로 고찰될 수 있음을 마땅히 고찰하여야 하는데, 첫 번째, 그것이 지금 행위 중에 있는 한 그 자체로(in itself),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로 그것이 미래(future)로서가 아니라, 현재(present)로서, 그리고 그것이 두 말단(terms)들 중의 하나(one) 쪽으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것으로서가 결코 아니라, 하나(one) 쪽으로 결정되는 것으로서 고찰되는 것이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를 들어, 제가 "소크라테스가 앉는 중임"을 볼 때에서 처럼, 시력이라는 감각 쪽으로, 그것은 무류하게 특정한 지식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a contingent thing)은 그것이 그 원인 안에 있는 것으로서 고찰될 수 있으며,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은 미래이며(future), 그리고 하나(one)로 그 시점(時點)까지 결정되지 않은(not yet determined)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a contingent thing)로서 고찰되는데, 이것은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원인(a contingent cause)이 반대의 사물(opposite things)들 쪽으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바로 이러한 의미로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a contingent thing)은 어느(any) 특정한 지식에 종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결과(a contingent effect)를 오로지 그 원인 안에서만 아는 자 누구든지, 단지 그것에 대한 어떤, 확정적이지 않은, 지식(a conjectural knowledge)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 모두를, 그들이 그들의 원인들 안에 있는 것으로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 중의 각 하나가 현실태적으로 그 자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 아십니다. 그리고 비록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이 순차적으로 현실태(actuality)가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을, 우리가 오로지(but) 동시에 행하듯이(do, 알듯이), 그들이 그들 고유의 있음 안에 있는 것으로서, 순차적이지 않게 아십니다. 이 이유는 당신의 지식이, 당신의 있음(being)이 또한 그러하듯이, 영원(eternity)에 의하여 측정되고, 그리고 영원이, 위(질문 10, 제2항)에서 말해졌듯이, 동시적으로 전체이기 때문에, 모든 시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어떤 이들이 말하듯이, 단지 그분께서 그분 안쪽에 현존하는 사물들의 형태(types)들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또한 당신의 얼핏 봄(glance)이 모든 사물들에 대하여 그들이, 그들의 현존 상태(presentiality)에 있는 것으로서, 영원으로부터 수행되기 때문에, 영원에서부터 하느님께 현재이기(present) 때문입니다. 따라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이 하느님에 의하여 무류하게 알게 됨은, 그들이 그들의 현존 상태(presentiality)에서 하느님의 시야에 종속하는 한, 명백하나(manifest), 그 시점(時點)까지(yet) 그들은 그들 고유의 원인들에 관련하여 미래의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2.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2, a4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summa/1022.htm#article4
(발췌 시작)
And thus it has prepared for some things necessary causes, so that they happen of necessity; for others contingent causes, that they may happen by contingency,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ir proximate causes.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 섭리[it, 즉, 신성적 섭리(divine providence)]어떠한 사물들을 위하여, 그들이 필연성에 의하여 발생하도록 [그리하여 그 결과가 필연적이도록] 필연적 원인(necessary causes)들을 이미 마련하였으며, 그리고 다른 사물들을 위하여, 그들이, 그들의 가장 가까운 원인(proximate causes)들의 본성(nature)에 따라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의] 비필연성(非必然性)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 결과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이도록]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원인(contingent causes)들을 이미 마련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3.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3, a6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게시자주 4-3: 특히 신학대전 본문 전체에 걸쳐,


(i)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 이라는 용어와,

(ii) "예정(predestation)" 이라는 용어, 그리고

(iii) 사람들의 "유 의지(free-will)"가 또한 언급되면서,

 

(iv)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계시된 "객관적 구속(objective redemption)"에 참여하여야 하는 우리들 각자의 "주관적 구속(subjective redemption)"에 있어서의 "자유 의지(free-will)" 역할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는 있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아래에 발췌된 문장임에 주목하십시오: 

(이상, 게시자 주 끝)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1.htm

(발췌 시작)
I answer that, Predestination most certainly and infallibly takes effect; yet it does not impose any necessity, so that, namely, its effect should take place from necessity. For it was said above (Article 1), that predestination is a part of providence. But not all things subject to providence are necessary; some things happening from contingency,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proximate causes, which divine providence has ordained for such effects. Yet the order of providence is infallible, as was shown above (Question 22, Article 4). So also the order of predestination is certain; yet free-will is not destroyed; whence the effect of predestination has its contingency. Moreover all that has been said about the divine knowledge and will (14, 13; 19, 4) must also be taken into consideration; since they do not destroy contingency in things, although they themselves are most certain and infallible.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예정론(predestination)(*)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무류하게 효력을 나타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이 론은, 말하자면, 그 결과가 필연성으로부터 반드시 발생하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any) 필연성(必然性, necessity)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이는 위(제1항)에서 에정론은 [하느님의] 섭리(providence)의 한 부분이라고 말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섭리에 종속하는 사물들 모두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어떠한 사물들은, 하느님의 섭리가 그러한 결과들을 위하여 이미 명령한(has ordained) 가장 가까운 원인(the proximate causes)들의 본성에 따라,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으로부터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섭리라는 질서(the order of providence)는, 위에서 (질문 22, 제4항) 보게 되었듯이, 무류합니다(infallible). 그래서 또한 예정론이라는 질서도 확실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자유 의지(free-will)는 파괴되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예정론(predestination)의 결과는 그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을 가집니다. 더구나 하느님의 지식 및 의지(신성적 knowledge and will) 에 관하여 이미 말해진 모두(14, 13; 19, 4) 또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비록 그들 자체들이 가장 확실하고 그리고 무류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사물들에 있는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
번역자 주: 이 용어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개신교측의 "이중 예정설(predestinarianism)"과의 차이점에 대한 글들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76.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67.htm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4.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5, a3, reply to Objection 4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summa/1025.htm#article3

(발췌 시작)

For it is according to the condition of the proximate cause that the effect has contingency or necessity, as was shown above (14, 1, ad 2). Thus is it that the wisdom of the world is deemed foolish, because what is impossible to nature, it judges to be impossible to God. So it is clear that the omnipotence of God does not take away from things their impossibility and necessity.

 

이는, 위에서(14, 1, ad2) 보게 되었듯이, 그 결과(the effect)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 혹은 필연성(必然性, necessity)을 가지는 것은 가장 가까운 원인(proximate cause)의 조건(condition)에 따라서 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의 지혜는 어리석다고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본성(nature)에 불가능한 바를 이 지혜는 하느님께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omnipotence)이 사물들로부터 그들의 불가능성(impossibility)과 필연성(necessity)을 박탈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5.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86, a3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출처 1: http://www.newadvent.org/summa/1086.htm#article3

출처 2: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84-86.htm#q86a3co

(발췌 시작)

I answer that, Contingent things can be considered in two ways; either as contingent, or as containing some element of necessity, since every contingent thing has in it something necessary: for example, that Socrates runs, is in itself contingent; but the relation of running to motion is necessary, for it is necessary that Socrates move if he runs. Now contingency arises from matter, for contingency is a potentiality to be or not to be, and potentiality belongs to matter; whereas necessity results from form, because whatever is consequent on form is of necessity in the subject. But matter is the individualizing principle: whereas the universal comes from the abstraction of the form from the particular matter. Moreover it was laid down above (Article 1) that the intellect of itself and directly has the universal for its object; while the object of sense is the singular, which in a certain way is the indirect object of the intellect, as we have said above (Article 1). Therefore the contingent, considered as such, is known directly by sense and indirectly by the intellect; while the universal and necessary principles of contingent things are known only by the intellect. Hence if we consider the objects of science in their universal principles, then all science is of necessary things. But if we consider the things themselves, thus some sciences are of necessary things, some of contingent things.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식들로 고찰될 수 있습니다: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들으로서(as contingent), 혹은 필연성의(of necessity) 어떤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사물들로서, 이들 둘 중의 하나로 인데, 그 이유는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은 그 안에 필연적인 어떠한 사물(something)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달린다(Socrates runs)"는 그 자체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contingent)이나, 그러나 운동(motion)에 대한 달리는 행위(running)의 관계는 필연적인데, 이는 소크라테스가, 만약에 그가 달린다면, 움직이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은 질료(matter)로부터 일어나는데(arises from), 이는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의]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은 [해당 시점(時點)에 혹은 장차] 있거나 혹은 있지 않을[to be or not to be (esse et non esse)] 어떤 가능태(a potentiality)이고(*), 그리고 가능태는 질료에 적절하기/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기(pertinet ad) 때문이나, 이에 반하여(whereas)  필연성은 [현실태인] 형상(form)으로부터 결과로서 생기는데(results from), 왜냐하면 형상에 결과로서 생기는 무엇이든지간에 그 주체(the subject)에 있어 필연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료는 개별화 원리이나(the individualizing principle), 이에 반하여(whereas) 보편적 실재(the unviersal)는 개별 질료로부터 그 형상의 추상화(abstraction of the form)로부터 옵니다(come from). 더구나 지성(the intellect) 저절로(of itself)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보편적 실재(the universal)을 가지나, 이와는 대조적으로(while) 감각(sense)의 대상이 개별적 실재(the singular)임은 위에서(제1조) 단언되었는데, 이 실재는, 우리가 위에서(제1조)에서 이미 말했듯이,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지성(the intellect)의 간접적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로서 고찰되는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것(the contingents)들은 감각(sense)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그리고 지성(the intellect)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알게 되나, 이와는 대조적으로(while) 보편적인 그리고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the universal and contingent things)들의 필연적 원리들은 오로지 지성(the intellect)에 의하여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과학(학문, science)의 대상들을 그들의 보편적 원리들 안에서 고찰한다면, 모든 과학은 필연적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들 자체들을 고찰한다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thus) 어떠한 과학들은 필연적인 사물들에 대한 것이고, 어떠한 과학들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
(*) 번역자 주: 바로 이 문장이 "contingency"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이다.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6.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57, a6 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summa/2057.htm#article6

(발췌 시작)

Reply to Objection 3. As stated in Ethic. vi, 2, truth is not the same for the practical as for the speculative intellect. Because the truth of the speculative intellect depends on conformity between the intellect and the thing. And since the intellect cannot be infallibly in conformity with things in contingent matters, but only in necessary matters, therefore no speculative habit about contingent things is an intellectual virtue, but only such as is about necessary things. On the other hand, the truth of the practical intellect depends on conformity with right appetite. This conformity has no place in necessary matters, which are not affected by the human will; but only in contingent matters which can be effected by us, whether they be matters of interior action, or the products of external work. Hence it is only about contingent matters that an intellectual virtue is assigned to the practical intellect, viz. art, as regards things to be made, and prudence, as regards things to be done.

 

반론 3에 대한 답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인] Ethic(윤리학). vi, 2에 서술되어 있듯이, 진리는 실천적 지성(the practical intellect)의 경우에, 사변적 지성(the speculative intellect)의 경우에서처럼, 마찬가지(the same)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변적 지성의 진리는 지성과 사물(the thing) 사이의 부합(confirmity)에 의존하기(depends on)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성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질료(contingent matters)들 상태에 있는 사물들이 아니라, 오로지 필연적인 질료(necessary matters)들과 무류하게(infallibly) 부합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결과(therefore)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에 관한 어떠한 사변적 습관(no speculative habit)도 어떤 지성덕(an intellectual virtue)이 결코 아니고, 오로지 필연적 사물들에 관하여만 [어떤 사변적 습관이] 그러합니다(such as is). 다른 한편으로, 실천적 이성의 진리는 올바른 욕구(right appetite)와의 부합에 의존합니다(depends on). 바로 이 부합은, 결코, 인간의 의지(human will)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 필연적 질료들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이 내면적 행위(interior action)의 질료들이든지, 혹은 외면적 일(exterior work)의 산출물(the products)들이든지 간에(whether), 우리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사물(contingent things)들에만 자리를 가집니다(has place in). 따라서 어떤 지성덕이 실천적 지성에 할당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질료(contingent matters)들에 관하여 뿐입니다, 즉, 만들어져야 할 사물들에 관하여, 기술(art), 그리고 행해져야 할 사물들에 관하여, 현명(prudence).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7월 29일]

4-7.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91, a4 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들에게 자연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신성적 법[divine law, 즉, 신법, 즉 계시된 법(revealed law)]이 필요함을 말할 때에 다음을 또한 언급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4.htm

(발췌 시작)

Secondly, because, on account of the uncertainty of human judgment, especially on contingent and particular matters, different people form different judgments on human acts; whence also different and contrary laws result. In order, therefore, that man may know without any doubt what he ought to do and what he ought to avoid, it was necessary for man to be directed in his proper acts by a law given by God, for it is certain that such a law cannot err.

 

두 번째로, 특히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contingent) 그리고 개별적인 사안(matter)들에 대한 인간의 판단의 불확실성의 이유로, 인간의 행위들에 대하여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판단들을 형성하고, 그리고 거기로부터 또한 서로 다른 그리고 상반되는 법들이 결과로서 생기기(result)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이 당연히 행하여야(do) 하는 바를 그리고 그가 당연히 피하여야(avoid) 하는 바를 알기 위하여, 사람이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진 어떤 법 [즉, 신성적 법(divine law), 신법, 계시된 법(revealed law), 계시법](*)에 의하여 자신의 고유한 행위들에 있어 명령을 받는(be directed) 것은 필요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법이 틀릴(err) 수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

(*) 번역자 주: "신성적 법(divine law)", 즉,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법(revealed law)"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07.htm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5.

 

게시자 주 5: 이번 항에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또다른 저술인 "Summa Contra Gentiles"의 영어본에 주어진, 1905년에 출판된 저서의, 주석들을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자료들을 찾아낸 google 검색 키는  

"contingent" "Gc" site:http://maritain.nd.edu/jmc/etext/

였습니다]:

 

https://maritain.nd.edu/jmc/etext/gc.htm

 

https://maritain.nd.edu/jmc/etext/gc1_13a.htm

 

https://maritain.nd.edu/jmc/etext/gc1_61d.htm

 

http://maritain.nd.edu/jmc/etext/gc1_67a.htm

 

https://maritain.nd.edu/jmc/etext/gc1_67b.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This uncertainty, as I have argue in the previous note, is a mere incident of the ignorance and infirmity of our minds in dealing with a complex case of causality. To an omniscient mind there would be no uncertainty. Such a mind would read the contingent event as necessarily contained in and necessarily following from its causes. I speak of events of pure physical causation: for, as I have said, of such only is there question here. I allow for the dependence of all physical nature upon the free will of God, creating things, preserving them in being and activity, fixing a certain collocation of causes from the first, and occasionally by His own special action interfering (as man in an inferior way also interferes) with the course of nature, by what is called a miracle.

 

제가 이전의 주(note)에서 이미 논하였듯이, 이러한 불확실(uncertainty)연기(緣起, causality)(*)의 한 복잡한 경우를 다룸에 있어 우리의 마음(minds)들의 무지(ignorance) 및 허약(infirmity)이라는 한 단순한 부수적 사건(a mere incident)입니다. 한 전지(全知)의 마음(an omnisccient mind)에게는 아무런 불확실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 사건(contingent event)을 그 원인들에 필연적으로 포함된 그리고 그 원인들로부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으로서 읽을(read) 것입니다(would). 저는 순수한 형이하학적 인과 관계(causation)의 사건들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는, 제가 이미 말했듯이, 오로지 그러한 것에 대한 질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자유 의지(free will of God)에 대한 형이하학적 자연(physical nature) 모두의 의존(dependence) 때문에(for), 사물들을 창조함, 있음(being) 및 활동(activity)으로 그들을 보존함, 그 첫 번째 원인으로부터 원인들의 어떤 배열을 정함(fixing), 그리고 때때로, 한 개의 기적(a miracle)이라고 불리는 바에 의하여, 당신의 고유한 특별한 행위에 의한 자연의 과정과 (사람이 저급한 방식으로 또한 간섭하듯이) 간섭함을, 인정합니다(allow).

 

-----

(*) 번역자 주: "연기(緣起, causality)"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63.htm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http://maritain.nd.edu/jmc/etext/gc2_26c.htm

 

https://maritain.nd.edu/jmc/etext/gc3_59d.htm

 

http://maritain.nd.edu/jmc/etext/gc3_72a.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Cf. I, Chapp. LXVII (with notes), LXXXV.

 

The contingent, sumbebêkos, is that which is, but might not be (Aristotle, Physics, VIII, v). The term is still of interest to the logician, and to the psychologist, who concerns himself with the freedom of the will, but has lost all interest in physical science, except in the cognate sense of accidental.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인 것(the contingent), sumbebêkos 는 [해당 시점(時點) 혹은 장차] 있으나, 그러나 있지 않을 수도(may) 있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형이하학(Physics), VIII, v]. 이 용어는 여전히 논리학자(the logician)에게, 그리고 의지의 자율성(the freedom of the will) 에 관여하는, 심리학자(the psychologist)에게, 흥미가 있으나, 그러나, [어떤 사물의 색깔(color) 등과 같은] 부수적 사물/특징(accidental)의 어원(語源)의 의미(cognate sense)를 제외하고형이하학적 과학(physical science, 물상 과학)에서 모든 흥미를 이미 상실하였습니다.(**)

 

-----
(*) 번역자 주: 바로 이 문장이 "the contingent"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이다.

 

(**) 번역자 주: 이 문장은, 더 구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포함하여, 그리스 시대의 일부 철학자들이 주장하였던 천동설(天動說, geocentricism)이 오류(error)임을 입증하는, 지동설(地動說, heliocentrism)의 강력한 천문학 관측 근거인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년)의 제3법칙(the 3rd law of Kepler)" 을, 자신의 저술인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소위 말하는 "면적(area)의 계산"을 누구나 손쉽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미적분학의 기본 정리]미분(differentiation)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수학적으로 엄격하게 증명한 뉴톤(Isaac Newton, 1642-1727년)에 의하여 발생하게 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https://maritain.nd.edu/jmc/etext/gc3_94a.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Such an effect as the death by lightning of a sheep in a thunderstorm, which St Thomas would call 'contingent,' is really a complex physical effect, as necessary a part of the pre-established order of physical causation as the alternation of day and night.

 

성 토마스(St. Thomas)가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이다contingent)' 라고 불렀을(would call), 한 뇌우에서 한 마리 양의 번개에 의한 죽음과 같은 결과는 정말로(really), 낮과 밤의 교대만큼 형이하학적 인과 관계(physical causation)에 있어서의 미리 제정된 질서의 필연적인(necessary) 한 부분인, 한 개의 복잡한 형이하학적 결과입니다.(*)

 

-----
(*) 번역자 주:

(1) 이와 같은 지적은 또한 답변 중에, "태양의 움직임(the movement of the sun)" 이라는 언급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에 의하여 저술된, 신학 대전 본문 전체에 걸쳐 단 한 번 등장하는,  따라서 오류(error)천동설(天動說, geocentricism)에 근거하고 있는 예제(example)가 제시되고 있는, 그러나, 이 예제를 제외하고, 답변의 내용 그 자체에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14, a13, Reply ot Objection 1에 적용될 것이다:

http://www.newadvent.org/summa/1014.htm#article13

 

(2)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신학 대전 본문의 "추가/부록(supplement)"으로서 마련된신학 대전, Supplement, q91, a1에서, 오류(error)천동설(天動說, geocentricism)에 근거한 답변이,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한 번 더 주어져 있다. 또한 참고하라:

http://www.newadvent.org/summa/5091.htm#article1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http://maritain.nd.edu/jmc/etext/gc3_94e.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In speaking of a 'necessary cause' St Thomas is in fact thinking of a physical cause which is not likely to be counteracted, or to have any of its requisite conditions fail, e.g., the rotation of the earth producing sun-rise. In speaking of a contingent cause, -- so far as the phrase may be used without bringing free will into the field, -- he has in view a physical cause, the action of which may readily be counteracted by the interference of other physical causes, or may fail of effect because some one of its many requisite conditions is not present. A contingent physical cause, uninterfered with and having all its conditions present, works as a necessary cause.

 

한 '필연적 원인'(a 'necessary' cause)에 대하여 말함에 있어, 성 토마스(St. Thomas)는 사실, 예를 들어, 일출(sun-rise)을 산출하는 지구의 자전과 같이, 중화되거나(be counteracted) 혹은 그 요구 조건들 중의 어느 것도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없는, 한 형이하학적 원인(a physical cause)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 condition)이] 비필연적(非必然的) 원인(a contingent cause)에 대하여 말함에 있어, --  이 표현이 해당 분야 안쪽으로 자유 의지(free will)를 데려옴 없이 사용될 수도 있는 한, -- 그는 관점에 있어(in view), 그것의 활동이 다른 형이하학적 원인들의 간섭에 의하여 쉽게 중화될(be counteracted) 수도 있거나, 혹은, 그것의 수많은 조건들 중의 어떠한 하나가 현존하지(present) 않기 때문에, 결과를 달성하지 못할(fail of) 수도 있는, 한 형이하학적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섭받지 않는 그리고 그것의 조건(conditions)들 모두를 현존하게 하는, 한 [변성(變成)함에 있어 연(緣)이] 비필연적(非必然的) 형이하학적 원인(a contingent physical cause)은 한 필연적 원인(a necessary cause)으로서 일합니다(works).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http://maritain.nd.edu/jmc/etext/gc3_95d.htm

 

6. 끝으로, 다음의 질문 및 이에 대한 답변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질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전체에 걸쳐, 위의 제2-6항에 그 정의(definition)가 안내된,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 이라는 단어는 총 몇 번 사용되고 있을까요?

 

질문에 대한 답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과 제310항, 이렇게, 단 두 번입니다.

 

6-1. 번역 오류와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2항의 라틴어 정본, 영어본, 그리고 우리말 번역본에 대한 정밀한 비교/검토는 위의 제2-1항에서 이미 고찰하였습니다.

 

6-2.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0항에서 발견되는 또다른 번역 오류들에 대하여서는, 제6-2-1항에 있는 영어본 및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번역문을 아래의 제6-2-2항의 기존의 번역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6-2-1.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0항)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1p4.htm#I

(발췌 시작)

310 But why did God not create a world so perfect that no evil could exist in it? With infinite power God could always create something better.174 But with infinite wisdom and goodness God freely willed to create a world "in a state of journeying" towards its ultimate perfection. In God's plan this process of becoming involves the appearance of certain beings and the disappearance of others, the existence of the more perfect alongside the less perfect, both constructive and destructive forces of nature. With physical good there exists also physical evil as long as creation has not reached perfection.175

 

31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무도 완미(完美)하여(perfect)(1) 그 안에 어떠한 악(evil)(2)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한 개의 세상을 왜 창조하지 않으셨는지요? 무한한 힘으로써 하느님은 더 선한 그 무엇을 항상 창조할 수 있으십니다.174 그러나 무한한 지혜(wisdom) 및 선함(goodness)으로써 하느님은 그 궁극적 완미(完美, perfection)(1)를 향하여 "여행함(journeying)이라는 어떤 상태에 있는" 한 개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을 자유롭게 의도하셨습니다(willed). 하느님의 계획에 있어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3)이라는 바로 이러한 과정은, 특정한 있음(有, beings)(4)들의 출현(appearance)과 다른 있음들의 소멸(disappearance)을, 덜 완미한 것(the less perfect)들과 함께 더 완미(完美)한 것(the more perfect)(1)들의 존재(existence)(5)를, 자연의 건설적 및 파괴적 힘들 둘 다를, 수반합니다(involves). 형이하학적 선(physical good)과 함께 형이하학적 악(physical evil)(6), 피조물이 완미(perfection)(1)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한, 또한 존재합니다.175

 

-----

174 Cf. St. Thomas Aquinas, STh I,25,6.
175 Cf. St. Thomas Aquinas, SCG III,71. 

번역자 주: 누구든지 위의 발췌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음의 전통적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교회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를 우선적으로 숙지하여야 할 것이다:

 

(1) 차용된 번역 용어들인 "complete[완전(完全)한]" 과 "perfect[완미(完美)한]"의 차이점은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2011년 8월 14일자 졸글]

 

(2) 차용된 번역 용어인 "악(evil)"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5.htm  [2011년 7월 17일자 졸글]

 

(3) 차용된 번역 용어인 "변성(變成)함/성위(成為)함(becoming)"의 정의(definition)는 위의 제2-5항에 있다.

 

(4) & (5) 차용된 번역 용어들인 "있음(有, being)" 과 "존재(existence)"의 차이점은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6.htm  [2012년 1월 24일자 졸글]

 

(6) 차용된 번역 용어인 "형이하학적 악(physical evil, 물리적 악)" 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84.htm [2012년 10월 27일자 졸글]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6-2-1: 바로 위의 번역자 주에 있는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를 우선적으로 숙지한 후에, 바로 아래에 발췌된 우리말 번역문과 위에 마련된 우리말 번역문이, 그 내용 전달 및 이해에 있어 어떠한 차이점들이 있는지, 국내의 성직자 및 수도자들을 포함하여,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아래의 기존의 번역문에서, 어떠한 단어들이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누락 혹은 제거되었는지 꼭 확인하십시오. 특히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아래의 번역문에서는 "있음(有, being)" 과 존재(existence)" 를 구분하지 않고 있음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6-2-2.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0항)

 

출처: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
110610121307&page=150

(발췌 시작)
310 하느님께서는 왜 악(2)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1)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 149) 그러나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1)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 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이러한 변화(3)는 어떤 존재(4)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소멸을, 더 완전한 것(1)과 더불어 덜 완전한 것을(5),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그 완성(1)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리적 선은 물리적 악(6)150) 과 공존한다.

 

-----

149.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 ,  1,  q. 25,  a.  6: Ed. Leon.  4, 298-299 참조.

15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이교도 논박」 , 3, 71: Ed. Leon. 14, 209-211 참조.
-----

(이상, 발췌 끝)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현재까지 약118시간

 



2,087 2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