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창조주하느님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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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1동성당 [suyu1] 쪽지 캡슐

2005-06-15 ㅣ No.451

 

강원도에는 남대천이라는 강이 있는데, 가을이 되면 연어들이 바다에서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옵니다. 연어는 다 자라서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신들이 알에서 깨어난 곳을 찾아가 그곳에다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송사리 보다 작은 어린 연어들이 넓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몇 년간 자란 다음에 자신이 알에서 깨어난 강을 찾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이런 습성은 우연히 생긴 것일까요?

연어뿐만 아니라 다른 동, 식물에서도 일정한 질서와 규칙이 발견됩니다. 작은 풀과 벌레 한 마리에서도 일정한 생리현상과 자기 역할 수행을 볼 수 있습니다. 소우주라고 하는 인간의 몸에서도 정교한 질서와 규칙들이 발견됩니다. 또한 대우주에는 지구만이 아니라 수성, 금성, 화성 등 수많은 별들과 행성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정교하고 질서 있게 운행합니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정교하고 질서가 잘 잡혀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일부 과학자들은 우주와 생물의 모습을 관찰할수록 그것이 우연에 의해 저절로 생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지성을 지닌 설계자’를 전제할 때 비로소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론 물리학의 창시자인 아이작 뉴턴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우주의 신비한 설계와 조화는 전지전능한 어떤 존재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알아낸 궁극적이며 최고의 깨달음이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학자들이 세상과 우주의 모습을 보면서 인정한 '지성을 지닌 설계자'를 인정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설계자"가 다름 아닌 하느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구약성서 창세기 1,2장의 말씀에 따라서 이 하느님께서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계속 돌보신다고 믿습니다.

창세기의 1,2장의 저자들은 현대 과학을 몰랐고, 따라서 세상 시초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상세하게 서술하려는 데에 목표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이야기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신앙의 진리를 가르쳐 주려고 했을 뿐입니다.그러므로 창조설화를 자연과학적 기록처럼 읽으려 한다면 초점을 잘못 맞춘 것입니다. 해석을 올바로 하기 위해서는 본래 글의 성격에 맞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창조설화의 저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우주와 세상의 형성과정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물을 것이 아니라, 원래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이야기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인생과 신앙의 진리를 가르쳐 주려고 했습니다. 마치 할머니가 어린 손자에게 인생의 지혜와 진리를 이야기에 담아서 설명해주는 것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흥부 놀부 이야기나, 콩쥐팥쥐를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인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삶의 진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두 이야기는 권선 징악, 즉 착하게 살면 결국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삶의 진리를 전해줍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게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신앙의 진리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구약성서, 창세기 저자들의 전하려는 신앙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과 인간은 그 기원을 하느님께 둔다는 것, 하느님은 세상을 좋게 창조하셨고, 남녀 인간을 당신 모습에 따라 창조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이 세력에 편승하여 인간이 생명의 길 대신 파괴의 길로 들어서서 방황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애쓰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의 저자들이 전하는 신앙의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가치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에게 기원을 두고,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이 악으로 기울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좀 덜 외롭게, 좀 더 씩씩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왜소하게 여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는 정 반대지요. 하느님을 올바로 믿게되면 인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교에서 믿는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분,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분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갖가지 것들에 대해 저항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는 인간을 병들게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 맑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종교는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올바른 종교인이 많아져서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를 기원합니다. /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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