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사진 자료실

[성당] 수원교구 왕림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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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06-04 ㅣ No.1027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수원교구 왕림 성당

한국 교회 세 번째 본당이자 수원교구의 뿌리

 

 

(사진설명)

1. 한국교회 세 번째 본당이자, 한수 이남 최초의 본당인 '믿음의 고향' 왕림 성당 전경. 현 성당은 1988년 100주년을 맞아 봉헌된 것이다. 왼쪽 뒷편 멀리에 천주 섭리 수녀회 건물이 보인다.

2. 왕림 본당 김정곤 주임신부와 최태환씨, 박경석 사목회 총회장(왼쪽부터)이 100여년전 왕림 성당 사진을 보며 신앙선조들의 삶을 회상하고 있다. 박경석 사목회 총회장이 100년전 왕림 성당이 사용하던 오르간을 보여주고 있다. 오르간 왼쪽 상단에는 '일본악기제조주식회사, 1895년 3월4일 제작'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쉽게 찾아가기 어려운 곳'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다. 하루종일 기차에 시달리고, 또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한참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 '몸이 태어난 고향'은 그래서 몸이 성장한 뒤에는 쉽게 찾아기 힘든 '마음의 고향'이 된다.

 

하지만 이번 주 '믿음의 고향'은 의외로 손에 닿을 듯한 가까운 곳에 있다. 서울에서 과천~의왕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불과 30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 경기도 화성시 봉당읍 왕림리 252번지, 왕림 본당(주임 김정곤 신부)은 한수 이남 1호 본당이다.

 

115여년전인 1888년, 세상이 한국을 조선으로 부르던 그 시절. 당시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걸어서 아침에 출발해 저녁 무렵 도착할 수 있는 이곳에 종현(현재의 명동, 1882년 설립), 원산(1887년 설립) 본당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본당이자 수원교구의 뿌리인 왕림 본당을 세웠다.

 

'당시 충청도 혹은 경상도 지역 본당 설립이 더 급했을 텐데, 왜 당시 선교사들은 서울이 지척인 이곳에 본당을 설립했을까.' 의문은 성당 마당에서 기자를 반갑게 맞은 박경석(마태오,61) 사목회 총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풀렸다. "왕림은 옛부터 조선시대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선교사들이 충청도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습니다."

 

사제들이 발길이 잦아서 일까. 최윤환 몬시뇰, 오기선, 최경환, 이정운, 김화태 신부 등 출신 사제만 열 손가락이 넘는다. 수도자는 그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박 회장의 설명을 듣는 동안 구교우촌 특유의 신앙 분위기와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주일미사때 아직도 남여 신자가 좌석을 구분해 앉는다는 말도 어색하지 않았다.

 

성당 외양은 '믿음의 고향'답게 전통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건축재료를 사용하고 있어 최근에 지어진 건물임이 쉽게 파악됐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5대째 왕림에서 신앙을 이어오고 있는 최태환(라파엘,77, 최윤환 몬시뇰 형)씨가 초기 왕림 성당의 사진을 보여줬다. 초가집이었다. 초대주임 안학고(앙드레) 신부가 이 초가집에 머물며 관할지역인 수원, 용인, 안성, 평택까지 오가며 사목했을 생각을 하니,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왕림성당은 이후 1901년 33칸 기와집 성당으로 모습을 바꿨으며 지금의 성당은 1988년 봉헌된 것이다.

 

세월은 성당 외양뿐 아니라 주변 모습도 바꿔놨다. 박 총회장은 왕림 일대를 '신앙 벨트'라고 부르며 자랑했다. 성당을 중심으로 수원 가톨릭대학교, 한국 외방선교회 신학원, 천주 섭리 수녀회, 위로의 성모 수녀회 수련소, 그리스도 사상 연구소 등 교회 기관이 2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왕림 성당 뒤를 감싸고 있는 산이 건달산(乾達山)인데 신자들의 풀이로는, '하늘에 닿는(오르는) 산'이라는 뜻. 그런데 이제는 교회 건물을 지나지 않고는 이 산을 오를 수 없게 됐다. 적어도 왕림에서는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오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성당 옆에 '박물관' 간판을 내건 건물이 있다. 초기교회 전례용품과 제대, 묵주 등 500여점의 유물을 전기하고 있는 박물관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김정집(바오로,48)씨는 "아직 공식 박물관은 아니지만 자료를 더 확충하고 사료를 수집해 차후에 공식 개관할 예정"이라고 했다.

 

박물관 창밖으로 4차선으로 확장된 수원~발안간 국도가 보였다. 차들이 막힘없이 시원스레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오히려 왕림의 그늘이 읽혀졌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지역 주민의 90% 이상이 신자였던 교우촌. 비신앙인이 마을에 이사오면 분위기에 휩쓸려 세례를 받았던 곳. 하지만 도로가 확장되고 인근지역이 개발되면서 복음화율이 20%대로 떨어졌다.

 

단층 기와집이 전부이던 이곳에 연립 주택이 총총이 들어서 있다. 360개 교리문답을 외우지 못하면 세례를 받지 못하던 시절, 판공성사를 위해 학교까지 거르고 성당에 왔던 그 60, 70대 신자들이 내놓은 수박과 참외가 어느덧 떨어져 가고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마을 입구까지 약 200m를 걸었다. 길 양쪽에는 연립주택 등 현대식 건물이 가득했다.

 

성당에서 건네준 '왕림 교회 100주년 기념집'을 펼쳤다.

 

"짚신을 삼는 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일 정도로 이들은 지독히 가난합니다. 그런 이들이 요즘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 가는 노자를 마련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주교님을 뵙기 위함입니다. 이들의 순박한 믿음에 매일 감탄하고 있습니다"(1892년 4월 24일 왕림 본당 주임 알릭스 신부가 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 중).

 

돌아오는 내내 주교님 얼굴을 보기 위해 끼니를 굶으며 호롱불 아래서 짚신을 짓는 110여년전 신앙선조들의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평화신문, 제726호(2003년 6월 1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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