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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 양심 1487_바리사이양심 [교리용어_양심] 108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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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6 [218.55.90.*]

2013-12-09 ㅣ No.1487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바리사이 양심(a pharisaic conscience)은 어떤 양심을 말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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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답변:

+ 찬미 예수님!

1. 우선적으로, "양심(良心, conscience)" 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의 제1항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제2항에 주어진,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읽기 전에 반드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26.htm <----- 필독 권고

2.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 시작) 

2-1.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pharisaic conscience(바리사이 양심)"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therealpresence.org/dictionary/p/p218.htm
(발췌 시작)

PHARISAIC CONSCIENCE
An erroneous conscience when the mind minimizes grave sins but magnifies matters of little importance, in the manner of the Pharisees accused by Christ. It is also the hardened conscience, which consistently judges that all or certain grave crimes are trivial or not wrong at all, because a person has acquired the habit of sinning mortally so that his or her mind now defends as virtue what is actually vice.

바리사이 양심(pharisaic conscience)
그리스도에 의하여 질책을 받았던 바리사이들의 방식으로, 중대한 죄(grave sins)들을 최소화하고,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들을 과장할 때의 어떤 오류의 양심(an erroneous conscience)(*)을 말합니다.
이 양심은 또한, 한 인격이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습관을 이미 습득하여 그 결과 그자의 마음은 지금 현실태적으로(actually) 악덕(vice)인 바를 덕(virtue)로서 옹호하기 때문에, 모든 혹은 특정한 대죄들 둘 중의 하나가 사소하거나 혹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판단하는, 굳어진 양심(hardened conscience)(**)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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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오류의 양심" 에 대한 설명은 아래의 제3-15항에 있다.
(**) 번역자 주: "굳어진 양심"에 대한 설명은 아래의 제3-12항제3-13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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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2. 이어지는 답변은 아래의 제3-11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3.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 The Catholic Catechism(1975년)의 저자이고 또한 Modern Catholic Dictionary(1980년)의 저자인, Hardon 신부님 제공의 "양심(conscience)"에 대한 문답(questions and answers)들 전문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archives/Q_and_A/Q_and_A_024.htm
(발췌 시작)

3-1. What is conscience?
Conscience is the practical judgment of the intellect deciding from the general principles of faith and reason on the goodness or badness of the way of acting that a person now faces.

3-1. 양심(conscience)은 무엇인지요?
양심은, 한 인격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행위의 방식의 선함(goodness)과 악함(선하지 않음, 나쁨, badness)에 대하여 신앙과 이성(faith and reason)의 일반 원리들로부터 결정하는, 지성(intellect)의 실천적 판단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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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What are the functions of conscience?
The functions of conscience are twofold. Beforehand, conscience informs a person whether an action is lawful or not. Afterwards, conscience tells him whether the act done was good or bad.

3-2. 양심의 기능은 무엇인지요?
양심의 기능은 두 겹입니다. 사전에, 양심은 어떤 행위가 적법한지(lawful) 혹은 적법하지 않은지를 한 인격(a person)에게 알려줍니다. 사후에, 양심은 행해진 행위가 선하였는지(good) 혹은 악하였는지(bad, 선하지 않은지, 나쁜지) 그에게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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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What is meant by antecedent conscience?
Antecedent conscience is the operation of the mind before performing a human action. The conscience either commands or forbids, counsels or permits what a person anticipates doing.

3-3. 사전 양심(事前良心, antecedent conscience)이라는 표현에 의하여 의미되는 바은 무엇인지요?
사전 양심(事前良心)은 어떤 인간의 행위를 수행하기 전에 마음의 작동(operation)을 말합니다. 이 양심은 한 인격이 행함을 예상하고 있는 바를, 명령하거나 혹은 금지하는, 권고하거나 혹은 허락하는, 둘 중의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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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What is the meaning of consequent conscience?
Consequent conscience is the passing of judgment on moral actions already done. It is the assessment of past behavior.

3-4. 사후 양심(事後良心, consequent conscience)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사후 양심(事後良心)은 이미 행하여진 윤리적 행위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양심은 지나간 처신에 대한 평가(assessment)입니다.


게지자 주 3-4
:

(1)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antecedent conscience"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a/a287.htm
(발췌 시작)
ANTECEDENT CONSCIENCE

The judgment of a person deciding on a moral matter prior to acting on it. Antecedent conscience either commands or forbids, counsels or permits the performance of an act.

See also CONSEQUENT CONSCIENCE.


사전 양심(事前良心, antecedent conscience)

어떤 윤리적 사안에 대하여 그것에 대하여 행동하기 전에 결정하는 한 인격(a person)의 판단을 말합니다. 사전 양심(事前良心)은 어떤 행위의 실행을, 명령하거나 혹은 금지하는, 권고하거나 혹은 허락하는, 둘 중의 하나 입니다.

또한 사후 양심(事後良心, consequent conscience)을 보라.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다음은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consequent conscience"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c/c507.htm
(발췌 시작)
CONSEQUENT CONSCIENCE

The judgment of the mind on the morality of an action already performed. The conscience either approves what has been done, giving peace to the mind and spiritual joy, or disapproves of what was done, thus causing remorse and a sense of guilt.

See also ANTECEDENT CONSCIENCE.


사후 양심(事後良心, consequent conscience)

이미 수행된 어떤 행동의 윤리성(morality)(*)에 대한 마음(the mind)의 판단을 말합니다. 이 양심은 이미 행해진 바를 찬성하여, 그 결과 마음에 평화(peace)(**)와 영적 기쁨(spiritual joy)(***)을 주거나, 혹은 행해진 바에 대하여 찬성하지 않는데, 이러한 방식으로(thus) 후회(remorse)와 유죄(guilt)의 어떤 느낌을 야기시킵니다.

또한 사전 양심(事前良心, antecedent conscience)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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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윤리성(윤리, morality)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의 제3-1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84.htm <----- 필독 권고

(**) 번역자 주:
(1)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평화(peace)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의 제3-2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2.htm <----- 또한 필독 권고

(2)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화, 즉 영적 평화(spiritual peace)에 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설명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3.htm <----- 또한 필독 권고

(***) 번역자 주:
(1)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두 개의 열매들(갈라티아 5,22) 중의 하나인, 기쁨[joy, 즉 영적 기쁨(spiritual joy)]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 제3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5.htm <----- 또한 필독 권고

(2)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기쁨(joy)에 대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설명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4.htm <----- 또한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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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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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What kind of conscience is indispensible for growth in spiritual perfection?
A sensitive conscience is necessary for growth in spiritual perfection.

3-5. 영적 완미(spiritual perfection)(*)에 있어 성장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은 양심의 어떤 종류인지요?
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될 수 있는 양심[sensitive conscience, 민감(敏感)한 양심]은 영적 완미에 있어 성장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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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그리스도교 신앙 생활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개념인, "완전(completeness)"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개념인, "perfection(완미)"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필독 권고

예를 들어,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31항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7.HTM
(발췌 시작)
They complete and perfect the virtues of those who receive them.
그들(성령의 일곱 선물들)은 이 선물들을 받아들인 자들의 덕(the virtues)들을 완전하게 하며(complete) 그리고 완미하게 한다(perfect).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하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31항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위에 발췌한 영어 문장에 대응하는 우리말 문장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위의 졸번역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아래의 번역은 번역 오류입니다:

출처: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684
(발췌 시작)
성령의 선물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덕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한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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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What is sensitive conscience?
A sensitive conscience is alert to the performance of God’s will not only in matters of strict obligation but in whatever would be pleasing to God.

3-6. 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될 수 있는 양심[sensitive conscience, 민감(敏感)한 양심]은 무엇인지요?
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될 수 있는 양심[sensitive conscience, 민감(敏感)한 양심]은,(*) 엄격한 의무의 사안들에서 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느님께 즐거울 수 있는 무엇이든지에 있어, 하느님의 의지의 실행(performance)에 대한 경계(alert)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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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sensitive" 를 "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될 수 있는" 으로 번역한 것은 다음에 있는 Merriam-Webster Dictionary에  주어진 설명을 따른 것이다:
http://www.merriam-webster.com/wdictionary/sensitive

"sensitive" 를 또한 "민감(敏感)한" 으로 번역한 것은  다음에 있는 漢典에  주어진 설명을 따른 것이다:
http://www.zdic.net/c/f/31/7699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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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How can one’s conscience become more spiritually sensitive?
Conscience can become more spiritually sensitive by the daily practice of examining; one’s past actions on their responsiveness to God’s will.

3-7. 우리의 양심은 어떻게 하면 더 영적으로 민감(敏感)하게[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될 수 있는지요? 
양심은, 하느님의 의지에 자신들의 바로 대답하는 상태(responsiveness)에 대한 자신의 과거의 행위들을 검토하는 행위들을 날마다 실천함으로써, 영적으로 더 민감(敏感)하게[외부의 작인(作因)/동인(動因)(external agents)들에 의하여 흥분하게, sensitive]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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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What is a scrupulous conscience?
A scrupulous conscience is a timorous and fearful conscience. The tendency is to judge something to be wrong when it is lawful. It is an unbalanced conscience.

3-8. 다의 양심(多疑良心, 의심많은/심착(心窄)하는/주저하는 양심)/양심의 혼란(良心混淆)(a scrupulous conscience)은 무엇인지요?
다의 양심(多疑良心)은 소심하고(timorous) 그리고 겁많은(fearful) 양심을 말합니다. 그 경향은 그 무엇(something)이, 그것이 적법함에도(lawful) 불구하고(when), 잘못이라고(wrong)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은 어떤 불안정에 빠진(unbalanced) 양심입니다.

게시자 주 3-8:
(1)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영어로 "scrupulous" 혹은 "scruples" 로 번역되는 용어들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되고 있는 용례들에는, 예를 들어, 다음에 있는 로마서 14,1에 대한 NAB 주석과 마태오 복음서 23,23-2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들이 있다:

http://old.usccb.org/nab/bible/romans/romans14.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1_tue.htm

 

(2)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scruple"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s/s180.htm
(발췌 시작)
SCRUPLE
Unreasonable doubt about the morality of an act done or to be done. Its basis is an erroneous conscience combined with a lack of control of the emotion of fear. (Etym. Latin scrupulus, small, sharp stone, small weight, scruple, from scrupus, rough stone.)

다의(多疑)/심착(心窄)(scruple)
이미 행해졌거나 혹은 행해질 어떤 행위의 윤리성(morality)에 관하여 조리가 맞지 않은 의심/회의(unreasonable doubt)를 말합니다. 그 근거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통제에 있어서의 어떤 결여와 결합된, 어떤 오류의 양심(an erroneous conscience)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다음은 天主敎英漢袖珍辭典에 주어진 "scruples" 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www.peterpoon.idv.hk/Resource/Dictionary/S.htm
(발췌 시작)
scruples :多疑;疑心病;心窄(病):良心混淆,通常指毫無理由地懷疑自己不能達到道德或信仰之要求而?生之過度疑慮。將無罪看作有罪,或將小罪看作大罪[Confusion of conscience, usually without any reason to suspect that one cannot meet the requirements of morality or faith; hence arising excessive doubts. It will regard innocence as guilt, or a venial sin as a grave sin. 양심의 혼란(良心混淆)이란, 통상적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이 윤리(morality, 道德) 혹은 신앙(信仰)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없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과도한 의심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혼란은 장차 무죄(無罪)를 유죄(有罪)로 간주하거나, 혹은 장차 소죄(小罪)를 대죄(大罪)로 간주할 것입니다.] 原字?拉丁文 scrupulous 意?小石:有石在心,坐臥不寧。
(이상, 발췌, 그리고 영어 및 우리말 번역 끝).


(4) 영어본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scruple(多疑/心窄, 다의/심착)" 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www.newadvent.org/cathen/13640a.htm

(5)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다의(多疑, 의심많음/주저함, scrupulosity)"를 언급하고 있는 교황 베네딕토 16세2010년 10월 18일자 교서 [제목: LETTER OF HIS HOLINESS BENEDICT XVI TO SEMINARIANS(신학생들에 보내는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교서)] 제3항은 다음에 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3. The sacrament of Penance is also important. It teaches me to see myself as God sees me, and it forces me to be honest with myself. It leads me to humility. The Curé of Ars once said: “You think it makes no sense to be absolved today, because you know that tomorrow you will commit the same sins over again. Yet,” he continues, “God instantly forgets tomorrow’s sins in order to give you his grace today.” Even when we have to struggle continually with the same failings, it is important to resist the coarsening of our souls and the indifference which would simply accept that this is the way we are. It is important to keep pressing forward, without scrupulosity, in the grateful awareness that God forgives us ever anew – yet also without the indifference that might lead us to abandon altogether the struggle for holiness and self-improvement. Moreover, by letting myself be forgiven, I learn to forgive others. In recognizing my own weakness, I grow more tolerant and understanding of the failings of my neighbour.

3. 고해성사(the sacrament of Penance)는 또한 중요합니다. 이 성사는 저에게 하느님께서 저를 보시듯이 저 자신을 보는 것을 가르치며, 그리고 이 성사는 저 자신에게 정직할 것을 강제합니다. 이 성사는 저를 겸손으로 이끕니다. 아르의 본당 사제(Curé of Ars)(*) 는 과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왜냐하면 내일 그대가 또다시 동일한 죄들을 범할 것임을 그대가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 아무런 일리(一理)도 이루지 못한다(make no sense, 전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그대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위하여 내일의 죄들을 즉시 잊어버리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동일한 실패들과 계속하여 싸워야 할 때에도, 바로 이러한 버릇/습관이 우리라는 그 버릇/습관(the way we are)임을 단순히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는(would) 우리의 영혼들의 천박하게 됨(coarsening)과 무관심(indifferrence)에 저항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을 용서하신다는 커다란 알아차림에 있어, 다의(多疑, 의심많음/주저함, scrupulosity) 없이, 그리고 또한 거룩함(holiness, 성덕)과  자기 개선(self-improvement)을 위한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도록 우리들을 이끌 수도 있는 무관심(indifference) 없이, 앞을 향하여 밀어 헤치고 나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저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내어줌으로써, 저는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을 배웁니다. 제 고유의 나약함을 알아차림 안에서, 저는 나의 이웃의 실패들에 대하여 더 관대하고 그리고 이해하도록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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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Curé of Ars(아르의 본당 사제)" 는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야기되었던 프랑스 아르 지역 평신자들의 종교적 무관심을 회복시키고자 프랑스 아르 지역의 본당 주임 신부로서 본당 소속의 평신자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St. Jean-Baptiste-Marie, 1786-1859년)에 대한 칭호(title)이다. 아르의 본당 주임 신부로 착좌한 이후 선종때까지 42년간 오로지 아르의 본당 주임 신부였던 그는 설교자로서 및 고해신부로서 널리 존경받았다.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가 된 비안네 신부는,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1929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St. Jean-Baptiste-Marie, 1786-1859년)에 대한 성인 전기를 읽을 수 있다. 대단히 좋은 내용이므로 많은 분들의 필독을 권고드립니다:
http://info.catholic.or.kr/saint/view.asp?ctxtSaintId=2083&Orggubun=101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12월 4일]
영어가 가능한 분들께서는 또한 다음의 주소에 주어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St. Jean-Baptiste-Marie, 1786-1859년)에 대한  성인 전기의 글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www.arsnet.org/111_en.php <----- 또한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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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그리고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본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10년 10월 18일자 교서 [제목: LETTER OF HIS HOLINESS BENEDICT XVI TO SEMINARIANS(신학생들에 보내는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교서)] 제3항 전문이다. 위의 졸번역문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예를 들어, 아래의 번역문에서는 "scrupulosity" 라는 용어가 긍정적인 의미로 주고 사용되는 세속의 의미인 "세심"으로 번역되었지만, 그러나 가톨릭 영성 신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scrupulosity" 라는 단어는, 위의 제2항제3-8항에서 설명되고 있듯이, 영성적으로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에, 그리고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중국 가톨릭계와는 달리, 국내의 가톨릭계에 "scrupulosity" 에 대응하는 적합한 번역 용어가 아직까지 선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 번역문]
(발췌 시작)
3. 고해성사 또한 중요합니다. 고해성사는 저에게, 하느님께서 보시듯이 제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치고, 저를 제 자신에게 정직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고해성사는 저를 겸손으로 이끕니다. 아르스의 본당 사제도 언젠가 이러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또다시 같은 죄를 범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에게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려고, 결코 내일의 죄는 생각지도 않으십니다.” 우리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싸워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는 사실에 체념하고 마는 무관심과 영혼의 무감각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세심해서도 안 되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언제나 새로이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성덕과 자기 개선을 위한 투쟁을 모두 포기하게 만드는 무관심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이 용서를 받게 되면,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법도 배우게 됩니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할 때, 내 이웃의 잘못을 훨씬 너그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12월 4일]
(6)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Catholic Spiritual Direction" 홈페이지 제공의 글 [제목: Understanding Scrupulosity(다의(多疑, 의심많음/주저함)에 대한 이해)]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영어 가능한 분들께서 또한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http://www.catholicspiritualdirection.org/scrupulosity.html <----- 또한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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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When is a conscience perplexed?
A conscience is perplexed when it sees sin both in the performance and omission of some act.

3-9. 언제 양심이 당황하게(perplexed) 되는지요?
양심은, 그것이 어느 행위의 수행 및 태만(omission) 둘 다에 있어 죄(sin)를 볼 때에 당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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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What is the meaning of a lax conscience?
A lax conscience decides on insufficient grounds that a sinful act is permissible or that something gravely wrong is not serious. A lax conscience sees virtue where there is sin.

3-10. 방종 양심(放縱良心, a lax conscience, 무디어진 양심)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방종 양심(放縱良心, 무디어진 양심)은 불충분한 근거들 위에서 어떤 죄있는 행위가 허용될 수 있다거나 혹은 중대하게 잘못인 그 무엇이 심각하지 않다고 결정합니다. 방종 양심은 죄가 있는 곳에서 덕(virtue)을 봅니다.

게시자 주: "laxity"가 한 극단이라면 이에 상반되는 또 하나의 극단이 "scrupulosity" 임은 다음의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While doing that, it is necessary to check the overtones entailed in the two extremes of laxity as well as scrupulosity respectively.
그렇게 하는 동안에, 다의(多疑, scrupulosity, 의심많음/주저함)뿐만이 아니라 방종(放縱,무디어짐, laxity)이라는 두 개의 극단들에 있어 각각 수반되는 배음/부대적 의미(倍音, overtones)들을 확인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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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What is meant by a pharisaic conscience?
A pharisaic conscience minimizes grave sins, but magnifies matters of little importance.

3-11. 바리사이 양심(a pharisaic conscience)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바리사이 양심은 중대한 죄들을 최소화하고,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들을 과장합니다.

게시자 주
(1) 마태오 복음서 23,24
에 대한 다음에 있는 NAB 주석에 의하면, "바리사이 양심" "다의 양심(多疑良心)""방종 양심(放縱良心, 무디어진 양심)" 둘 다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matthew/matthew23.htm

(2)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pharisaic conscience(바리사이 양심)"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therealpresence.org/dictionary/p/p218.htm
(발췌 시작)

PHARISAIC CONSCIENCE
An erroneous conscience when the mind minimizes grave sins but magnifies matters of little importance, in the manner of the Pharisees accused by Christ. It is also the hardened conscience, which consistently judges that all or certain grave crimes are trivial or not wrong at all, because a person has acquired the habit of sinning mortally so that his or her mind now defends as virtue what is actually vice.

바리사이 양심(pharisaic conscience)
그리스도에 의하여 질책을 받았던 바리사이들의 방식으로, 중대한 죄(grave sins)들을 최소화하고,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들을 과장할 때의 어떤 오류의 양심(an erroneous conscience)을 말합니다.
이 양심은 또한, 한 인격이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습관을 이미 습득하여 그 결과 그자의 마음은 지금 현실태적으로(actually) 악덕(vice)인 바를 덕(virtue)로서 옹호하기 때문에, 모든 혹은 특정한 대죄들 둘 중의 하나가 사소하거나 혹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판단하는, 굳어진 양심(hardened conscience)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이 글의 결론) 
따라서, "바리사이 양심"
(i) 다의 양심(多疑良心),
(ii) 방종 양심(放縱良心, 무디어진 양심),
(iii) 오류의 양심,
(iv)
굳어진 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바리사이 양심"

(i) 이미 행해졌거나 혹은 행해질 어떤 행위의 윤리성(morality)에 관하여 조리가 맞지 않은 의심/회의(unreasonable doubt)를 하는 양심[즉, 다의(scruplous) 양심(多疑良心)]이고,

(ii) 불충분한 근거들 위에서 어떤 죄있는 행위가 허용될 수 있다거나 혹은 중대하게 잘못인 그 무엇이 심각하지 않다고 결정하는 양심[즉, 방종(lax) 양심(放縱良心, 무디어진 양심)]이며,

(iii) 한 인격에게 어떤 선한 행위가 나쁘거나(악하거나) 혹은 어떤 나쁜(악한) 행위가 선하다고 말하는 양심(즉, 오류의(erroneous) 양심)이고, 그리고

(iv) 모든 혹은 특정한 대죄들 둘 중의 하나가 사소하거나 혹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판단하는 양심(즉, 굳어진(hardened) 양심)임을
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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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What is a hardened conscience?
A hardened conscience consistently judges that either all or certain grave sins are trivial or not wrong at all.

3-12. 굳어진 양심은 어떤 양심인지요?

굳어진 양심(a hardened conscience)은 모든 혹은 특정한 대죄들 둘 중의 하나가 사소하거나 혹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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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How is a hardened conscience acquired?
A hardened conscience is acquired by the habit of sinning mortally, until a person’s mind [is formed].

 

3-13. 굳어진 양심은 어떻게 습득하게 되는지요?

굳어진 양심은, 한 인격의 마음이 [형성되기] 까지 줄곧, 죽음에 이르게(mortally) 죄(sin)를 범하는 습관에 의하여 습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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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When is a conscience certain?
A conscience is certain when it has no prudent fear of being wrong, and when it firmly decides that some action is right or wrong.

 

3-14. 언제 양심은 확신하는지요?
양심은, 잘못임에 대한 아무런 현명한 두려움(prudent fear)을 양심이 가지지 않을 때에, 그리고  어느 행위가 올바르거나 혹은 잘못임을 양심이 확고하게 결정할 때에, 확신합니다(cer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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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What is an erroneous conscience?
An erroneous conscience tells a person that a good action is bad or a bad action is good.

3-15. 오류의 양심은 무엇인지요?
오류의 양심(an erroneous conscience)은 한 인격에게 어떤 선한 행위가 나쁘거나(악하거나) 혹은 어떤 나쁜(악한) 행위가 선하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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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What is the rule governing a doubtful conscience?
The rule is that we may never act on a doubtful conscience.

3-16. 확신없는 양심(a doubtful conscience)을 다스리는 규칙은 무엇인지요?
그 규칙은 어떤 확신없는 양심에 의거하여 결코 행동하지 말하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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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When is a conscience doubtful?
A conscience is doubtful when a person cannot certainly decide for or against a course of moral action.

3-17. 언제 양심이 확신없게 되는지요?
양심은 한 인격이 윤리적 행위의 어떤 과정을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것을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을 때에 확신없게 됩니다(doubtful).


게시자 주 3-17
:
(1)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doubtful conscience(확신없는 양심)"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d/d297.htm
(발췌 시작)
DOUBTFUL CONSCIENCE

A state of mind when it cannot certainly decide for or against a course of action and leaves the person unsure about the morality of what one is to do, or what one may have done. One sign of a doubtful conscience is that it gives rise to a positive judgment with a prudent fear of being wrong, or more commonly to a negative judgment in which the person does not know whether an act is lawful or not.

 

확신없는 양심(doubtful conscience)

마음이 행위의 어떤 과정을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것을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해당 인격을 자신이 행하는 바, 혹은 자신이 이미 행하였을 수도 있는 바의 윤리성(morality)(*)에 관하여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할 때의 마음(the mind)의 어떤 상태를 말합니다. 확신없는 양심(a doubful conscience)의 한 표지(a sign)는 잘못임(being wrong)에 대한 어떤 현명한 두려움(a prudent fear)과 함께 어떤 긍정적인 판단(a positive judgment)을 초래하거나, 혹은 더 통상적으로, 그 안에서 해당 인격이 어떤 행위가 적법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알지 못하는, 어떤 부정적인 판단을 초래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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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윤리성/윤리(morality)" 라는 용어의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적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의 제3항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84.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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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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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How is a doubtful conscience to be resolved?
A doubtful conscience should be resolved by personal reflection, seeking wise counsel, and above all, asking for divine light in prayer. 

3-18. 확신없는 양심(a doubtful conscience)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지요?
확신없는 양심은 인격적 반성(反省)(personl reflection), 지혜로운 권고(wise counsel)를 구하는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도(above all),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빛을 요청함으로써 마땅히 해소되어야 합니다(be resolved).


게시자 주 3-18: "확신없는 양심(a doubtful conscience)"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787항-제1789항에 주어져 있으며, 예를 들어, 다음은 제1787항 전문이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1787.htm (우리말본)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1.HTM (영문본)
(영문본 발췌 시작)
1787 Man is sometimes confronted by situations that make moral judgments less assured and decision difficult. But he must always seriously seek what is right and good and discern the will of God expressed in divine law.


1787 사람은 윤리적 판단들을 덜 확신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들에 때로는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진지하게 올바르고(right) 그리고 선한(good) 바를 추구하여야 하며 그리고 하느님의 법(신법)에 표현된 하느님의 의지를 식별하여야 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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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1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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