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영광] 필리피 2,11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번역오류] 1988_ glory 1444_ 1122_ 1242_ 파스카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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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16.191.*]

2021-03-28 ㅣ No.2192

게시자 주: (1)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92.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이번 글에 서술된 바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또한 사용하여 분석하고, 이 분석의 결과에 따라 도출된 바들/결론들입니다.

 

 

부제: 국내의 개신교회 측 신약 성경들, 필리피 2,11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심각한 번역 오류이다

 

1. 들어가면서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4월 23일]

1-0.

1-0-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하느님을 나타내는 피휘의 용어인 주님(主, Lord)은 천지만물 및 그들 사이의 질서의 통치권자를 또한 의미한다'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lord_means_sovereignty_2419.htm <----- 필청/필독 권고    

[이상, 2022년 4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4-03-31(나해 주님 부활 대축일]

1-0-2. 그리고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의 필자 저서인, 총 6권의 책들이 한 질을 구성하는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가해-I"첫 번째 3분 복음/교리 묵상(가해 대림 제1주일)첫 번째 교리 문답으로서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제84항 전문이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819.htm <----- 또한 필독 권고

(발췌 시작)

CCCC 84.‘주님(Lord)’이라는 칭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CCC 446-451, 455

 

성경에서 이 칭호는 통상적으로 하느님을 거룩한 주권자/통치권자(Sovereign)로서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칭호를 당신께 적용하셨으며(ascribed)[칠십인역 시편 110을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시는 마태오 복음서 22,41-46] 또한 당신의 신성적 주권/통치권(his divine sovereignty)을 자연, 마귀, 죄, 그리고 죽음을 이기는 힘으로써, 무엇보다도 당신 자신의 부활로써 드러내셨습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문(the first Christian creeds)들은 성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는(due to) 힘(power)과 영예(honor)와 영광이 또한 예수님께도 속함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proclaim):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즉, 칠십인역 그리스어본 시편 148,13에 제시된 충분 조건을 충족시키는 이름, 즉, 주님]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피 2,9). 예수님은 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Lord)이시며, 바로 그분 쪽으로 우리의 인격적 자유로움(freedom)을 완전히 종속시켜야(submitted) 하는 단 하나뿐인 분(One)이십니다(엮은이 번역).

 

(*) 다음의 졸고 필히 학습 요망: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3310.htm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a_adv_1_c446.htm

(이상, 발췌 끝)

[이상, 2024년 3월 31일자 내용 추가 끝]

 

1-1.

1-1-1. 다음은 2005년에 초간된 "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10-11 전문입니다:

 

출처: https://maria.catholic.or.kr/bible/read/bible_read.asp?menu=bible&m=2&n=157&p=2 

(발췌 시작)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주: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

(이상, 발췌 끝)

 

1-1-2. 그리고 바로 위의 제1-1-1항에 발췌된 바에 대응하는 1970년에 초간된 "NAB"(New American Bible), 필리피서 2,10-11 전문은, 다음에 발췌된 바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10G.HTM 

(필리피서 2,6-11 발췌 시작) 

6 Who, though he was in the form of God, did not regard equality with God something to be grasped. 7 Rather, he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slave, coming in human likeness; and found human in appearance, 8 he humbled himself, becoming obedient to death, even death on a cross. 9 Because of this, God great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 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end, of those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이상, 발췌 끝)

 

질문 1: 위의 제1-1-1항에 발췌된 바에서, 제11절의 우리말 번역문이 무슨 말인지요??? 더 구체적으로, 어찌하여, 영어로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졸번역: 성부 하느님의 영광이르기까지]라고 번역되는 표현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다"로 번역될 수 있는지요???

 

질문 2: "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11에서 바로 이 심각한 번역 오류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게시자 주 1-1: (1) 질문 2에 대한 답변은, 아래의 제3-5항에 있습니다.

 

(2) 다음은 1960년대 중반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교회 일치 정신에 따라 국내의 개신교회 측 목회자 한 분과 공동으로 번역을 하여 1970년대에 초판된 "공동번역성서", 필리피서 2,10-11 전문입니다. 바로 위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10-11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출처: https://maria.catholic.or.kr/bible/read/bible_read.asp?menu=bible&m=4&n=57&p=2 

(발췌 시작)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상, 발췌 끝)

(이상, 게시자 주 1-1 끝)

 

1-2.

1-2-1. 우선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필리피서 2,10-11매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2독서(필리피 2,6-11)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필리피서 2,10-11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도 문맥/단락은 필리피서 2,6-11이라고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이 전례력을 통하여, 직접적으로(directly), 가르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입니다. 

 

1-2-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교황청에서 전례독서를 발췌하는, 1960년대에 초간된 "RSVCE"(Revised Standard Version Catholic Edition)에서 발췌된, 영어본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palm.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5]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was in Christ Jesus,) [6] who, though He was in the form of God, did not count equality with God a thing to be grasped, [7]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servant, being born in the likeness of men. [8] And being found in human form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unto death, even death on a cross. [9] Therefore God has 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the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10]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11]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이상, 발췌 끝)

 

1-2-3.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그리스어본 필리피서 2,8필리피서 2,11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할 수 있습니다:

 

필리피서 2,8:

https://biblehub.com/interlinear/philippians/2-8.htm  <----- 반드시 확인하라


필리피서 2,11:

https://biblehub.com/interlinear/philippians/2-11.htm  <----- 반드시 확인하라

 

게시자 주 1-2-3: (1) 바로 위의 필리피서 2,11,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에서 사용되고 있는, 영어로 "to"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전치사는 인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이 그리스어 전치사 의 대단히 중요한 용례(usage example)에 대한 글/논문[제목: 믿다(believe)와 쪽으로 믿다(believe in)의 차이점; 게시일자: 2014-05-12]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91.htm <----- 필독 권고

 

1-3.

1-3-1. (질문 1에 대한 필자의 고유한 답변 1) 위의 제1-1-2항제1-2-2항에 발췌된 NABRSVCE, 필리피서 2,8필리피서 2,11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다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필리피서 2,8에서의 "예수님의 죽음"(A)필리피서 2,11에서 "성부 하느님의 영광(glory)"(B)과, 각각 그 말단 (A)쪽으로 그리고 그 말단 (B) 쪽으로 향한다는, 따라서 (i) 한 개의 말단(a terminal)인 "예수님의 죽음"(A)과 또 다른 한 개의 말단인 "성부 하느님의 영광(glory)"(B) 사이의 극명한 대조뿐만이 아니라, (ii) contra-variant하게 움직이는 그 방향성(directionality)까지도, 극명하게 대조/대비가 되는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리피서 2,11의 마지막 부분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번역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혀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should), 성부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혹은

 

"그리고 모든 혀는, 성부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should)."

 

게시자 주 1-3-1: (1) 필리피서 2,11에서 그리스어 전치사를 필자가, "쪽으로" 대신에, "에 이르기까지"로 번역한 것은, 필리피서 2,9에서,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성부 하느님의 영광이 있는 곳, 즉, 성부 하느님께서 계신 곳, 즉, 하늘(heaven, 천당)에까지, 매우 높이 들어올려졌음이, 바로 이어지는 제10절 및 제11절에서 수사학에 있어 강조의 기법으로 기술되고 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2) 그러니까, 성삼위 하느님의 제2위격이신, 즉, 성부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이신, 성자 하느님께서는 한처음부터 이미 영광 안에 계시는데, 바로 이분께서, 성부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여, 강생 신비에 의하여 사람으로 내려 오심(descension)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감추셨으나, 그러나 또다시 성부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여, 당신의 완미한(perfect) 몸을 인류의 구속(救贖, redemption)을 위한 유일한 희생 제물로서 제공하심으로써, 그 결과로, 성자 하느님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 둘 다를 지니신, 우리들의 맏형이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들어 올려짐(ascension)을 받아,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당신의 부활(Resurrection) 및 승천(Ascension)이라는 영광을 받게 되는 과정들을 거치셨음[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9항ㄴ 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9항ㄹ;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60항ㄴ 참조]을 우리들이 현실태적으로(actually) 알아차려,(#) 그 결과로서, 당신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심(필리피 2,9)이란, 즉, 성부 하느님의 영광 안쪽에까지 들어올림 받으신 예수님(팔리피 2,11)이란, 곧, 예수님께서 피조물들 전체에 대한 신성적 주권/통치권(divine sovereignty)을 지닌 '주님'(Lord)이심을 말하므로, 바로 이 사실을 우리들이 현실태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인 '주님'(Lord)께, 즉, '주님'(Lord)이신 예수님께, 우리들도 영광을 더하여야 함이, 바로 필리피서 2,6-11에 기술되어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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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논문[제목: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에서, 마침내 는 최종적으로(finally) 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게시일자: 2020-01-05]에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21.htm <----- 성직자 및 수도자들의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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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님'(Lord)이란 곧 '하느님의 피휘(避諱)의 이름'[히브리어 "Adonai"(아도나이), 그리스어 "Kyrios"(키리오스), 라틴어 "Dominus"(도미누스), 영어 "Lord", 우리말 "주님"]'이기 때문에, 여기서 '주님'(Lord)이란 곧 다음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08항에서 말해지고 있는 바로 그 '당신의 이름'임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0.htm 

(발췌 시작)

 
CCC 2808 In the decisive moments of his economy God reveals his name, but he does so by accomplishing his work. This work, then, is realized for us and in us only if his name is hallowed by us and in us.
 
(졸번역)
CCC 280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경륜의 결정적인 순간들에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며, 다만(but)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work)을 수행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바로 그 경우에 있어(then), 당신의 이름이 우리에 의하여(by)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영광을 받음으로써(by being glorified)](*) 거룩하게 드러나 빛날(is hallowed) 만 오로지(only if), 바로 이 하느님의 일(opus Dei)이 우리를 위하여(for)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즉, 실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2)

[내용 추가 일자: 2019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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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바로 이 대괄호 [ ] 안의 문구 추가가, 전후 문맥 안에서, 논리적으로 적합함(logically proper)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강론 말씀에서 확인될 것이다:

(발췌 시작)
The first concern of the “Lord’s Prayer” is that God’s name should be glorified, that his Kingdom should come, that his will should be done.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중요한 건(concern)은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반드시(should) 영광을 받아(be glorified), 그리하여 그 결과 그분의 나라/통치(his Kingdom)가 반드시(should) 도래하고, 그리하여 그 결과 그분의 뜻(his will)이 반드시(should) 성취되는 것입니다.

(*2) 번역자 주: 즉, 당신의 이름이 우리에 의하여(by)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영광을 받음으로써(by being glorified)](*) 거룩하게 드러나 빛나게 됨(being hallowed)이 하느님의 일(opus Dei)이 우리를 위하여(for) 그리고 우리 안에서(in) 실현될 수도 있음[즉, 실현될 가능성이 있음]한 개의 실천적 원리(a practical principle), 즉, 한 개의 필요 조건(a necessary condition)임을 여기서 말하고 있다. 실천적 원리/실천 원리(practical principle)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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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9년 12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졸번역 끝) 

(이상, 발췌 끝)

 

(3) 따라서, 필리피서 2,6-11은, 성부 하느님의 영광 그 자체 혹은 성부 하느님의 영광에 그 무엇을 더하여야 함/증대시켜야 함에 대한 기술이 결코 아니고,(*1) 장차 도래할 예수 재림의 날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위업의 결과로서 개시된 새창조(New Creation) 안에서, 우리의 육신들이 영광를 받아 그 결과로 거룩하게 변모됨으로써, 예수님처럼, 장차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수도 있음, 즉, 성삼위 하느님의 삶/생명에 참여하게 될 수도 있음의 명확한 성경 근거임, 즉, 그리스도교 부활 신앙의 명확한 성경 근거에 포함됨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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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우리말본이 아닌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93항의 본문 중에 포함되어 있는 성 보나벤뚜라의 지적을 학습할 수 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10.htm 

(발췌 시작)

CCC 293 Scripture and Tradition never cease to teach and celebrate this fundamental truth: "The world was made for the glory of God."134 St. Bonaventure explains that God created all things "not to increase his glory, but to show it forth and to communicate it",135 for God has no other reason for creating than his love and goodness: "Creatures came into existence when the key of love opened his hand."136 The First Vatican Council explains:
 
This one, true God, of his own goodness and "almighty power", not for increasing his own beatitude, nor for attaining his perfection, but in order to manifest this perfection through the benefits which he bestows on creatures, with absolute freedom of counsel "and from the beginning of time, made out of nothing both orders of creatures, the spiritual and the corporeal. . ."137
 
(졸번역)
CCC 293 성경(Scripture)과 성전(Tradition)은 다음과 같은 근본 진리(fundamental Truth)를 가르치고 경축하는 것을 결코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을 위하여 창조되었다.”성 보나벤뚜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증대시키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이 영광을 밖으로 나타내어 그리하여 이것을 나누어 주시고자(communicate)" 만물들을 창조하셨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선함(goodness) 이외에 창조 행위을 위한 다른 이유를 전혀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물들은 사랑의 열쇠(the key of love)가 당신의 손을 열었을 때에 비로소 존재(existence)로 나타났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당신 고유의 선함(goodness)과 "전능하신 힘"을 지니신 바로 이 한 분이신, 참 하느님께서는, 당신 고유의 지복(beatitude)을 증대시키기 위하여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미(perfection)를 얻기 위하여서도 아니고, 당신께서 창조물들에게 베푸신 혜택들을 통하여 바로 이 완미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계획의 절대적 자유로우심과 함께 "한처음에, 무로부터 영적인 및 형이하학적 창조물들 둘 다에 있어서의 순서(orders)들을 ..." 만드셨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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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21년 4월 7일]

(4) 그리고, 왜냐하면 필리피서 2,6-11에 기술된 바를 통하여, 즉, "주님"[즉, 오주(吾主)]이신 예수님께 우리들이 영광을 더함을 통하여(필리피서 2,6-11), 바로 이것의 결과로서, 필리피서 2,6-11 바깥의 한 개의 일로서, 왜냐하면 주님(Lord)는 단 한 분뿐이기 때문에(신명기 6,4; 마르코 복음서 12,29), 또한 "주님"이신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2) 우리들로부터 자동적으로(automatically) 및 즉각적으로(immediately) 영광를 받게 되기 때문에, 따라서 "주님"이신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즉, 오주(吾主)]를 통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성경 근거인  필리피서 2,6-11제11절 중의 우리말 번역문에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하여금 논리적으로 악순환(logically vicious circle/cycle)에 빠지게 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지 그 방식 자체를 도저히 인지할 수 없게 만드는,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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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上主(상주, heavenly Lord,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 上帝(heavenly King, 높은 하늘에 계신 임금님)라는 천주교회 용어들의 출처와 기원"라는 제목의 글/논문[게시일자: 2018-08-06]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42.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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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1년 4월7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4-03-27]

(5) 다른 한편으로, '주님(Lord)'라고 불릴 수 있는 분은,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 하느님 한 분뿐이었으며(신명기 6,4), 그리고 강생하신 거룩한 말씀, 즉, 성자 하느님이 곧 예수님이심을 신앙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경우(A)에, 예를 들어, 예수님의 말씀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오 복음서 12,8) 및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복음서 10,30) 등에 의하여, 왜냐하면 통치권자를 또한 의미하는 '주님(Lord)'은 단 한 분뿐이기 때문에, 심지어 공생활 당시의 예수님이 이미 자동적으로(automatically) '주님(Lord)'이심을 알 수 있으나(마르코 복음서 12,29),

 

그러나 신약의 시대가 개시되었던 1세기의 경우에, 왜냐하면 아직은 (A)에 있는 신앙 고백을 하기 이전의 상태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A)에 있는 신앙 고백을 참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약 성경 자체가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부 하느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승천(Assention)까지 허락하심으로써, 즉, 성부 하느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성부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끼까지 높이 들어올리심으로써[참조: 루카 복음서 22,69(예수님의 증언) 및 사도행전 7,54-56(성 바오로가 자신의 두 귀들로써 직접 들은 스테파노의 순교 직전의 증언)], 즉, 성부 하느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승천(Assention)이라는 최종적 영광을 더하시는 과정으로써, [칠십인역 시편 110을 예수님께서 직접 인용하시는 마태오 복음서 22,41-46에 대한 공적 해석인]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사도행전 2,14-36)에서 당시의 유다인들이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는 바를, 이번에는(in turn) 당시의 이방인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여, 예수님이 또한 '주님(Lord)'이 되심을 성부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음을 필리피서 2,6-11에서 이방인들의 사도인 성 바오로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따라서, 예를 들어, 요한 복음서 10,30"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 진리임을 성 바오로가 증명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신성적 주권자/통치권자(the divine sovereignty)를 의미하는 '주님(Lord)'은 단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신명기 6,4; 마르코 복음서 12,29).

[이상, 2024-03-27일자 내용 추가 끝] 

 

(6) 또 다른 한편으로, 유다교이슬람교도 또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을 것이나, 특히, 그리스도교(Charistianity)란, 이들 교(教)/경신(敬神, religion)들과의 근본적인 차이점으로서, "주님"이신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를 다 드러내어 주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복음서 14,6-7)라고 말씀하신, "주님"[즉, 오주(吾主)]이신 예수님께(필리피 2,11) 우리들이 영광을 더함을 통하여(필리피서 2,6-11), 바로 이것의 결과로서, 필리피서 2,6-11 의 내용에 그 자체가 포함되지 않은 한 개의 일로서, 왜냐하면 신성적 통치권자(the divine sovereignty)를 또한 의미하는 '주님(Lord)'은 단 한 분뿐이기 때문에(신명기 6,4; 시편 148,13; 마르코 복음서 12,29), "주님"이신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들로부터 자동적으로(automatically) 및 적정(適正)하게(condignly)(요한 복음서 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영광을 받게 되는 유일한 교()/경신(敬神, religion)이기 때문에, 

 

그러나 "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6-11제11절 중의 우리말 번역문 말미에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하여금 논리적으로 악순환(logically vicious circle/cycle)에 빠지게 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성부 하느님[즉, 상주(上主, 즉,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는지 그 방식 자체를 도저히 인지할 수 없게 만드는, 심각한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4-03-27]

(7) 지금까지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에 발췌된 요한 복음서 13,31요한 복음서 13,32가 참 진리들임을 성 바오로가, 번역 오류 없는 필리피서 2,11에 근거하여, 증명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8.htm

(발췌 시작)

요한 복음서 13,31:
[cf.
이사야서 66,5(주: 주석 성경 제2265쪽 각주 필히 참조); 2테살로니카 1,12 우리말 번역 필히 참조

[1960년판 사사성경, 시제 번역 오류] 유다스가 나간 후에 예수 이르시되, 『인자 지금 영광을 받고 천주도 인자를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1961년 초판 관주 성경전서 중의 1956년 개역 한글판, 번역 오류]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RSV] When he (Judas Iscariot) had gone out,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in Him God is glorified;

[1970년 초판 NAB] 10 11 When he had left,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1977년 초판 공동번역성서, 시제 번역 오류]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2005년 초판 새 번역 성경, 시제 및 용어 번역 오류]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즉,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느낄 듯하게(주: 표준국어대사전)]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즉,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느낄 듯하게(주: 표준국어대사전)] 되셨다.

[필자에 의하여 수정된 바로 위의 새 번역 성경 본문]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고/현양(顯揚)되고(glorified),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게 되신다/현양(顯揚)되신다(is glorified).

 

요한 복음서 13,32:
[cf.
이사야서 66,5(주: 주석 성경 제2265쪽 각주 필히 참조); 2테살로니카 1,12 우리말 번역 필히 참조]

[1960년판 사사성경, 시제 번역 오류] 천주 이미 인자를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매, 천주 또한 친히 인자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요, 또 미구에 인자를 영화롭게 하시리라.

[1961년 초판 관주 성경전서 중의 1956년 개역 한글판, 시제 번역 오류]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RSV] if God is glorified in Him, God wi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and glorify Him at once.

[1970년 초판 NAB] (If God is glorified in him,) God wi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and he will glorify him at once.

[1977년 초판 공동번역성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

[2005년 초판 새 번역 성경, 시제 및 용어 번역 오류]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즉,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느낄 듯하게(주: 표준국어대사전)]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즉,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를 느낄 듯하게(주: 표준국어대사전)] 하실 것이다.

[필자에 의하여 수정된 바로 위의 새 번역 성경 본문]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게 되면(is glorified),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더하실(will glorify) 것이다. 이제 곧 그에게 영광을 더하실(will glorify) 것이다.

(이상, 발췌 끝)

[이상, 2024-03-27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시자 주 1-3-1 끝)

 

1-3-2. 그러나, 바로 위의 제1-3-1항에서 말씀드린, 바로 그러한 contra-variant힌 극명한 대조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연, 현재까지 우리나라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에서 번역한 우리말본 신약 성경들, 필리피서 2,8필리피서 2,11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4월 17일]

1-3-3. 지금까지 위의 제1항에서 지적한 바에 이어지는 글로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0항에서, 마침내 는 최종적으로(finally) 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번역 오류]; 게시일자: 2020-01-05]을 반드시 필독하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21.htm <----- 반드시 필독하라

[이상, 2021년 4월 17일자 내용 추가 끝]

 

1-4. (질문 1에 대한 답변 2) 

1-4-1. 1992년에 프랑스어본 및 이탈리아어본이 초간되었고, 예를 들어, 세속의 양성 평등 사상의 교회 안쪽으로의 침투 시도 등이 포함되는 이유들 때문에, 5년간의 보완 작업을 거쳐 1997년라틴어 정본 및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출판된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9항 전문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필리피서 2,11에서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매우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1H.HTM 

(발췌 시작)

449 By attributing to Jesus the divine title "Lord", the first confessions of the Church's faith affirm from the beginning that the power, honour and glory due to God the Father are due also to Jesus, because "he was in the form of God",65 and the Father manifested the sovereignty of Jesus by raising him from the dead and exalting him into his glory.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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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Cf. Acts 2:34 - 36; Rom 9:5; Titus 2:13; Rev 5:13; Phil 2:6.
66 Cf. Rom 10:9; I Cor 12:3; Phil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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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신성적 칭호"주님"을 예수님께 돌림으로써, 교회의 신앙의 첫 번째 고백들은 그 시초부터 성부 하느님께 합당한 힘, 명예 그리고 영광이 또한 예수님께 합당함을 확언하는데,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형체/모습(form)으로 계셨으며",65) 그리고 성부께서 그분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심으로써 및 그분을 당신의 영광 안쪽으로까지 고양(高揚)함으로써[참조: 루카 복음서 22,69(예수님의 증언) 및 사도행전 7,54-56(성 바오로가 자신의 두 귀들로써 직접 들은 스테파노의 순교 직전의 증언)] [승천하신] 예수님의 [신성적] 통치권/주권(sovereignty)[즉, 승천하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66)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1-4-1: (1) 다음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제공의 라틴어 정본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9항 전문입니다:

 

출처: https://cbck.or.kr/Documents/Catechism/Read/449 

(발췌 시작)

449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는 신성한 칭호로 부름으로써,[69] 권능과 영예와 영광을 하느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확언한다.[70]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과 같은 분”(필리 2,6)이시며, 성부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당신의 영광 안에 들어 높이심으로써[71] 예수님의 주권을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449 Priores confessiones fidei Ecclesiae, Iesu titulum divinum Domini tribuentes, ab origine affirmant potestatem, honorem et gloriam Deo Patri debitas etiam Iesu deberi, quia Ipse est “in forma Dei”(Phil 2,6) et quia Pater hunc Iesu manifestavit dominatum Eum resuscitans ex mortuis et exaltans in gloria 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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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사도 2,34-36 참조.

70. 로마 9,5; 티토 2,13; 묵시 5,13 참조.

71. 로마 10,9; 1코린 12,3; 필리 2,9-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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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미숙]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라틴어 전치사 "in""안에"로 번역되었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in" 이 라틴어 단어 "exaltans"[주: 영어 to raise, elevate, exalt] 바로 뒤에 사용된 전치사이기 때문에, 이보다는, 예를 들어, "안쪽으로까지"(into)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전치사 "in"이, 영어 전치사 "in"(안에)뿐만이 아니라, 움직임의 동사(verbs of motion)들과 함께 사용될 때에 영어 전치사 "into"(안쪽으로), "to"/"toward"(쪽으로, 쪽으로 향하여) 등의 의미를 또한 가지고 있음을, 라틴어 사전인 Charlton T. Lewis, Charles Short, A Latin Dictionary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4.0059%3Aentry%3Din1 <----- 필이 확인하라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24-03-31(나해 주님 부활 대축일)]

1-4-2. 다음은, 나해인 2000년 대희년 4월 16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강론 말씀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s://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homilies/2000/documents/hf_jp-ii_hom_20000416_palm-sunday.html 

(발췌 시작)

HOMILY OF THE HOLY FATHER 

PALM SUNDAY

16 April 2000

 

1. "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Mt 21: 9; cf. Ps 117 [118]: 26).

 

1. "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을 받게 되니라! (마태오 복음서 21,9; 참조: 시편 117[118], 26)

 

[내용 추가 일자: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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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표현 'nomine Domini'의 우리말 번역 표현이, '주님의 이름' 대신에, 반드시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야 함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3310.htm <----- 꼭 필독 권고  

 

그리고 이 지적과 관련하여, 위의 게시자 주 1-4-1에 발췌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제공의 라틴어 정본 및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9항에서, '주님 신성한 칭호로 부름으로써' 대신에, '주님이라는 신성한 칭호로 부름으로써'로 번역되었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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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4년 4월 1일자 내용 추가 끝]

 

In this surging cry we hear an echo of the enthusiastic welcome which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gave Jesus for the feast of Passover. We hear it again each time we sing the Sanctus during Mass.

 

바로 이 파동치는(surging) 외침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거주자들이 과월절(the feast of Passoverr)을 위하여 예수님께 제공하였던, 정열적 환영으로 구성된, 한 개의 반향(an echo)을 듣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거룩하시도다(Sanctus)를 노래하는 각 시간에 또다시 이 환호를 듣습니다.

 

After saying:  "Pleni sunt caeli et terra gloria tua", we add:  "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Hosanna in excelsis".

 

다음과 같이 기도한 다음, "Pleni sunt caeli et terra gloria tua". 우리는 다음을 추가합니다: "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Hosanna in excelsis".

 

In this hymn, whose first part is taken from the prophet Isaiah (cf. Is 6: 3), the "thrice holy" God Lord(Κύριος, 이사야 6,1 및 6,3 in 칠십인역 그리스어본 구약성경)(*)  is exalted. In the second part, we express the assembly's grateful joy at the fulfilment of the messianic promises: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그 첫 번째 부분이 예언자 이사야 (참조: 이사야 6,3) 로부터 발췌된 바로 이 찬미가(hymn)에서, "세 번 거룩하신" 주님(Lord)(Κύριος, 이사야 6,1 및 6,3 in 칠십인역 그리스어본 구약성경)(*)께서 고양(高揚)됩니다/높이 들어올림을 받게 됩니다(is exalted). [바로 이 찬미가의]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아저 약속들의 구현에 접하여(at) 군중의 고마워하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을 받게 되니라(is blessed),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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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 예로니모께서 이사야서 6,1 및 6,3에서, 히브리어 "Adonai"(Lord, 주님)에 등가인 "Dominum" "Dominus"로 각각 올바르게 직역 번역을 하였는데, 그러나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위의 영어본 강론 말씀에서, "Lord" 대신에, "God"대단히 잘못 번역이 되었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https://en.katabiblon.com/us/index.php?text=LXX&book=Is&ch=6&interlin=on [주: "κύριον"(이사야 6,1) "κύριος"(이사야 6,3) in 신약 성경 본문에서 발췌 인용되고 있는 칠십인역 그리스어본 구약 성경]

https://www.newadvent.org/bible/isa006.htm [주: Dominum  Dominus in Vulgate]

https://biblehub.com/interlinear/isaiah/6-1.htm 

https://biblehub.com/interlinear/isaiah/6-3.htm  [주: Adonai(이사야 6,1)  Yahweh(이사야 6,3) in 마소라본 구약 성경(기원후 9세기 경에 유다교 용도로 편집된 구약 성경)]

https://biblehub.com/isaiah/6-1.htm [주: "Lord" in 거의 대부분의 영어본 성경들]

https://biblehub.com/isaiah/6-3.htm [주: "Lord" in 거의 대부분의 영어본 성경들]

http://catho.org/9.php?d=cba#fe [주: Seigneur in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서 TOB]

https://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nova-vulgata_vt_isaiae_lt.html#6 [주: Dominum  Dominus in Nova Vulgata(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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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thoughts naturally turn to the people of the Covenant who for centuries and generations lived in expectation of the Messiah. Some believed John the Baptist to be the one in whom the promises would be fulfilled. However, as we know, the Precursor answered the explicit question about his possible messianic identity with a clear denial, referring those who questioned him to Jesus.

 

우리의 생각들은, 세기들 및 세대들 통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예상(expectation) 안에서 살았던 계약의 백성 쪽으로, 자연적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어떠한 자들은 요한 세례자가 그 안에서 이 약속들이 구현될(would) 바로 그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선구자는, 자신의 가능한 메사아적 정체성에 관하여, 자신에게 질문을 한 자들을 예수님 쪽으로 언급함이라는 한 개의 분명한 부정(denial)으로써, 그들에게 답변하였습니다.

 

There was a growing conviction among the people that the messianic times had now arrived, first through the Baptis t's testimony, then through the words and signs performed by Jesus, especially because of the raising of Lazarus, which had occurred a few days before the entry into Jerusalem, of which today's Gospel speaks. This is why, when Jesus arrives in the city riding on a young ass, the crowd greets him with a burst of joy: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Hosanna in the highest" (Mt 21: 9).

 

이 세례자의 증언을 통하여 첫 번째, 그런 다음에 예수님에 의하여 약속된 말씀들과 표징들을 통하여특별히, 바로 그것에 대하여 오늘의 복음 말씀이 이야기하는[즉, 요한 복음서 11,45-53을 말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서 14,1ㄴ), 예루살렘 안쪽으로 [예수님의] 입성 며칠 전에 이미 발생하였던, 라자로를 소생시킴 때문에, 메시아의 시대가 이제 이미 도달하였다는 어떤 성장하는 확신(a growing confiction)이 이 백성 사이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어린 나귀 등에 타고서 이 도성에 도착할 때에 군중이, 다음과 같은, 기쁨으로 구성된 한 개의 격발(a burst)로써 그분을 영접한(greets) 이유입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을 받게 되니라(is blessed),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마태오 복음서 21,9).

 

2. The rites of Palm Sunday reflect the people's joy as they wait for the Messiah but, at the same time, they are characterized as a liturgy "of the passion" in the full sense. Indeed, they open before us the prospect of the now imminent drama, which we have just relived in the account of the Evangelist Mark. The other readings too bring us into the mystery of the Lord's passion and death. The words of the prophet Isaiah, whom some like to see as an Old Testament evangelist, show us the image of a condemned man who is scourged and buffeted (cf. Is 50: 6). The refrain of the responsorial psalm,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has us contemplate the agony of Jesus on the cross (cf. Mk 15: 34).

 

But it is the Apostle Paul who, in the second reading, offers us the deepest analysis of the paschal mystery:  Jesus, "though he was in the form of God, did not count equality with God a thing to be grasped, 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servant ...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unto death, even death on a cross" (Phil 2: 6-8). In the austere liturgy of Good Friday we will listen again to these words, which continue:  "Therefore God has 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the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ibid., 2: 9-11).

 

그러나, 오늘의 제2독서에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파스카 신비에 대한 가장 깊은 해석을 제공한 분은 바로 사도 바오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형체(form)으로 계셨지만, 붙잡게 되는 한 개의 사물인 하느님과 동등함(equality)을 셈에 넣지(count) 않으시고, 다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그리하여 그 결과 한 명의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부의 명령에] 순종하셨습니다" (필리피 2,6-8). 성 금요일의 준엄한 전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는, 이들 말씀들을 또 다시 장차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이미 높이 고양(高揚)하셨고 그리하여 그분 위에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즉, 칠십인역 그리스어본 시편 148,13에 제시된 충분 조건이 충족되는 이름, 즉, 주님]을 이미 수여하셨으며(필리피서 2,9)[주: 위의 게시자 주 1-4-1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9항], 그리하여 그 결과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하늘과 지상 그리고 지하에 있는, 모든 무릎은 마땅히 구부려져야 하고, 그리고 모든 혀는, 성부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라고 마땅히 고백하여야 합니다" (필리피 2,9-11)

 

Abasement and exaltation:  this is the key to understanding the paschal mystery; this is the key to penetrating God's wonderful plan which is fulfilled in the paschal events.

 

굴욕(abasement)과 고양(高揚)/높이 들어올림 받음(exaltation): 바로 이것이 파스카 신비를 이해하는 열쇠(key)이며, 그리고 바로 이것이 파스카 사건들 안에서 구현된 하느님의 경이로운 계획을 관통하는 열쇠(key)입니다.

(이상, 발췌 및 일부 단락들의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24-03-31일자 내용 추가 끝]

 

1-5. 이번 항에 발췌된 바들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 성무일도/시간경매달 매주일 저녁 기도(Vesper)로서 바쳐지고 있는, 한 개의 찬가(Canticle)인 필리피서 2,6-11에 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들 입니다:

 

츨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psalter/jp2_b16_commentaries.htm 

 

1-5-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무일도/시간경매달 첫 번째 주일 저녁 기도(Vesper)로서 바쳐지고 있는, 한 개의 찬가(Canticle)인 필리피서 2,6-11에 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2003년11월 19일자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전문[제목: 하느님의 종이신 그리스도(Christ, Servant of God)]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jp-ii_aud_20031119_en.htm  

(발췌 시작)

Canticle of the first Sunday of Vespers, Philippians 2: 6-11
"Christ, servant of God"

 

"하느님의 종이신 그리스도"

 

1. In addition to the Psalms, the Liturgy of Vespers includes certain Biblical Canticles. The Canticle just proclaimed is undoubtedly one of the most significant and theologically rich. It is a hymn placed in the second chapter of the Letter of St Paul to the Christians of Philippi, the Greek city that was the Apostle's first stop of missionary proclamation in Europe. The Canticle is thought to be an expression of the original Christian Liturgy and it is a joy for our generation, after two millennia, to join in the prayer of the Apostolic Church.

 

1. 저녁 기도들 전례(the Liturgy of Vespers)는, 시편(Psalms)들에 추가적으로, 어떤 정해진 성경 찬가(Biblical Canticles)들을 포함합니다.(*) 방금 선포된 이 찬가는 틀림없이(undoubtedly) 가장 의미심장한(significant) 그리고 신학적으로 귀중한(rich) 찬가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찬가는, 유럽 쪽으로(in) 선교 선포(missionary proclamation)에 있어 성 바오로가 첫 번째로 머무른 지역(stop)이었던 그리스 도시인, 피리피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성 바오로의 서간의 두 번째 장에 놓여져 있는 한 개의 찬미가(a hymn)입니다. 이 찬가는 원 그리스도교 전례(the original Christian Liturgy)의 한 표현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 찬가는, 2000년 이후에, 우리 세대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the Apostolic Church)[즉, 가톨릭 교회]의 기도에 결합하는(join), 한 개의 기쁨(a jo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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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psalter/jp2_b16_commentarie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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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nticle unfolds in a double vertical trajectory: a first movement is one of descent followed by ascension. Indeed, on one hand, there is the humiliating descent of the Son of God when, in the Incarnation, he becomes man out of love for humankind. He plummets into the kenosis, the "emptying" of his divine glory, pushed to the point of death on the Cross, the punishment of slaves who were least among men, thus making him a true brother of suffering humanity, sinful and rejected.

 

이 찬가는 다음과 같이 어떤 이중의(double) 수직적 궤도(trajectory)를 펼칩니다(unfolds): 첫 번째 움직임은, 오름(ascension)에 의하여 뒤따르게 되는, 내림으로 구성된 하나(one of descent) 입니다. 정말로, 한 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즉, 성자]의 굴욕적인 내림(humiliating descent)이, 그분께서, 강생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man)이 되실 때,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미천한 자들인 노예들에 대한 벌인, 십자가 위에서 죽음이라는 정도에까지(to the point) 강요되는(pushed to), 그리하여 당신께서, 죄로 가득찬(sinful) 그리하여 거부된(rejected), 고통 받는 인류(suffering humanity)의 한 명의 참된 형제가 되게 하는, kenosis, 즉, 당신의 신성적 영광(divine glory)을 "비우심"(emptying), 안쪽으로 수직으로 떨어지십니다(plummets into).

 

2. On the other hand, there is the triumphant ascension which takes place on Easter Day, when the Father reinstates Christ in the divine splendour and he is celebrated as Lord by the entire cosmos and by all men and women now redeemed. We are placed before a magnificent re-reading of Christ's mystery, primarily the Paschal one. St Paul, along with proclaiming the Resurrection (cf. I Cor 15: 3-5), defines Christ's Paschal mystery as the "exaltation", "raising up", "glorification".(*)

 

2. 다른 한 편으로,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신성적 광채(divine splendour) 쪽으로 복위시키시는(reinstates) 그리하여 그분께서, 전체 우주에 의하여 및 이제 구속(救贖)을 받은(now redeemed) 모든 사람(men)들과 여자(women)들에 의하여, 주님(Lord)으로서 경축되는 때인부활절 주일(Easter Day)에 발생하는 승리의 오름(triumphant ascension)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되게 파스카 신비인,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한 개의 장엄한 다시 읽음(re-reading)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i) "당신의 부활을 선포함"에 추가하여(along with)(1코린토 15,3-5 참조),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즉, 구속(救贖) 신비]를, (ii) "고양(高揚)"/"높이 들어올림 받음"(exaltation), "일으켜 세워짐"(raising up), "영광을 받음"(glorification)으로서, 정의합니다(defines).(*)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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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바로 이 근거로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대희년인 2000년 5월 24일자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에서 또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jp-ii_aud_20000524.html  

(발췌 시작)

1. The mystery of Christ's Passover involves the history of humanity, but at the same time it transcends it. Thought itself and human language can in some way grasp and communicate this mystery, but do not exhaust it. For this reason, the New Testament, although speaking of "resurrection", as attested by the ancient Creed(*1) which Paul himself received and passes on in his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cf. 15:3-5), also uses another expression to explain the meaning of Easter.

 

1. 그리스도의 과월/파스카(passover) 신비[즉, 구속(救贖, Redemption) 신비](*1)는 인류의 역사를 감싸나(involves), 그러나 동시에 이 신비는 이 역사를 초월합니다. 사유(thought) 그 자체 및 인간의 언어는 바로 이 신비를 어떠한 방식으로 붙잡을(grasp) 수 있고 그리고 전달할(communicate)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 신비를 남김없이 논하지(exhaust) 못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신약 성경은, 바오로 자신이 받아들였고 그리고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자신의 첫 번째 서간에서 전하는(passes on)(1코린토 15,3-5 참조) 고대 신경(the ancient Creed)(*2)에 의하여 입증되듯이, 비록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과월/파스카(Easter)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표현을 또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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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21년 4월 28일]

(*1)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집에 제시된 유관 설명을 학습할 수 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88.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3-1. 다음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증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 사전에 주어진 "파스카 신비/희생제물 (Paschal Mystery/Sacrifice)"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1: http://old.usccb.org/catechism/text/glossary.shtml#p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cc_glossary.htm#p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PASCHAL MYSTERY/SACRIFICE:

 

Christ's work of redemption accomplished principally by his Passion, death, Resurrection, and glorious Ascension, whereby "dying he destroyed our death, rising he restored our life" (1067; cf. 654). The Paschal Mystery is celebrated and made present in the liturgy of the Church, and its saving effects are communicated through the sacraments (1076), especially the Eucharist, which renews the paschal sacrifice of Christ as the sacrifice offered by the Church (571, 1362-1372).

 

파스카 신비/희생제사(PASCHAL MYSTERY/SACRIFICE):


당신의 수난(Passion), 죽음, 부활(Resurrection), 그리고 영광을 발하는(glorious) 승천(Ascension)에 의하여 주로 성취된 속량(redemption, 구속)이라는 그리스도의 위업을 말하는데, 그 결과로 “죽으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우리들의 죽음을 파괴하셨고 그리고, 일어나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우리들의 생명을 회복시키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67항;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4항 참조),(*) 이 파스카 신비는 교회의 전례 안에서 경축되고 그리하여 현존하게 되며, 그리고 이 신비의 구하는 효능(saving effects)들은 성사(the sacraments)들을 통하여(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76항), 특히, 교회에 의하여 봉헌되는 희생 제물로서 그리스도라는 파스카 희생 제물(the paschal sacrifice of Christ)을 새롭게 하는, 성체성사(the Eucharist)를 통하여 전달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71항, 제1362-1372항).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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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그리스도에 의한 바로 이 구속 위업은 또한 "객관적 구속"(objective redemption)이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여,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콜로새 1,24-2,3)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3_m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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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21년 4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끝)

[이상, 2021년 4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2)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고대 신경(the ancient creed)은, 로마서 6,17에서 "가르침의 표준"(the standard of teaching)이라고 언급되는 바, 즉, 사도 베드로가 로마로 갈 때에 이미 가지고 갔던 그리고 이후에 "사도신경"이라고 불리는 바를 말할 것이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의 글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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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ecially in John and Paul it is presented as the exaltation or glorification of the Crucified One. Thus, for the fourth Evangelist, the Cross of Christ is already the royal throne which stands on earth but penetrates the heavens. Christ is seated on it as the Saviour and Lord of history.

 

특별히 [사도] 요한(John)바오로(Paul)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과월/파스카(passover)십자가 형벌을 받은 자(the Crucified One)가 고양(高揚)/높이 들어올림 받음(exaltation) 혹은 영광을 받음(glorification)으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 네 번째 복음사가의 경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땅위에 서 있으나 그러나 하늘들을 관통하는, 왕좌(the royal throne)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구세주(Saviour)주님(Lord)으로서 그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Jesus, in fact, exclaims in the Gospel of John: "I, 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men to myself" (12:32; cf. 3:14; 8:28). In the hymn inserted in the Letter to the Philippians, Paul, after describing the profound humiliation of the Son of God in his death on a cross, celebrates Easter in this way: "Therefore God has highly exalted him and bestowed on him the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that at the name of Jesus every knee should bow, in heaven and on earth and under the earth, and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 (Phil 2:9-11).

 

예수님께서는, 사실, 요한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외치십니다(exclaims): "나는, 땅으로부터 내가 높이 들어올려질 때에, 모든 사람들을 나 자신 쪽으로 장차 잡아당길 것이다" (요한 복음서 12,32; 요한 복음서 3,14 및 8,28 참조).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삽입된 찬미가에서, 바오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에 있어, 심오한 모욕(profound humiliation)을 묘사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과월/파스카(Easter)[즉, 구속(救贖, Redemption)]를 경축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즉, 주님]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였습니다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이르기까지(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3)(필리피,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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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번역자 주: 바로 이 마지막 문구의 우리말 번역문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즉, 본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새 번역 성경"의 대응하는 번역문이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부득불, 필자가 바로잡은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92.htm [주: 본글]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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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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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fore, from the bright horizon of divine transcendence, the Son of God crossed the infinite distance between Creator and creature. He did not grasp on, as if to a prey, to his "equality with God", which was due to him by nature and not from usurpation. He did not want to claim jealously this prerogative as a treasure, nor use it for his own interests. Rather, Christ "emptied", "humbled" himself and appeared poor, weak, destined for the shameful death of crucifixion; it is precisely from this extreme humiliation that the great movement of ascension takes off, described in the second part of the Pauline hymn (cf. Phil 2, 9-11).

 

바로 이러한/다음의 방식으로(therefore), 신성적 초월(divine transcendence)의 빛나는 지평선으로부터, 하느님의 아드님[즉, 성자]께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건너셨습니다(crossed): 즉. 그분께서는, 당신의 본성(nature)에 의하여 당신에게 마땅한(due) 그리하여 권리 침해(usurpation)가 아니었던, "하느님과 동등"(equality with God) 쪽으로, 마치 한 마리의 먹이(a prey) 쪽으로 처럼, 붙잡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바로 이 특권(prerogative)을 한 개의 보물로서 시기하면서(jeasously) 주장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또한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사리(私利, interests)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셨고"(emptied), "겸허하게 하셨으며"(humbled) 그리하여 십자가 형벌(crecifixion)이라는 창피한 죽음을 향하게 되는, 가난하고, 나약한 자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는데(appeared), 그리하여, 바오로의 찬미가(hymn)의 두 번째 부분에 서술되어 있는(필리피 2,9-11 참조)오름(ascension)이라는 위대한 움직임이 이륙하는(take off) 것은, 정확하게(precisely), 바로 이 극단적인 모욕(humiliation)으로부터 입니다.

 

3. God now "exalts" his Son, conferring upon him a glorious "name" which, in Biblical language, indicates the person himself and his dignity. Now this "name" Kyrios or "Lord", the sacred name of the Biblical God, is given to the Risen Christ. This places heaven, earth and hell, according to the division of the universe into three parts, in a state of adoration.

 

3. 하느님께서는 이제, 그분 위에, 성경 언어(Bilical language)에 있어, 해당 인격(person)인 그분 자신 및 그분의 품위(dignity)를 가리키는, 한 개의 영광을 발하는(glorious) "이름"을 수여하심으로써(conferring), 당신의 아드님(Son)을 "고양(高揚)하십니다"/"높이 들어올리십니다"(exalts). 이제, 성경 하느님(the Biblical God)의 성스러운 이름(the sacred name)인, 키리오스(Kyrios) 혹은 "주님"(Lord)라는 바로 이 이름이, 일어나게 되신 그리스도(the Risen Christ)에게 [성부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집니다. 바로 이 이름은, 흠숭(acoration)이라는 한 개의 상태에 있으면서, 우주를 세 개의 부분들로 구분함에 따라, 하늘(heaven), 땅(earth) 그리고 저승(hell)로 정돈합니다/배치합니다(places).

 

In this way, at the close of the hymn, Christ appears in glory as the Pantocrator, that is, the omnipotent Lord triumphantly enthroned in the apses of the Palaeochristian and Byzantine basilicas. He still bears the signs of the passion, of his true humanity, but now reveals the splendour of divinity. Near to us in suffering and death, Christ now draws us to himself in glory, blessing us and letting us share in his eternity.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 찬미가의 끝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전능하신 지배자(Pantocrator)로서, 즉, 고대 그리스도교(Palaeochristian) 및 비잔틴 바실리카Byzantine basilicas들의 동쪽 끝에 쏙 내민 반원(apses)들에 의기양양하게(triumphantly) 왕좌에 앉게 되신(enthroned) 전능하신 주님(the omnipotent Lord)으로서, 영광 안에서(in glory), 나타나십니다(appears). 그분께서는 당신의 수난(the passion)의, 당신의 참된 인성(humanity)의, 표시(signs)들을 여전히(still) 지니고 계시나, 그러나 이제 신성의 광채(the splendour of divinity)를 드러내어 보이십니다(reveals). 고통 받음(suffering)과 죽음(death)의 상태에 있는 우리들 쪽으로 접근하시어(near),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영광 안에 계시는(in glory) 당신 자신 쪽으로, 우리들을 축복하심으로써(blessing) 그리하여 우리들이 당신의 영원(eternity)을 함께 나누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letting), 우리들을 잡아당기십니다(draws).

 

4. Let us conclude our reflection on the Pauline hymn with the words of St Ambrose, who often uses the image of Christ who "emptied himself", humiliating himself and, as it were, annihilating himself (exinanivit semetipsum) in the Incarnation and his oblation on the Cross.

 

Particularly in his Explanatio super Psalmos CXVIII [Comment on Psalm CXVIII], the Bishop of Milan says:  "Christ, hung on the tree of the Cross... was pierced by the lance, whereby blood and water flowed out, sweeter than any ointment, from the victim acceptable to God, spreading throughout the world the perfume of sanctification.... Thus, Jesus, pierced, spread the perfume of the forgiveness of sins and of redemption[구속(救贖)]. Indeed, in becoming man from the Word which he was, he was very limited and became poor, though he was rich, so as to make us rich through his poverty (cf. II Cor 8: 9). He was powerful, yet he showed himself as deprived, so much so that Herod scorned and derided him; he could have shaken the earth, yet he remained attached to that tree; he closed the heavens in a grip of darkness, setting the world on the cross, but he had been put on the Cross; he bowed his head, yet the Word sprung forth; he was annihilated, nevertheless he filled everything. God descended, man ascended; the Word became flesh so that flesh could revindicate for itself the throne of the Word at God's right hand; he was completely wounded, and yet from him the ointment flowed. He seemed unknown, yet God recognized him" (III, 8, Saemo IX, Milan-Rome 1987, pp. 131, 133).

(이상, 발췌 및 일부 단락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1-5-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무일도/시간경매달 두 번째 주일 저녁 기도(Vesper)로서 바쳐지고 있는, 한 개의 찬가(Canticle)인 필리피서 2,6-11에 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2004년 8월 4일자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전문[제목: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He empited Himself)]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jp-ii_aud_20040804_en.htm  

(발췌 시작)

Canticle in Philippians (2: 6-11)
He emptied himself!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1. On our journey through the Psalms and Canticles that make up the Liturgy of the Hours we have come to the Canticle in Philippians (2: 6-11) that is a feature of First Vespers on all of the four Sundays that the Liturgy covers.

 

We are meditating upon it for the second time, exploring more deeply the wealth of its theology. These verses shine with the Christian faith of the origins, centred on the figure of Jesus, recognized and proclaimed our brother in humanity but also Lord of the universe. Thus, it is a real confession of Christological faith that mirrors clearly the thought of St Paul but may also echo the voice of the Judeo-Christian community before the Apostle's time.

 

2. The Canticle starts from the divinity of Jesus Christ. Indeed, the divine "nature" and condition are his - in Greek, morphé - that is, the essential transcendent reality of God (cf. v. 6). Yet he does not consider his supreme and glorious identity as a proud privilege of which to boast nor as a sign of power and mere superiority.

 

Our hymn clearly moves downwards, that is, towards humanity. It is on this path of "emptying" himself, or as it were, stripping himself of that glory to take on the morphé, in other words, the reality and condition of a servant, that the Word takes on in order to enter the horizon of human history. Indeed, he assumes the "likeness" of human beings (cf. v. 7) and even goes so far as to accept the sign of limitation and finality which death is. It is an extreme humiliation, for he even accepted death on the cross, which the society in his time held to be the vilest form (v. 8).

 

3. Christ chose to lower himself from glory to death on a cross; this is the first movement of the Canticle to which, in order to reveal its other nuances, we will have occasion to return.

 

3. 그리스도께서는 영광(glory)으로부터 십자가 위에서 죽음(death) 이르기까지(to)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것을 선택하였으며,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찬가의 첫 번째 움직임인데, 바로 그것 쪽으로, 그것의 다른 뉘앙스를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가 되돌아가는 때를 장차 가질 것입니다(will).

 

The second movement is in the opposite direction:  from below it ascends to the heights, from humiliation it rises towards exaltation. It is now the Father who glorifies the Son, snatching him from the clutches of death and enthroning him as Lord of the universe (cf. v. 9). St Peter too, in his discourse at Pentecost, declares that "God has made him both Lord and Christ, this Jesus whom you crucified" (Acts 2: 36). Easter, therefore, is the solemn Epiphany of the divinity of Christ, which is at first concealed by his condition as a servant and a mortal.

 

[이 찬가의] 두 번째 움직임은 다음과 같이 반대 방향 쪽으로(in) 있습니다: 아래에서부터 높은 데로 이 움직임은 올라가고, 모욕(humiliation)으로부터 [성부 하느님의 영광 안쪽으로] 고양(高揚)(exaltation) 이르기까지(to) 이 움직임은 치솟습니다(rises). 죽음의 발톱(clutches)들로부터 그분을 낚아 챔(snatching)으로써 그리고 그분에게 이 우주의 주님(Lord)으로서 왕좌에 앉힘(enthroning)으로써, 이 아드님에게 영광을 더하시는(glorifies) 분은 이제 바로 성부이십니다(제9절 참조). 성 베드로도 또한, 성령 강림일 자신의 강화에서, "하느님께서 그분을 주님(Lord) 및 그리스도(Christ) 둘 다로 이미 삼으셨는데, 바로 이 예수님을 여러분들이 십자가형에 처하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36). 그러므로, 과월/파스카(Easter)는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의 장엄한 현현(顯現, Epophany)인데, 이 현현은 처음에, 한 명의 종(a servant) 및 한 명의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a mortal)으로서 이라는, 그분의 조건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4. Before the grandiose figure of Christ glorified and enthroned, let everyone fall to their knees in adoration. A powerful profession of faith is raised not only from within the whole horizon of human history, but also from heaven and from hell (cf. Phil 2: 10): "Jesus Christ is Lord" (v. 11) "We see Jesus, who for a little while was made lower than the angels, crowned with glory and honour because of the suffering of death, so that by the grace of God 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Heb 2: 9).

 

4. 영광을 받으신(glorified) 그리고 왕죄에 않히게 된 그리스도의 숭고한 표상(figure) 면전에서, 모든 이는 흠숭에 있어(in adoration) 자신들의 무릎을 꿇도록 합시다. 어떤, 강력한(powerful), 신앙 고백(profession of faith)이, 인간의 역사의 전체 지평선 안쪽에서부터 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늘(heaven)로부터 및 저승(hell)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십니다" (필리피 2,10 참조).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게 되셨다가", 하느님의 은총(grace)에 의하여 그분께서 모든 이를 위한 죽음을 맛볼 수도(might) 있도록 하는, 죽음에 기인하는 고통 받음(suffering)의 이유로(because of)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게 되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 2,9).

 

Let us end our brief analysis of the Canticle in Philippians, to which we will need to return, by listening to the words of St Augustine who, in his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Commento al Vangelo di San Giovanni), refers to the Pauline hymn to celebrate the life-giving power of Christ who brings about our resurrection, snatching us from our mortal end.

 

5. These are the words of the great Father of the Church: "Christ, "though his nature was divine, did not jealously keep his equality with God to himself'. What would have become of us, here below in the abyss, weak and attached to the earth, hence, incapable of reaching God? Could we have been left to ourselves? Absolutely not. He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servant', but without abandoning his divine form. Consequently, he who was God, made himself man, taking on what he was not without losing what he was; thus, God became man. Here, on the one hand, you find help in your weakness, and on the other, you find what you need to attain perfection. Christ raises you up by virtue of his humanity, he guides you by virtue of his human divinity and leads you to his divinity. All Christian preaching, O brothers, and the economy of salvation centred on Christ is summed up in this and in nothing else:  in the resurrection of souls and the resurrection of bodies.

 

Both died: the body because of its weakness, the soul because of its wickedness; both were dead and both, the soul and the body, had to be raised. By virtue of whom is the soul raised if not by Christ as God? By virtue of whom is the body raised, if not by Christ as Man?... Your soul rises from wickedness by virtue of his divinity and your body rises from corruption by virtue of his humanity" (Commento al Vangelo di San Giovanni, 23, 6, Rome, 1968, p. 541).

(이상, 발췌 및 일부 단락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1-5-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무일도/시간경매달 세 번째 주일 저녁 기도(Vesper)로서 바쳐지고 있는, 한 개의 찬가(Canticle)인 필리피서 2,6-11에 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05년 6월 1일자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전문[제목: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겸허하게 하셨습니다(He humbled himself)]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aud_20050601_en.htm

(발췌 시작)

Canticle cf. Letter to the Philippians (2: 6-11)
He humbled himself
Evening Prayer 

 

1. In every Sunday celebration of Vespers the liturgy proposes anew the Christological hymn of the Letter to the Philippians (cf. 2: 6-11) which is short but laden with meaning. We are examining the first part of this hymn that has just resounded (vv. 6-8), in which the paradoxical "self-emptying" of the Divine Word is described as he divests himself of his glory and takes on the human condition.

 

Christ, incarnate and humiliated by the most shameful death of crucifixion, is held up as a vital model for Christians. Indeed, as is clear from the context, their "attitude must be that of Christ" (v. 5), and their sentiments, humility and self-giving, detachment and generosity.

 

2. He certainly possesses the divine nature with all its prerogatives. But this transcendent reality is not interpreted or lived out under the banner of power, greatness and dominion. Christ does not use his equality with God, his glorious dignity or his power as an instrument of triumph, a sign of remoteness or an expression of incontestable supremacy (cf. v. 6). On the contrary, he strips or "empties himself", immersing himself without reserve in our weak and wretched human condition. In Christ the divine "form" (morphe) is concealed beneath the human "form" (morphe), that is, beneath our reality marked by suffering, poverty, limitation and death (cf. v. 7).

 

Consequently, it was not a mere disguise or a change in appearance such as people believed the deities of the Greco-Roman culture could assume. The form Christ took was divine reality in an authentically human experience. God does not appear only as a man, but he makes himself man and truly becomes one of us, he truly becomes the "God-with-us" who is not satisfied with looking down kindly upon us from the throne of his glory, but plunges in person into human history, becoming "flesh" or, in other words, a fragile reality, conditioned by time and space (cf. Jn 1: 14).

 

3. This radical and true sharing in the human condition, with the exception of sin (cf. Heb 4: 15), leads Jesus to the boundary that is a sign of our finite condition and transience: death. However, it is not the product of an obscure mechanism or a blind fatalism. It stems from his free choice of obedience to the Father's plan of salvation (cf. Phil 2: 8).

 

The Apostle adds that the death Jesus encounters is death on a cross, actually the most disgraceful death; he thereby desires to be truly a brother to every man and every woman, also of those who are forced to suffer an atrocious or ignominious end.

 

But it was precisely in his passion and death that Christ witnessed to his free and conscious obedience to the Father's will, as we read in the Letter to the Hebrews: "Son though he was, he learned obedience from what he suffered" (Heb 5: 8).

 

Let us conclude here our reflection on the first part of the Christological hymn that is centred on the Incarnation and the redeeming passion[구속(救贖)하는 수난]. We will have an opportunity later to examine the subsequent paschal development that leads from the Cross to glory.

 

The basic element of this first part of the Canticle seems to me to be the invitation to enter into Jesus' sentiments. Entering into the sentiments of Jesus means not considering power, riches and prestige as the supreme values in our lives, for basically they do not respond to our most profound spiritual thirst, but rather, by opening our hearts to the Other, carrying with the Other our life's burden and opening ourselves to Our Heavenly Father with a sense of obedience and trust, knowing that by such obedience to the Father, we will be free. Entering into the sentiments of Jesus: this should be our daily practice of living as Christians.

 

4. Let us conclude our reflection with a great witness of the Eastern tradition, Theodoret, who was Bishop of Cyr, Syria, in the fifth century. "The Incarnation of Our Lord is the most exalted expression of divine concern for human beings. Indeed, neither heaven nor earth nor the sea nor the air nor the sun nor the moon nor the stars nor the whole visible and invisible universe, created by his one word, or rather, brought to light by his word in conformity with his will, show his immeasurable goodness as does the fact that the Only-begotten Son of God, the One who subsisted in the nature of God (cf. Phil 2: 6), a reflection of his glory, bearing the stamp of his substance (cf. Heb 1: 3), who was in the beginning, was with God and was God, through whom all things were made (cf. Jn 1: 1-3), after having taken on the nature of a slave, appeared in the form of a man; because of his human figure he was considered a man, he was seen on earth, he had relationships with people, he burdened himself with our infirmities and took upon his own shoulders our sicknesses" (Discorsi sulla provvidenza divina, 10: Collana di testi patristici, LXXV, Rome, 1988, pp. 250-251).

 

Theodoret of Cyr continues his reflection by shedding light on the close connection, highlighted in the hymn of the Letter to the Philippians, between the Incarnation of Jesus and the redemption of humanity[인류의 구속(救贖)]. "The Creator worked with wisdom and justice for our salvation. Since he did not wish to use his power alone to lavish upon us the gift of freedom, nor solely to arm mercy against the one who subjugated the human race, to ensure that they would not accuse mercy of injustice; rather, he conceived of a way full of love for human beings and at the same time adorned with justice. Indeed, having united in himself human nature, henceforth overcome, he leads it into battle and disposes that it shelter from defeat, to rout the one who had once wickedly been victorious, to free it from the tyranny of the one who had cruelly enslaved it and to recover its original freedom" (ibid., pp. 251-252).

(이상, 발췌 끝)

 

1-5-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무일도/시간경매달 네 번째 주일 저녁 기도(Vesper)로서 바쳐지고 있는, 한 개의 찬가(Canticle)인 필리피서 2,6-11에 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05년 10월 26일자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 전문[제목: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십니다(Jesus Christ is Lord)]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ben-xvi_aud_20051026_en.htm  

(발췌 시작) 

Canticle Phil 2,6-11
Jesus Christ is Lord!
Evening Prayer - Sunday of Week Fourth

 

1. Once again, following the itinerary proposed by the Liturgy of Vespers with various Psalms and Canticles, we have heard resound the wonderful and fundamental hymn St Paul inserted into the Letter to the Philippians (2: 6-11).

 

Already in the past we have underlined that this text contains a two-way movement:  descent and ascent. In the first, Christ Jesus, from the splendour of divinity which by nature belongs to him, chooses to descend to the humiliation of "death on a cross". In this way he shows himself to be truly man and our Redeemer[우리들의 구속주(救贖主)], with an authentic and full participation in our human reality of suffering and death.

 

2. The second movement, upwards, reveals the paschal glory of Christ, who manifests himself once more after death in the splendour of his divine majesty.

 

The Father, who welcomed his Son's act of obedience in the Incarnation and passion, now "exalts" him in a supreme way, as the Greek text tells us. This exaltation is expressed not only through the enthronement at God's right hand, but also with the conferral upon Christ of a "name which is above every name" (v. 9).

 

Now, in biblical language, "name" indicates a person's true essence and specific function, manifesting his or her intimate and profound reality. To the Son, who, for love, was humiliated in death, the Father confers an incomparable dignity, the "Name" above all others, that of "Lord", of God himself.

 

3. Indeed, the proclamation of faith, chorally intoned from Heaven, earth and the netherworld lying prostrate in adoration, is clear and explicit:  "Jesus Christ is Lord" (v. 11). In Greek, it is affirmed that Jesus is Kyrios, undoubtedly a royal title, which in the Greek translation of the Bible renders the name of God revealed to Moses sacred and unutterable. With the name Kyrios, Jesus Christ is recognized as true God.

 

On the one hand, then, there is the recognition of the universal sovereignty of Jesus Christ, who receives honour from all of creation, seen as a subject lying prostrate at his feet. On the other, however, the acclamation of faith declares Christ existing in the divine form or condition, thereby presenting him as worthy of adoration.

 

4. In this hymn the reference made to the scandal of the cross (cf. I Cor 1: 23), and even earlier to the true humanity of the Word made flesh (cf. Jn 1: 14), is interwoven with and culminates in the event of the Resurrection. The sacrificial obedience of the Son is followed by the glorifying response of the Father, to which adoration is united on the part of humanity and creation. Christ's singularity emerges from his function as Lord of the redeemed world[구속(救贖)을 받은 세상의 주님], which has been conferred upon him because of his perfect obedience "unto death". In the Son, the project of salvation reaches fulfilment and the faithful are invited, especially in the liturgy, to announce and to live the fruits [of salvation].

 

This is the destination where the Christological hymn leads us, upon which for centuries the Church meditates, sings and considers as a guide of life: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was in Christ Jesus" (Phil 2: 5).

 

5. Let us now turn to the meditation on our hymn that has been interwoven with great wisdom by St Gregory of Nazianzus. In a poem in honour of Christ, the great fourth-century Doctor of the Church declares that Jesus Christ "does not empty himself of any part that makes up his divine nature, and not-withstanding this he saves me like a healer who bends over festering wounds.... He was of the line of David, but was the Creator of Adam; he was made of flesh, but was also a stranger to it; he was generated by a mother, but by a virgin mother; he was limited, but also immense; he was born in a stable, but a star led the Magi to him, who brought him gifts and bowed down and knelt before him. As a mortal man he battled with the devil, but, invincible as he was, he overcame the tempter with a three-fold strategy.... He was victim, but also High Priest; he was sacrificed, but was God; he offered his blood to God and in this way he purified the entire world. A cross raised him up from the earth, but sin remained nailed to it.... He descended to the dead, but came back from the netherworld redeeming[구속(救贖)하신 후에] many who were dead. The first event is typical of human misery, but the second is part of the richness of the incorporeal being..., that earthly form the immortal Son takes upon himself because he loves us" (Carmina arcana, 2:  Collana di Testi Patristici, LVIII, Rome, 1986, pp. 236-238).

 

At the end of this meditation I want to underline two phrases for our lives. In the first place, this admonition of St Paul: "Have this mind among yourselves, which was in Christ Jesus". To learn to feel as Jesus felt; to conform our way of thinking, deciding and acting to the sentiments of Jesus. We will take up this path if we look to conform our sentiments to those of Jesus. Let us take up the right path.

 

The other phrase is that of St Gregory of Nazianzus. "He, Jesus, loves us". These tender words are a great consolation and comfort for us; but also a great responsibility, day after day.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5: 바로 위의 제1-5항에 발췌된 바들은, (i) 위의 제1-3항에 있는 (질문 1에 대한 필자의 고유한 답변 1)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이후에, 그러고 나서 (ii) 또한 위의 제1-4항에 있는 (질문 1에 대한 답변 2)이 필자에 의하여 마련되고 한 이후에,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이들 두 답변들을 뒷받침하는(support) 교황 교도권의 문헌들을 추가적으로 찾아 본 결과로서, 확보된 중요한 문헌들입니다. 특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위에 발췌된, 필리피서 2,6-11에 대한, 교의 신학, 성서 신학, 영성 신학 분야에 걸쳐, 탁월한 해설들을 마련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1-6. 따라서, 지금까지 위의 항들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여,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Sun T. Soh) "공동번역성서""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11의 마지막 부분에, 위의 제1-3-1항, 제1-4항, 그리고 제1-5항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여,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1-6: (1) 바로 이 번역 오류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는, 위의 제1-3-1항제1-4항에 있는 (질문 1에 대한 필자의 고유한 답변 1)(질문 1에 대한 답변 2)에 또한 제시되어 있습니다.

 

(2) 아래의 제2항에서는, (질문 2)에 대한 답변으로서, 왜 이러한 수준의 심각한 번역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성경공부/영어성경공부 묵상 동영상을 청취할 수 있는데, 따라서, 본글은 바로 아래의 주소에 있는 이 묵상 동영상의 교안 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91.htm <----- 여기를 클릭한 후에, 안내된 묵상 동영상을 청취하시기 바랍니다

(게시자 주 1-6 끝)

[이상, 2021년 4월 26일자 내용 추가 끝]

 

 

2. 유관 한문본/중국어본 신약 성경 자료/사료 분석 I

 

이번 항에서는, (질문 2)에 대한 답변으로서, 왜 이러한 수준의 심각한 번역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다수의 중국어본/한문본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8-11을, 연대순에 있어 내려가면서, 실증적으로(posotively)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0. 본 제2항에서 발췌되는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한문본 신약 성경, 필리피서 2,8-11에서, 한자 낱글자 두 개의 결합인 "歸榮"(귀영), "榮歸"(영귀)가 사용되었는데, 우선적으로, 이들 표현들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들 낱글자을의 결합들에 대한 용례 분석 그리고, 이들 각각이 한 개의 시어(詩語)/단어(單語)일 경우에, 그 의미들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 "歸榮"(귀영)의 경우:

 

(시어(詩語)/단어(單語) 분석 제1단계) "Chinese Text Project" 홈페이지 제공의 대단히 방대한 분량의 한문 문헌들에 대한 다음의 용례 분석에 의하면, "歸榮"(귀영)이 한 단어/숙어로서 매우 드물게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s://ctext.org/pre-qin-and-han?searchu=%E6%AD%B8%E6%A6%AE%20 0

https://ctext.org/post-han?searchu=%E6%AD%B8%E6%A6%AE 3

 

(시어(詩語)/단어(單語) 분석 제2단계) 그리고 "歸榮"(귀영)이라는 인접한 낱글자들이 한 개의 시어(詩語)임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여 이 표현을 검색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sou-yun.cn/QueryPoem.aspx?key=%e5%bd%92%e8%8d%a3&au=&st=3 

 

(시어(詩語)/단어(單語) 분석 제3단계)

다음은, "한어대사전"에 수록된 "歸榮"(귀영)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歸榮  

 

(歸榮,归荣)
猶榮歸。光榮地返回故鄉。[졸번역: 영귀(榮歸)와 마찬가지이니라(猶, just like). 영광(光榮)의 지위(地)와 함께 고향으로 되돌아감(返回)을 말하니라].
 唐司空圖《送草書僧歸越》:“今繫名內殿,且為歸榮,足以光于遠矣。”
 宋歐陽修《吉州學記》:“幸予他日因得歸榮故鄉而謁於學門,將見吉之士皆道德明秀而可為公卿。”
 明無名氏《雲間雜志》卷中:“張南山尚書歸榮,家訓云:‘為吾後人者,生子雖多,不可不教;生女雖多,不可不舉。’”

(이상, 발췌 끝)

  

2-0-2. "榮歸"(영귀)의 경우:

 

(시어(詩語)/단어(單語) 분석 제1단계) "Chinese Text Project" 홈페이지 제공의 대단히 방대한 분량의 한문 문헌들에 대한 다음의 용례 분석에 의하면, "榮歸"(영귀)가 한 단어/숙어로서,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으나, 그러나 중국의 한나라 이후부터 가끔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s://ctext.org/pre-qin-and-han?searchu=%E6%A6%AE%E6%AD%B8 2

https://ctext.org/post-han?searchu=%E6%A6%AE%E6%AD%B8 28

 

(시어(詩語)/단어(單語) 분석 제2단계) 그리고 "榮歸"(영귀)라는 인접한 낱글자들이 한 개의 시어(詩語)임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여 이 표현을 검색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sou-yun.cn/QueryPoem.aspx?key=%e8%8d%a3%e5%bd%92&au=&st=3


(시어(詩語)/단어(單語) 분석 제3단계)

다음은, "한어대사전"에 수록된 "榮歸"(영귀)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榮歸  

 

(榮歸,荣归)
光榮地歸回。舊時多指富貴返鄉。[졸번역: 영광(光榮)의 지위(地)와 함께 되돌아감(歸回)을 말하니라. 옛 시절에 부귀(富貴)와 함께 고향에 되돌아감(返鄉)을 많이 가리켰나니라].
 元本高明《琵琶記‧風木餘恨》:“你今日榮歸故里,光耀祖宗。”
 《醒世恒言‧張淑兒巧智脫楊生》:“楊小峰就接淑兒母子到揚州地方,賃房居住,等了元禮榮歸,隨即結姻。”
 《白雪遺音‧馬頭調‧餞別》:“滿腹錦繡,胸藏經緯,求取功名,一定身榮貴,衣錦榮歸。”

(이상, 발췌 끝)

 

2-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장 바쎄 신부님(1662-1707년)에 의하여 1704년경에 저술된 필사본인 한문본 신약 성경(주: 히브리서 제1장까지 번역이 됨)[주: 이 필사본 신약 성경을 지금부터 "로마 보존본"이라고 부름], 필리피서 2,8 및 2,11에, 死 ... 十字架之死 (제8절), ... 同享神父 (제11절) [졸번역: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榮)을 동등하게 향유하고 있다(同享)]라는 표현이 있는데, 제11절에서, 예를 들어  대신에, 同享 를 사용한 것은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2-1707_장_바쎄/필리피_2.htm 

(발췌 시작 around 神父)

필피피2_6-11_in_1704년경_장_바쎄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세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1: (1) 바로 위의 제2-1항에 안내된 로마 보존본 신약 성경에 근거하여 장 바쎄 신부님께서는, 신약 성경 중의 4복음서들을 하나로 묶은 화합 복음서/조화 복음서의 한 종류를 필사본으로 또한 남기셨는데 [주:이 필사본 신약 성경을 지금부터 "영국 보존본"이라고 부름], 장 바쎄 신부님의 바로 이 필사본 영국 보존본 신약 성경에 또한 포함되어 서간문들[주: 히브리서 제1장까지 포함되어 있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로마 보존본 서간문들과 동일합니다.

 

(2) 장 바쎄 신부님의 필사본 신약 성경, 필리피서 2,11에서 사용된 한자 낱글자 은, 동사가 결코 아니고, 명사임에 또한 주목하십시오.

 

(3) 다른 한편으로, 개신교회 측에서 중국 본토에 선교사가 처음으로 파견된 시점은 1807년이었으며, 그 첫 번째 선교사는 로벝트 모리슨임은 널리 잘 알려져 있는데, 로버트 보리슨은 영국에서 이미 장 바쎄 신부님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필사본인 영국 보존본 신약 성경 한 부를 입수하여, 자신이 신약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을 할 때에 대단히 많이 참조하였음은 또한 널리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4) 그리고 바로 위의 제(2)항에서 말씀드린 바는, 다음의 제2-2항에 발췌된 로버트 모리슨의 중국어본 신약 성경, 필리피서 2,8-2,11을 들여다보면, 그 증거/흔적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장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 번역문의 구조를 그대로 베끼면서, 그러나 장 바쎄 신부님에 의하여 의역 번역된 부분을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으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필리피서 2,11에서 同享을 전치사 로 교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그리고 이들 개신교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8-11에 대하여, 헤딩 번역을 두고서 필자가 "올바른 직역 번역" 혹은 "번역 오류"이라고 말씀드리는 판단의 근거/기준/잣대는, 매우 주관적이고 또 오류일 수도 있는 필자의 고유한 자의적/임의적 느낌(feeling) 등에 의존하여서가 아니라,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 성서 신학, 그리고 영성 신학 등에 포함되는, (i) 위의 제1-4-1항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9항의 내용(ii) 위의 제1-4-2항에 발췌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필리피서 2,6-11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과의 부합(, honestum, virtuous, fitting, conformity, 부합(符合)함/적합함) 여부입니다.

 

(6) 특히 필자에게 대단히 유감인 것은,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1992년에 초판이 발랭되었고, 또 이것이 우리말로 번역이 된 것이 "새 번역 성경"이 초판 발행된 2005년보다 훨신 더 이전의 일인데, (i) 필리피서 2,11의 우리말 번역문에 위의 제1항에서 함께 고찰한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있다는 점, 그리고 (ii) 오늘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바로잡아지지 않아 온 점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한 분이신 하느님이 그 원천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내용과 "신약 성경"의 내용에, 때로는, 모순(contraddiction)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혹시라도,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심각하게 고통 받음과 함께 드리는 이 지적을 읽고서 불쾌하게 느끼는 분들께서는, 위의 제1-1-2항제1-2-2항에 발췌된 영어본 본문들뿐만이 아니라, 또한 다음에 발췌된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서"(TOB), 필리피서 2,8-11 전문을, 각각  세 번 이상 정독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도대체 바로 이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6-11 중의 어디에,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새 번역 성경의 경우] 혹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성서의 경우]라는 번역문들과 그 내용에 있어 정확하게 일치하는 문구가 있는지, 제발 좀 찾아내어, 필자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또한 "주석 성경", 필리피서 2,6-11의 주석들 중의 어느 주석들이 TOB 주석들의 우리말 직역 번역이 아닌지도 "주석 성경"의 독자들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제발 좀 구체적으로 밝혀 주십시오:

 

(발췌 시작)

필리피서_2_8-11_in_TOB_제2548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두 번째 행(row), 세 번째 행,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영어 전치사 "to"(에 이르기까지)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동일한 프랑스어 전치사 à가, 세 번에 걸쳐,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발췌 끝)

 

아직도 오로지 불쾌하게 느낍니까???

 

(7) 다른 한편으로, 개신교회 측의 문헌들 중에 바로 이러한 판단의 근거/기준/잣대가 있는 지에 대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는 알지 못합니다.

 (이상, 게시자 주 2-1 끝)

 

2-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국 개신교회 장로파 소속의 로버트 모리슨의 신약 성경 1823년판,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179&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36&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823_로버트_모리슨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死 ... 十字架之死 (제8절), ... 爲主, 神父之 (제11절) [주: 올바른 직역번역][졸번역: ... 성부 하느님의 영광(榮)이르기까지]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2-2: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2-2항에 안내된 중국어본 성경 및 아래의 항들에 안내된 다수의 중국어본 성경들의 필리피서 2,8-11 본문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ible.fhl.net/new/ob.php?book=all&chineses=50&chap=2&sec=11 <----- 필히 확인하라

 

(2) 그런데, 위의 제2-2항에 발췌된 바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듯이,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들 중에서 최초로/처음으로 1807년에 중국 본토에 진입하였는 로버트 모리슨에 의하여 올바르게 직역 번역이 된 그의 신약 성경, 필리피서 2,11에서의 번역 표현이,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항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간적으로, 로버트 모리슨보다 늦게 신약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한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혀 수용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배척을 받게 된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이상, 게시자 주 2-2 끝)

 

2-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 마쉬만(馬殊曼)의 중국어본 신약 성경 1822년판,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124&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34&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822_마쉬만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일곱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爲主, 神父 (제11절) [의역 번역][바로 이 의역 번역의 우리말로의 졸번역: ... 성부 하느님 쪽으로 영광의 지위와 함께 되돌아감(榮歸)에 이르기까지]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독일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 귀츨라프의 중국어본 신약 성경 1839년판,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193&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70&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839_귀츨라프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 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爲主, 天父上帝 (제11절) [의역 번역][바로 이 의역 번역의 우리말로의 졸번역: ... 그리하여 성부 하느님 쪽으로 영광의 지위와 함께 되돌아가게(榮歸) 하셨습니다]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자신을 예수님의 친동생이라고 주장한 개신교회 측의 이단인, 중국인인, 홍수전의 무리가 출판한 태평천국용 1853년판 신약 성경,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408&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97&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853_홍수전_태평천국용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爲主, 天父上帝 (제11절) [의역 번역][바로 이 의역 번역의 우리말로의 졸번역: ... 그리하여 성부 하느님 쪽으로 영광의 지위와 함께 되돌아가게(榮歸) 하셨습니다]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6.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미국 개신교회 침례파 소속의 선교사 고다드의 중국어본 신약 성경 1853년판,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428&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94&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853_고다드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以至於死卽十字架之死 (제8절), ... 爲主, 神父 (제11절) [의역 번역][바로 이 의역 번역의 우리말로의 졸번역: ... 성부 하느님 쪽으로 영광의 지위와 함께 되돌아감(榮歸)에 이르기까지]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7. (번역 오류)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중국어본 신약 성경 위판역본 1853년판,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214&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103&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853_위판역본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爲主, 天父上帝 (제11절) [주: 번역누락/번역오류][바로 이 번역 오류 문장의 우리말로의 졸번역: ... 성부 하느님께 영광을 더하였습니다/드렸습니다(榮)]로 잘못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8.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미국 개신교회 장로파 소속의 선교사들 브리지만(裨治文), 컬버트슨(克陛存) 역 1863년판 신약 성경,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389&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124&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863_브리지만(裨治文)&컬버트슨(克陛存)_역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以至於死 ... 死於十字架 (제8절), ... 爲主, 神卽父 (제11절) [의역 번역][바로 이 의역 번역의 우리말로의 졸번역: ... 성부 하느님 쪽으로 영광의 지위와 함께 되돌아감(榮歸)에 이르기까지]로 잘못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2-8: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이 중국어본 성경이 우리나라 개신교회 축의 우리말본 성경의 번역 대본에 포함됨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89.htm <----- 필독 권고

 

2-9. (번역 오류)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문리화합역본 1923년판, 신약 성경, 필리피서 2,6-11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옛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17&chineses=50&chap=2&sec=11 

새 출처: https://bible.fhl.net/new/ob.php?book=307&chineses=50&chap=2&sec=11 [2023-09-20]

(발췌 시작)

필리피2_6-11_in_1906_문리화합역본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여기서, ... 死 ... 死於十字架 (제8절), ... 爲主, 父上帝 (제11절) [주: 번역오류][바로 이 번역 오류의 문장의 우리말로의 졸번역: ... 그리하여() 성부 하느님 영광을 더하게/드리게(榮) 하셨습니다]로 잘못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0. 이상, 지금까지 위의 제2항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Sun T. Soh) 1820년대와 그 이후에 개신교회 측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번역이 된 중국어본 신약 성경들 중에서, 위판역본문리화합역본, 필리피서 2,8-11에 동일한 종류의 번역 오류가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 유관 우리말본 신약 성경 자료/사료 분석 II

 

이번 항에서는, (질문 2)에 대한 답변으로서, 왜 이러한 수준의 심각한 번역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우리말본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8-11을, 연대순에 있어 내려가면서, 실증적으로(posotively)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3-1. 우리나라 천주교회에 의하여 1948년에 초판 발행된, 1969년판 "복음성서", 필리피서 2,11의 마지막 부분인,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에 대응하는 부분이, "... 성부이신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임을, 필자가 확인하였는데,

 

(발췌 시작)

필리피서_2_6-11_in_1969년판_복음성서_제247쪽.jpg

(이상, 발췌 끝)

 

그러나 이 번역은, 위의 게시자 주 2-1제5항에 제시된 판단의 기준/잣대에 의하여, 번역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혹은, 위의 제1-3항에 제시된 (질문 1에 대한 필자의 고유한 답변 1)에 의하여, 번역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번역 오류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는,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4.0059%3Aentry%3Din1 <----- 필이 확인하라

 

라틴어 전치사 "in"의 의미 대신에, 바로 이 라틴어 전치사 "in"에 대응하는 영어 전치사 "to"의 여러 의미들 중에서 "to + 명사"의 경우에 있어서의 "to"의 의미인 "...을 위하여"를 사용한, 따라서, 위의 제2항에 발췌된 다수의 한문본/중국어본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8-11을 전혀 참조하지 않은, 또다른 종류의,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3-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국내의 개신교회들 측에서 우리말로 번역을 한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11을 비교할 수 있는데,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php&chap=2&sec=11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에 대응하는 부분이, "공동번역성서"제외하고, 모두 "...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로 혹은 이 번역 표현과 정확하게 등가인 문장으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번역은, 위의 게시자 주 2-1제5항에 제시된 판단의 기준/잣대에 의하여, 번역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혹은, 위의 제1-3항에 제시된 (질문 1에 대한 필자의 고유한 답변 1)에 의하여, 번역 오류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치 않는지요?

 

3-3.

3-3-1. 따라서, 지금까지 본글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4)(Sun T. Soh) 위의 제2항과 바로 위의 제3-2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에 의하여, 국내의 개신교회 측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11에 있는 "...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혹은 이 표현과 논리적으로 등가인 번역 표현은,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측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신약 성경, 필리피서 2,11를 우리말로 중역 번역(double translation)을 하는 과정에, 위의 제3-0항에 발췌된 한자 단어 "歸榮"(귀영), 즉, "榮歸"(영귀)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서 발생한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5) 만약에 국내의 개신교회 측에서 신약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에, 본글에서 필자가 들여다본 유관 자료/사료들을 참조할 수 있었더라면(가정법 과거), 국내의 개신교회 측 신약 성경들 중의 필리피서 2,11에 있는 "...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는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나하면, 다음이 성립하기 떄문입니다:

-----

우리들 모두에게는

동일한 경험을 하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충분하게 주어져 있다.

[capax Dei, 창세기 1,26]

-----

 

3-3-2. 그리고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4)의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6) 국내의 개신교회 측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신약 성경들의 번역 대본(들)에, 위의 제2-4항에 안내된, 귀츨라프의 중국어본 신약 성경이 포함될 수도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3-3-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국내의 개신교회 측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성경들의 번역 대본(들)에, 위의 제2-항에 안내된, 브리지만(裨治文), 컬버트슨(克陛存) 역 1863년판 중국어본 성경이 포함됨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는 글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89.htm <----- 필독 권고

 

3-4. 다른 한편으로, 위의 제1항과 위의 제3-1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에 의하여,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7) 만약에 우리나라 천주교회에 의하여 1948년에 초판 발행된 "복음성서"가 2005년에 초간된 "새 번역 성경"의 번역대본들에 포함되었더라면(가정법 과거), "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11에 있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는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5. 질문 2에 대한 답변


(이 글의 결론 8)(Sun T. Soh) 2005년에 초간된 "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11에 있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는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새 번역 성경"의 초벌 번역 작업에 참여한 번역자(들)이, (i) 위의 제1항에 제시된, 1992년에 초간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49항을 전혀 학습하지 않은 상태에서, (ii) 우리나라 천주교회에 의하여 1948년에 초판 발행된 "복음성서"를 번역대본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대신에, (iii) "공동번역성서" 및 국내의 개신교회 축에서 번역한 우리말본 신약 성경, 필리피서 2,11만을 오로지 참조하였기 때문일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9)(Sun T. Soh) 만약에 "새 번역 성경"의 초벌 번역 작업에 참여한 번역자(들)이, 본글에서 필자가 들여다본 유관 자료/사료들을 참조하였더라면(가정법 과거), "새 번역 성경", 필리피서 2,11에 있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는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나하면, 다음이 성립하기 떄문입니다:

-----

우리들 모두에게는

동일한 경험을 하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충분하게 주어져 있다.

[capax Dei, 창세기 1,26]

-----

 

(질문 3) 그런데, 지역 언어로 번역이 된 성경 본문의 특정 단락(A)에  심각한 번역 오류가 있을 경우에, 만약에 바로 이 특정 단락이, 동일한 지역 언어로 번역이 된, 교회의 다른 문헌(B)의 본문 중에서 발췌 인용되면, 이 문헌(B)를 읽고서 그 내용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제목: 집사일을 청산/정리하게???; 게시일자 2010-10-05]을 한 개의 예로서 제시함으로써, 이 질문의 답변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4.htm <----- 필독 권고

 

3-6. (질문 4) 본글에서 다루고 있는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가 우리말본 신약 성경들에서 발생하게 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문 4에 대한 간략한 답변) 구약 성경 및 신약 성경 전반에 걸쳐 많이 사용되고 있는 "영광"(glorty)라는 용어가, 문학적으로 수식하는 용도가 결코 아니고, 교의 신학, 성서 신학, 그리고 영성 신학 등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한 개의 초자연적 개념(a supernatural concept)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학습을 통하여 바로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논문들을 여러 번 정독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glory.htm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5월 1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본글에 이어지는 졸글/논문[제목: NAB 요한 복음서 10,17에서 in order to 가 사용된 것은 심각한 번역 오류이다; 게시일자: 2021-04-24]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을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05.htm <----- 필독 권고

[이상, 2021년 5월 1일자 내용 추가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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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30시간 (신뢰할 수 있는 유관 자료들의 발굴 및 분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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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_T_SOH,1863_비치문裨治文,파스카_신비,필리피2_6-11,신성적_통치권자(CCCC_84),주님,아도나이,키리오스,the_Lord,Dominus,Ky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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