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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복음서들의 역사성(historicity)에 대한 교도권의 가르침 [성경공부_역사성] [교리학습_역사성] [_교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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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17.151.*]

2011-04-27 ㅣ No.1043

 
+ 찬미 예수님
 
이 글은, 아무런 출처/근거 제시 없이 주어진 다음과 같은 주장이,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다르기에, 얼마다 다른지를 비교/검토하기 위하여 마련한 글입니다:
 
- 다 음 -
 
[(2011/04/27) : 복음서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확인이 아니라 부활 사건의 신앙적 증거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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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은 "주석 성경" 공관 복음서 입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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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성경" 공관 복음서 입문
 
제24쪽:
 
(발췌 시작)
 
복음서들의 모든 내용을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복음서 안에 흩어져 있는 많은 표지를 바탕으로 복음서 전통들을 거슬러 올라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행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의 기능과 그 효력은 여전히 독자들을 신앙으로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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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 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인 TOB 제2313쪽는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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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따라서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들의 내용 중에는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는 하나,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네 복음서들의 내용 모두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여전히 (성경의) 독자들을 신앙으로 부르는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행적어디에 잘 기록되고 보존되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2.
질문 1: 위의 "주석 성경"의 공관 복음서 입문 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전히 (성경의) 독자들을 신앙으로 부르는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행적이 잘 기록되어 전달되고 있는 문헌들 중에서 대표적인 문헌이 무엇일까요?
 
 
질문 1에 대한 답변:
 
다음에 발췌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의 가르침에 의하면,
 
질문 1에 대한 정답은 신약 성경 중의 네 복음서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참고:"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St. Joseph 판 NAB(New American Bible)의 "Contents" 바로 다음에 전문이 주어져 있습니다.
 
특히 다음의 발췌문에서 굵게 표시한 부분이 신약 성경 중의 네 복음서들의 역사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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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때가 찼을 때(갈라 4,4 참조) 말씀이 사람이되시어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4 참조) .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고, 행적과 말씀으로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죽음과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과 성령의 파견으로 당신의 사업을 완성하셨다. ...
 
18. ... 교회는 네 복음서가 사도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언제나 어디서나 주장하였으며 또 주장하고 있다. ...
 
 
19.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위에 언급한 네 복음서가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서슴지 않고 단언하며,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사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 올림을받으신 그 날까지(사도 1,1-2 참조) 활동하시고 가르치신 바를 충실하게 전하고 있음을 확고하고 항구하게 주장해 왔고 또 주장하고 있다." ... 우리가 전해들은 그 말씀들의 진리를 깨닫도록 그들은 자신의 기억과 회상이나, 또는“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 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루가 1,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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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

(발췌 시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제 5 장

신약성서
 
신약성서의 탁월성
 
17.  믿는 모든 이를 구원하는(로마 1,16 참조) 하느님의 힘인 하느님의 말씀은 신약성서 안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그능력을 드러내신다. 때가 찼을 때(갈라 4,4 참조) 말씀이 사람이되시어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4 참조) .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고, 행적과 말씀으로 당신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며, 죽음과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과 성령의 파견으로 당신의 사업을 완성하셨다. 홀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요한 6,68 참조) 그분께서는 땅에서 높이 들리시어 모든 이를 당신 자신에게 이끄셨다 (요한 12,32 참조) . 그러나 이 신비는 이전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복음을선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일으키고, 교회를 불러모으도록 성령 안에서 계시되었다(에페 3,4-6 참조). 이 모든 것에 대한 신약성서의 기록은 하느님의 영구한 증언이다.
 
복음서의 사도적 기원
 
18. 모든 성서 가운데, 또 신약성서 중에서도 복음서가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으뜸 가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네 복음서가 사도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언제나 어디서나 주장하였으며 또 주장하고 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선포하였고, 나중에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사도들과 그 제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신앙의 바탕을 글로 쓴 것이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네 가지 형태의 복음이다. 1)
 
복음서의 역사성
 
19.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위에 언급한 네 복음서가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서슴지 않고 단언하며,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함께 사시며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 올림을받으신 그 날까지(사도 1,1-2 참조) 활동하시고 가르치신 바를 충실하게 전하고 있음을 확고하고 항구하게 주장해 왔고 또 주장하고 있다. 사도들은 주님 친히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주님 승천 후 충분히 깨달아 청중들에게 전해 주었다. 2) 그와 같이 깨닫게 된 것은 사도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을 겪고 진리이신 성령의 빛으로 가르침을 받은 3) 덕분이다. 성서 저자들은 예수님께 관한 참되고 바른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어떤 것은 말이나 이미 쓰여진 글로 전해지는 많은 전승들 가운데서 선택하고, 어떤 것은 종합하고, 또 어떤 것은 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선포 양식으로 네 복음서를 썼다. 4) 우리가 전해들은 그 말씀들의 진리를 깨닫도록 그들은 자신의 기억과 회상이나, 또는“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 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하였다(루가 1,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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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문본 Dei Verum의 해당 절들입니다)
 
 
CHAPTER V
 
THE NEW TESTAMENT
 
17. The word God, which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all who believe (see Rom. 1:16), is set forth and shows its power in a most excellent way in the writings of the New Testament. For when the fullness of time arrived (see Gal. 4:4),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in His fullness of graces and truth (see John 1:14). Christ established the kingdom of God on earth, manifested His Father and Himself by deeds and words, and completed His work by His death, resurrection and glorious Ascension and by the sending of the Holy Spirit. Having been lifted up from the earth, He draws all men to Himself (see John 12:32, Greek text), He who alone has the words of eternal life (see John 6:68). This mystery had not been manifested to other generations as it was now revealed to His holy Apostles and prophets in the Holy Spirit (see Eph. 3:4-6, Greek text), so that they might preach the Gospel, stir up faith in Jesus, Christ and Lord, and gather together the Church. Now the writings of the New Testament stand as a perpetual and divine witness to these realities.
 
18. It is common knowledge that among all the Scriptures, even those of the New Testament, the Gospels have a special preeminence, and rightly so, for they are the principal witness for the life and teaching of the incarnate Word, our savior.
 
The Church has always and everywhere held and continues to hold that the four Gospels are of apostolic origin. For what the Apostles preached in fulfillment of the commission of Christ, afterwards they themselves and apostolic men,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divine Spirit, handed on to us in writing: the foundation of faith, namely, the fourfold Gospel, according to Matthew, Mark, Luke and John.(1)
 
19. Holy Mother Church has firmly and with absolute constancy held, and continues to hold, that the four Gospels just named, whose historical character the Church unhesitatingly asserts, faithfully hand on what Jesus Christ, while living among men, really did and taught for their eternal salvation until the day He was taken up into heaven (see Acts 1:1). Indeed, after the Ascension of the Lord the Apostles handed on to their hearers what He had said and done. This they did with that clearer understanding which they enjoyed (3) after they had been instructed by the glorious events of Christ's life and taught by the light of the Spirit of truth. (2) The sacred authors wrote the four Gospels, selecting some things from the many which had been handed on by word of mouth or in writing, reducing some of them to a synthesis, explaining some things in view of the situation of their churches and preserving the form of proclamation but always in such fashion that they told us the honest truth about Jesus.(4) For their intention in writing was that either from their own memory and recollections, or from the witness of those who "themselves from the beginning were eyewitnesses and ministers of the Word" we might know "the truth" concerning those matters about which we have been instructed (see Luke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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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참고: 지금 발췌 중인 "하느님의 말씀(Dei Verum)" 제19항에서 사용 중인 다음의,
 
l’historicité (프랑스어본) = la storicità (이탈리아어본) = historical character (영어본) = 역사성 (우리말본),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아래의 제3항에 주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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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프랑스어본 Dei Verum의 해당 절들입니다)
 
 

CHAPITRE V :
Le Nouveau Testament

17. Excellence du Nouveau Testament

La Parole de Dieu, qui est une force divine pour le salut de tout croyant (cf. Rm 1, 16), se présente dans les écrits du Nouveau Testament et sa puissance s’y manifeste de façon singulière. Dès que fut venue, en effet, la plénitude des temps (cf. Ga 4, 4), le Verbe de Dieu s’est fait chair, et il a habité parmi nous, plein de grâce et de vérité (cf. Jn 1, 14). Le Christ a instauré le règne de Dieu sur terre ; par ses gestes et ses paroles, il a révélé et son Père et lui-même ; par sa mort, sa résurrection, son ascension glorieuse et par l’envoi de l’Esprit Saint, il a parachevé son œuvre. Élevé de terre, il attire à lui tous les hommes (cf. Jn 12, 32 grec), lui qui seul possède les paroles de la vie éternelle (cf. Jn 6, 68). Mais ce mystère n’a pas été dévoilé aux autres générations comme il l’a été désormais dans l’Esprit Saint à ses saints Apôtres et prophètes (cf. Ep 3, 4-6 grec), afin qu’ils proclament l’Évangile, qu’ils suscitent la foi en Jésus, Christ et Seigneur, et qu’ils rassemblent son Église. De ces réalités, les écrits du Nouveau Testament présentent un témoignage permanent et divin.

18. L’origine apostolique des Évangiles

Il n’échappe à personne qu’entre toutes les Écritures, même celles du Nouveau Testament, les Évangiles possèdent une supériorité méritée, en tant qu’ils constituent le témoignage par excellence sur la vie et sur la doctrine du Verbe incarné, notre Sauveur.

Toujours et partout l’Église a tenu et tient l’origine apostolique des quatre Évangiles. Ce que les Apôtres, en effet, sur l’ordre du Christ, ont prêché, eux-mêmes et des hommes de leur entourage nous l’ont, sous l’inspiration divine de l’Esprit, transmis dans des écrits qui sont le fondement de la foi, à savoir, l’Évangile quadriforme selon Matthieu, Marc, Luc et Jean [31].

19. Leur caractère historique

La sainte Mère Église a tenu et tient fermement et, avec la plus grande constance, que ces quatre Évangiles, dont elle affirme sans hésiter l’historicité, transmettent fidèlement ce que Jésus, le Fils de Dieu, durant sa vie parmi les hommes, a réellement fait et enseigné pour leur salut éternel, jusqu’au jour où il fut enlevé au ciel (cf. Ac 1, 1- 2). En effet, ce que le Seigneur avait dit et fait, les Apôtres après son Ascension le transmirent à leurs auditeurs avec cette intelligence plus profonde des choses dont eux-mêmes, instruits par les événements glorieux du Christ et éclairés par la lumière de l’Esprit de vérité [32], jouissaient [33]. Les auteurs sacrés composèrent donc les quatre Évangiles, choisissant certains des nombreux éléments transmis soit oralement soit déjà par écrit, rédigeant un résumé des autres, ou les expliquant en fonction de la situation des Églises, gardant enfin la forme d’une prédication, de manière à nous livrer toujours sur Jésus des choses vraies et sincères [34]. Que ce soit, en effet, à partir de leur propre mémoire et de leurs souvenirs, ou à partir du témoignage de ceux qui « furent dès le début témoins oculaires et serviteurs de la Parole», ils composèrent leurs écrits dans le but de nous faire éprouver la « vérité » des enseignements que nous avons reçus (cf. Lc 1, 2-4).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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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historicity(역사성)"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위에 발췌한 "하느님의 말씀(Dei Verum)" 제19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교황청발 문헌들의 내용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므로, 차분히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HISTORICITY
역사성

Applied to the Gospels, their validity as faithfully narrating the facts and events of the life of Jesus Christ, with their causes and effects explained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네 복음서들에 적용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사실들과 사건들을, 성령의 감도 하에서 설명되는 이들의 원인들과 결과들과 함께, 충실하게(faithfully, 성실하게, 사실들과 일치하게) 이야기함에 있어서의 네 복음서들의 타당성(validity, 유효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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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디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 126항입니다:

 

126 복음서의 형성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교회는 네 복음서의“역사성을 주장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사시는 동안, 승천하신 그날까지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실제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이 복음서들이 충실히 전해 주고 있음” 을 확고하게 주장한다.

   2. 구전(口傳). “사도들은 주님 친히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들을 주님의 승천 후에 충분히 깨달아 청중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와 같이 깨닫게된 것은 사도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을 직접 겪고 진리이신 성령의 빛으로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다.”

   3. 복음서의 기록.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참되고 바른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어떤 것은 말이나 이미 쓰여진 글로 전해지는 많은 전승들 가운데서 선택하고, 어떤 것은 종합하고, 또 어떤 것은 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선포 양식으로 네 복음서를 썼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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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계시 헌장, 1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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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26항입니다:

 

126 We can distinguish three stages in the formation of the Gospels: 

1.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the Church holds firmly that the four Gospels, "whose historicity she unhesitatingly affirms, faithfully hand on what Jesus, the Son of God, while he lived among men, really did and taught for their eternal salvation, until the day when he was taken up."99 

2. the oral tradition. "For, after the ascension of the Lord, the apostles handed on to their hearers what he had said and done, but with that fuller understanding which they, instructed by the glorious events of Christ and enlightened by the Spirit of truth, now enjoyed."100 

3. the written Gospels. "The sacred authors, in writing the four Gospels, selected certain of the many elements which had been handed on, either orally or already in written form; others they synthesized or explained with an eye to the situation of the churches, the while sustaining the form of preaching, but always in such a fashion that they have told us the honest truth about Jesus."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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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2년 1월 19일]

예를 들어,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39항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가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보여주는 실제 사건이며, 신약 성경은 이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639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는 신약 성경이 증언하듯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보여 주는 실제 사건이다. 서기 56년경에 이미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코린 15,3-5) . 사도는 여기서, 다마스쿠스 성문 근처에서 개종한 뒤에 알게 된 부활에 대한 살아 있는 전승을 말하고 있다. 543).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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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렇다고 한다면,
 질문 2: 도대체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네 복음서들의 역사성(historicity)에 대한 교도권의 전통적 가르침과 충돌하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2011/04/27) : 복음서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확인이 아니라 부활 사건의 신앙적 증거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비록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하더라도, 신앙과 관련하여, 자신의 개인적 판단을 우선적으로 내세우거나 과신하는 다음의 경우들에 해당하는 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할 것입니다.
 
(1)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의 정의(definition)모르고 있는 경우; 혹은
 
(2) 비록 교도권의 정의(definition)를 알고 있더라도 교도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 혹은
 
(3) 비록 교도권의 정의(definition)를 알고 있더라도 위의 제1-2항들에서 제시한 문헌들에 대한 교리 학습을 하지 않은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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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다음과 같은, 네 복음서들에 기록이 되어 있는, 여전히 (성경의) 독자들을 신앙으로 부르는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행적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하는 주장은, 상당히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2011/04/27) : 복음서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확인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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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른 한 편으로, 20세기에 들어와, 여전히 (성경의) 독자들을 신앙으로 부르는나자렛 예수님의 역사적 삶과 행적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하는, 수정주의자(Revisionists)들의 행보들은 어떠하였을까요?
 
 
아래에 발췌한, 예를 들어, 개신교 측 신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과 그 추종자들이 어떤 노선을 걸어 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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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나바르 주석자들은 네 개의 복음서들이 성 마태오, 성 마르코, 성 루카, 그리고 성 요한에 의하여 저술되었음을 주장하는 데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본문의 문헌적 특징들에 대한 비평 분석(critical analysis)과 각 복음서에 있어서의 역사적 언급들이 전승(Tradition)에 대한 만장일치의, 정확한 증언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p. 29). 이것은 확실하게 사실이나, 그러나, 이것은, 역사 비평가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기에 오늘날의 성서와 관련된 학문(biblical scholarship)의 폭넓은 범위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역사 비평적 학문"의 영역에 있어 지난 2세기들에 걸쳐 제시되어 왔던 바는 그 고유의 방법에 대하여 진실로 역사적이지도 않고 그리고 충분하게 비판적이지도 아니한 하나의 역사 비평적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thinking)이었습니다. 나바르 주석자들은, 그들의 방법이 "역사 비평 학파(historical-critical school)"의 잘못된 원리(principles)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아니한, 교부들의, 중세의 가톨릭 주석자들의, 그리고 근세의 가톨릭 주석자들의,  더 견고하고 실제적인 접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의 해석을 위하여, 나바르 주석자들은 따라서 가톨릭 전승(Catholic Tradition)과 일치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는 입장을 이미 취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 세기들을 내려오면서 그리스도교 전승은 복음서들의 역사적 특징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왔음을 보입니다. [ . . . ]  그와 동시에, 교회는, 우리의 믿음이 이에 대하여 우리를 확신하게 하는, 이러한 역사성이 다음과 같이 이성적으로 견고한 근거를 또한 가지고 있음을 항상 유지하여 왔습니다: 능숙한 역사-문헌적 비평 학문은, 심지어 믿음의 주변부에 대하여 추구된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것이 진지한, 과학적인 논거들을 실제로 사용한다면, 복음서들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p. 37). 필자는 복음서들의 역사적 특징은 견고한 진실이나,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복음서들의 역사적 특징에 반하여 논쟁하는 우리의 시대들에 있어 출판된 지나치게 많은 책들과 논문들에 의하여 증거되는 바와 같이, 역사 비평 학문 전체의 성향은 이에 반하여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자는, 능숙한 역사 학문은 복음서들의 역사적 진실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점, 그러나, 우리의 시대에 있어 우세한 학파인  "역사 비평 학파"라는 문헌적 학문이, 심지어 가톨릭 교회의 안쪽에 있으면서도, 진지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이들에 의한 복음서들의 역사적 진실의 약화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여(to say that), 나바르 주석자들의 이러한 마지막으로 인용된 판단을 적절하게 다른 말로 바꿀(reword) 것입니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인 famous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first German edition, 1921)에서, 공관 복음서들의 거의 전적으로의 비-역사성에 대한 압도적인 내부적 증거인 것으로 보이는 바를 제시하였으며, 그리고 그는 The Gospel of John (English translation, 1971)에서 성 요한의 복음서의 비-역사성에 대한 언뜻 보기에 더 커다란 증거와 함께 이것을 끝까지 추적하였습니다. 과거의 80년 동안에 걸쳐 불트만의 이들 두 개의 저술들에 있는 많은 양의 잘못된 그리고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자료가 체계적으로 전혀 반박되지 않아 왔던 것은 바로 가톨릭 성경 학문에 대한 불명예입니다. 따라는 우리는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Martin Debelius, Raymond Brown(The Birth of the Messiah,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Virginal Conception and the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etc , 그리고 수많은 다른 역사 비평가들) 같은 저자들의 잘못된 그리고 역사적이지 않은 접근과 Giuseppe Ricciotti (Life of Christ, unabridged edition) 같은 가톨릭 저자의 믿을 수 있는(solid) 접근을 비교합니다. 나바르 주석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 짓습니다: "지난 2세기들 동안에 걸쳐 복음서들이 세심한 연구의 대상이 된 이후, 진지한 비평가 누구든지 간에 이 성스러운 책들이 참된 역사서임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최종적 분석에 있어, 이러한 판단은 사실(true)입니다만, 그러나 누구가 진지한 비평가들인지요? 그들은, 그들의 방법이 18세기의 합리주의(rationalism)에 뿌리가 내려져 있는 그리고 영감을 받은 성경의 역사적 진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해 왔던, 역사 비평 학파의 학자들이 분명히 아닙니다. 당면하게 행하여져야만 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바는 역사 비평 학자들의 결론들을 뒤로 밀어붙이는 것이며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추론(fallacious reasonings)들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나바르 주석자들이 이러한 일을 자신들의 현재의 주석서에 표현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러나 이것은 다른 곳에서 반드시 행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주석서가 나바르 대학교 학자들의 많은 관련된 논문들과 에세이들에 근거하고 있음을 듣습니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Martin Dibelius, Raymond Brown,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 같은 역사 비평 학자들의 잘못된 저술들이 어느 점에까지 이들 관련된 나바르 대학교 논문들과 에세이들로 철저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반박될 것인지를 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반박의 일은 여전히 하나의 도전으로서 가톨릭 성경 학문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리고 시작할 장소는 역사와 역사적 방법에 대한 정확한 개념들의 상세한 개발(elaboration)에서부터이며 그리고 역사 비평 학파의 잘못된 역사적 및 문헌적 틀(framework)을 성경의 네 개의 어의(語義)들이라는 틀로 대체하는 것으로부터입니다. 1890년대에 Marie-Joseph Lagrange가 가톨릭 성경 학문에 Hermann Gunkel과 그의 동료들의 역사 비평 접근을 도입하였을 때에, 그는 무엇이 건전한 역사적 방법이며 그리고 어떻게 이것이 사용되어야만 하는지를 가톨릭 성경 해석적 전통의 관점으로부터 결정함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선수 단계를 불행하게도 간과하였습니다. 가톨릭 학문은 바로 이 역사적 과실로부터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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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여기를 클릭하면, <----- 대단히 유익한 글이나, 그러나 국내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글이기에, 필독을 권고합니다.

 

Robert Bultman 의 추종자들로서, 역사에 있어서의 예수(historical Jesus 역사적 예수, 즉 과거의 사건으로서의 예수)에 대하여 매우 극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이며, 필독을 권고합니다.


 

4-3. 여기를 클릭하면,

 

계몽주의(Enlightenment), 근본주의(Fundamentalism), 뉴 에이지(New Age) 등의 이념들에 의한 염려스러운 수준의 역사성(historicity) 비판 및 훼손 등의 문제에 대한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문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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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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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1: 예수의 역사적 실재
 
작성자   주호식(jpatrick)  쪽지 번  호   192
 
작성일   2009-01-03 오전 11:37:30 조회수   171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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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1 - 예수의 역사적 실재
 
 
과거는 오늘이 있게 한 원인이다. 또한 내일은 오늘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2천년 역사 속을 면면히 흐르며 과거와 오늘을 이어주는 정신은 무엇일까.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은 단지 역사 속의 사건에 불과할 뿐인가. 가톨릭신문사는 창간 70주년을 기해 시도했던 세계 교회사 100대 사건-역사의 현장을 찾아서좦를 다시 시작하며 그 의미찾기에 나선다. 이 기획은 당초 독자들의 깊은 관심과 격려 속에 출발했으나 우리 사회에 크나 큰 어두움을 드리웠던 IMF 등 뜻하지 않은 요인들로 인해 그간 중단됐었던 본보는 다시 시도되는 이 기획을 통해 2000년 교회역사가 지닌 빛나는 문화유산은 물론 교회사의 전체 맥락을 짚어봄으로써 미래교회의 모습을 정립하는데 밑거름으로 삼고자 한다. 여기서 다룰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은 본사가 선정했으며 광주 가톨릭대학교 김희중 신부(그레고리안대학교 교회사 박사) 등 전문가들이 감수했다. 집필은 특별취재반 기자들이 맡는다.
 
 
만삭의 아내를 부축하며 달려온 것이 벌써 수백리 길. 나자렛 사람 요셉은 머리 누일 곳이라도 찾았으나 베들레헴에서 방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임박한 출산의 다급함 때문일까. 요셉과 마리아의 심신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요행히 마굿간에 거처를 마련한 요셉과 마리아. 안쓰럽게도 그들의 출산을 어린 양치기 목동들과 하늘의 수많은 별들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누추하고 불편하기 이를데 없는 이 출산의 순간이 온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 예수, 수천년 동안 인류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 1?4).

그것은 또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 14)고 하신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 voluntas tua)라는 성모 마리아의 고백이 결실을 맺으며 믿는 이들의 신앙고백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구세주의 탄생은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가장 소박하고 가난하게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쯤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 인구 3만명의 도시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번째 임금인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묘사된 베들레헴은 그동안 주인과 주민이 뒤바뀌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겪고 지금은 아랍인 거주지인 상태.

구세주의 탄생지로 인류 역사에 일대 전환점을 이룬 역사의 현장 베들레헴. 이곳에 예수성탄성당이 있다.
예수성탄성당의 입구는 말을 타고 들어와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길은 좁고 출입구는 두번이나 낮추어졌다.

예수성탄성당은 현재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고, 십자군이 북쪽에 세운 가타리나성당은 가톨릭이 보존하는데, 성탄 때 TV에 나오는 베들레헴에서의 미사 장면은 성 가타리나성당에서의 미사봉헌 모습이다.

허리를 굽혀 좁은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아기 예수가 탄생한 바로 그 자리에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동정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고 라틴어로 새겨놓았다.

이곳은 예수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실재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려는 순례자들로 연일 발디딜틈 없이 북적댄다. 별자리를 보려면 보통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데 운이 좋았다. 순례객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릎을 꿇은 채 예수께서 나신 곳이라는 별자리에 친구했다. 그때의 감격이란.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의 삶의 흔적은 나자렛에서부터 가나-갈릴래아 호수-사마리아-예리고-예루살렘 등지 곳곳에 베어 있다.
이즈르엘 평야 북쪽에 위치한 나자렛은 예수가 유년시절을 보냈고 공생활 전까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30여년을 보낸 곳이다. 이곳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예고해준 자리, 곧 마리아의 집터였다는 곳에 성모영보성당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나자렛에서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가나촌. 혼인잔치에서 첫번째 기적을 행하셨다는 곳에 기적의성당이 있다. 지하에 보관된 돌항아리들을 보는 순간 2000년 전 혼인잔치에 와 있는 듯 감격이 밀려든다.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묻어있는 곳.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다니는 기적을 보여주신 곳도, 거센 풍랑을 한마디 말씀으로 잠재운 곳도 바로 이곳이다.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 인접한 도시 타브가에는 예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다는 곳에 빵의 기적성당이 서 있고, 산상설교를 하셨다는 진복팔단산 언덕엔 진복팔단성당이 호수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또 베드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내 양들을 잘 돌보라」는 명령과 함께 수위권을 받았다는 곳에 베드로 수위권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리스도교 최대의 성지 예루살렘. 예수의 수난 죽음과 함께 그의 인간적 면모를 확연히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올리브산 정상의 주의기도성당과 게세마니 동산의 고뇌의성당을 거쳐 예수께서 입성하셨다는 그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가시관을 쓰신 빌라도의 관저가 그대로 보존돼 있고 병사들이 예수를 매질하고 가시관을 씌운 곳에 세운 채찍성당은 다시 한번 순례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기도는 골고타언덕까지 이어진다. 골고타언덕은 원래 예루살렘성 밖 사형집행장이었으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그리스도교 성지가 되었다. 이곳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요청으로 주의 무덤성당이 세워졌다.

성당구내에 10~14처까지의 유적을 수용하고 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곳(12처), 예수의 시신이 내려진 곳(13처), 예수의 빈 무덤(14처) 등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2000년을 이어져 오는 신앙의 실재와 연속성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2000년 전 한 인간의 모습으로 탄생하셨다. 그 이름은 예수였다. 그는 30여년을 살았고 당시의 가치기준과 관행을 깨부수는 파격적인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모욕과 수난, 그리고 십자가 형벌이었다. 인간적으로 더할 수 없는 패배와 좌절, 결국엔 죽음까지 자초한 예수를 그리스도요 구원자로 고백하는 무리가 있다.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는 허구도 아니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당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방편은 더 더욱 아니다. 그의 실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가 나약한 이 세상 삶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게 하는 바탕이자 뿌리이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일생을 걸고 던진 가르침은 바로 사랑과 기쁨이다.
 
[가톨릭신문, 2000년 3월 5일, 전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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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태 ( (2011/05/01) :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과 부활에 대한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역사성을 갖지만, 그 각각의구체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확인은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모든 사건이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그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부활 사건의 신앙적 증거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 애초에 올렸던 한줄답변의 출처/근거를 요청하였더니, 출처/근거 제시 대신에, 제가 올려드린 글을 읽고는 자신의 주장을 이와같이 수정하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수정을 하더라도, 내용을 알고 수정을 하여야 제대로 된 수정인데, 여전히 교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5/01) :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 수정된 문장의 주된 문장이, 예를 들어, "부활 사건의 증언이다" 가 아니라, "부활 사건의 신앙적 증거로 봐야한다" 이므로, 여전히 교회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5/01) :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바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삶에 대한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역사성을 가진다" 입니다. 여기로부터 한 개의 따름 정리로서, "네 복음서들은 부활 사건의 증언이다" 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굳이 "신앙적 증거"임을 언급할 필요도 없는데, "신앙적 증거"를 주된 주장으로서 주장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수정문은 여전히 교회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교회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주장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증언"과 "신앙적 증거"는 대단히 다른 것입니다.
 
소순태 ( (2011/05/01) : [이제 이 복음서의 견해에 관한 한, 소 순태씨의 칼라 댓글을 보지 않아도 ㅁㄱㅈ님의 의견과 거의 대등소이할 겁니다. 아니 꼭 같겠죠. 그래서 곽 은빛님께서 질문한 내용의 두 분 답변은 칼라로 쓴 ㅁㄱㅈ님의 견해라고 저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 따라서,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5/01) : 제 글로 다시 가서, "하느님의 말씀(계시헌장, Dei Verum)" 제17-19항들을 다시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적 증거"라는 주장 자체가 따름 결과로서 등장할 수 없는 문장들입니다.
 
소순태 ( (2011/05/01) : 따라서 그 분은, 교회의 가르침을 순명하는 자세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자신 고유의 평소 신념(belief)을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 (2011/05/01) : 예를 들어, 사도 요한이 빈 무덤에서 아마포와 수건의 상태를 "보고 믿었다" 고 기록한 것은, 베드로와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충실한 "증언"이지, 물적 증거를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신앙적 증거"가 아닙니다. 바로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설명이 그 다음 절(제9절)에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소순태 ( (2011/05/01) : 다른 한 편으로, "신앙적 증거" 라는 표현 자체를 가톨릭 교회의 문헌들에서 별로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가 무엇인지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구글 검색 엔진으로 검색을 해 보니, 국내 개신교측에서는 "신앙적 증거"라는 표현을 많이들 사용하고 있더군요.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가톨릭 교회의 핵심 가르침을 출처를 알 수 없는 표현과 함부로 섞어 사용하게 되면 결국에 교리적으로 커다란 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꼭 같은 단어도 다르게 그 의미를 정의하여 교리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하는 자들도 있으니까요. 대표적인 예: 남미의 해방신학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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