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6월호_특집'전쟁과 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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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저는 태어난 흑석동에서 자랐으며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공소 시절을 기억해보면 봄, 가을 판공 때나 신부님을 뵈올 수 있었고, 어른들은 엄격한 교리시험을 거쳐야만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가장 큰 기쁨은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었고, 미사가 끝나면 신부님과 함께 식사하는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뜻밖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난 때였습니다. 한강다리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집은 흑석동이라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도 외갓집으로 피난을 갈 수 있었습니다. 외가 식구들은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저의 신앙생활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어도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은 전쟁과 같은 극한상황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본당인 명수대 본당(現 흑석동 본당)은 신설본당이었으나 주임이신 이경재 신부님은 매우 진보적이어서 새로운 사목방안을 세우고 실천을 강구하셨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서울대교구에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1956년 8월 18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흑석동 본당에서 탄생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제 어머니의 협조단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서울대교구의 레지오 첫 번째 최연소 협조단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모두가 신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분의 섭리를 뒤늦게나마 우리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1956년 우리 서울교구에 레지오가 도입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세밀한 계획이셨습니다. 레지오의 도입으로 한국교회의 위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와 선교가 병행될 때 복음화가 잘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각 본당에서는 레지오 마리애가 신심단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한국교회에서 개인 신심을 공동체 신심으로 인도했고, 조직적인 선교방식을 알려주었으며 봉사와 활동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레지오 단원 여러분!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물론, 특별히 레지오 마리애 단원 여러분께서 통일을 위하여 6월 한 달 동안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바쳐주셨으면 합니다.
나원균/바오로 몬시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