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7년 3월호 [훈화]

인쇄

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7-03-14 ㅣ No.80

[아프리카의 밤하늘은 유난히 빛났습니다]

 

얼마 전에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프리카의 처참한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순수함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프리카의 피로 얼룩진 죽음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다이아몬드 뒤에 숨겨진 잔혹한 아프리카의 역사를 그린 영화로서 다이아몬드 밀거래를 둘러싸고 무기구입 자금을 마련하려는 반군과 다이아몬드 채취에 동원되어 착취당하는 주민들의 잔혹한 현실을 그린 영화입니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으로 수만 명이 희생되고 어린 아이들을 마약으로 조종하여 “정부군에 협조한 부모를 살해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패륜을 강요하는 현실, “아프리카의 붉은 흙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흘린 피로 붉게 변했다” “아프리카는 아직도 20만 명의 소년 군인들이 있다”는 대사와 자막은 제 마음을 무겁게 조였습니다. 
2006년 9월 아프리카 ‘앙골라’라는 나라에 갔었습니다. 물론 다이아몬드 원석을 구하려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코끼리와 사자, 그리고 기린이나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을 구경하기 위한 사파리 여행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앙골라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작은 학교나 고아원을 건립하려는 꿈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고아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수천, 수만 명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처참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글을 여러 책에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이렇게 듣고 읽었던 내용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가는 길은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살아가는 모습도 참혹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스페인 국적을 포기하고 앙골라에 귀화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수녀님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숭고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앙골라의 수도 루완다(Luanda)에서 굶주린 배를 채워보려고 닭처럼 그리고 개처럼 쓰레기더미를 파헤치는 어린이들을 보았습니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먹을 것이 없을 것 같은 쓰레기더미, 그런데 그곳에서 먹을 것은 찾지 못하고 갓난아기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쓰레기더미에 내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짐승 같은 행동을 하느냐고. 그러나 그 방법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아기를 살리는 길이요, 그 방법이 가족 모두가 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쓰레기더미 근처에는 메리세다리아스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300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스물두 살 먹었지만 손과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여자아이, 아이들이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발견한 생후 1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 27년이라는 내전의 후유증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정말 불쌍한 아이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앙골라의 참혹한 현실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아파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는 새들이 평화롭게 날고 있었습니다. 칠흑같은 밤하늘에 별들은 유난히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비록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지만 순박한 아이들의 마음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 가련하게 보였지만 아이들의 눈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설움이 가득히 고여 있었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고, 힘에 겨워 지쳐있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우수에 잠겨있었지만 결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는 어두운 나라, 메마른 나라, 죽음의 나라가 아닙니다. 꿈이 있는 나라요,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꿈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아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욕심을 내지 않은 아이들, 원망하지 않는 아이들,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들, 슬퍼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어두운 밤에 유난히도 반짝이는 작은 별들입니다.
별을 바라보는 마음은 사랑의 마음, 부유한 마음입니다. 아프리카의 밤하늘은 유난히도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별들이 유난히도 빛났습니다.
_김양회·요한보스코 신부

 


[열두 사도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고통 없이 영광 없고 죽음 없이 부활 없다”(떼이야르 드 샤르뎅).
이 말은 지상여정(地上旅程)을 순례하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투쟁교회(鬪爭敎會)를 신실하게 살고있는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힘있는 위안이고 격려가 아닐는지요. ‘참된 크리스천 생활’이란 한마디로 ‘고통에서 영광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나아가는 삶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내다보며 은총의 때 사순절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가장 강력하고 교훈적이며 경고적인 말씀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1베드 5,8 참조)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4-3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죽기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외면적 심리적 추종뿐만 아니라 그 부르심에 대한 인간적인 결의와 행동적인 응답이 요구됩니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바리아 산상(山上)으로 오르실 때처럼, 또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행하신 것처럼 온전히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마르 10,38).
예수 그리스도를 철두철미 추종하고 온전히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살며 그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파한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직제자 사도(使徒, 그리스어 Apostolos)들입니다. 지금 여기서 레지오 사도직을 수행하며 실제로 사도로 불림받고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399)라는 교회사가는 열두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며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자기 잘못에 대해 얼마나 통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통회를 했던지 눈밑에 눈물 구멍이 생겼다고 합니다. 로마에서 전교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에서 전교하다가 아카이아 파트라스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안드레아가 매달린 십자가는 X자형이었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님 측근 삼인방의 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모교회를 지키다가 헤로데 아그리파 왕의 칼에 목이 베였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첫 순교자이며, 다른 야고보와 대비하여 장 야고보라고도 불립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부탁하신 대로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며 전교하다가 70년경 예루삼렘이 멸망되고 나서, 에페소에 가서 전교했습니다. 거기서 박해를 만나 기름가마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박해하는 이들이 놀라 밧모 섬에 귀향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묵시(계시)를 받아 묵시록을 쓴 후 자기 명대로 살다가 죽은 유일한 제자입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 부르기아 지방에 가서 전교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 지방에 가서 전교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믿었던 의심 많은 제자였지만 파르티아, 인도 등지에서 전교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태오는 세리 출신으로 제1복음 성경의 저자이며,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떠밀려 죽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이집트에 가서 전교하고 유다에 돌아와서 전교하다가 화살의 과녁이 되어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페르시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티아는 가롯 유다 대신 선출된 제자로서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의 신앙자 우리들 역시 사도들처럼 참으로 죽기까지 우리의 신앙을 온전히 지키며 키워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의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어려운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열두 사도처럼 죽기까지 주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매달리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_최홍길·레오 신부

 


[사순절을 잘 지내고 계시나요?]

 

저는 서울교구 내 꼬미씨움 간부님들과 꾸리아 단장님들과 함께 피정을 하며, 그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피정을 마치고 떠나보내면서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잘 생활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영적 독서를 통해서 예수님께로 향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주님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그분을 따름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는 과정이야말로 참된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속에 파묻혀서 주님을 찾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내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데 왜 이런저런 일을 시키려 하느냐?” “그냥 지내던 대로 살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뭐가 좀 달라지느냐?”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을 내가 노력한다고 변화될 턱이 있느냐?” 하십니다.
절망에 빠진 목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점점 먹고살기 힘들어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서 신앙생활로 이끈다든가 봉사를 한다는 것은 더욱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나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나의 업무로 생각하고 그저 때워야 하는 책임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안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까?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누구 때문에 레지오 단원으로서 봉사를 합니까?
여러분이 행하는 봉사와 활동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업적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숫자와 업적이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정성껏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과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뛰어들어서 함께할 때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동안 주님을 자주 모시십시오.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자주 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내가 하나라는 느낌을 갖고 생활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은총이 충만할 때일수록 유혹도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떠나지 않도록 꼭 붙드십시오.
이 사순절, 우리의 모든 일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시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영적 독서 : 예수와 친밀히 사는 법 (준주성범 2권 8장)
1. 예수께서 가까이 계시면 모든 것이 다 좋고 예수께서 안 계시면 모든 것이 다 어려워진다. 예수께서 내 안에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별 위안이 없고, 예수께서 한 말씀만 해주시면 우리는 큰 위안을 느낀다. 마르타가 “스승이 오셔서 너를 찾는다” 하니, 마리아가 울고 있다가 곧 일어나 그를 마중나가지 아니했는가. 네가 눈물 흘리는 것을 막아 즐겁게 해주시려고 예수께서 너를 찾아오시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예수께서 안 계시면 네 마음은 무미건조해진다. 예수 이외의 것을 찾음은 그 얼마나 어리석고 허황된 일이냐. 온 세상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일 것이다.
2. 예수가 아니면 이 세상이 네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예수가 없으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되고 예수가 계시면 행복한 낙원이 된다. 예수가 너와 같이 계시면 어떤 원수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예수를 찾는 사람은 귀한 보배를 얻었고 그보다 더 값진 것은 또 없느니라. 예수를 잃으면 그 손실이 막대하니 온 세상을 잃은 이상의 손실이다.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은 극히 가련하고, 예수와 같이 사는 사람은 부유하다.
_윤병길·세례자 요한 신부

 


[에델 퀸과 그녀 안에 깃든 성삼위]

 

에델 퀸의 시복청원자로 참여하신 안셀름 모이니한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서술하였습니다. “영성체의 기회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크나큰 고통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톨릭 계통이 아닌 요양소에 환자로 수용되었을 때에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밖에는 성체를 모실 수 없었는데, 나중에 ‘그때 매일 성체를 모시는 기회를 빼앗긴 것은 정말로 지옥에 갔다온 경험을 한 것 같다.’ 그녀는 또  ‘만일 성체가 없다면 얼마나 황량한 생이 될 것인가… 이렇게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성삼위께 거듭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체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레지오 영성이라는 왕관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입니다. 그 사랑은 레지오의 쁘레또리움과 아듀또리움 단원들 안에 특별한 방법으로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레지오 단원으로서 상급 단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마도 성체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실히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에델 퀸의 영적 생활의 다른 면, 다시 말해 그녀의 정신 속에 은총을 통하여 계시는 성삼위를 간단히 묵상해 보겠습니다. 에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아일랜드의 카루트지오 수녀회의 한 수녀는 베르나르도 신부님이 쓰신 「성체에서 성삼위까지」라는 소책자를 거듭해서 읽으며 묵상했던 일을 말해주었습니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성체는 우리 정신 안에 깃든 성삼위의 신비를 직접 삶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으로 에델은 이 위대한 법칙을 이론으로뿐 아니라 매일의 실천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녀가 좋아했던 저자들 중에서 또 한 사람이 성삼위 은총의 엘리사벳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은총을 통하여 우리 존재의 저 깊은 곳에서 우리와 엄청나게 절친하다는 신비스러움에 관하여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분들이 있는데, 엘리사벳도 그 중 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물론 에델에게도 성삼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과 천국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둘의 차이는, 우리 안에 있는 성삼위의 신비는 믿음으로 느낄 수 있고, 천국이 있음은 직접적인 축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러한 것을 이해하면, 왜 에델이 그토록 긴 시간을 침묵과 명상으로 갈망하였는지를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시복을 위한 청문회에서 여러 증인들은 ‘그녀의 열성적인 사도직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영적인 명상이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에델은 그녀의 작은 묵상노트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성삼위를 공경하며, 성모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이신 주님 안에서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은총을 갈구합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십시오. 우리의 모든 명예와 보상과 거룩함을 바쳐 하루 온종일 자주 그분을 우리의 정신 안에 살아계시는 성삼위께 봉헌하십시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성삼위가 머무르시는 성소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삼위를 공경합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곤란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우리 정신 안에 깃든 성삼위를 공경하십시오.”
“성모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성삼위를 공경합시다. 쓸모없는 걱정거리랑 전부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공경하고 하나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정신 안에 깃든 성삼위와 함께, 성모님을 통하여.”

에델 퀸에게는 삼위일체의 논리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부담없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녀에게 성삼위는 완전히 살아있고 힘이 넘치며  활력적이었습니다. 그녀가 성삼위를 자신의 실제의 생활에, 그리고 기도에, 일에,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용하는 태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정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_맥그리거  신부 / 강용대 역

 



3,75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