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동성당 게시판

어버이 날의 큰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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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근 [barbara59] 쪽지 캡슐

2000-05-08 ㅣ No.421

 해마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부모님께 무슨 선물로 기쁘게 해드릴까 걱정부터 하게 된다. 편찮으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나는 더구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을 하면서, 그냥 맛잇는 음식장만에다 꽃을 사다가 집안 분위기를 환하게 해드리는 정도로 마음을 쓰곤 하였다.

 

 7년 전 그토록 건강하셨던 시아버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 주로 누워계시고 오래 앉아 계시지도 못하시는데 최근에는 4년 전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요즘 부쩍 몸과 마음이 허약해셨다. 그렇게 병환중이신 시아버님을 모시고 내가 난데없이 봄꽃이 다 지기전에 봄나드리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시어머님은 "어떻게..." 하시며 불가능하다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항상 조마조마할 정도로 하루하루 달라져 가는 시아버님 모습을 볼 때마다 더 늦기 전에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었다.

 

 더구나 오늘은 어버이날.

오랜 병석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바깥바람을 쏘이시며 기분 전환을 하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남편은 출장 중이고 하나밖에 없는 시동생은 허리를 다쳐 요양 중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기동을 못하시는 시아버님을 어떻게 모시고 나갈 수 있을까 궁리 하다가, 갑자기 동네에 있는  "삼성 3119 구조단"  생각이 났다.

전화를 하여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남자 두 분만 오셔서 내 차에 태울 수 있게 해주고 그리고 돌아 올 때 연락하면 다시 집안으로 모시는 것만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했더니 의논을 하여 아침에 전화를 주겠다고 한다. 구급 구조단이 이런 일까지 도와줄까? 그래도 어버이날 효도하려는 나를 위해 도와줄꺼야.... 혼자 자문자답하며 기다리는데, 오늘 아침에 11시쯤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님의 오랜만의 외출을 서둘러 준비하였다.

 응급실로 실려 가실 때 빼고는 처음 외출이었다. 집에서는 온종일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 계시던 분이 신기하게도 오늘은 부기가 빠진 맑은 얼굴로 차분히 응해주셨다.

 차 뒷좌석에 어머니 곁에 기대 앉으신 아버님의 모습이 얼마나 평화스러워 보이던지 예전의 아버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나 점잖으시고 항상 미소가 가득한 선비같은 분이셨기에 머리도 하얗게 세어 마치 신선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들떠 있었다. 나는 운전을 조심하며 우선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아버님, 여기 외환은행 기억나시지요?"

 "아버님이 아이들 과자 사주시던 이 슈퍼 기억나세요?"

 "정한이 업고 유치원 버스 태우던 여기 기억나세요?"

 "유빈이 스쿨버스 타던 곳 기억하세요?"

 "여기가 우리 가족이 다니는 성당인데 아시지요?"

 

 많은 기억들을 떠올리시게 질문을 계속하면 아버님은 "응" 하시며 바깥을 바라보신다. 아이들 이름이 나올 때마다 아버님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지며 조용히 눈을 떴다 감았다 하셨다.

 

 장충단 공원에 분수는 뿜어 오르지 않았지만 마침 연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곳곳에 새빨간 철쭉꽃이 만발해 있었다.

 

 어머니 시비가 있는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수표교를 바라보고, 때마침

먹거리 장터가 열려 있는 국립극장 뜰을 지나 남산 순환도로로 하여  남산타워 근처까지 가서 나무 숲 그늘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소풍 온 들뜬 마음으로 준비해 간 도시락을 펼쳤다. 차에서 내리지는 못했지만 차안에서나마 창문을 열어놓고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도시락을 먹으며

 "아버님 우리 오늘 소풍 겸 외식, 좋으세요?" 하며 물었다.

고개만 끄덕이시는 시아버님의 모습은 몇 년만에 보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옆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드시게 하려고 애쓰셨지만 힘이 드시는 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신다.

 

 "눈 좀 뜨세요"

 "응. 졸려"

 "아버님 이 꽃 좀 보세요"

 "저 연한 초록색 나뭇잎 좀 보세요."

 

 별로 드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기뻤다. 단 30분도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오늘만큼은 우리의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님은 고맙게도 두시간이나 견디어 주셨다.

 

 온통 연초록 빛 물결의 터널 속을 뚫고 나온 듯 우리의 마음 또한 연초록으로 짙게 물들여 져 있었다.

 

"3119 구조단" 의 도움이 없었다면 2000년 어버이날을 이렇게 뜻 깊게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 시어머니께서 내 어깨를 살며시 안아 주시며 "오늘 수고 많았다. 고맙다" 하시는데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나 역시 시아버님을 모시고 용감하게 외출을 해 낸것이 무한히 기쁘기만 하고 스스로 대견해지기도 했다. 아마 어느 해 어버이날보다도 값진 큰 선물을 안겨드린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소원을 이루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총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내년 어버이날에도 오늘의 이 기쁨을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또 한번 주님께 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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