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재의 수요일]단식 (마태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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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2-14 ㅣ No.85

 

 

[재의 수요일]단식 (마태  6,1-6.16-18)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는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요엘 예언자는,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요엘 2,12-18)
12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13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14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뿔 나팔을 불어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
16 백성을 모으고 회중을 거룩하게 하여라. 원로들을 불러 모으고 아이들과 젖먹이들까지 모아라. 신랑은 신방에서 나오고 신부도 그 방에서 나오게 하여라.
17 주님을 섬기는 사제들은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아뢰어라. “주님, 당신 백성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소유를 우셋거리로,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로 넘기지 마십시오. 민족들이 서로‘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하고 말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18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라며,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고 한다. (2코린 5,20─6,2)
형제 여러분, 20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6,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을 베풀 때, 기도할 때,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마태  6,1-6.16-1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재의 수요일 제1독서(요엘2,12~18)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요엘2,12~13)

 

'이제라도'에 해당하는 '웨감 앗타'(wegam atha) '모든 것이 다 끝장 나버린 상황에서라도',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때라도' 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는 다시 일어날 용기를 갖지 못한다. 더우기 돌아가야 할 대상이 거룩하신 하느님 더군다나 심판의 재앙을 단행하여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신 당사자이신 하느님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면서 그들에게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인지,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이지를 엿볼 수 있다.

 

본문은 하느님의 백성이 어떤 자세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는지를 말한다. 네가지로 제시되는데 원문상으로는 네 가지 태도 가운데서 '마음을 다하며'란 어구가 맨 먼저 나온다. 

이에 해당하는 '뻬콜 레바브켐'(bekol lebavkem)은 결코 거짓된 태도가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할 뿐 아니라 온 힘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것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마음' 지칭하는 단어는 '레바브'(lebav; heart)이다. 이는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내포하는 인간의 본질적 부분을 가리킨다. 마음이 빠진 외적 행위만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다.

두번째'단식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에 해당하는 '우베촘'(ubetsom)의 어근 '촘'(tsom)번역 그대로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행위 의미한다. 율법에서 공식적 단식은 일년에 한 번 있었다.  그들은 대속죄일에 전국적으로 단식했다. 그러나 경건한 히브리인들은 깊이 회개할 때도 단식하고, 국가적, 민족적 위기와 재난의 상황 앞에서도 단식하고 기도했다(1열왕 21,27-29 ; 요나3,3-10참조). 이같은  진실한 단식에는 하느님의 마음을 뒤바꾸는 큰 힘 담지되어 있다.

15절에도 ' ~단식을 선포하고 거룩한 집회를 소집하여라'고 하면서 '단식'이 또 나온다.  원문은 '캇데슈 촘'(qadeshu tsom)인데, '단식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라'는 표현은 구별하여 떼어 두라는 의미이다. 어느 한 날을 '단식일'(tsom)로 정해서 사람들이 그 날을 다른 날들과 철저하게 구별하여 모두 단식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또한 '집회' 해당하는 '아차라'(atsara)는 14절에도 나온 표현으로서 집단적인 회개를 목적으로 한 집회를 지칭한다.

세번째로 유다 백성은 '울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에 해당하는 '우베베키'(ubabaki)의 어근 '베키'(beki)는 어원적으로 큰소리를 내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도록 우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 형제들을 만난 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다가 자기 방으로 가서 대성통곡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으며(창세 45,2), 히즈키야 왕 하느님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은 후에 하느님께 목숨을 구하면서 대성통곡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2열왕 20,3). 이같은 사례를 고려할 때 하느님께 회개하며 나아가는 자들은 가슴을 치면서 통곡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넷째 유다 백성은 '슬퍼해야'(애통해야)한다고 권면한다. 이에 해당하는 '우베미쓰페드'(ubemisped)의 원형 '미쓰페드'(misped)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머리카락을 쥐어 뜯거나 가슴을 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는 특별히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하만의 간계로 멸절 위기에 처한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절망적 운명을 생각하면서 부르짖은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에스4,3).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13)

12절에서 요엘은 주님의 날의 도래에 앞서 진심으로 회개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본절에서 요엘은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유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요엘은 그들에게 '마음'을 찢으라고 명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극심한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하느님 대전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 옷을 찢곤했다(창세37,34; 여호7,6; 1열왕21,27참조). 그러나 요엘 예언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옷을 찢지 말라고 말한다. 옷을 찢는 것은 회개의 표시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칫 형식적 행위로 끝나고 말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외적 의식은 마음을 변하지 않고 행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 은유적 표현인데,  이것은 가슴에 상처를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심령으로 통회하는 것 의미한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시편51,19)

왜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받아주시고 작정하신 심판을 철회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에 제시된 주 하느님의 속성은 이미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계시해주신 하느님 자신의 속성이기도하다(탈출34,6-7). 

먼저 '너그럽고' 해당하는 '한눈'(hanun)지체가 높은 윗사람이 지체가 낮은 아랫 사람에게 호의(친절)을 베푸는 행위를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여기에서 자격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과분한 호의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신약의 희랍어에서 '카리스'(charis)에 해당하며,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은총'(grace)으로 번역된다.

둘째 '자비로운'에 해당하는 '라훔'(lahum)산모가 자기 몸에 잉태된 태아를 출산하기까지 보호하고 양육하는 자리인 자궁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자신이 직접 낳은 자녀에 대한 부모 특별히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 나타내는 단어이다. 흔히 구약성경에는 '불쌍히 여기다','자비롭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신명4,31; 느헤9,17). 더욱이 특징적인 사실은 이 단어가 하느님의 속성을 지칭하는 경우 외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계약을 맺어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이기에 유다 백성이 죄를 지어 참혹한 심판에 떨어져 크나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결코 방치하시지 않으신다.

셋째 '분노에 더딘' 분으로 소개한다. 여기서 '더디고'에 해당하는 '에레크'(erek)어떤 물체를 잡아 늘이거나 시간 등을 연장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유래한다. 요엘은 유대 백성들이 주님께서 길게 참으시는 성품을 충분히 이해하여 더 극심한 심판을 당하기 전에 그분에게로 돌아와야 함을 촉구한다.

넷째 '자애가 큰' 분으로 말한다. 여기서 '자애' 해당하는 '헤세드'(hesed)계약의 백성에 대해 베푸시는 주 하느님의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사랑 강조하는 단어이다. 

요엘 선견자가 이같이 주 하느님의 성품을 네 가지로 나열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유다 백성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체하지 말고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주님을 섬기는 사제들은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 아뢰어라." (17)

중재(중보)기도 예언자들도 할 수 있었지만, 중재적 성격을 지닌 제사는 사제들만이 드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따라서 요엘 예언자는 당시 상황에서 온 백성이 단식하고 집회를 이루어 주님 대전에 회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특히 사제들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중재 기도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울며'에서 '성전 현관'(하울람; haulam) 성소로 들어가는 동쪽 현관 말하며 '제단' 해당하는 '미즈빼아'(mizbeha)성전의 성소 밖에 위치한 번제단을 지칭한다. 그 번제단과 성전 현관사이는 흔히 <사제들의 뜰>로 불리워지며 그곳에서 사제들은 제사가 집전되는 중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에제8,16).

특별히 여기서 요엘은 그들이 울면서 기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에 해당하는 '이브쿠'(ibku)의 원형 '빠카'(baka)는 단순히 우는 정도가 아닌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을 의미 하는 동사이다(창세21,16; 27,38). 본문에서 이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러한 통회와 자기 복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사죄와 회복이 임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재의 수요일 복음(마태6,1~6.16~18)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1)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2)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3)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5)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16)  너희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7)

 

마태오 복음 6장 1~18절까지는 당시 유대인들의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였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경계의 말씀이 들어 있다. 

B.C.586년 남부 유다 멸망 이후 포로 시대의 상황에서 유대인의 전통과 예식을 고수하려는 강한 민족주의적 배경 아래 생성 발전한 유다교는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여서 지나친 형식주의가 퍼져 나갔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 행위 가운데는 위선적 요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구약 율법을 빌미로 해서 저지르는 대표적인 위선을 거론하신다.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고(마태6,1)에 이어, 특히 자선(마태6,2~4), 기도(마태6,5~15). 단식(마태6,16~18)에 있어서 근본 의미를 밝혀 주시며, 위선을 버릴 것을 촉구하신다.

'위선'이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의(義)임이 지적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프로스 토 테아테나이 아우토이스'(pros to theathenai autois; to be seen by them)에서 '프로스'(pros; to)'~하기 위하여', '~을 목적으로'라는 의미를 가지며, '보이다'에 해당하는 '테아테나이'(theathenai; be seen)목적을 나타내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수동태이다.

여기서 다른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에게 보이려는 목적만으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위선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아주 잘 드러난다. 그리고 '조심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로세케테'(prosechete; take heed; be careful)'주의하다', '삼가다'의 뜻을 가진 '프로세코'(prosecho)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마치 걸음걸이가 서툰 어린 아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자상한 표현이다.

또한 '하지 않도록'에 해당하는 '메 포이에인'(me poiein; not to do)마태오 복음 6장 1절 이하의 내용이 실생활 가운데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행위에 관한 교훈이다.

마태오 복음 6장 2절부터 4절까지는 유다교에서 종교 규정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자선'에 해당하는 '엘레에모쉬넨'(eleemosynen; thine alms)에 있어서의 위선에 대한 교훈이 나온다.  

여기서 주어'너희'가 아니고 '너'라는 단수인데, 이것은 모든 사람 각자가 자선을 행할 때 이 규정이 엄격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또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에서 '때'로 번역된 '호탄'(hotan; when)'~할 때는 언제든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만약 자선을 한다면' 정도의 가정법적인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은 반드시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데, 자선을 베풀 때에는'이라는 필연적 의미를 지닌다.

 

마태오 복음 6장 2절'위선자' 해당하는 '호이 휘포크리타이'(hoi hypokritai; the hypocrites)기본형 '휘포크리테스'(hypoktites)'가장하다', '꾸미다'뜻이 있는 '휘포크리노마이'(hypokrinomai)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연극 배우'뜻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밖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여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마태15,7; 마르7,6).

이런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목격할 수 있는 회당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자선하고,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나팔을 불듯이 자랑까지 하여 그들의 행위가 실제로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시에 목적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한편,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에 해당하는 '아페쿠신'(apechousin; they have)의 원형 '아페코'(apecho)는 희랍 고전 문헌에서 '어떤 것을 받고 영수증을 주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확실히 받았음을 나타내는 단어인데, 그러니까 여기서 등장하는 위선자자신에게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확실한 반대 급부가 없으면, 자선을 베풀지 않는 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선을 베풀므로, 자선을 베풀 때 이것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됨으로써, 그들이 목적했던 것을 이룰 수 있기에 그들은 충분한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6장 3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에서 원문에는 '손'이라는 단어가 없고, '너의 왼쪽~너의 오른쪽'만 나온다. 새 성경 번역문과 달리 원문에 '손'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은 구체적인 형체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다. 말하자면, 행위로 이루어지는 자선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동정이나 또는 자선을 계획하는 것조차도 은밀히 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성경에서는 오른쪽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반면에 왼쪽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선한 의지로 자선을 베풀려고 할 때, 이것을 저해하는 악한 충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악한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은밀하고 신속하게 자선을 베풀라는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에 해당하는 표준 원문에는 '프로슈케스테' (proseuchesthe) 라는 2인칭 복수형이 아니고, '프로슈케'(proseuche)라는 2인칭 단수형으로 나오므로 '또 네가 기도할 때에'로 번역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 개개인에 대해 교훈을 주시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하다'에 해당하는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을 향하여'라는 방향나타내는 전치사 '프로스'(pros)'원하다', '고대하다'는 뜻이 있는 '유코마이'(euchomai)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전치사 '프로스'(pros)단 하나의 방향을 나타내는 단어이기에, 기도는 오로지 하느님께 응답받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져야 하며, 타인에게 과시하거나 칭찬을 받기 위한 다른 목적이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유다인 시간으로 3시(오전9시), 6시(정오), 9시(오후3시)가 공식적인 기도 시간이었고, 위선자들은 이 시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기도를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거나 앉아서도 할 수 있지만, 굳이 서서 기도하는 것은 자신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심을 과시했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6장 6절 '골방'에 해당하는 '타메이온'(tameion; closet)'창고', '내실', '침실'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가장 일차적인 뜻은 식료품 등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루카12,24)이다. 

당시 피지배 국민으로서 가난과 빈곤에 시달리던 유다인들은 가족들을 위해 아무도 모르는 '창고'에 식량을 숨겨 두었고, 식량을 가지러 들어갈 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이렇게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식량 창고'는 생명과도 같은 가장 중요한 비밀 장소로 여겨졌다.

 

 

 

<회개>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얹는 ‘재’는 ‘참회’를 상징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실행하는 금육과 단식도 참회를 상징합니다.) 

즉 우리는 회개한다는 표시로 재를 머리에 얹고 금육과 단식을 실천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입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요나 3,4-5).”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셨다.” 라는 뜻입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해 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니네베의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요나서에는 그 도시의 죄가 무엇인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든 니네베는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회개함으로써 멸망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요나서의 내용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께서 니네베에 재앙을 내리시려다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시고 당신의 계획을 취소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취소’ 라는 말은 모순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취소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들 쪽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니네베를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요나를 시켜서 멸망을 선포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는 요나의 선포는,  

원래는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무너진다.”였을 것입니다. 

(“무너지는 것을 피하려면 회개하여라.” 라는 선포.)

 

에제키엘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멸망을 당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사실 ‘재’는 원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허무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우리가 회개의 표시로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먼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묵상하기 위한 일이고, 회개를 통해서 그 운명을 극복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먼지에서 왔지만 먼지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재를 머리에 얹고 한 끼 단식하기만 하면 그것이 회개인가?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9).”

회개는 어떤 절차나 예식이 아니라 ‘삶의 변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이나 한 끼 굶는 일은 모두 무의미한 형식이 될 뿐입니다.

(무의미한 형식이라는 말은 겉으로만 그럴듯한 위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위선’을 몹시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8).”

위선자들도 단식할 때에는 굶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굶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단식은 단식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진심으로 실행하는 단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단식을 단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단식에 관해서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4-7)”

하느님 뜻을 실행하지는 않고, 굶기만 하는 것을 단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 실천 없는 단식은 단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재의 수요일인 오늘은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참조)라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허무하기만 하지요. 늘 고통과 시련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땅속에 묻히고 마는 존재라니! 그것도 언제 어디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시 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되돌아가려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란 하느님을 외면하고 다른 곳을 향하던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절차입니다. 하느님이 없는 것같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삼다가 하느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인간적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겠다는 결심이 회개입니다.
재의 수요일을 지내며 주변의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도 많은 희생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마음 깊이 뿌리내린 이기주의라는 악을 뽑아야 하며 이웃에게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어려운 이들과 만남과 나눔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사순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을 향하는 시기라 하겠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는 기간이지요.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복된 은총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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