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6주일(나해) 마르 6,30-34; ’18/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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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나해) 마르 6,30-34; ’18/07/22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부제 강론
찬미 예수님,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의 사랑 속에 행복한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난은 그만큼 벗어나기 힘들다는 경험이 쌓여서 생겨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난한 모습을 보면, 속담을 근거로 대면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불편합니다. 그 불편함을 어느 성당을 지날 때마다 느낍니다. 그 성당 앞에는 걸인이 한분 계십니다. 남자분인데 다리를 크게 다쳐 일을 할 수 없고, 병원 치료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불구가 되었다며 자신의 처지를 말하며 구걸을 하고 계십니다.
한번은 ‘그분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가.’로 신학생들끼리 언쟁이 붙었습니다. 누구는 그냥 지나치기 뭐해서 돈을 주었습니다. 누구는 돈을 주다보면, 자발성을 막는 것이므로 성장을 오히려 방해하기에 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누구는 돈을 주는 것에 반대하면서도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기에 음식을 사다주기도 했습니다. 신학생들이 한 토론의 주제는 ‘앞선 행동들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의 행위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이 어떻게 났을까요? 결국 결론이 안 났습니다. 몇 번이고 대화를 해도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는 측과 직접적인 것은 아니라는 측은 거리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2학년 때였는데 제 기억으로는 서로를 비난하고 욕하면서 대화는 끝났습니다. 그 때를 되돌아보면, 분명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저는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혼란스러울 때, ‘나는 누구?’ ‘지금 여기는 어디?’라고 질문합니다. 내가 갈 방향을 잡기위해서 다시금 시작점을 맞추는 것이죠. 내가 누구인지를 놓치면, 내가 바라지도 않는 길로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만일 자신에게 혼란이 찾아온다면, 잠깐 멈춰서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길이 내가 바라는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우리에겐 ‘수정’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에게도 그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태 마르 6,31)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제자들은 회복이 필요한 상태였나 봅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떠한 회복이 필요했을까요.
먼저 필요한 것은 ‘체력적인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는 말씀 다음에 바로 나오는 것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마르 6,31) 라는 말씀입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했으니 얼마나 제자들이 열심히 일했는지 또한 얼마나 지쳤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영적인 회복’,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사실 오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체력적 회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오늘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먼저 제자들에게는 그 동안 힘들었으니 가서 좀 쉬라고 말씀하시고 외딴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 곳에 가서는 또 다시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십니다. 제자 된 입장에서 이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스승님이 ‘쉬어! 쉬어!’ 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일하면, 제자가 쉴 수 있겠어요. 몸을 또 움직여야죠.
예수님께서는 왜 그토록 힘든 몸을 이끌고도 다시 사람들을 만나며 일을 하셨는지 오늘 복음의 후반부를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마르 6,34) 군중을 바라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가엾은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죠. 무엇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에겐 육체적인 회복을 넘어선 영적 회복이 필요합니다. 영적 회복은 내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고, 신앙인인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금 느껴보는 것이겠습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한 회복은 바로 ‘예수님의 가엾어 하는 마음’을 되찾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핍박하는 악한 행실을 저지른 왕들을 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왕이 “세상에 공정과 정의”(예레 23,5)를 이루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예레 23,6)고 말합니다. 공정과 정의, 안전은 하느님께서 백성을 가엾은 마음으로 보셨기 때문에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정의’라는 단어가 퍼지고 있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단어이기에 그동안 사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널리 사용된다는 점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으로 이롭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할 때,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방향을 잃으면 또 다른 적개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요즘 남녀혐오를 보면 방향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남녀가 서로를 이렇게 까지 미워할 수 있는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하나가 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도록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안타까움이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권 회복을 위한 행동은 부당한 대우로 힘들어 하는 사람을 보았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가엾어 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이 부르짖는 정의라는 행동은 오히려 또 다시 편 가름과 분노를 일으킵니다.
제2독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 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3-14)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가엾어 하시며, 당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유다인과 이방인이라는 구분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가엾어 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유다인이냐 이방인이냐라는 구분보다 앞서고, 남녀라는 구분보다도 앞섭니다.
저는 열정과 패기가 다였던 지난 2학년 시절을 돌아보며, 우리가 가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공유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그 당시 열띤 토론을 했던 신학생들은 뜨거운 가슴뿐 아니라 가난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가엾어 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신앙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부당한 처우에 맞서는 나의 권리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가 공존하는데 필요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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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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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