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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요한 18,33ㄴ-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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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11-25 ㅣ No.136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요한 18,33ㄴ-37)

 

다니엘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 앞으로 인도되는 모습을 본다. (다니 7,13-14)
13 내가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14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모든 눈이 보리라고 한다. (묵시 1,5ㄱㄷ-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5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6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7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당신은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고 세상에 왔다고 하신다. (요한 18,33ㄴ-37)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33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제2독서 (요한묵시1,5ㄱㄷ-8)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6)

 

6절 역시 5절에 이어 계속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찬양과 영광송으로써 본절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를 한 나라로 이루어 사제로 삼으셨다' 는 것이다. 이것은 5절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한 구속 사업의 두가지 결과를 언급한 것이다.

 

이것 역시 탈출기 19장 5절과 6절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 라는 문구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것을 인용하여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2,9)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던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킴으로써 집합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한 후 단절되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대속적 죽음으로 회복시킴으로 인하여 개별적으로는 성도 개개인을 직접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사제(히에레이스; hiereis)로 만들었다.

 

전자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적 지위를 부각시킨다면,v후자는 거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직접적 접근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내용은 묵시록의 결론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반복 선포된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묵시21,3)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묵시21,24).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이란 표현에 잘 드러나고 있다.

 

즉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세우신 인류 구원 사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 오로지 성부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음은 본문 뿐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도 누차 강조되고 있다(요한6,38-40; 8,42 ;10,37.38 ;17,4).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또한 개별적으로는 영적 사제가 되게 하는 귀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사건 앞에서 요한 사도가 이것을 가능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 무궁하기를 비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된 '독사'(doxa)는 본래 '영예'나 '명성'을 뜻하며, 하느님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에는 '신성으로 거룩하심','존귀나 위엄','권능' 등을 뜻한다. 그러나 원초적으로는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하는 대상을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사제 삼으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바로 그러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신다(요한17,5).

하느님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신 분이요,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를 인간에게 전달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셨으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세세토록 영원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편, 여기서 '권능'으로 번역된 '크라토스'(kratos)는 일반적으로 '신적 권세' 나 '통치권'을 의미한다. 여기서 언급된 '크라토스'는 '적에 대한 승리' 또는 '법이나 규칙에 의한 통치'를 뜻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 표현으로부터 오늘날 '민주정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나 '전제정치'를 뜻하는 '오토크라시'(Autocracy)등의 '크라시' 단어가 파생되었다.

 

이러한 권세와 능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마지막 통치를 연상시키는데, 요한 사도는 묵시록의 머리말인 1장 5절, 6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승리적 통치 언급한다.

이것은 총체적인 악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 역시 묵시록의 뚜렷한 주제가 될 것임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묵시록의 앞으로의 전개 방향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7)

 

'보십시오'(이두;idu)라는 감탄사를 필두로 시작되는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재림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리라는 기대는 이미 공관복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온다 (마르코13,26; 14,62; 마태24,30; 26,64; 루카21,27). 그래서 혹자는 이러한 진술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종말론적인 후렴구' 로 간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절은 다니엘의 환시와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7장 13절에는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이나 히브리 사상에서 '구름'(톤 네펠론; ton nephelon)은 주로 '하느님의 임재와 현현' 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탈출13,21;16,10; 마태17,5 ; 사도1,9).

따라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는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신적 임재와 현현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진술이다.

 

특히 여기서 '오십니다'로 번역된 '에르케타이'(erchetai)는 본래 '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르코마이'(erchomai)직설법 현재형이지만, 여기서는 미래적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묵시3,11; 22,7 ; 12,20).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재림의 성격이 그의 강생과는 대조적으로 공개적일 것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눈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재림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될 것이며, 그분을 '찌른 자들'도 그분의 재림을 볼 것이다.

 

여기서 '찌른'으로 번역된 '엑세켄테산'(eksekentesan)은 '분리'나 '이탈'의 의미를 나타내는 '에크'(ek)와 그 자체로 이미 '찌르다', '꿰뚫다' 라는 뜻을 지닌  동사 '켄테오'(kenteo)합성어인 '엑켄테오'(ekkenteo)의 부정 과거형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 본문과 즈카르야서 12장 10절을 인용한 요한 복음 19장 37절에서만 등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요한19,37).

 

그런데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찌른 로마 병사는 한 명이었지만, 그분을 찌른 자들이 복수형으로 나온 것은, 그 배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정치 권력의 야합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당시나 모든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증거를 '적대적으로 대한 모든 이들'아울러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는 그의 재림이 그 자체로 축복이지만, 그것을 적대적으로 대한 모든 이들에게 있어 그의 재림은 그 자체로 심판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즈카르야서 12장 10절에서 "그리하여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은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슴을 칠 것이다' 로 번역된 '콥손타이'(kopsontai)는 문자적으로 '자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콥토'(kopto)의 미래 중간태로 '자기 자신을 자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묵시록에서 바빌론으로 상징된 로마의 패망과 관련되어 언급된 바 있다(묵시18,9).

 

그런데 즈카르야서 12장 12-14절을 감안하면, 묵시록 19장 9절이하는 '바빌론 왕들의 비통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땅'(게스; ges)이라는 표현이 첨가되어,  애통함과 비통함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향이 '땅에 있는 모든 종족',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으로 통칭되는 전 인류(묵시5,9 ;7,9 ;10,11 ;13,7 ;14,6 ;17,15)에게 미칠 것이라는 계시가 아닐 수 없다.

 

이 놀라운 일은 진실로 반듯이 될 일이므로,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나이 아멘; nai amen) 이란 표현을 덧붙이는 요한 사도의 기록은 너무나 타당하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로 번역된 '나이'(nai)는 '아멘'과 동일한 의미로서, '나이'가 희랍식의 긍정을 의미한다면, '아멘'(amen)히브리식의 긍정을 뜻한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8)

 

하느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한다. '알파와 오메가' 희랍어 알파벳의 처음과 끝글자를 뜻하므로, 의미상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시작과 끝' 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희랍 철학의 전통을 감안할 때,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은 '지극히 높으신 신의 영원성'을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본절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자기 칭호인 '알파와 오메가'는 묵시록 전체의 구조와 관련해서 매우 독특한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또한 만물을 종말론적인 성취로 이끄실 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신적 자기 선포묵시록에서 단지 두 차례만 등장하고 있다. 

첫번째는 요한 사도가 환시를 보기 전인 묵시록 1장 8절에서 등장하고, 두번째는 하느님의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종말론적인 성취가 '다 이루어졌다' 라고 선포한 바로 그 시점에서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라고 언급된다(묵시21,6).

 

말하자면, 요한 사도는 자신의 저술에 교차 대구법적인 구조를 사용하며,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느님의 면모를 매우 정교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께서는 창조의 시작으로 '알파'이시며, 새 창조(구원)의 완성으로 '오메가'이신 것이다.

 

    (2018. 11. 25.)(요한 18,33ㄴ-37)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권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온 세상의 주님으로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주권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고, 동시에 더욱 확실하게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권한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2-25).”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될 때 영원한 생명도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도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믿는 일’도, ‘회개하는 일’도 모두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6-38ㄱㄴ)”


(여기서 우리말 번역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이 식민지 이스라엘의 보잘것없는 죄수를 재판하면서, 죄수에게 정중하게 존댓말을 쓰고, 그 죄수는 해라체 말을 쓰면서 총독을 상대로 말을 완전히 놓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실제 현실에서는 총독은 죄수에게 말을 놓고, 죄수는 존댓말을 쓸 것입니다.

물론 서양 말에는 존댓말과 반말과 해라체 말이 구분되지 않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는 우리 말 어법대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무에게나 말을 놓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 예수님의 말투를 보면, 조금도 겸손하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나 해라체 말을 쓰면서 말을 놓으신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예수님을 높여 드리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섬기고 공경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위압적이고 교만한 예수님이 아니라 겸손한 예수님입니다.

200주년 성서에서는 제자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신 것으로 번역했는데, 다른 번역들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번역자들은 예수님을 높여 드린다는 생각만 하고, 겸손한 예수님은 아예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닐까?

교회 지도자들의 교만한 권위주의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과 상관없는 딴 세상의 나라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의 방식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나라는 권력자들이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가득 찬 ‘영적인’ 나라이고, 믿음과 말씀과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나라입니다(루카 22,24-27).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이 세상은 예수님의 나라에 속합니다. 이 세상과 예수님의 나라는 대립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 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이 세상은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고, 어지럽혀져 있고, 미완성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세상을 변화시켜서 당신의 나라로 바꾸려고 오셨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것이 충만하고, 모든 면에서 완성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세속적인 힘으로(무력으로) 하시는 일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과 희생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랑은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무엇보다도 더 강한 힘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사랑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라는 말씀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사람으로 오셨다는 뜻이고,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내가 선포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다.” 라는 뜻입니다.

현세적인 일에만 집착하면서 구원받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진리 따위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인류 역사는 권력과 힘을 가지려던 수많은 왕과 권력가들이 이룬 흥망성쇠의 역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몫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수단과 방법이 불의해도 역사를 주도한 인물들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고 평가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권력의 희생양이 된 민초들의 삶과 억울하게 당한 소수의 역사는 왜곡되고 억압되며 멸시당해 왔습니다. 교회 역사의 어두운 시기에도 교회의 권력에 희생된 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구촌에는 여전히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이들이 많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를 꽃피운 나라들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권 의식이 성장하고 있고,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제재와 감독은 물론 공직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시민 의식도 커 가고 있습니다. 정경 유착과 적폐 청산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목마른 시민들이 이룬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도 세계사적으로 주목을 받지만, 여전히 권력의 시녀로 살아오며 잘못된 이념 논쟁의 희생양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역사에서는 실패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2천 년이 지난 오늘 그분의 진리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깨달은 신자들의 순교와 영웅적 신앙 고백을 통하여 승리하신 왕이 되셨습니다. 권능의 상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며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시는 선언은, 세상이 완성되는 날까지 교회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복음입니다.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며 살아갑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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