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사순 제2주일]거룩한 변모 (루카 9,28ㄴ-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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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3-17 ㅣ No.152

 

 

[사순 제2주일]거룩한 변모 (루카 9,28ㄴ-36)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땅을 후손에게 준다고 하신다. (창세 15,5-12.17-18)
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5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 (필리 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인다. (루카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창세15,5-12.17-18)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갈라, 갈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창세15,10.17)

 

'반으로'로 번역된 '빳타웨크'(bathawek)는 '~안에'(in)을 의미하는 전치사 '뻬'(be)정관사 '하'(ha)  및  '정 가운데'를 의미하는 '타웨크'(thawek)가 합쳐진 말로서 '바로 그 정가운데'(in the midst)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정 가운데를 쪼개라는 것은 좌우로 조금의 치우침도 없이 하느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리고 '빠타르'(bathar; 자르다, 쪼개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15장 18절나오는 '뻬리트'(berith; 계약)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뻬리트'(계약)'자르다', '쪼개다' 란 의미를 갖는 '빠라'(bara)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계약'이란 용어의 어원이 암시하듯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그 표적이 되는 쪼갠 희생 제물 가운데로 계약의 두 당사자가 지나가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은 만약 계약이 성실하게 지켜지지 않을 때, 그 위반자는 희생물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를 지닌다(예레34,18-21).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처럼 희생 제물을 쪼개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실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지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하느님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뜨린 이후로, 모든 인류는 계속 원죄가운데 태어나 본죄를 지음으로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며 살아감으로, 모든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될 운명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죽으심으로 하느님의 공의를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의 제물이 예표하고 암시하는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구속 공로로 말미암아 영적 죽음을 모면했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17)

 

여기서 '화덕'(풀무)으로 번역된 '탄누르'(thannur)는 진흙으로 만든 꼭대기에 통풍을 위한 구멍을 낸 화로를 가리킨다. 

그런데 창세기 15장 17절연기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화덕의 횃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당한 혹독한 고난을 상징하고(신명4,20; 이사48,10),  뿜는 연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구원의 때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견해다.

 

또 다른 하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할 때 밤낮으로 지켜준 불기둥과 구름 기둥처럼(탈출13,22; 14,24; 33,10)  화덕과 연기도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으로(탈출3,2; 19,18; 이사31,9) 볼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뒤이어 나오는 횃불이 쪼갠 짐승들의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써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는 것을 볼 때, 횃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화덕과 연기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하느님께서 짙은 어두움 가운데 고뇌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횃불과 연기 가운데 임재하신 것처럼, 성도들이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홀연히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시며 마음에 확신과 더불어 죄악을 극복할 힘을 주신다(이사41,10).

 

'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이처럼 '바로 그'란 의미의 정관사 '하'(ha)'이것들'이란 의미의 지시 형용사 '엘레'(elle)가 사용된 것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창세15,9)을 상징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제물들은 모두 정결한 것으로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악으로 오염된 이방 사람들이 아니라 이들과 구분된 정결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제물 위에 임하시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마음이 깨끗한 이들에게 찾아오신다(마태5,8).

   


 

 

내가 변해야 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3,13-15.19-21).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길 수 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최선에 최선을 다하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 구원이 우리의 것이요, 영광스러운 변모가 나의 것입니다.


친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 이었습니다 갑자기 곰이 나타났습니다. 둘이서 곰을 피하여 도망치는데 나무 한 그루가 보였습니다. 곰은 아직 친구들을 따라오지 못하였고 서로 받쳐주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나무를 잘 타는 친구가 먼저 나무를 타고서 올라갔습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친구는 겁에 질려 ‘곰은 죽은 짐승은 먹지 않은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그저 죽은 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 친구가 아래를 보니 죽은 척 하는 친구에게 곰이 쿵쿵 다가와 흠흠 냄새를 맡았습니다. 얼마 후 곰이 돌아가고 나무에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말했습니다.

- 야, 곰이 너한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뭐라고 하든? - 응, 위급할 때 혼자 도망치는 놈하고는 친구하지 말래.

우리말에도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인지는 시련을 앞에 두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사랑이 깊은 친구관계는 어려울 때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 대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시련이 은총의 시기요, 위기를 기회로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없고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냉담을 하기도 합니다. 좋은 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제자들에게 좋은 체험을 만들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앞서 희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셨습니다.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모습,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모습 앞에서도 제자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사흗날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희망을 간직하고 강건하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곧 다가올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당혹해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힘과 용기를 지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유 모습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12절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그리고 창세기 1장 26절.27절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고 하였는데 이제 해처럼 빛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나서 주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로마12,2). 쉽지 않지만 이 선택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같이 거울을 보고 얼굴을 가꾸며 몸단장을 하듯 영혼의 상태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점검하고 부족함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고 거기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초막은 하느님께서 거처 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쉽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초막을 지으려면, 내 맘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드는 초막을 지어야 합니다. 내 생각에 주님께서 맞춰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마음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취미나 하고 싶은 것, 돈 되는 것, 세상의 것을 버리는 용기가 요구됩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황된 초막은 헐어버려야 합니다. 수고와 땀, 사랑과 정성이 깃든 초막이 필요합니다.  


떤 이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우게 되고 더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해야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고 믿음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에 따르는 행동, 실천이 부족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판공문제지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니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17,9).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부활의 영광의 신비를 깨닫기 전까지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착각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세속적인 권력의 영광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여러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 이상한 현상이나 꿈을 과장하고 떠벌립니다. 거기에는 겸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했다면 말이 아니라 삶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현상이나 사건 안에서 진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성당에는 매주 목요일 성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11시 미사에 이어 성체를 현시하고 침묵 속에 기도하며 성체강복으로 마칩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삽니다.” 그래서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 신심이 더해지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표징을 가끔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고 강조하는데도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보여 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 체험이 전부는 아니지만 성체께 대한 믿음을 더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체험한 사람은 더 자주 준비된 마음으로 미사참례와 영성체, 성체조배를 하며 나눔의 신비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체험을 했다는 것은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해 확인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제발 말하지 마라!, 먼저 말씀대로 행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더 큰 언어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시기를 청합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사랑합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임금들이 서로 계약을 맺을 때 희생 제물을 가져와 반으로 자른 뒤 계약 조건을 말하며 잘라진 제물 사이로 지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둘 가운데 누구라도 계약을 어기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른 짐승 사이를 지나가시며,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점이 발견됩니다.

계약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잘라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잘린 짐승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계약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니 창세기 15장은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약속, 곧 하느님의 언약에 관한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는 것도 아브라함이 청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계약에 당신 스스로를 옭아매시는 하느님. 여기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마지막까지 책임지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이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주님께서 변모하시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실 때, 바로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하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당신이 바로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제물이며, 당신의 피로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리라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 그분의 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이루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충실하심 덕분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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