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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마태 2,13-15.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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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12-29 ㅣ No.192



2019년 12월 29일 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마태 2,13-15.19-23)

 

집회서의 저자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상쇄하는 것이라고 한다. (집회 3,2-6.12-14)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의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권고한다. (콜로 3,12-21)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이집트로 피신하였던 요셉은 헤로데가 죽었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와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마태 2,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집회3,2~6.12~14)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3~6) 

집회서 제1부(1,1~16,23)에서 저자는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을 천명한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므로 주님을 제대로 알아 모시지 않으면 그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다(1,14).

여기서 '경외함'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실제로 저자는 먼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언급한 데(1~2장) 이어서 곧바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가르친다(3장).

오늘 성가정 축일 독서는 집회서 3장 2~6절과 12~14절의 말씀이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3)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6)

이 말씀은 탈출기 20장 12절의 십계명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공경하라'라고 번역된 '캅베드'(kabbed) '무겁다','존귀하다', '많다'는  뜻을 지닌 '카베드'(kabed) 능동형 명령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존경하라','절대적으로 존귀케 하라' 매우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카베드'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경외한다는 문맥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부모를 섬기고 공경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잘 보여준다.

사실 부모단순히 자식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매체 혹은 이 땅에서 양육하고 지원하는 물리적 후원자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바대로 부모 이 땅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권위를 지닌 존재이므로 자녀는 부모 섬기는 일을 하느님 섬기듯이 정성껏 하여야 한다.

또한 이렇게 부모를 섬기고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법까지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느님 뿐만 아니라 그 권위를 지상에서 대행하는 우리의 육신적인 아버지이신 부모를 하느님께 하듯 섬겨야 할 것이다.

 

탈출기 20장 12절에 '오래 살 것이다'라고 번역된 '야아리쿤'(yaarikun) '연장하다', '확장하다'는 뜻이 있는 '아라크'(arak)사역 능동형 동사로서 '길게 하여 주다', '연장시키다'는 뜻이다.

'아이리쿤'(airikun)는 사역형 동사이므로 '길어지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주어하느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즉, 생명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장수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생명 연장의 약속이 아니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삶이 복될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실로 하느님께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면,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인생을 또한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사도 바오로는 이 아름답고 복된 약속을 에페소서 6장 1~3절에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자녀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하신 약속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2독서(콜로3,12~21)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18~21)

콜로새서 3장 12~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린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신앙의 덕목을 밝히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콜로새서 3장 18절~4장 1절에서는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삶의 지침들 중에 특히 가까운 인간 관계에서 지켜야 할 덕목들을 제시한다.

'아내 여러분'으로 번역된 '귀나이케스'(gynaikes; wives)원형 '귀네'(gyne)'여성'이라는 뜻과 '아내'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는데, 여기서는 가정을 전제로 하므로 '아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사도 바오로는 본격적인 권면을 하기에 앞서서 아내들에게 이 권면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호격으로 새 단락을 시작한다.

 

여기서 아내의 본분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순종하십시오'로 번역된 '휘포탓세스테'(hypotassesthe; submit) 원형 '휘소탓소'(hypotasso) '~아래에'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휘포'(hypo)'두다', '놓다'를 의미하는 '탓소'(tasso)의 합성어로서 아무개의 권고나 충고, 통제에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이 단어는 군사 용어로서 상관들의 통치권에 대한 하급 군사들의 복종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적 순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심과 사랑하는 마음과 신뢰를 가지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다스리고 이끄는 권한을 남편에게 주었기 때문에 아내들은 남편들을 잘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아내의 순종하는 정결한 행위로 남편을 구원할 수도 있으므로 순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 (1베드3,1~2)

창조 질서에 따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한 창조 원리로도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대로(1코린11, 3.8.9), 여자가 남자의 보호를 받고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는 것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정의 질서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과 같은 신앙의 의무요(에페5,22~24), 하느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를 따르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아내가 더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동등한 관계에 있어서도 질서를 위해 순종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동등하시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께 순종하였듯이, 아내도 남편과 동등하지만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

아내가 남편을 잘 섬길 때 가정이 질서가 유지되고 하느님의 법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 자신의 인간적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더 높고 위대한  하느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세를 늘 갖고 있어야 한다.

아내의 순종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가장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느님 아래에서 가정을 질서있게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아내의 순종은 아름다운 가정을 세우는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남편들이 아내에 대하여 지켜야 할 본분은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십시오'로 번역된 '아가파테'(agapate) 원형 '아가파오'(agapao)어떠한 인격체를 향하여 좋아하는 마음과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서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내를 좋아하며 소중히 여기고 아내가 모든 것에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자기 희생적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agape) 동사형이 사용된 것남편이 육체적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이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부부 생활도 이러한 아가페적 사랑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동일한 옥중 서간인 에페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에 비유한다(에페5,25).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위가 동반된 자신의 전부를 희생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의 헌신적인 사랑과 아내의 순종 가정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두 요소는 상호 연관성을 가지는데, 아내가 순종하면 남편은 사랑하게 되고, 남편이 사랑하게 되면 아내는 순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 부부지켜야 할 기본적인 덕목임을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3장 18절의 아내에게 주는 권면에서와는 다르게 콜로새서 3장 19절의 남편에게 주는 권면에서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준수 명령외에 한 가지 금지 명령을 더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질게 대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피크라이네스테'(pikrainesthe; be harsh; be bitter) 원형 '파크라이노'(pikraino)화나게 하거나 괴로움에 덮여 비탄에 잠기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금지를 나타내는 부사 '메'(me)와 함께 현재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괴롭히는 것을 중단하라', '괴롭히는 습관을 버려라'라는 강한 금지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권면은 당시 사회의 분위기와 여건을 반영하여 주어졌다고 여겨진다.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그렇게 높지 않았던 당시에 아내들은 남편의 폭력과 무관심의 희생물이 되기 쉬웠으므로, 이같은 사도 바오로의 권면은 매우 신선했다고 여겨진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3장 20절, 21절에서 보다 확대된 가족 구성원으로서 부모와 자녀사이의 순종과 존중에 대하여 권면한다.

 

먼저 콜로새서 3장 20절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가 순종임을 밝힌다.

여기서 '순종십시오'로 번역된 '휘사쿠에테'(hypakuete; obey)원형 '휘파쿠오'(hypakuo) '~아래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hypo)그 자체로 이미 '듣다','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쿠오'(akuo)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를 직역하면, '아래에서 듣다'로서 '철저히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희랍 고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서 문지기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가서 그가 누구인가를 확인하여 문을 열며 영접하는 행위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콜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 단어는 문 두드린 자가 누구이고, 왜 문을 두드렸는지를 문지기가 알아내듯이 부모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아내가 남편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휫포타소'(hypotasso)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나타낸다.

원문에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보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이 훨씬 강도 높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서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학습하기를 원하신다.

가정 안에서 부모께 대한 순종궁극적인 권위이신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연결되어 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권위에 대리자들로서, 하느님께서는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통해 당신께 대한 순종을 훈련하게끔 하셨다. 이 훈련은 그들의 삶을 다스리는 절대적 권위에 대한 순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도리요 의무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셨다(에페6,1). 그러나 부모에 대하여 거부하고 불효하는 자죽음이 그 대가로 주어질 것이다(마태15,4).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녀들의 순종의 영역'무슨 일에서나'로 번역된 '카타 판타'(kata panta; in everything; in all things)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녀들이 어느 한 가지나 몇 가지만을 한정해서 선택적으로 순종하고  공경하거나 일시적이고 한정적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무제한적으로 모든 면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특히 '무슨일에서나'라는 표현은 부모의 명령이 하느님의 권위와 자신의 양심에 위배될 경우, 마음대로 부모를 대적할 것이 아니라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해야 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이것이'로 번역된 '가르'(gar)'왜냐하면 ~때문이다'라는 뜻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이것은 앞의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라는 명령이 바로 본문의 이유 때문에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원문은 '투토 가르 유아레스톤 예스틴 엔 퀴리오'(tuto gar euareston estin  en kyrio; for this is pleasing well to the Lord; for this pleases the Lord)로서 '이것은 주님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번역된다.

여기서 전치사 '엔'(en)의 용례가 문제인데, '어떤 일이~에게 일어나다' 혹은 '어떤 인격적 존재의 면전에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것은 주님 앞에서 기쁨이기 때문이다'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순종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21)

'아버지 여러분'으로 번역된 '파테레스'(pateres)원형 '파테르'(pater)는 일차적으로 '아버지'를 뜻하고, 더 나아가서는 '양육자', '보호자', '지지자'라는 뜻도 가진다.

여기서 부모 중의 한 편 양육자로서의 아버지의 의미가 아닌, 자녀에 대한 양육과 보호의 책임을 지닌 부모의 대표격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아버지 여러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자녀에 대한 양육자로서 어머니까지 포함한 부모를 가리키는 말이다(히브11,23).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것이다.

'들볶지 마십시오'라는 뜻으로 번역된 '에레티제테'(erethizete;  provoke to anger; embitter)의 원형 '에레티조'(erethizo)는  '흥분시키다', '화나게 하다'라는 뜻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리를 남용할 때 오는 부작용을 가리킨다.

자녀 하느님의 선물로서 부모자녀의 소유주가 아니라 소유주인 하느님을 대신하여 양육하는 양육자일 뿐이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에 대한 소유욕에 사로잡혀 자녀를 마치 자신의 꼭둑각시 인형처럼 다루어서는 안된다.

부모의 욕심대로 혹은 부모의 권위만을 내세워 자녀를 양육한다면, 자녀들은 상심하거나 반발하게 된다. 그래서 자녀를 성나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양육할 때 자녀들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에페6,4).

한편 '기를 꺾고 맙니다'로 번역된 '히나 메 아티모신'(hina me athymosin)'히나'(hina) 가정법' 구문으로서 목적을 나타낸다.

이것은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혹은 '기를 꺾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기를 꺾다','낙심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티모신'(athymosin) 원형 '아티메오'(athymeo; discourage) 부정 불변사 '아'(a)'열정', '열망'을 뜻하는 명사 '티모스'(thy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열정을 잃어버리다', '낙담하다','의기소침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열정과 용기를 잃은 자녀에게는 미래가 없다. 성장기에 있는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어린 격려이지, 심령을 상하게 하고 기를 꺾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자녀의 재능과 취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모들만의 일방적인 강요는 자녀를 낙담하게 만든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자녀를 전락시키거나 교육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탈란트를 발견해서 그것을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한평생 살도록 양육해야 한다.

 

  


 오늘의 묵상

한 가정의 행복은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가정의 일원들에게 헌신과 애정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행복은 서로를 사랑으로 감싸 줄 때 충만해집니다. 모든 이의 공동선을 위한 헌신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기와 그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고자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동방 박사들에게서 메시아의 탄생 이야기를 들은 헤로데 임금은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위험이 닥쳐오자 주님께서 요셉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은 일어나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서둘러 피신합니다. 부리나케 떠나면서 그동안 공들여 쌓은 성과와 집과 친구들을 모두 버립니다. 그의 행복은 아기와 그 어머니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데의 아들이 다스리는 유다로 들어가지 않고 갈릴래아의 작은 고을, 나자렛으로 갑니다. 요셉의 태도는 하느님의 부성에 대한 반영과 동참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와 그 어머니를 참으로 걱정하시고 천사를 보내시어 요셉에게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십니다.
요셉의 배려는 하느님의 배려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에게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나오고 요셉의 가정은 그분의 인도를 받습니다.가정에서 애정이 이기적으로 변하면 나쁜 감정과 관계 때문에 불목이 가정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요셉이 아기와 그 어머니와 함께하였던 것처럼, 가장 힘없는 이들, 가장 작은 이들, 가장 소홀히 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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