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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은 어디에 주어져 있을까요? 969_토미즘학습 [신학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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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0 [218.55.90.*]

2014-02-09 ㅣ No.1519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질문: 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은 어디에 주어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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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질문: 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은 어디에 주어져 있을까요?
 
질문에 대한 답변: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입니다.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여태까지 모르고 계셨더라면, 지금부터라도 부디 깨달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 주일 및 대축일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즉, 전례 성경 독서들을 학습하거나 혹은 강론 준비를 할 때에,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 또한 학습할 것을 권고하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유관 항들은, 2014년 6월 29일자 교황청 경신성사성 제공의 강론 지침서부록 I에 안내되어 있으며, 특히, 이 지침서의 맨 앞 부분에 교령(Decree)이 공표되어 있음에 주목합니다:
http://www.cbck.or.kr/book/book_list.asp?p_code=K5280&seq=40253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발행의 우리말 번역본 안내,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6일]
 
그리고 바로 위에 안내된 문헌은, 다음에 있는, 1981년 1월 21일자 교황청 경신성사성 문헌 [제목: 미사 전례 성경 총지침서(General Introduction to the Lectionary), 제2판(Second Edition)]에 이어지는 문헌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2_intro2Lectionary_1981_2nd.htm [영문본 안내 및 우리말본 시안 안내,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6일]
 
(간곡히 드리는 당부의 말씀)
국내의 사제들께서도 매 주일 및 대축일 미사 중의 강론 준비를 하실 때에, 더 훌륭한 강론을 위하여, 위의 강론 지침서의 본문을 그리고 부록 I이 제공하고 있는 매 주일 및 대축일 전례 성경 독서들에 권고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유관 항들을, 또한 습관적으로 학습하실 것을 권고드리고 그리고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이상, 당부의 말씀 끝)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각자에 대한 "복음화"/"재복음화"/"새로운 복음화" 시에 혹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그동안 노력해 왔던 바입니다: 사실, 3년을 주기로 매년 두 권씩 총 6권이 한 질을 이루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저서,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의 각 과의 끝에는 "3분 복음/교리 묵상" 이 있는데, 여기에서, 매 주일 및 대축일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즉, 매 주일 및 대축일 전례 성경 말씀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선정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의 항들을 읽고 묵상할 수 있고, 그리고 또한 이들 항들의 모체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항들로의 인터넷 접속 안내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내용의 "3분 복음/교리 묵상"은, 이미 2007년 11월부터, 즉, 2008년 대림 제1주일부터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안내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atholic_bible_study.htm <----- 이제는 좀 되었습니다만, 굿뉴스 서버 제공의 게시판들의 교체 이후에 발생하고 있는 오류(error) 때문에,이 주소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새 화면의 우측 상단에 있는 "[전체목록으로] 단추"를, 수고스럽더라도, 다시 한 번 더 클릭하십시오.
 
그리고 가톨릭출판사로부터 이 해설서들의 구입 안내는 다음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해설서들의 각 과의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일 미사 중의 전례 성경 말씀들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들을 또한 읽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 매우 충실한 양질의 해설들을 읽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를 클릭해 보십시오:
[이상,2015년 6월 22일자 내용 추가 끝]
 
특정 구절의 성경 말씀을 읽고서, 독자 본인에게 어떤 좋은 생각이 떠 오른다면,
 
성경 말씀들에 대한 해석권을 가지고 있는 거룩한 교회의 교도권이 동일한 특정 구절의 성경 말씀을 읽고서 어떠한 묵상/사변적 추론을 하였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또한 당연히 습관적으로 떠올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떠 오르는 분들께서는, 그 즉시 동일한 특정 구절에 대한 공인 해석이 주어진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항들을 찾아서 학습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3일]
그리고 특정 성경 구절들 인용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항들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출처 찾아보기" 는 다음의 주소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 폰 용 홈페이지]
[이상, 2015년 6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21일]
예를 들어,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43항, 제703항, 그리고 제1218항들은 그 성경 근거로서 창세기 1,2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43 당신 파스카 전에 예수님께서는‘다른 파라클리토’ (보호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알려 주신다. 창조 때부터 46)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 47) 이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고, 그들 안에 계시면서, 48) 그들을 이끌어“모든 진리를” (요한 16,13) 깨닫도록 가르쳐 주실 것이다. 49)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자와 성부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한‘위격’ 으로 계시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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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창세 1,2 참조.
47.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48. 요한 14,17 참조.
49. 요한 14,26 참조. 
그리고 더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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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서
 
703 하느님의‘말씀’ 과 그분의 ‘숨결’ 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의 기원이다. 55)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한 본체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께서 만물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시고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으
     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성령께서 하느님으로서 성부 안에서
     성자를 통해 만물을 유지하시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권한은 당연
     히 그분께 속한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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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시편 33(32),6;  104(103),30;  창세 1,2;  2,7;  코헬 3,20`-21;  에제 37,10 참조.
56. 「비잔틴 전례 성무일도」 , 주일 아침 기도 제2양식, 1·2후렴: Παρa κλητικη ~ı(로마, 1885), 10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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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 이 보잘것없으면서도 놀라운 피조물인 물은 태초부터 생명과 풍요의 원천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감돌고 있었다.” 고 한다. 12)

     태초에 성령께서 물 위에 머무시어 거룩하게 하는 힘을 주셨나이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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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창세 1,2 참조.
13.
「로마 미사 전례서」 , 부활 성야, 세례수 축복 기도, 표준판(바티칸, 1970), 28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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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따라서, 성경 본문의 특정한 구절에 대한 본인의 묵상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주어진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의 묵상/사변적 추론이 어떤 면에서 얼마만큼 어떻게 다른지를 깊이 성찰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16세기 중반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한 결과물로서 가톨릭 보편 교회가 처음으로 마련하였던 교리서인 "로마 교리서(트리엔트 교리서)"를 출판하였는데, 그 이후로 가톨릭 영세자가 성품성사를 받게 되면, 성품성사의 집전자이신 주교님께서 새로 사제(priest)가 되신 분께,
 
(1) 라틴어 본 대중 라틴말 성경 한 부,
(2) 가톨릭 교회 교리서, 즉 로마 교리서 한 부, 그리고
(3)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한 부를
 
선물로서 증정하셨다고 합니다.
 
질문: 그런데 왜 하필 이들 세 권을 증정하셨을까요? 전혀 궁금하지도 않으신지요?
 
참고: 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에 대한 글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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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록 1 >>
 
 
위의 글을 읽으신 교우님께서 주신 질문:
 
(2011/06/08) :
 
성 토마스 아퀴나스님의 글을 자주 접해서 봅니다 . 그런데 왜 세권을 증정하셨지요 궁금합니다 ^^
 
 
답변:
 
(2011/06/08) :
 
+ 찬미 예수님!
 
16세기 이후로 유럽 지역에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존중하며 따르지 않는, 소위 말하는 인문 철학 풍조가 세속에 널리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세속의 인문 철학적 도전으로부터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을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지속적으로 계승해 나가려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을 사제들께서 충실하게 알고 계셔야 할 필요성 때문에 그러한 선물들을 증정하셨다는 생각입니다. "로마 교리서"는 애초에 본당 사목을 하고 계신 사제들을 위하여 마련된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리서였으며, 이 교리서에 간략하게 요약되어 주어진 교리들의 버팀목으로서의 더 자세한 가톨릭 신학의 핵심 저서가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이었기에 그러한 조치를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굿뉴스 서버 제공의 신학 대전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조치만으로도 부족하였는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레오 13세 교황님께서는 토미즘(즉,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체계)을 가톨릭 보편 교회의 신학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하고자 교황으로서의 모든 권위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설명(영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있는 레오 13세 교황님의 회칙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레오 13세 교황님 이후의 교황님들도 토미즘을 지속적으로 지지하셨으며, 그리하여,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는 글의 후반부에서 언급되고 있는, 1965년 10월 28일자로 공포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령인,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온 교회의 열망」(Optatam Totius)”의 우리말 번역본 제19-20쪽에 있는 본문 중의 제16항 전반부 및 각주들인 다음의 자료를 또한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구절이 바로 위의 교령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구원의 신비를 되도록 온전히 밝히고자 신학생들은 토마스 성인을 스승으로 삼아 사변의 도움으로 그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신비들 사이의 연관성을 통찰하도록 배워야 한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자료를 보셔도 됩니다 :
 
 
특히 교황청 발 가톨릭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정의(definiiton)를 분명하게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성 토마스의 저술들을, 특히 신학 대전 포함을, 필히 제대로 학습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드린 말씀은, 제가 지난 십 수년 동안 교회의 핵심 문헌들을 학습한 결과, 2010년 1월달 쯤에 드디어 알게 된 바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드리는 김에 몇 말씀들을 추가로 드렸는데, 이들이 궁금증 해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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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을 구성하고 있는 성경(Sacred Scripture)과 성전(Sacred Tradition), 그리고 교도권(Magisterium)은 구분은 하되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한 개만을 떼어 내어 학습하는 것은, 학습자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커다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95항의 가르침입니다:
 
95 “그러므로 성전과 성서와 교회 교도직은 하느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신 계획에 따라 각기 독립되어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셋 모두 함께 고유한 방식대로 성령의 활동 아래 영혼의 구원에 효율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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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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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9일]
 
<< 부 록 2 >>
 
 
그리스도교 철학의 부흥에 관하여


영원하신 아버지1)

 

- AETERNI PATRIS -

 

교황 레오 13세, 1879-08-04

 

    1. 인간에게 구원과 신적 지혜의 빛을 전해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의 독생 성자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가서 모든 사람을 가르치라.’(마태 28,19)고 명령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막히게 위대한 선익을 가져다 주셨고, 또 당신께서 세우신 교회를 뭇 백성들의 보편적이며 최고의 스승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로써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또한 진리 안에 보존되어야 했기 때문에, 만일 주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정신을 언제까지나 비출 교도권을 설정하시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된 원천인 천상 가르침들의 결실들도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지탱하시며 그분의 사랑으로 영감 받은 교회는 이 명령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언제나 사람들을 종교심 안에서 교육하고 중단 없이 오류에 대적하고자 하였으며 그렇게 하고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각 주교들의 헌신적인 노고나 법규들과 공의회들의 가르침들, 그리고 특히 로마 교황들의 반복적인 권고들은 바로 이 점을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후계자들로서, 교황들은 형제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줄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정신이 기만당할 수 있고 신앙의 순수성이 그들 속에서 부패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헛된 철학의 속임수” 때문이기에(골로 2,8), 교회의 최고 목자들은, 진정한 학문을 최대로 증진시키면서 동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서, 모든 인문과학 특히 ‘철학’(다른 모든 학문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바로 이 철학에 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이 어디에서든 가톨릭 신앙의 규범에 따라 가르쳐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여러분께 첫 번째 서한을 보냈을 때,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앞서 바로 그것을 강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비중과 시대의 여건들이 우리에게 “철학 탐구의 방법론”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다시 의논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참으로 신앙의 유산과 인문과학의 품위 자체에 걸맞는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I

    3. 우리 시대의 서글픈 현실을 심각하게 바라보면서 공적으로든 사사롭게든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심층을 이해하고 있는 이라면, 우리에게 덮쳐 와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들고 있는 해악들의 원인이 바로 신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 관한 불경건한 이론들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불경건한 이론들은 철학 학파들에서 출발하여 사회 구석 구석까지 미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행동하는 데 이성의 선도(善導)를 받는 것은 바로 인간 본성에 속하는 일이라, 지성이 어떤 것에서 죄를 짓게 되면, 의지도 쉽게 정도(正道)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인식에 자리잡고 있는 거짓된 의견들은 인간 행위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타락시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신이 건전하다면, 곧 탄탄하고 참된 원리들에 근거하고 있다면, 인식은 사사롭게든 공개적으로든 많은 선익을 낳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4. 우리는 인간의 철학이 모든 오류를 완전히 배격하고 뿌리뽑아 버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창설되었을 때, 세상이 ‘인간적 지혜의 설득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과 그분의 능력만을 가지고’(1고린 2,4) 믿음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통해서 그 원초적인 품위가 복원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정신이 오류의 어둠을 제치고 건전해질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느님의 전능한 능력과 도움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안배하시는) 신적인 지혜의 넘치는 후의(厚意) 덕분에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도움들은 멸시되어서도 또 소홀히 취급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런 도움들 가운데 분명 가장 으뜸인 것은 바로 철학의 올바른 사용입니다. 실상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정신 속에 헛되이 이성의 빛을 밝혀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의 빛은 이성의 가치를 결코 꺼버리거나 시들게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기는 커녕 이성의 가치를 강화하고 그 힘을 증대시키고 더욱 고상한 것들에 적합하게 만들어 줍니다.

    5. 따라서 사람들을 다시 믿음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인문과학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명한 교부들이 이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옛 문헌들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실상 교부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이성에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노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학문으로 믿음은 원리와 자양분과 변호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2)
   그리고 철학은 현명한 사람들이 합당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고 보호하는 데, 그리고 자기 생도들의 정신이 계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하게 준비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옛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예비학”3) 또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서설이자 도움”4) 또는 “복음의 안내자”5) 라고 말한 것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6. 그리고 분명히 자비심 넘치는 하느님께서는, 신적인 것들에 관해서, 신앙의 빛을 통해서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없는 저 진리들뿐만 아니라 이성이 전혀 관통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들까지도, 신적인 권위로 모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오류의 감염도 없이 알려질 수 있도록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신적 계시로 얻은 (또는 신앙의 가르침에 밀접하게 연관된) 진리들 가운데 어떤 내용들은 이교 철학자들에 의해서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입증되고 검증된 적절한 논변을 통해서 알려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기”(로마 1,20) 때문이고, 또한 ‘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백성들에게 그들 가슴 속에 법의 업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해 주기’(로마 2,14-15)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교 철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던 이런 진리들을 계시를 돕는 데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지혜와 적대자들 자신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7. 얼마 전부터 도입된 이런 방법은 아주 오래된 것이고 교부들도 자주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오히려 종교적 전통들의 이 존중할 만한 증언과 수호자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려는 히브리인들에게 금과 은으로 된 그릇들과 수려한 의복들을 이집트에서 가져가라고 명령한 것이, 처음에는 일부다처제와 우상숭배의 예식에 쓰이던 것들이 이제는 그 용도를 바꿔 참된 하느님을 경배하는 데에 쓰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전통이 유사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네오체사레아의 그레고리오는,6) 오리게네스가 대단히 예리하게 그리스도교의 지혜를 옹호하고 우상 숭배를 논파하기 위해서 원수의 손에서 빼앗은 창을, 곧 이방인들의 견해에서 천재적으로 발췌한 많은 명제들을 활용했다고 격찬하고 있습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와7) 니사의 그레고리오는8) 이러한 논쟁적 방법을 칭찬했고 대 바실리오에게서도 그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예로니모는 사도들의 제자인 콰드라투스아리스테스, 유스티노, 이레네오 등의 교부들에게서 이 방법을 몹시 격찬했습니다.9) 그리고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금, 은, 옷가지들이 이집트에서부터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부드러운 박사이자 거룩한 순교자인 치프리아노가 뭐라고 말했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또 락탄시우스빅토리누스, 그리고 옥타투스힐라리오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수많은 그리스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10) 만일 자연적 이성이, 그리스도의 권능의 비추임이 있기도 전에 이토록 풍부한 가르침을 낼 수 있었다면, 구세주의 은총이 그 타고난 능력들을 회복하고 증강시킨 다음에는 훨씬 더 풍부하게 산출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철학 방식을 통해서 신앙을 향한 하나의 평탄하고 쉬운 길이 열린다는 것을 보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8. 그러나 철학을 사용하는 데에서 오는 유익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는 “값진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는 그분’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업적들을 명상하면서도 그것을 이루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지혜 13,1)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하고 놀라운 결실은 무엇보다도 이성을 통해서 포착됩니다. 이성은 어떤 절대적 신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지성을 통해서) 그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기”(지혜 13,5)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또한 그 신이 모든 완전성의 총체이기 때문에 단연 뛰어난 존재임을 입증해 줍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무한한 지혜이시기에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어져 있을 수가 없고, 또 여하한 타락한 것들이 끼여들 수 없는 완전한 정의(正義)이시기에, 신은 진실하실 뿐만 아니라 속일 수도 없고 속을 수도 없는 진리 자체이십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이성이 하느님의 말씀에 충만한 신뢰와 권위를 인정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이성은 복음의 가르침 그 자체가 처음부터 어떤 확고한 진리의 확증된 증거인 어떤 놀라운 표지들로써 명백히 드러났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꾸며낸 어떤 신화’를 믿듯이(2베드 1,16) 그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성과 판단을 완전히 합리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신적인 권위에 복속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이성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잘 표현해 주고 있듯이)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는 교회가, 그 놀라운 전파력과 그 기막힌 건강성 그리고 어디서나 다함없는 그 풍요성뿐만 아니라 보편적(catholica)인 통일성과 불굴의 안정성 때문에도, 언제까지나 신앙의 중요한 동인이며 (그의 사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논파될 수 없는 증거라고 분명히 말해 줍니다.11)

    9. 이제 이처럼 튼튼하게 기초를 다졌으니, 다시 한번 더 ‘철학’의 계속적이고 다양한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신학은 ‘참된 학문’의 형식과 특성과 본성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 학문 속에서는 모든 고상한 것들 가운데서도 천상적 가르침들의 많은 다양한 부분이 (마치 한 몸 안에서처럼) 하나로 통합되고, 따라서 그들은 적절한 제 자리에 배정되고 그들의 원리들로부터 연역되어 서로 서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또 여타의 다른 학문들이 적절하고 틀릴 수 없는 논거들로써 정당화될 것입니다.
   신앙에 관한 예리하고 광범위한 지식과 신앙의 신비 자체에 대한 더욱 투명한 지성적 인식은 결코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인식을 두고 성 아우구스티노와 다른 교부들은 격찬하고 따랐으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도 그것의 결실이 풍부하다는 점을 재확인했습니다.12) 깨끗한 삶을 살아가며 신앙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철학으로부터도 조명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그는 이러한 지식과 지성적 인식을 더욱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이 교의들에 대한 이해는 “자연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사물들의 유비(analaogia)에서 또는 이러한 신비 상호간의 연관 관계나 인간의 최종 목적과의 연관성에서 추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13)

    10. 마지막으로, 계시 진리를 면밀히 검토해서 옹호하고 감히 그 계시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하는 것은 철학의 본령(本領)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위한 성채요 종교의 강력한 요새라고 간주되는 것은 철학에게는 칭찬이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세주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권능이고 지혜인 한에서 확실히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 진리에 비겨 볼 때, 더 이상 가장 강력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거스르는 궤변주의자들의 논거를 약화시키고 진리에 대한 사기적 음모들을 폭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포도밭의 울타리이며 방벽이라고 간주되었습니다.”14)
   그리고 가톨릭을 반대하는 자들은 종교를 거슬러 논거를 펴면서 철학으로부터 끌어 낸 무기들을 자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의 옹호자들도 계시 진리를 옹호하는 데에서 철학에서 많은 것을 끌어내 이용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해치려고 인간 이성으로 고안한 적수의 무기들을 같은 이성에 입각해서 효과적으로 논박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마뉴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이방인들의 사도가 종교 논쟁에서 사용했던 형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인도자이고 강력한 설교자였던 바오로는 그리스도 사건을 변론하면서 신앙을 위한 논거를 펼치는 데에서 우연히 기록된 구절까지도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에게서, 적군의 무기를 빼앗아 오만 방자한 골리앗의 머리를 바로 적의 칼로 자르는 참다운 전법(戰法)을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15)
   그러기에 교회는 그리스도교 박사들이 철학으로부터 이러한 도움을 끌어내도록 권장할 뿐만 아니라 명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계시된 진리에 반대되는 모든 주장들은 완전히 거짓이다. 진리는 진리에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16)라고 규정한 다음, 철학 박사들에게 거짓된 주장들을 논박하는 데 열렬히 투신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 아우구스티노가 확인하고 있듯이, “만일 인간 이성이 성서의 권위에 반대된다면, 설사 그것이 아무리 날카롭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의 외양(外樣)에 속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도저히 참된 것일 수가 없습니다.”17)

    11. 그러나 철학은 동시에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값진 결실들을 낼 수도 있기 때문에 존경하는 옛 교부들이 이미 걸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장엄하고 권위 있게 선포한 길에서 절대 벗어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날카로운 지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초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많은 진리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확인했으므로, 인간 지성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분수를 넘는 것들에 대해서 감히 넘볼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곧 그 진리 자체를 감히 부인하려 들거나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측정하려 들거나 함부로 해석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초자연적 진리들을 충만하고 겸손된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천상의 진리들에 대해서 종이나 추종자처럼 봉사할 수 있고, 또 신의 은총 덕분으로 어느 정도까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인간 지성이 자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저 이론적 요점들에 관해서는, 철학이 자기의 고유한 방법과 원리, 논증 방법 등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다만 신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무모한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라면 말입니다. 계시로써 알려지게 된 것들이 절대적으로 참되고 그릇될 수 없다는 것과 신앙에 모순되는 것은 또한 올바른 이성에도 반대된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면, 가톨릭 철학자는 계시된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정되는 어떤 결론을 받아들일 경우 그것은 신앙뿐만 아니라 이성에까지도 폭력을 휘두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2. 인간 본성이 지니고 있는 힘을 정도 이상으로 과장하면서, 인간의 지성이 신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경우 자신의 자연적인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이런 굴종의 무게에 짓눌려 진리와 위대함의 절정을 향한 그의 걸음걸이가 둔해지고 지장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음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과 속임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것을 꿈꾸면서, 어리석고 배은망덕하게도, 가장 고상한 진리들을 배격하고, 시민 생활을 위한 온갖 선익이 솟아나게 되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신앙의 축복을 스스로 배척하고 있는 셈입니다. 실상 인간의 정신은 매우 협소한 테두리의 한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많은 잘못에 떨어질 수 있고 많은 것들에 대해서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13.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신의 권위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가장 확실한 교사입니다. 따라서 이 신앙을 따르는 사람은 오류의 늪에 빠지거나 불확실한 의견들의 홍수에 떠밀릴 염려가 없습니다.
   따라서 철학 탐구를 그리스도교적 신앙 추종과 결부시키는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철학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상 영혼이 받아들인 신적 진리의 빛은 지성 자체에게도 유익합니다. 신적 진리의 빛은 지성의 품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품위와 날카로움 그리고 확실성을 훨씬 더 높여 주는 것입니다.

    14. 그리고 신앙에 반대되는 진술들을 논박하고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것들을 증명하는 데에서 자기 천품의 힘을 활용할 때, 그들은 이성을 유익하고 품위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실상 첫째 경우들에서는 오류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논거들의 인위성을 간파할 수 있고, 둘째 경우에서는 그것들을 튼튼하게 증명하고 모든 현명한 이들도 납득할 만하게 만들기 위한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발견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과 실천이 정신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 힘을 증강시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필시 부조리하게도 참과 거짓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정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신앙이 이성에게 가져다 준 대단한 선익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성을 오류에서 해방시키고 보존하며 여러 가지 인식으로 풍요롭게 만든다.”18)
   그러므로 현명한 인간이라면 신앙을 이성이나 자연적 진리에 대한 원수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 크게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무지의 원인들과 오류의 홍수 가운데에서 거룩한 신앙은 그의 길을 비추고, 우정어린 별처럼 그에게 오류에 빠질 염려 없이 진리의 문을 가리켜 주기 때문입니다.

II

    15.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철학사에 눈길을 돌려본다면 방금 우리가 말한 것들이 사실로 확인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선물을 지니지 못했던 고대 철학자들은 그 가운데 가장 현명했던 이들까지도 많은 점에서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상 그들이 얼마나 자주 신의 본성에 대해서, 사물의 기원에 대해서, 세계의 운행에 대해서, 신의 미래 인식에 대해서, 악의 원리와 원인에 대해서, 인간의 궁극 목적에 대해서, 인간의 영원한 행복에 관해서, 그리고 그 밖에도 인간에게 더없이 절실한 다른 참되고 확실한 지식들에 대해서, 일부 단편적인 진리에다가 거짓되고 부조리하고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진술들을 뒤섞어 놓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신적인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적 학문들의 경우에서도 진정한 혁신가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신(1고린 1,24) 그리스도, 곧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골로 2,3) 그리스도이심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초기 교부들과 교회의 박사들은, 고대 철학자들의 작품들을 탐구하고 그들의 학문들을 계시된 가르침들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중한 자세로 거기에서 지혜롭게 진리에 따라 말해진 것들은 취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교정하거나 배척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섭리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잔혹한 폭군들을 거슬러 교회를 옹호하시고자 위대한 영혼을 지니고 있던 용맹한 순교자들을 일으켜 세우셨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거짓 철학자들과 이단적 사상가들을 거슬러 대단히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을 세우셔서 계시된 진리들을 인간 이성의 도움을 받아 옹호하도록 안배하셨기 때문입니다.

    17. 따라서 교회 공동체 초기부터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맹렬한 적대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제도를 비웃으며, 신들이 여럿이라는 것, 물질이 시작도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물들의 변천이 신의 섭리로써 지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맹목적인 힘과 숙명적인 필연성으로써 움직인다는 것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거슬러서 우리가 ‘호교론자들’(apologetici)이라고 부르는 현자들이 투쟁하였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안내를 받으면서도 인간적인 지혜의 도움도 받아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하느님만을 인정하고 찬미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권능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된 삼라만상은 그분의 지혜 때문에 힘을 얻고 고유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순교자 성 유스티노는 첫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유스티노는 가장 유명한 그리스 학원들에서 교육받았고,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진리가 오직 계시 진리를 통해서만 충만하게 도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이 계시 진리들을 열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온갖 공격으로부터 변론하였고 로마 황제들 앞에서 웅변적으로 강력하게 옹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중에 그는 계시 진리들과 그리스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들을 조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콰드라투스, 아리스티데스, 헤르미아스, 아테나고라스도 똑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같은 이유로 불굴의 순교자이자 리옹 교회의 교부였던 성 이레네오도 버금가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레네오는 영지주의자들 덕분에 로마 제국 내에 퍼지게 되었던, 동방으로부터 유래된 타락한 이론들을 논박하면서 (성 예로니모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개의 이단들의 기원과 그것들이 어떤 원천으로부터 솟아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19)

    18. 또한 아무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논박서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역시 성 예로니모는 격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박식하게 논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철학으로부터 원용되지 않은 논술들이 하나라도 있었단 말입니까?”20) 그는 놀랄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철학사를 위해, 철학적 논변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그리고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모색하기 위해 많은 것들이 유익하다는 점을 논증했습니다. 그가 다져 놓은 길을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의 그의 교육 때문에 유명한 오리게네스가 뒤따랐습니다. 그는 그리스 사상과 동방 사상에 밝은 사람으로서 상당량의 박학한 저술들을 통해서 놀랄 만큼 적절하게 성서들을 주해하고 거룩한 가르침들을 옹호하는 논술을 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에 전혀 아무런 오류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 진리의 확실성을 증대시키는 수많은 논증들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성서의 권위에 입각해서 논박했습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을 거슬러서는 무기를 바꾸어 철학을 가지고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을 날카롭고 박식하게 논박하면서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가르침에서나 탐구에서도 그대들은 우리와 견줄 수 없다.”21)고 선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을 거슬러 저술들을 남긴 아르노비오와 「신의 제도」를 쓴 락탄시우스도 대단한 설득력과 논술력으로 사람들이 가톨릭 지혜의 가르침과 계율을 받아들이도록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수들을 논파하는 데에 플라톤 학파에서 흔히 하듯이 철학을 전도(顚倒)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무기를 가지고 출발해서, 그리고 철학자들 상호간의 불일치를 하나 하나 지적하면서 논술했습니다.22) 그리고 위대한 아타나시우스와 설교가들의 왕인 크리소스토모는 우리에게 영혼과 신의 속성 그리고 다른 매우 중대한 문제들에 관한 저술들을 남겼는데, 이들은 일반적인 평에 의하면 이 저술들만한 깊이와 방대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들을 하나 하나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밖에도 대 바실리오와 두 명의 그레고리오를 거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온갖 문화의 중심이던 아테네에서 철저한 철학 교육을 받았고, 이단자들을 논박하고 열성적으로 충실히 준비한 저 가르침들을 가지고 신자들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노였습니다. 그는 대단한 천품을 지니고 거룩한 학문과 세속 학문에 능통한 이로서 지극한 신앙심과 최고의 지성으로 자기 시대의 모든 오류들을 강력히 타도했습니다. 그가 건드리지 않은 철학의 분야들이 과연 있었습니까? 아니, 그가 신도들에게 신앙의 깊은 신비들을 설명하고 그것들을 적수들의 어리석은 공격들로부터 옹호할 때라든가, 아니면 아카데미 학도들과 마니케이파들을 무색하게 하며 인간의 학문들의 토대와 강건성을 구할 때, 또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저 악의 근거와 기원과 원인들을 추적할 때에도 대단한 열성을 가지고 철저히 심화시키지 않은 적이 과연 있었습니까? 천사, 영혼, 인간 정신, 의지, 자유 의지, 종교, 천상 행복, 시간, 영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변적 물체들의 본성 등에 대해서 그는 얼마나 정교하게 논했던 것인지요!
   그 뒤, 동방에서는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바실리오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뒤를 따라, 그리고 서방에서는 보에시우스성 안셀모성 아우구스티노의 뒤를 따라 철학의 유산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19. 그리고 ‘스콜라 학자들’이라고 불리는 중세의 박사들은 대단한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곧 교부들의 방대한 저술들 속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풍부한 가르침들을 끈기를 가지고 수집해서 후대인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거의 한 곳에 모아 놓았던 것입니다.

    20. 그러나,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스콜라 학의 기원과 특성이 무엇이고 또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선임자 식스토 5세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학문의 정신과 지혜와 지성을 주실 수 있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교회를 필요에 따라 새로운 축복들로 채우시며 새로운 힘으로 강화시키시는 그분의 신적인 선물 덕분에,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들인 우리 교부들은 스콜라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특별히 이 학부(파리 대학 신학부)의 명석한 교수인 천사적인 성 토마스와 세라핌적인 성 보나벤투라라는 두 영광스러운 박사들은 ……대단한 천품과 항구한 탐구 그리고 철저한 수고로써 이 스콜라 학을 발전시키고 해명하여 후대인들에게 매우 조직적이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명료하게 해명된 스콜라 학을 남겨 주었습니다. 실제로 성서, 교황들, 교부들 그리고 공의회 등의 대단히 풍요로운 원천들에서 유래되는 대단히 건강한 학문 인식과 그 수행은 성서 자체의 순수하고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서나, 교부들을 확고한 확실성과 유용성을 가지고 읽고 이해하는 데에서, 그리고 오류와 이단들을 가려 내고 논박하는 데에서 교회에 언제나 크나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표현한 바 있는 저 위험한 날들이 이미 도래한 최근에는, 신을 모독하는 교만하고 현학적인 사람들은 점점 더 악화일로를 치달아 스스로 오류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오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을 재확인하고 이단적 가르침들을 타도하는 것은 더없이 필요하고 절실합니다.”23)

    21. 이 말씀들은 다만 스콜라 학에만 해당되는 듯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철학과 그 공로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콜라 철학을 진리의 원수들에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로 만든 것은 바로 두 성인의 저 명석한 천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식스토 5세께서 앞의 글에 덧붙이고 계시듯이 “사물들과 그 원인들의 적절한 연계, 전열을 갖춘 병사들과도 같은 질서와 배열, 맑고 투명한 정의와 구분들, 튼튼한 논거, 정밀한 토론들을 통해서,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이 뚜렷이 구분되고 현란하게 치장한 이단자들의 거짓말이 가면이 벗겨져 알몸이 드러나듯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24) 이 놀랍고 찬란한 천품들은, 스콜라 학자들이 신학적 토론에서도 적절한 자리에서 즐겨 사용하였듯이, 오늘날도 철학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신적인 지식을 긴밀한 연관 속에 결합시킨 것은 온통 스콜라 학자들의 고유한 공로이기 때문에, 그들의 단연 뛰어난 신학은 확실히, 만일 불완전하고 불비(不備)한 철학을 사용했더라면 사람들에게서 그토록 많은 칭송과 영예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모든 스콜라 박사들 가운데에서도 분명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단연 두드러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스콜라 학의 왕자이며 스승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는 가예타노가 말하고 있듯이 “고대의 거룩한 박사들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어떤 점에서는 그 모든 이들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25) 성 토마스는 그들의 가르침들을 마치 흩어진 지체들을 한 몸으로 모으듯 수집해서 놀랄 만한 방식으로 배열했고 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보충 완성시켰습니다. 그러기에 가톨릭 교회의 영광이며 비상한 보루라고 평가받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일생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 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높은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다루지 않은 철학의 분야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학문의 규범들, 신과 영적 실체들, 인간, 감각적 사물들, 그리고 인간의 활동들과 그 원리들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다루었으며, 그래서 더 이상 방대한 어떤 문제들의 집약이나 더 적합한 문제 배열, 더 나은 방법이나, 더 이상 탄탄한 어떤 원리나 논증, 더욱 명쾌한 논술 방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여하한 문제에 대해서도 토마스보다 더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3. 뿐만 아니라 이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는 철학적인 결론들을 사물들의 내밀한 근거들과 보편적 원리들 속에서 명상했습니다. 그 속에는 거의 무한한 진리의 싹들이 담겨 있었고, 따라서 적절한 때가 되면 후대의 스승들에 의해서 싹이 트고 풍부한 결실들을 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철학 방법을 오류들을 논박하는 데에도 적용하였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저 모든 과거의 오류들을 논파할 수 있었고 또 후대에 반복적으로 솟아날 오류들을 격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성과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를 조화시켜 각각 자신의 권리와 품위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은 성 토마스의 날개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더할 수 없는 위대함의 절정에 오를 수 있었고, 신앙도 이미 성 토마스와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크고 강력한 도움을 이성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4. 이런 이유들 때문에 특별히 지난 과거에 신학과 철학의 가장 지혜롭고 저명한 사람들은 성 토마스의 불후의 작품들을 면밀하게 연구했던 것이며, 거기서 문화 유산과 방법뿐만 아니라 내밀한 자양분까지 얻기 위해서 모두 그의 천사적 지혜에 대한 탐구에 매진하였던 것입니다.
   거의 모든 수도회 창립자들은 자기 회원들에게 성 토마스가르침을 연구하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명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이토록 위대한 스승에게서 조금도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 최고의 스승 때문에 영광을 누리는 도미니코회는 말할 것도 없고, 베네딕도회, 가르멜회, 아우구스티노회, 예수회와 다른 많은 수도회들이 이런 비슷한 회헌 규정을 정했습니다.
   지금 저의 생각은 큰 기쁨으로 파리, 살라망카, 알칼라, 두애, 툴루즈, 루뱅, 파도바, 볼로냐, 나폴리, 코임브라 등 한때 유럽에서 피어났던 저 유명한 대학과 학교들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 학원들의 명성은 세기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커졌고, 그들이 토론한 중대한 문제들과 결론들은 언제나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습니다. 저 위대한 인간적 지혜와 문화의 중심지들에서 성 토마스는 왕자로 군림하고 있었고, 거기에 살던 모든 정신들, 곧 교수와 학생들이 오직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르침과 권위에 의지함으로써 충만한 지적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날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25. 그러나 우리가 더 중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임 교황들께서 한결같이 토마스 데 아퀴노의 지혜를 격찬하며 증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실상 클레멘스 6세(칙서 In Ordine), 니콜라오 5세(1451년 도미니코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네딕토 13세(칙서 Pretiosus)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 전체가 그의 놀라운 가르침을 통해서 조명되었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오 5세께서는, 이 가르침으로 속임수가 노출된 이단들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으며, 세상 전체가 페스트와도 같은 오류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클레멘스 12세(칙서 Verbo Dei)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가 성 토마스의 저술들에서 수많은 선익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게는 그레고리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와 같은 최고의 교회 박사들에게 돌리는 것과 똑같은 영예를 마땅히 드려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황들께서도 성 토마스를 안전하게 따를 수 있는 스승과 모범으로 대학들과 고등학교에 추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확인하려면, 복자 우르바노 5세께서 툴루즈 대학에서 행한 다음의 강연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복된 토마스의 가르침을 진실되고 가톨릭적인 것으로 따르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데 전심전력할 것을 간절히 바라며 명하는 바입니다”(1368/8/3 헌장 V). 그리고 인노첸시오 12세께서는 루뱅에서(1694/2/6 서한), 베네딕토 14세께서는 그라나다의 디오니시아노 학원에서(1752/8/12 서한) 우르바노 5세의 모범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관한 교황들의 평가 가운데서도 인노첸시오 6세의 증언은 그 백미(白眉)입니다. “성 토마스의 가르침은 (성서를 예외로 친다면) 다른 어떤 가르침 앞에서도 단연 할 말을 가지고 있으며, 힘찬 논증력과 명제들의 진리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로부터 일탈하는 법이 없었지만, 반대로 거기에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들은 언제나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웠습니다.”26)
   (그 속에서는 전세계에서 수집된 지혜의 꽃들이 번득이는) 세계 공의회들은 언제나 다투어 특별히 성 토마스의 탁월함을 강조했습니다. 리옹 공의회, 비엔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바티칸 공의회성 토마스는 말하자면 ‘참석’을 했고, 주제 토론과 선언문들을 언제나 ‘주재’하여 그리스인들과 이단자들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을 거슬러 불굴의 투지로 대적했으며, 결국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최고의 영예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들이 중앙 제단 위에 성서와 교황들의 선언문들 사이에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을 놓아 두고 의견과 근거와 해답들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톨릭 교회의 박사들에도 허용된 적이 없는 유독 토마스만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26. 마지막으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이 위대한 스승은 가톨릭을 반대하는 적수들에게서도 찬탄과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상 이단적인 분파의 우두머리들 가운데는, 만일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르침만 제거할 수 있다면 자기들은 “어렵지 않게 다른 모든 가톨릭 박사들을 대적해서 격파하고 가톨릭 교회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Bezza-Bocerus). 물론 어림도 없는 헛된 꿈이었지만, 그들이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사실만큼은 그리 헛된 것이 아닌 셈입니다.

    27.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이런 사실들과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선임자들이 특별히 사랑했던 저 가르침의 선익과 강력한 힘과 놀라운 유익에로 눈길을 던질 때, 언제 어디서나 그의 가르침들이 마땅히 존중된 것은 아니라는 슬픈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의 일상 경험, 대단히 뛰어난 지성인들의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간곡한 권유 등은 언제까지나 스콜라 철학을 선호해 왔던 것입니다.

    28. 그런데 여기 저기서 옛 가르침 대신에 새로운 철학 방식이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철학들에게서 교회와 시민 사회가 더욱 갈구했을 건전하고 값진 결실들을 얻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16세기의 쇄신가들의 노력 때문에 신앙과는 전혀 무관하게 철학을 하고자 했고, 온갖 구실과 자유를 표방하며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이론들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갖가지 철학하는 방법들이 생겨났고, 인간 인식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조차도 서로 모순되는 갖가지 주장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잡다한 생각들로부터 쉽게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로 넘어가기 일쑤였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의심에서부터 오류로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29. 그리고 사람들은 남들을 모방하기 좋아하는 법이므로, 이런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은 가톨릭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번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것들로 옛것을 증대시키고 완성하려 들기보다는 옛 지혜의 유산을 치워 버리고 오직 새것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건전한 자세일 수 없으며 인류의 학문적 유산을 훼손시키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실상 이 복잡다단한 이론들은 어떤 개별 스승들의 권위와 자의(恣意)에 입각하고 있기에 토대가 부실하며, 옛 철학처럼 확실하고 튼튼한 철학을 구성하지 못하고 기껏 얄팍하고 혼란스러운 이론이나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만일 적수들의 충동을 이겨 내는 데 조금밖에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 속에 그 원인과 탓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능력과 박학과 풍요로운 새로운 발견들을 가지고 철학 탐구를 하려는 학자들을 막으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권장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과 박학 속에 철학적 활동 전체나 그 대부분을 다 투자하는 것은 최대의 신중을 다해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신학은 상당한 학식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조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 속에 이성과 계시가 결합되어 계속해서 “신앙의 무적의 보루”27)일 수 있도록 스콜라 학자들처럼 진지한 방식으로 취급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30. 그러므로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철학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데 아퀴노의 놀라운 가르침을 그 순수한 광채 속에서 회복시켜야 한다고 믿고 헌신적으로 투신하였습니다.
   우리는 기쁘게도 여러분의 수도회의 적지 않은 회원들이 같은 지향을 가지고 기꺼이 같은 길에 투신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그런 방향으로 끊임없이 매진해 줄 것을 당부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 ‘천사적 박사’라는 수원(水源)으로부터 영구히 풍부하게 흘러 넘치는 가장 순수한 지혜의 강물을 온 세계 젊은이들에게 넉넉하게 마시게 하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바람직한 일은 없다는 점을 모든 이에게 확실하게 일러 두는 바입니다.

III

    31.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거짓된 학문의 기교와 교활함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기를 드는 것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젊은이들, 특히 교회의 희망으로 자라나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떤 강하고 튼튼한 가르침으로 양육되어 강건하고 잘 무장됨으로써 종교의 근거들을 효과적이고 지혜롭게 다루게 되고, 또 사도들이 가르치고 있는 대로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1베드 3,15), 또한 반대자들을 건전한 가르침으로 안내하고 설득시킬(디도 1,9) 채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32. 그리고 신앙에서 멀어져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미워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직 이성만을 유일한 스승이며 안내자로 삼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으로써 그들을 치유하고 은총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하느님의 초자연적 도우심 다음으로는 교부들과 스콜라 학자들의 건전한 가르침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튼튼한 토대, 그 신적인 기원, 그 확실한 진리, 그 증명 논거, 인류에게 가능해진 은혜 그리고 이성과의 완전한 조화 등을 증명하였고, 또 너무도 명료하고 강력했기 때문에, 주저하는 자들과 허풍떠는 자들까지도 회심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타락한 이론들의 해악 때문에 우리가 모두 목격하고 있듯이 매우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가정과 시민 사회조차도, 만일 대학과 학교들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가장 일치되는 건전한 교육이 시행되기만 했더라면 분명 훨씬 더 평온하고 확실한 기반 위에 서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가장 건전한 가르침을 토마스 데 아퀴노의 작품들 속에서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방종으로 변형되고 있는 자유의 진정한 본성, 법칙과 그 힘, 자명한 원리들의 영역, 더 높은 권위에 대한 마땅한 복종, 인간 상호간의 사랑 등에 대한 토마스의 가르침들은 사회 질서의 평온과 대중의 안녕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새로운 법의 원리들을 전복시킬 수 있는 대단히 강력하고 꺾일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33.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든 학문은 우리가 제안한 철학의 쇄신으로부터 진보의 희망을 품어야 하고 대단한 도움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들과 인문 과학들은 다른 여타 학문들의 교정자인 철학으로부터 언제나 지혜로운 규범과 타당한 전개 방식을 얻어 내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보편적 원천과도 같은 철학으로부터 여타 학문들을 양육하는 정신이 흘러 나옵니다. 그리고 인문 과학들은 철학의 특전이 건전하고 그 판단이 타당할 때 활짝 피어났지만, 철학이 쇠퇴하고 오류와 어리석음에 빠졌을 때에는 무시되고 거의 잊혀졌다는 것은 사실과 경험이 입증해 주는 바입니다.

    34.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단한 영예를 누리고 있고 그 찬란한 많은 발견들이 어디서나 커다란 찬탄을 자아내는 물리학은 옛 철학을 쇄신한다고 해서 전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리학을 연구해서 결실을 내고 그것을 증진시키려면 단순한 사실 관찰이나 자연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모자라고, 오히려 그 사실들이 확실할 때 더욱 높은 곳으로 고양되어 근면하게 사물들의 본성을 인식하며, 그것들이 복종하는 법칙들과 그 질서, 다양성 속의 통합, 그리고 다양성 속에서의 상호 유사성을 산출하는 원리들을 탐구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탐구를 위해서 스콜라 철학이 적합한 방법으로 교육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많은 힘과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는 정말 놀랄 정도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알아 두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곧 얼마나 부당하게 스콜라 철학에게 진보나 자연 과학의 증진에 대하여 반동이라는 비난이 가해지고 있는지 하는 사실 말입니다. 실상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부들의 사상을 따라 늘 인간학 분야에서, 인간 지성은 물질적 사물들에서부터 비물질적이고 영적인 실재들의 인식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곧 그들은 철학자에게 자연의 본성들을 꾸준히 탐구하고 그 탐구에 오래 머무르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들은 자기들의 예로써 재확인했습니다. 실상 성 토마스성 알베르투스 마뉴스 그리고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은 철학적 사변에만 투신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물들의 인식에도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아니 적지 않은 숫자의 스콜라 학자들이, 이 영역에서 근대인들이 인정하고 진리에 일치된다고 선언하는 독창적인 가르침과 해결책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많은 저명한 물리학 교수들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근대 물리학의 확실하고 검증된 결론들과 스콜라 학의 철학적 원리들 사이에는 아무런 실제적 대립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지혜롭게 말해지고 어느 누가 했든지 유익하게 발견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기꺼이 그리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바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대들 존경하는 모든 형제에게 성 토마스의 거룩한 가르침을,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고 영예스럽게 만들며 사회의 선익이나 모든 학문을 증진시키는데 다시 활용하고 또 그것을 최대한 널리 확산시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권고하는 바입니다.

    35. 우리는 특별히 성 토마스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스콜라 학자들에게서 대단히 미묘하게 탐구되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가르쳐졌다면, 그리고 현대의 어떤 가르침들과 충만히 양립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 있다면, 또는 마지막으로 어떤 이유로 받아들여질 가치가 없는 어떤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따르라고 제시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36. 특별히 신중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대들이 뽑은 스승들은 자기 제자들의 정신이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르침으로 관통될 수 있도록 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의 가르침이 다른 모든 이론에 견주어 얼마나 튼튼하고 월등한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대들이 설립한 (또는 설립할) 학부들은 그의 가르침을 해설하고 옹호하며 흔한 오류들을 논박하는 데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들은 정통 가르침 대신에 이런 저런 허풍떠는 이론들에 말려들거나, 진정한 가르침 대신에 타락한 이론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성 토마스의 지혜가 그 원천으로부터, 또는 적어도 뛰어난 지성들의 확실하고 한결같은 판단에 따르면 그 원천에서 흘러 나와 아직도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저 강물들로부터 탐구될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원천에서 나왔다고들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질적이고 해로운 저 시냇물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을 멀리 떼어 놓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37. 그렇지만,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우리의 이런 착수가 성서에서 학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그분(1열왕 2,3)께 조율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헛된 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에서는 “위로부터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이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에게서”(야고 1,17) 우리에게 오게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야고 1,5).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우리는 ‘천사적 박사’를 모범으로 삼는 바입니다. 실상 그는 주님께 달려가 기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탐구와 노력의 결실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겸손하고 항구한 기도로써 교회의 자녀들을 학문과 지혜의 정신으로 비추시고 그들의 정신을 열어 주시어 지혜를 깨닫게 해 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하기로 합시다.
   그래서 그대들과 하느님 사이에 ‘상지(上智)의 좌(座)’라 불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중개자로 삼아, 선하신 하느님의 더없이 찬란한 결실들을 얻게 되기를 빕니다. 또한 그대들의 거룩한 변호인들로서 정결한 배우자 요셉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와 바오로를 모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오류로 물든 타락한 세상을 진리로 쇄신시키고 세상을 천상 지혜의 빛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도움을 열렬히 희망하며 그대들의 사목적 헌신에 신뢰하면서, 천상 선물들의 주인이시고 우리 복의 증인이신 주님 안에서 그대들에게 사도적 축복을 보내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대들과 함께 그대들에게 맡겨진 모든 성직자와 백성들에게도 같은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2년
1879년 8월 4일
교황 레오 13세

 
1.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의 원 제목은 De philosophia christiana ad mentem sacti Thomae Aquinatis Doctoris Angelici in scholis catholicis instauranda(가톨릭 학교들에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정신에 따라 교육되어야 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에 관해서)이고 교황청 문헌집 ASS(Acta Sanctae Sedis) 12(1978), 97-115면에 실려 있다. 이 회칙의 영어 번역은 다음 책의 한 '부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R.Chervin-E. Kevane, Love of Wisdom.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Philosophy,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8, 444-457.
2. 성 아우구스티노, 「삼위일체론」(De Trinitate), XIV, i, 3(PL 42, 1037).
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Stromata I, 16; VII, 3(PG 8, 795; 9, 426).
4. 오리게네스, Epistola ad Gregorium(PG 11, 87-91).
5.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Stromata I, 5(PG 8, 718-719).
6. 네오체사레아의 그레고리오, Orat.paneg.ad Origen, 14(PG 10, 1094).
7.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Carm. i, Iamb.3.
8.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Vita Moysis(PG 44, 359).
9. Epistola ad Magnum, 4(PL 22, 667).
10. 성 아우구스티노, De doctrina christiana I, ii, 40(PL 34, 63).
11.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Dei Filius, c.3.
12. Dei Filius, c.4.
13. 같은 곳.
14.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Stromata 1, 20(PG 8, 818).
15. 성 히에로니무스, Epistola ad Magnum, 2(PL 22, 666).
16. 칙서 Apostolici regiminis.
17. 성 아우구스티노, Epistola 143(al.7) ad Marcelinum, 7(PL 33, 589).
18. Dei Filius, c.4.
19. 성 히에로니무스, Epistola ad Magnum, 4(PL 22, 667).
20. 같은 곳.
21. 테르툴리아누스, 「호교론」(Apologetica) 46(PL 1, 573).
22. 락탄시우스, Institutiones divinae, vii, 7(PL 6, 759).
23. 식스토 5세, 칙서 Triumphantis(1588).
24. 식스토 5세, 칙서 Triumphantis(1588).
25. 가예타노, In II-II Summa Theologiae, q.148, a.4: Ed. Leoninina, vol. X, n.6, 174면.
26. 인노첸시오 6세, Sermo de sancto Thoma.
27. 식스토 5세, 칙서 Triumphantis.

* 이 글은 [신앙과 이성](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99)의 부록으로 실려 있다.

====================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16일]
 
<< 부 록 3 >>
 
게시자 주: 다음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10년 6월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에 대하여 세 번에 걸친 강론 말씀들입니다:
 
첫 번째 강론:
 
두 번째 강론:
 
세 번째 강론: 
 
참고: 더 나아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에서 주어진, 잘 정돈된, 2007년 3월 7일부터 2011년 4월 13까지, 108번에 걸친,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의 전기 목록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s://catechesisofthepopes.wordpress.com/major-themes/the-lives-of-the-saints/audiences/
[이상, 2015년 2월 16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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