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은 어디에 주어져 있을까요? 969_토미즘학습 [신학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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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0 [218.55.90.*] 2014-02-09 ㅣ No.1519 (십자성호를 그으며)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질문: 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은 어디에 주어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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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 찬미 예수님!
질문: 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은 어디에 주어져 있을까요? 질문에 대한 답변: 바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입니다.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여태까지 모르고 계셨더라면, 지금부터라도 부디 깨달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 주일 및 대축일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즉, 전례 성경 독서들을 학습하거나 혹은 강론 준비를 할 때에,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 또한 학습할 것을 권고하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유관 항들은, 2014년 6월 29일자 교황청 경신성사성 제공의 강론 지침서의 부록 I에 안내되어 있으며, 특히, 이 지침서의 맨 앞 부분에 교령(Decree)이 공표되어 있음에 주목합니다:
http://www.cbck.or.kr/book/book_list.asp?p_code=K5280&seq=40253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발행의 우리말 번역본 안내,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6일] 그리고 바로 위에 안내된 문헌은, 다음에 있는, 1981년 1월 21일자 교황청 경신성사성 문헌 [제목: 미사 전례 성경 총지침서(General Introduction to the Lectionary), 제2판(Second Edition)]에 이어지는 문헌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2_intro2Lectionary_1981_2nd.htm [영문본 안내 및 우리말본 시안 안내,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6일]
(간곡히 드리는 당부의 말씀)
국내의 사제들께서도 매 주일 및 대축일 미사 중의 강론 준비를 하실 때에, 더 훌륭한 강론을 위하여, 위의 강론 지침서의 본문을 그리고 부록 I이 제공하고 있는 매 주일 및 대축일 전례 성경 독서들에 권고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유관 항들을, 또한 습관적으로 학습하실 것을 권고드리고 그리고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이상, 당부의 말씀 끝)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각자에 대한 "복음화"/"재복음화"/"새로운 복음화" 시에 혹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그동안 노력해 왔던 바입니다: 사실, 3년을 주기로 매년 두 권씩 총 6권이 한 질을 이루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저서,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의 각 과의 끝에는 "3분 복음/교리 묵상" 이 있는데, 여기에서, 매 주일 및 대축일 제1독서, 제2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 즉, 매 주일 및 대축일 전례 성경 말씀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선정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의 항들을 읽고 묵상할 수 있고, 그리고 또한 이들 항들의 모체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항들로의 인터넷 접속 안내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내용의 "3분 복음/교리 묵상"은, 이미 2007년 11월부터, 즉, 2008년 대림 제1주일부터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안내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atholic_bible_study.htm <----- 이제는 좀 되었습니다만, 굿뉴스 서버 제공의 게시판들의 교체 이후에 발생하고 있는 오류(error) 때문에,이 주소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새 화면의 우측 상단에 있는 "[전체목록으로] 단추"를, 수고스럽더라도, 다시 한 번 더 클릭하십시오.
그리고 가톨릭출판사로부터 이 해설서들의 구입 안내는 다음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해설서들의 각 과의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일 미사 중의 전례 성경 말씀들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들을 또한 읽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 매우 충실한 양질의 해설들을 읽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를 클릭해 보십시오:
[이상,2015년 6월 22일자 내용 추가 끝] 특정 구절의 성경 말씀을 읽고서, 독자 본인에게 어떤 좋은 생각이 떠 오른다면,
성경 말씀들에 대한 해석권을 가지고 있는 거룩한 교회의 교도권이 동일한 특정 구절의 성경 말씀을 읽고서 어떠한 묵상/사변적 추론을 하였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또한 당연히 습관적으로 떠올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떠 오르는 분들께서는, 그 즉시 동일한 특정 구절에 대한 공인 해석이 주어진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항들을 찾아서 학습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23일] 그리고 특정 성경 구절들 인용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항들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출처 찾아보기" 는 다음의 주소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 용 홈페이지]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 폰 용 홈페이지]
[이상, 2015년 6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3월 21일]
예를 들어,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43항, 제703항, 그리고 제1218항들은 그 성경 근거로서 창세기 1,2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43 당신 파스카 전에 예수님께서는‘다른 파라클리토’ (보호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알려 주신다. 창조 때부터 46)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 47) 이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고, 그들 안에 계시면서, 48) 그들을 이끌어“모든 진리를” (요한 16,13) 깨닫도록 가르쳐 주실 것이다. 49)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자와 성부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한‘위격’ 으로 계시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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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창세 1,2 참조.
47.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48. 요한 14,17 참조. 49. 요한 14,26 참조. 그리고 더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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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서 703 하느님의‘말씀’ 과 그분의 ‘숨결’ 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생명의 기원이다. 55)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한 본체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께서 만물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시고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으
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성령께서 하느님으로서 성부 안에서 성자를 통해 만물을 유지하시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권한은 당연 히 그분께 속한다. 56) -----
55. 시편 33(32),6; 104(103),30; 창세 1,2; 2,7; 코헬 3,20`-21; 에제 37,10 참조. 56. 「비잔틴 전례 성무일도」 , 주일 아침 기도 제2양식, 1·2후렴: Παρa κλητικη ~ı(로마, 1885), 10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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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 이 보잘것없으면서도 놀라운 피조물인 물은 태초부터 생명과 풍요의 원천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감돌고 있었다.” 고 한다. 12) 태초에 성령께서 물 위에 머무시어 거룩하게 하는 힘을 주셨나이다. 13) -----
12. 창세 1,2 참조.
13. 「로마 미사 전례서」 , 부활 성야, 세례수 축복 기도, 표준판(바티칸, 1970), 283면. -----
(이상, 발췌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따라서, 성경 본문의 특정한 구절에 대한 본인의 묵상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주어진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의 묵상/사변적 추론이 어떤 면에서 얼마만큼 어떻게 다른지를 깊이 성찰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16세기 중반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한 결과물로서 가톨릭 보편 교회가 처음으로 마련하였던 교리서인 "로마 교리서(트리엔트 교리서)"를 출판하였는데, 그 이후로 가톨릭 영세자가 성품성사를 받게 되면, 성품성사의 집전자이신 주교님께서 새로 사제(priest)가 되신 분께,
(1) 라틴어 본 대중 라틴말 성경 한 부,
(2) 가톨릭 교회 교리서, 즉 로마 교리서 한 부, 그리고
(3)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한 부를
선물로서 증정하셨다고 합니다.
질문: 그런데 왜 하필 이들 세 권을 증정하셨을까요? 전혀 궁금하지도 않으신지요?
참고: 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에 대한 글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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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 록 1 >>
위의 글을 읽으신 교우님께서 주신 질문:
(2011/06/08) :
성 토마스 아퀴나스님의 글을 자주 접해서 봅니다 . 그런데 왜 세권을 증정하셨지요 궁금합니다 ^^
답변:
(2011/06/08) :
+ 찬미 예수님!
16세기 이후로 유럽 지역에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존중하며 따르지 않는, 소위 말하는 인문 철학 풍조가 세속에 널리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세속의 인문 철학적 도전으로부터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을 온전하게 보존하면서 지속적으로 계승해 나가려면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을 사제들께서 충실하게 알고 계셔야 할 필요성 때문에 그러한 선물들을 증정하셨다는 생각입니다. "로마 교리서"는 애초에 본당 사목을 하고 계신 사제들을 위하여 마련된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리서였으며, 이 교리서에 간략하게 요약되어 주어진 교리들의 버팀목으로서의 더 자세한 가톨릭 신학의 핵심 저서가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이었기에 그러한 조치를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굿뉴스 서버 제공의 신학 대전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조치만으로도 부족하였는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레오 13세 교황님께서는 토미즘(즉,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체계)을 가톨릭 보편 교회의 신학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하고자 교황으로서의 모든 권위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설명(영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있는 레오 13세 교황님의 회칙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레오 13세 교황님 이후의 교황님들도 토미즘을 지속적으로 지지하셨으며, 그리하여,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는 글의 후반부에서 언급되고 있는, 1965년 10월 28일자로 공포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령인,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온 교회의 열망」(Optatam Totius)”의 우리말 번역본 제19-20쪽에 있는 본문 중의 제16항 전반부 및 각주들인 다음의 자료를 또한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구절이 바로 위의 교령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구원의 신비를 되도록 온전히 밝히고자 신학생들은 토마스 성인을 스승으로 삼아 사변의 도움으로 그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신비들 사이의 연관성을 통찰하도록 배워야 한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자료를 보셔도 됩니다 :
특히 교황청 발 가톨릭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정의(definiiton)를 분명하게 알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성 토마스의 저술들을, 특히 신학 대전 포함을, 필히 제대로 학습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드린 말씀은, 제가 지난 십 수년 동안 교회의 핵심 문헌들을 학습한 결과, 2010년 1월달 쯤에 드디어 알게 된 바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드리는 김에 몇 말씀들을 추가로 드렸는데, 이들이 궁금증 해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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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전승(Apostolic Tradition)을 구성하고 있는 성경(Sacred Scripture)과 성전(Sacred Tradition), 그리고 교도권(Magisterium)은 구분은 하되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한 개만을 떼어 내어 학습하는 것은, 학습자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커다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95항의 가르침입니다:
95 “그러므로 성전과 성서와 교회 교도직은 하느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신 계획에 따라 각기 독립되어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셋 모두 함께 고유한 방식대로 성령의 활동 아래 영혼의 구원에 효율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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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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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4년 2월 9일]
<< 부 록 2 >> 출처 2: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그리스도교 철학의 부흥에 관하여
- AETERNI PATRIS -
교황 레오 13세, 1879-08-04
1. 인간에게 구원과 신적 지혜의 빛을 전해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의 독생 성자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가서 모든 사람을 가르치라.’(마태 28,19)고 명령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막히게 위대한 선익을 가져다 주셨고, 또 당신께서 세우신 교회를 뭇 백성들의 보편적이며 최고의 스승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정신이 기만당할 수 있고 신앙의 순수성이 그들 속에서 부패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헛된 철학의 속임수” 때문이기에(골로 2,8), 교회의 최고 목자들은, 진정한 학문을 최대로 증진시키면서 동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서, 모든 인문과학 특히 ‘철학’(다른 모든 학문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바로 이 철학에 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이 어디에서든 가톨릭 신앙의 규범에 따라 가르쳐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I 3. 우리 시대의 서글픈 현실을 심각하게 바라보면서 공적으로든 사사롭게든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심층을 이해하고 있는 이라면, 우리에게 덮쳐 와 우리를 가슴 아프게 만들고 있는 해악들의 원인이 바로 신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 관한 불경건한 이론들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불경건한 이론들은 철학 학파들에서 출발하여 사회 구석 구석까지 미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4. 우리는 인간의 철학이 모든 오류를 완전히 배격하고 뿌리뽑아 버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창설되었을 때, 세상이 ‘인간적 지혜의 설득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과 그분의 능력만을 가지고’(1고린 2,4) 믿음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통해서 그 원초적인 품위가 복원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정신이 오류의 어둠을 제치고 건전해질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느님의 전능한 능력과 도움뿐인 것입니다. 5. 따라서 사람들을 다시 믿음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인문과학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명한 교부들이 이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옛 문헌들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실상 교부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들을 이성에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노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학문으로 믿음은 원리와 자양분과 변호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2) 6. 그리고 분명히 자비심 넘치는 하느님께서는, 신적인 것들에 관해서, 신앙의 빛을 통해서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없는 저 진리들뿐만 아니라 이성이 전혀 관통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들까지도, 신적인 권위로 모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오류의 감염도 없이 알려질 수 있도록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신적 계시로 얻은 (또는 신앙의 가르침에 밀접하게 연관된) 진리들 가운데 어떤 내용들은 이교 철학자들에 의해서 자연적 이성의 빛으로 입증되고 검증된 적절한 논변을 통해서 알려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기”(로마 1,20) 때문이고, 또한 ‘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백성들에게 그들 가슴 속에 법의 업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해 주기’(로마 2,14-15) 때문입니다. 7. 얼마 전부터 도입된 이런 방법은 아주 오래된 것이고 교부들도 자주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8. 그러나 철학을 사용하는 데에서 오는 유익함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는 “값진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는 그분’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업적들을 명상하면서도 그것을 이루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지혜 13,1)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하고 놀라운 결실은 무엇보다도 이성을 통해서 포착됩니다. 이성은 어떤 절대적 신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지성을 통해서) 그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기”(지혜 13,5)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또한 그 신이 모든 완전성의 총체이기 때문에 단연 뛰어난 존재임을 입증해 줍니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무한한 지혜이시기에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어져 있을 수가 없고, 또 여하한 타락한 것들이 끼여들 수 없는 완전한 정의(正義)이시기에, 신은 진실하실 뿐만 아니라 속일 수도 없고 속을 수도 없는 진리 자체이십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이성이 하느님의 말씀에 충만한 신뢰와 권위를 인정해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9. 이제 이처럼 튼튼하게 기초를 다졌으니, 다시 한번 더 ‘철학’의 계속적이고 다양한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신학은 ‘참된 학문’의 형식과 특성과 본성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이 학문 속에서는 모든 고상한 것들 가운데서도 천상적 가르침들의 많은 다양한 부분이 (마치 한 몸 안에서처럼) 하나로 통합되고, 따라서 그들은 적절한 제 자리에 배정되고 그들의 원리들로부터 연역되어 서로 서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또 여타의 다른 학문들이 적절하고 틀릴 수 없는 논거들로써 정당화될 것입니다. 10. 마지막으로, 계시 진리를 면밀히 검토해서 옹호하고 감히 그 계시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하는 것은 철학의 본령(本領)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위한 성채요 종교의 강력한 요새라고 간주되는 것은 철학에게는 칭찬이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세주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권능이고 지혜인 한에서 확실히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 진리에 비겨 볼 때, 더 이상 가장 강력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거스르는 궤변주의자들의 논거를 약화시키고 진리에 대한 사기적 음모들을 폭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포도밭의 울타리이며 방벽이라고 간주되었습니다.”14) 11. 그러나 철학은 동시에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값진 결실들을 낼 수도 있기 때문에 존경하는 옛 교부들이 이미 걸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장엄하고 권위 있게 선포한 길에서 절대 벗어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날카로운 지성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초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많은 진리들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확인했으므로, 인간 지성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분수를 넘는 것들에 대해서 감히 넘볼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곧 그 진리 자체를 감히 부인하려 들거나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측정하려 들거나 함부로 해석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초자연적 진리들을 충만하고 겸손된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천상의 진리들에 대해서 종이나 추종자처럼 봉사할 수 있고, 또 신의 은총 덕분으로 어느 정도까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인간 지성이 자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저 이론적 요점들에 관해서는, 철학이 자기의 고유한 방법과 원리, 논증 방법 등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다만 신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무모한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라면 말입니다. 계시로써 알려지게 된 것들이 절대적으로 참되고 그릇될 수 없다는 것과 신앙에 모순되는 것은 또한 올바른 이성에도 반대된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면, 가톨릭 철학자는 계시된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정되는 어떤 결론을 받아들일 경우 그것은 신앙뿐만 아니라 이성에까지도 폭력을 휘두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2. 인간 본성이 지니고 있는 힘을 정도 이상으로 과장하면서, 인간의 지성이 신의 권위에 복종하게 될 경우 자신의 자연적인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이런 굴종의 무게에 짓눌려 진리와 위대함의 절정을 향한 그의 걸음걸이가 둔해지고 지장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음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13.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신의 권위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가장 확실한 교사입니다. 따라서 이 신앙을 따르는 사람은 오류의 늪에 빠지거나 불확실한 의견들의 홍수에 떠밀릴 염려가 없습니다. 14. 그리고 신앙에 반대되는 진술들을 논박하고 신앙과 조화를 이루는 것들을 증명하는 데에서 자기 천품의 힘을 활용할 때, 그들은 이성을 유익하고 품위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실상 첫째 경우들에서는 오류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논거들의 인위성을 간파할 수 있고, 둘째 경우에서는 그것들을 튼튼하게 증명하고 모든 현명한 이들도 납득할 만하게 만들기 위한 설득력 있는 이유들을 발견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II 15.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철학사에 눈길을 돌려본다면 방금 우리가 말한 것들이 사실로 확인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선물을 지니지 못했던 고대 철학자들은 그 가운데 가장 현명했던 이들까지도 많은 점에서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상 그들이 얼마나 자주 신의 본성에 대해서, 사물의 기원에 대해서, 세계의 운행에 대해서, 신의 미래 인식에 대해서, 악의 원리와 원인에 대해서, 인간의 궁극 목적에 대해서, 인간의 영원한 행복에 관해서, 그리고 그 밖에도 인간에게 더없이 절실한 다른 참되고 확실한 지식들에 대해서, 일부 단편적인 진리에다가 거짓되고 부조리하고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진술들을 뒤섞어 놓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신적인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적 학문들의 경우에서도 진정한 혁신가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신(1고린 1,24) 그리스도, 곧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골로 2,3) 그리스도이심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초기 교부들과 교회의 박사들은, 고대 철학자들의 작품들을 탐구하고 그들의 학문들을 계시된 가르침들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중한 자세로 거기에서 지혜롭게 진리에 따라 말해진 것들은 취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교정하거나 배척했습니다. 17. 따라서 교회 공동체 초기부터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맹렬한 적대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제도를 비웃으며, 신들이 여럿이라는 것, 물질이 시작도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물들의 변천이 신의 섭리로써 지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맹목적인 힘과 숙명적인 필연성으로써 움직인다는 것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거슬러서 우리가 ‘호교론자들’(apologetici)이라고 부르는 현자들이 투쟁하였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안내를 받으면서도 인간적인 지혜의 도움도 받아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하느님만을 인정하고 찬미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권능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된 삼라만상은 그분의 지혜 때문에 힘을 얻고 고유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18. 또한 아무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논박서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역시 성 예로니모는 격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박식하게 논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철학으로부터 원용되지 않은 논술들이 하나라도 있었단 말입니까?”20) 그는 놀랄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철학사를 위해, 철학적 논변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 그리고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모색하기 위해 많은 것들이 유익하다는 점을 논증했습니다. 그가 다져 놓은 길을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의 그의 교육 때문에 유명한 오리게네스가 뒤따랐습니다. 그는 그리스 사상과 동방 사상에 밝은 사람으로서 상당량의 박학한 저술들을 통해서 놀랄 만큼 적절하게 성서들을 주해하고 거룩한 가르침들을 옹호하는 논술을 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에 전혀 아무런 오류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 진리의 확실성을 증대시키는 수많은 논증들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19. 그리고 ‘스콜라 학자들’이라고 불리는 중세의 박사들은 대단한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곧 교부들의 방대한 저술들 속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풍부한 가르침들을 끈기를 가지고 수집해서 후대인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거의 한 곳에 모아 놓았던 것입니다. 20. 그러나,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스콜라 학의 기원과 특성이 무엇이고 또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선임자 식스토 5세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학문의 정신과 지혜와 지성을 주실 수 있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당신의 교회를 필요에 따라 새로운 축복들로 채우시며 새로운 힘으로 강화시키시는 그분의 신적인 선물 덕분에,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들인 우리 교부들은 스콜라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특별히 이 학부(파리 대학 신학부)의 명석한 교수인 천사적인 성 토마스와 세라핌적인 성 보나벤투라라는 두 영광스러운 박사들은 ……대단한 천품과 항구한 탐구 그리고 철저한 수고로써 이 스콜라 학을 발전시키고 해명하여 후대인들에게 매우 조직적이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명료하게 해명된 스콜라 학을 남겨 주었습니다. 실제로 성서, 교황들, 교부들 그리고 공의회 등의 대단히 풍요로운 원천들에서 유래되는 대단히 건강한 학문 인식과 그 수행은 성서 자체의 순수하고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서나, 교부들을 확고한 확실성과 유용성을 가지고 읽고 이해하는 데에서, 그리고 오류와 이단들을 가려 내고 논박하는 데에서 교회에 언제나 크나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표현한 바 있는 저 위험한 날들이 이미 도래한 최근에는, 신을 모독하는 교만하고 현학적인 사람들은 점점 더 악화일로를 치달아 스스로 오류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오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을 재확인하고 이단적 가르침들을 타도하는 것은 더없이 필요하고 절실합니다.”23) 21. 이 말씀들은 다만 스콜라 학에만 해당되는 듯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철학과 그 공로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콜라 철학을 진리의 원수들에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로 만든 것은 바로 두 성인의 저 명석한 천품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식스토 5세께서 앞의 글에 덧붙이고 계시듯이 “사물들과 그 원인들의 적절한 연계, 전열을 갖춘 병사들과도 같은 질서와 배열, 맑고 투명한 정의와 구분들, 튼튼한 논거, 정밀한 토론들을 통해서,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이 뚜렷이 구분되고 현란하게 치장한 이단자들의 거짓말이 가면이 벗겨져 알몸이 드러나듯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24) 이 놀랍고 찬란한 천품들은, 스콜라 학자들이 신학적 토론에서도 적절한 자리에서 즐겨 사용하였듯이, 오늘날도 철학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신적인 지식을 긴밀한 연관 속에 결합시킨 것은 온통 스콜라 학자들의 고유한 공로이기 때문에, 그들의 단연 뛰어난 신학은 확실히, 만일 불완전하고 불비(不備)한 철학을 사용했더라면 사람들에게서 그토록 많은 칭송과 영예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모든 스콜라 박사들 가운데에서도 분명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단연 두드러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스콜라 학의 왕자이며 스승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는 가예타노가 말하고 있듯이 “고대의 거룩한 박사들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기에 어떤 점에서는 그 모든 이들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25) 성 토마스는 그들의 가르침들을 마치 흩어진 지체들을 한 몸으로 모으듯 수집해서 놀랄 만한 방식으로 배열했고 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보충 완성시켰습니다. 그러기에 가톨릭 교회의 영광이며 비상한 보루라고 평가받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23. 뿐만 아니라 이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는 철학적인 결론들을 사물들의 내밀한 근거들과 보편적 원리들 속에서 명상했습니다. 그 속에는 거의 무한한 진리의 싹들이 담겨 있었고, 따라서 적절한 때가 되면 후대의 스승들에 의해서 싹이 트고 풍부한 결실들을 내게 될 것이었습니다. 24. 이런 이유들 때문에 특별히 지난 과거에 신학과 철학의 가장 지혜롭고 저명한 사람들은 성 토마스의 불후의 작품들을 면밀하게 연구했던 것이며, 거기서 문화 유산과 방법뿐만 아니라 내밀한 자양분까지 얻기 위해서 모두 그의 천사적 지혜에 대한 탐구에 매진하였던 것입니다. 25. 그러나 우리가 더 중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선임 교황들께서 한결같이 토마스 데 아퀴노의 지혜를 격찬하며 증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실상 클레멘스 6세(칙서 In Ordine), 니콜라오 5세(1451년 도미니코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베네딕토 13세(칙서 Pretiosus)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 전체가 그의 놀라운 가르침을 통해서 조명되었음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비오 5세께서는, 이 가르침으로 속임수가 노출된 이단들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으며, 세상 전체가 페스트와도 같은 오류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클레멘스 12세(칙서 Verbo Dei)와 다른 교황들께서는, 교회가 성 토마스의 저술들에서 수많은 선익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게는 그레고리오,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와 같은 최고의 교회 박사들에게 돌리는 것과 똑같은 영예를 마땅히 드려야 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황들께서도 성 토마스를 안전하게 따를 수 있는 스승과 모범으로 대학들과 고등학교에 추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26. 마지막으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이 위대한 스승은 가톨릭을 반대하는 적수들에게서도 찬탄과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실상 이단적인 분파의 우두머리들 가운데는, 만일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르침만 제거할 수 있다면 자기들은 “어렵지 않게 다른 모든 가톨릭 박사들을 대적해서 격파하고 가톨릭 교회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Bezza-Bocerus). 물론 어림도 없는 헛된 꿈이었지만, 그들이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사실만큼은 그리 헛된 것이 아닌 셈입니다. 27.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이런 사실들과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선임자들이 특별히 사랑했던 저 가르침의 선익과 강력한 힘과 놀라운 유익에로 눈길을 던질 때, 언제 어디서나 그의 가르침들이 마땅히 존중된 것은 아니라는 슬픈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의 일상 경험, 대단히 뛰어난 지성인들의 판단,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간곡한 권유 등은 언제까지나 스콜라 철학을 선호해 왔던 것입니다. 28. 그런데 여기 저기서 옛 가르침 대신에 새로운 철학 방식이 속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철학들에게서 교회와 시민 사회가 더욱 갈구했을 건전하고 값진 결실들을 얻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16세기의 쇄신가들의 노력 때문에 신앙과는 전혀 무관하게 철학을 하고자 했고, 온갖 구실과 자유를 표방하며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이론들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29. 그리고 사람들은 남들을 모방하기 좋아하는 법이므로, 이런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은 가톨릭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번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것들로 옛것을 증대시키고 완성하려 들기보다는 옛 지혜의 유산을 치워 버리고 오직 새것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건전한 자세일 수 없으며 인류의 학문적 유산을 훼손시키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실상 이 복잡다단한 이론들은 어떤 개별 스승들의 권위와 자의(恣意)에 입각하고 있기에 토대가 부실하며, 옛 철학처럼 확실하고 튼튼한 철학을 구성하지 못하고 기껏 얄팍하고 혼란스러운 이론이나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30. 그러므로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철학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데 아퀴노의 놀라운 가르침을 그 순수한 광채 속에서 회복시켜야 한다고 믿고 헌신적으로 투신하였습니다. III 31.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거짓된 학문의 기교와 교활함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기를 드는 것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젊은이들, 특히 교회의 희망으로 자라나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떤 강하고 튼튼한 가르침으로 양육되어 강건하고 잘 무장됨으로써 종교의 근거들을 효과적이고 지혜롭게 다루게 되고, 또 사도들이 가르치고 있는 대로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1베드 3,15), 또한 반대자들을 건전한 가르침으로 안내하고 설득시킬(디도 1,9) 채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32. 그리고 신앙에서 멀어져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미워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직 이성만을 유일한 스승이며 안내자로 삼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으로써 그들을 치유하고 은총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하느님의 초자연적 도우심 다음으로는 교부들과 스콜라 학자들의 건전한 가르침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튼튼한 토대, 그 신적인 기원, 그 확실한 진리, 그 증명 논거, 인류에게 가능해진 은혜 그리고 이성과의 완전한 조화 등을 증명하였고, 또 너무도 명료하고 강력했기 때문에, 주저하는 자들과 허풍떠는 자들까지도 회심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33.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든 학문은 우리가 제안한 철학의 쇄신으로부터 진보의 희망을 품어야 하고 대단한 도움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들과 인문 과학들은 다른 여타 학문들의 교정자인 철학으로부터 언제나 지혜로운 규범과 타당한 전개 방식을 얻어 내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보편적 원천과도 같은 철학으로부터 여타 학문들을 양육하는 정신이 흘러 나옵니다. 그리고 인문 과학들은 철학의 특전이 건전하고 그 판단이 타당할 때 활짝 피어났지만, 철학이 쇠퇴하고 오류와 어리석음에 빠졌을 때에는 무시되고 거의 잊혀졌다는 것은 사실과 경험이 입증해 주는 바입니다. 34.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단한 영예를 누리고 있고 그 찬란한 많은 발견들이 어디서나 커다란 찬탄을 자아내는 물리학은 옛 철학을 쇄신한다고 해서 전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리학을 연구해서 결실을 내고 그것을 증진시키려면 단순한 사실 관찰이나 자연에 대한 숙고만으로는 모자라고, 오히려 그 사실들이 확실할 때 더욱 높은 곳으로 고양되어 근면하게 사물들의 본성을 인식하며, 그것들이 복종하는 법칙들과 그 질서, 다양성 속의 통합, 그리고 다양성 속에서의 상호 유사성을 산출하는 원리들을 탐구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탐구를 위해서 스콜라 철학이 적합한 방법으로 교육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많은 힘과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는 정말 놀랄 정도입니다. 35. 우리는 특별히 성 토마스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스콜라 학자들에게서 대단히 미묘하게 탐구되거나 신중하지 못하게 가르쳐졌다면, 그리고 현대의 어떤 가르침들과 충만히 양립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 있다면, 또는 마지막으로 어떤 이유로 받아들여질 가치가 없는 어떤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따르라고 제시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36. 특별히 신중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대들이 뽑은 스승들은 자기 제자들의 정신이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르침으로 관통될 수 있도록 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의 가르침이 다른 모든 이론에 견주어 얼마나 튼튼하고 월등한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대들이 설립한 (또는 설립할) 학부들은 그의 가르침을 해설하고 옹호하며 흔한 오류들을 논박하는 데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37. 그렇지만, 오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우리의 이런 착수가 성서에서 학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그분(1열왕 2,3)께 조율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헛된 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에서는 “위로부터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이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에게서”(야고 1,17) 우리에게 오게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느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야고 1,5).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 이 글은 [신앙과 이성](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1999)의 부록으로 실려 있다. ====================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16일]
<< 부 록 3 >> 게시자 주: 다음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10년 6월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에 대하여 세 번에 걸친 강론 말씀들입니다:
첫 번째 강론:
출처 1: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en/audiences/2010/documents/
hf_ben-xvi_aud_20100602.html 두 번째 강론:
출처 1: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en/audiences/2010/documents/
hf_ben-xvi_aud_20100616.html 세 번째 강론:
출처 1: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en/audiences/2010/documents/
hf_ben-xvi_aud_20100623.html 참고: 더 나아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교리 교육용 수요일 일반 알현 강론 말씀에서 주어진, 잘 정돈된, 2007년 3월 7일부터 2011년 4월 13까지, 108번에 걸친, 가톨릭 교회의 교부들의 전기 목록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s://catechesisofthepopes.wordpress.com/major-themes/the-lives-of-the-saints/audiences/ [이상, 2015년 2월 16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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