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약현성당 게시판

삥뜯겨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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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pious] 쪽지 캡슐

2003-01-05 ㅣ No.1128

성탄절이 지난지 열흘이 거의 다되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방학이 된 지금이 오히려 더 성탄의 분위기를 내는 때입니다. 초등부 아이들은 벌써 성탄제를 했지만 중고등부는 내일 있을 성탄제를 요즘 한창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성당에 나와 추운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투닥거리며 뭔가를 해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귀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다가 만난 아이들이 한결같이 제게 하는 말은 "신부님 안녕하세요"와 함께 "신부님 배고파요"입니다. 이 말은 언제든 변함이 없습니다. 가만이 생각해보면 제가 어렸을 때도 아이들은 신부님께 그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감히 신부님들께 그런 말을 할 주변머리가 없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말을 듣는 신부들은 맘이 편치가 않습니다. 매몰차게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많은 아이들의 배를 모두 채워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고나 계실려나!

사실 신부들이 그렇게 여유있게 살지 못하고 있기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몸이 못따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오늘 잠깐 볼일이 있어서 마당에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들어갔는데 아이들 몇명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습니다. 연습하러 왔냐는 제 물음에 아이들은 리허설하다가 잠시 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볼일을 보고 나가는데 문을 나서는 제게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신부님 배고파요"하면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이 말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인사하고 아는척 하는 말같았습니다.

 

하지만 지나치는 저에게 며칠 계속 들어온 이 말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김밥하고 자장면이요" 참 소박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이것 저것 잘도 먹고 아쉬운거 없이 지낼텐데 왜 여기서 이렇게 추위에 떨면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가서 먹고 오자"하고 말했습니다. 반신반의 하는 아이들. 그래도 내가 자장면 네그릇 값정도야 못내겠니 하고 생각하면서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다른 애들도 있는데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아이들도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국집으로 가기위해 성당을 내려오는 길에 아이들은 하나 둘씩 늘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렇게 성당문은 멀게 있는 것일까요?

 

결국 중국집에 들어가 의자에 앉으니 뒤에 늦게 온 교사들까지 약 이십여명이 넘는 아이들과 교사들이 중국집을 꽉 채웠습니다. 속으론 혹시 돈이 모자라지 않을까? 이 집도 카드는 되겠지? 하고 자장면 값과 짬뽕값을 속으로 셈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서로 먼저 나온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주고, 다른 애들에게 더먹으라고 나눠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추억에 제가 작은 기쁨을 주었다는 흐뭇함에 당당히 계산을 하고 먼저 중국집을 나왔습니다.

 

성당언덕을 다시 올라오면서 별로 멀지도 않은데 내려갈때는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을까 하고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이들 말로 이런걸 삥뜯겼다고 하나?

 

하지만 그래도 이런 삥이라면

 

인정사정없이 삥뜯겨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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