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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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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78

 

 

신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해제

 

 

-박상래,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7 고린토서, 분도출판사, 1993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 고린토

옛 고린토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지협 이스무스(지금은 이스미아)에서 남쪽으로 30리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고린토 자체는 항구도시가 아니지만 양편에 두 항구를 끼고 있었다. 고린토 북쪽 고린토 만에는 레카이온 항구가 있어 아드리아 해로 통했고, 동쪽사론 만에는 겐크레아 항구가 있어 에게 해로 통했다. 이처럼 고린토는 육로로는 남북으로 통하는 통로요 해로로는 동서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관계로 예로부터 상업이 번창했다.

  기원전 146년 로마인들이 고린토를 강점할 무렵 시민 수는 13만 명쯤 된 것 같다. 로마인들이 고린토를 초토화시킨 까닭에 고린토는 거의 한 세기 동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율리우스 체사르가 기원전 44년부터 고린토를 로마 식민지로 재건하였다. 마침내 기원전 27년 고린토에는 아카이아 속주의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당시 고린토에는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동방인 등 여러 인종이 모여 살았다. 가위 인종 박람회 같은 도시였다. 바오로 시대 고린토 시민 수는 13만 명을 넘었다고 추산한다. 고린토에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다는 고고학적 증거물도 발굴되었다. 그리스어로 "히브리인들의 회당"이라고 새긴 흰 대리석이 레카이온 중앙 통에서 발굴되었는데, 이 돌은 본디 유대교 회당 출입구 위에 놓인 상인 방 돌이었을 것이다. 이는 바오로 시대 회당의 것은 아니고 4세기경에 지은 어느 회당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린토에는 별의별 종교가 흘러 들어와서 마치 종교 전시장 같았다. 이제까지 발굴된 신전, 동전, 조각들을 살펴보면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잡신들을 섬겼다. 미남 신 아폴로, 예술의 여신 아테나, 운명의 여신 튀케, 사랑의 미녀 신 아프로디테,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지하의 신에게 강간당한 여신 코레, 이스무스에 신전을 지닌 바다의 신 포세이돈 따위 그리스 신들을 고린토인들은 섬겼다. 그런가 하면 율리우스 체사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등 신격화된 황족을 섬기는 신전이 고린토 광장 서쪽 끝에 있었다. 아울러 겐크레아에는 에집트 바다의 여신 이시스 신전이 있었고, 고린토에서 에집트 치유의 신 사라피스를 섬겼다는 고고학적 증거물도 발굴되었다. 바오로가 전도한 고린토는 글자 그대로 종교 다원사회라 하겠다.

  일상 통용어는 그리스어였고, 행정기관에서는 라틴어도 사용했다. 고린토는 교통과 상업이 발달해서 경제적으로는 윤택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천박하고 윤리적으로는 퇴폐한 도시였다고 한다. 빈부의 차는 극심했는데 그리스도인들 절대 다수는 빈자들이었다. 고린토인들은 운동경기를 즐겨, 옛 고린토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지협 이스무스에서 격년마다 범 헬라 운동회를 열었다.

 

2. 고린토 교회 창립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경) 오늘날의 터키에서 그리스로 건너가 네 교회를 세웠다. 우선 그리스 북부지역 마케도니아 속주에 필립비 교회, 데살로니카 교회, 베레아 교회를 창설했다. 바오로는 실라를 데살로니카에 남겨 두고(사도 17,14) 디모테오를 데리고 남행하여 문화도시 아테네에서 전도했으나 실패하고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사도 17,16-34). 아테네에서 바오로는데살로니카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한편 그들을 재교육하려는 뜻으로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파견하고(1데살 3,1-5), 바오로 자신은 홀로 그리스 남부지역 아카이아 속주로 내려갔다.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75킬로미터 떨어진,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 고린토로 내려가서 무려 18개월간 머물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바오로는 늘 그랬듯이 고린토에서도 손수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도비를 벌었다. 단, 필립비 교우들이 보낸 물질적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들였다(필립 4,14-16; 2고린 11,9). 바오로는 마침 로마에서 고린토로 쫓겨온 유대 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를 만나 그 집에 얹혀 살면서 부부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는 한편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전도했다(사도 18,1-4). 49∼50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한 적이 있는데(수에토니우스, 글라우디오의 생애, 25,4), 그 때 유대 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는 고린토로 피신해 살던 중 바오로를 만나 함께 생활하고 함께 일하면서 고린토 교회 창립을 도와  주었던 것이다. 그 후 이 부부는 바오로를 따라 에페소에서도 전도했다(사도 18,18-28). 이들은 에페소에서도(1고린 16,19), 나중에는 로마에서도(로마 16,3-5) 자기들 집에 그리스도인들을 모았다. 실라와 디모테오가 마케도니아 속주에서. 정확히 말해서 데사로니카 교회에서 고린토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바오로는 저간에 유대교에 동조하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방인 디디오 유스도의 집에 기거하면서 주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전도했다(사도 18,7). 아울러 이 무렵에 데사로니카 교우들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으니,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이는 바오로의 서간집 중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가장 먼저 씌어진 글이다.

  고린토 전도 말엽 유대인들이 바오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에 끌고 가서 그를 종교 이단자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당대 로마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인 갈리오는 매우 현명해서 종교 문제에 관한 소송을 기각했다(사도 18,12-17). 고린토 유적지에 가 보면 레카이온 중앙 통 남쪽 끝에 당시 대중 연설도 하고 공개 재판도 한 법정 축대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이 고발 사건은 바오로의 연표를 작성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델피에서 발굴된 금석문에 따르면 갈리오는 51∼52년에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했다. 이 무렵에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 창립을 마무리하고,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를 데리고 동쪽 외항 겐크레아에서 승선하여 에페소, 가이사이라, 예루살렘을 거친 다음, 출발지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다(사도 18,18-22).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이 제법 있다.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사도 18,1-4,18-29; 1고린 16,19; 로마 16,3-5), 회당장 그리스보(사도 18,8; 1고린 1,14), 회당장 소스테네(사도 18,17; 1고린 1,1)는 모두 유대 계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밖에도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그들이 어떤 인종인지 성분을 밝힐 수는 없는 형편이다. 예를 들면 고린토에서 제일 먼저 예수 신앙을 받아들이고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은 스데파나 집안 사람들(1고린 1,16; 16,15-17),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자기 집을 고린토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제공한 가이오(1고린 1,14; 로마 16,23), 에페소에서 전도하던 바오로에게 고린토 교회 소식을 전한 여 교우  클로에 집안 사람들인데(1고린 1,11), 이들이 유대인들인지 이방인들인지 밝힐 수 없는 형편이다.

  고린토에서 로마 교우들에게 문안한 이들(로마 16,21-23) 가운데 상당수도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교우들임에 틀림없다. 곧, 루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드로 같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로마서를 대필한 데르디오, 고린토 시의 재정관 에라스도, 과르도 등 문안 명단에 나오는 이들 중 상당수는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교우들이다. 그리고 고린토 동쪽 외항 겐크레아 신자 중 이름이 알려진 이는 여 교우 페베인데, 바오로는 놀랍게도 그를 일컬어 "겐크레아에 있는 교회의 봉사자"라고 높인다(로마 16,1). 스데파나와 함께 54년경 에페소에 있던 바오로를 찾아간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1고린 16,17) 역시 고린토 교회의 초창기 신자였다.

 

3. 고린토 교우들에게 보낸 A 서간 B 서간

현재의 신약성서에는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오직 고린토 전ㆍ후서 두 편만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더 많은 편지들을 써 보냈다.

  바오로는 51∼52년경 고린토를 떠난 다음, 3차 전도여행에 올라 54년경 에페소에서 활발히 전도하던 중(1고린 16,8-9) 고린토인들에게 편지를 발송한 바 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고린토 전서이다. 그런나 바오로가 전서에 앞서 고린토인들에게 또 한 편의 편지(A서간)를 써 보냈다고 스스로 확언한다(1고린 5,9). 불행히도 이 편지는 전해 오지 않는다. 1고린 5,9에 따르면 사도는 그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교우들에게 지시했다.

  이제 바오로가 54년경 에페소에서 고린토 교회로 두번째 편지, 곧 지금의 고린토 전서(B 서간)를 써 보낸 까닭을 살필 차례이다. 바오로는 두 갈래 경로로 고린토 교우들의 최근 소식들을 들었다. 우선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에페소에 와서, 고린토 신도들이 네 파로 갈라졌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1,11-17). 클로에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만, 고린토 교회의 유력한 여 교우임에는 틀림없다. 또 한 가지 소식통으로는, 고린토 교우들이 결혼과 독신 문제에 관한 질의서를 만들어서 에페소의 바오로에게 보냈던 것이다(7장). 이 질의서를 전하고, 그에 대한 답서로 지금의 고린토 전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간 이들이 고린토 신자들의 심부름꾼들인 스데파나와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였다(16,17). 이처럼 바오로는 인편 또는 서면으로 고린토 교회의 여러 가지 소식들을 접하고 사목적 지침들을 하달했으니, 이것이 곧 고린토 전서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서간에서 서기 50년대 초반 한 지역교회의 생생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고, 아울러 위대한 사도의 사목적 배려를 눈여겨볼 수 있다. 이제 바오로가 고린토 전서에서 다룬 문제들을 항목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린토 교회는 바오로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등 사색당파로 분열되었다(1,10-4,21).

  2) 고린토 교우들 중에는 제 의붓어머니와 공공연히 동거 동침하는 패륜아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가 교회에 나와도 어느 누구 하나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바오로는 이 사람을 교회에서 제거하라고 지시한다(5,1-13).

  3) 교우들끼리 재산 문제로 사회 법정에 고소하는 사례가 있었다(6,1-11). 교우들 사이에 시비가 있는 것부터 잘못이다. 시비가 있으면 교회 내에서 가려 주라고 바오로는 타이른다.

  4)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실 삼아 사창가를 드나드는 신자들도 있었다(6,12-20).

  5) 7장에선 결혼ㆍ이혼ㆍ독신ㆍ재혼 등 성 윤리를 자세히 다룬다. 바오로는 부부생활을 충실히 하라고 권한다. 부부 가운데 한편은 신자이고 한편은 비신자인 경우에도 될 수 있는 대로 결혼생활을 지속하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비신자 편에서 이혼하려고 하면 신자편이 동의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독신은 값진 삶이라 장려할 만하나, 결혼할 생각이 있으면 결혼해도 도무지 죄 될 것이 없다고 한다. 부부 가운데 한편이 사망한 경우에는 재혼할 수 있지만, 재혼 배우자로 반드시 그리스도인을 택해야 한다고 한다.

  6) 고린토 도살장에서는 우상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에 짐승을 잡거나 또는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다. 마음이 여린 소심한 교우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리를 귀신 씌었다고 여겨 먹기를 꺼렸다. 이와는 달리 강심장을 지닌 대법한 교우들은 만물은 주님이 창조하신 것이요 귀신 따위는 있지도 않거나 있어 봐야 별 것 아니라고 여긴 나머지 아무런 거리낌없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었다. 원칙적으로 바오로는 대범한 교우들의 확신에 동조한다. 곧, 우상에게 바친 것인가 아닌가 따질 것 없이 아무 고기나 먹어도 무방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부류의 신자들이 함께 식사하는 경우에는 대범한 교우들은 소심한 교우들의 심정을 헤아려, 우상에게 바친 고기는 상에 차려서도 안되고 먹어서도 안된다고 지시한다. 한 개인의 확신보다 이웃 사랑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8장; 10,1-11,1). 9장에선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한다.

  7) 11,2-14,40에서는 공동체 모임 때, 곧 성찬 때 지닐 태도를 밝힌다. 바오로는 여 교우들더러 머리를 가리고 성찬에 참석하라고 명했다.(11,2-16). 그리고 당시에는 신도들이 제각기 음식을 갖고 와서 공동체 회식을 하고 곧 뒤이어 성찬을 거행한 것 같다. 그런데 경제적ㆍ시간적 여유가 있는 교우들은 미리 와서 자기네끼리 먹어치우는 바람에 여유가 없는 교우들은 굶주리고 부끄러움을 당하기 일쑤였다. 바오로는 이런 비행을 고치고자 엄숙히 명령했다. 많이 가져왔건 적게 가져왔건 미리 왔건 늦게 왔건 모두 모인 다음에 다같이 공동체 회식을 들고 성찬을 거행하라고.

  8) 12-14장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룬다. 사도는 참 은사인지 거짓 은사인지 식별하는 기준으로 그리스도 신앙고백을 든다. 곧,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참 은사요, "예수는 저주"라고 하면 거짓 은사라는 그리스도론 적 식별 기준을 제시한다. 아울러 큰 은사인지 작은 은사인지 식별하는 기준으로 공동체에의 기여도를 든다. 교회 공동체 건설에 도움이 되면 될수록 큰 은사요, 그렇지 않으면 작은 은사라는 것이다. 은사의 우열을 두고, 고린토 신도들은 무아경에 빠져 지껄이는 신령한 언어(글로쏠라리아)은사를 제일로 쳤으나, 사도 바오로는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베푸는 사랑(아가페) 은사를 가장 높이 평가하여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읊었다(13장).

  9) 죽은 이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오류를 시정코자,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죽은 이들의 부활을 주장한다(15장).

 10)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모금을 촉구한다(16,1-4).

 

4. 고린토 교우들에게 보낸 C 서간 D 서간

바오로가 고린토 전서(B 서간)를 보낸 다음에 그와 고린토 교우들의 관계가 어떠했느냐, 바오로가 고린토 교우들에게 편지를 몇 편이나 더 보냈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봐야겠으나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의 해답은 또 다른 문제와 관련된다. 곧, 지금의 고린토 후서가 한 통의 편지냐(큄멜), 아니면 적어도 편지 두 통(1-9장, 10-13장)을 한데 묶은 것이냐, 혹은 대여섯 통을 한데 모아 놓은 서간집이냐(보른캄, 슈미트할즈)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말이다. 신약학계에서는 200년이 넘도록 고린토 후서의 단일성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 백가쟁명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뜻을 합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난감한 노릇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판단을 유보하는게 상책일 법한데, 그러나 고린토 후서를 해설하려면 어차피 어느 한 가지 설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여기서는 신약학계의 통설에 따라(불트만, 랑, 클라욱, 까레), 지금의 고린토 후서에는 바오로의 편지 두 통이 들어 있다는 것(1-9장, 10-13장), 10-13장 편지가 1-9장 편지보다 먼저 씌어졌다는 것, 10-13장 편지는 바오로가 고린토 교우들에게 보낸 세번째 편지(C 서간)로서, 이른바 "눈물 편지"(2고린 2,4)의 단편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전제 아래 사건의 경위를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짐작컨대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모금을 독려코자(1고린 16,1-4 참조) 디도와 협조자 한 사람을 고린토로 파견하였다(2고린 12,17-18). 그렇지만 고린토 교우들이 저들에게 순종하기는커녕 외부에서 들어와 바오로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한 유대계 그리스도교 전도사들의 사주를 받은 나머지 바오로의 사도직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 같다. 바오로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몸소 고린토 교회로 찾아갔다. 고린토 교회 창립 때의 방문에 이은 두번째 방문이다(13,2). 그러나 이미 사태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고린토 신도들 대부분은 바오로의 적수들에게 동조하고, 남자 교우 한 사람은 바오로에게 공개적으로 심한 모욕을 가했다(2고린 2,5-11; 7,12; 참조 12,20-21). 바오로는 에페소로 되돌아와서 "몹시 괴롭고 마음이 답답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2고린 2,4; 참조 2,3.9; 7,8.12) 고린토 교우들에게 비통한 편지를 써 보냈다. 아마도 디도가 편지 심부름을 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눈물 편지"라고 하는데, 바오로가 고린토 교회로 보낸 세번째 편지(C 서간)이다. 적수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고린토 교우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눈물겨운 서간이다. 디도를 시켜 고린토 교우들에게 "눈물 편지"를 띄우고 나서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트로아스를 거쳐 그리스 북부지역 마케도니아로 건너갔다. 거기서 사도는 노심초사, 디도가 고린토에서 돌아오기만 기다렸다(2,12-13; 7,5). 마침내 디도가 와서 뜻밖의 희소식을 전했다. 고린토 교우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바오로와 화해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요, 전에 바오로에게 불의를 행한 무뢰한을 교우들이 처벌했다는 것이다(2,5-11; 7,6-16). 이에 바오로는 기쁨과 고마움에 겨워 고린토 교회로 네번째 편지(D 서간 = 화해 편지)를 띄웠으니, 곧 지금의 고린토 후서 1-9장이다. 때는 57년경, 디도는 형제 2명과 함께(8,6.17-18.22; 9,3) 이 편지를 지니고 또다시 고린토로 내려가서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해 모금도 하고(2고린 8-9장; 로마 15,25-31), 바오로의 방문도 준비했다. 곧 뒤이어 바오로도 고린토에 당도하여 모처럼 석 달 가량 조용히 지내던 기회에(사도 20,3)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총 정리하여 방대한 로마서를 집필하였다.

  지금의 고린토 후서에서 바오로는 모처럼 신상 발언을 많이 한다. 특히, 고린토 교회에 침입하여 바오로의 사도직을 부정한 적수들을 상대로 일대 논전을 벌이는 10-13장(C 서간 = 눈물 편지)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과 현재의 심경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따라서 고린토 후서야말로 바오로의 인간성과 사도관을 살피는데 더없이 좋은 보고이다.

 

5. 바오로의 적수들

고린토 교회에 침입하여 바오로의 사도직을 부인하고 자기들이 진짜 사도들이라고 으스댄, 바오로의 적수들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고린토 후서 해설의 첩경이다. 우선 2고린 10-13장(C 서간 = 눈물 편지)에서 바오로와 적수들과 고린토 교우들간의 긴장과 대립 관계를 암시하거나 명시하는 단락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10,1: 바오로는 고린토 교우들을 마주 대하면 겸손하지만 일단 떨어져 있으면 기고만장하다(참조 10,10).

  2) 10,2: 바오로는 육에 따라(세속적 기준에 따라) 처신한다(참조 5,16; 11,18).

  3) 10,7: "누군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확신한다면,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듯이 우리도 그렇다는 이 사실을…" (참조 11,23; 13,3).

  4) 10,10: "혹자는 말하기를, 비록 그(바오로)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막상 왕림하면 몸은 약하고 말주변도 부끄러울 정도라고 합니다"(참조 4,7-10; 12,7-9; 11,6).

  5) 10,12-18: 적수들은 자신들을 내세운다(참조 5,12; 11,18-23; 7항).

  6) 11,4: "아무나 와서 일찍이 우리가 선포한 적이 없는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일찍이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여러분이 받아들이거나 할 때 여러분은 잘도 참습니다."

  7) 11,5; 12,11: 적수들은 "거물급 사도들"로 자처한다.

  8) 11,6: "내가 비록 말(주변)에 있어서는 서투르다고 할지라도 지식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참조 10,5.10).

  9) 11,7-12: 바오로가 물질적 도움을 사양하다. 바오로는 사도가 아니라서 사양한다고 적수들이 헐뜯다(참조 12,16).

 10) 11,13-15: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위장한 가짜 사도들이요 속여먹는 일꾼들입니다.…(사탄)의 봉사자들이 의로움의 봉사자들로 가장하고 나선다 해도 뭣이 그리 대수롭겠습니까?"

 11) 11,18-23: "많은 이들이 육에 따라 자랑하고 있으니 나도 자랑해 보렵니다. …그래서 누가 여러분을 종살이시켜도, 누가 여러분을 등쳐먹어도, 누가 사로잡아도(참조 2,17), 누가 거드름을 피워도, 누가 여러분의 얼굴을 때려도 여러분은 잘 참아냅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봉사자들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합니다마는 나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

 12) 12,1-12: 적수들은 현시와 계시를 받았노라고 자랑하면서 바오로에게는 그런 신비체험이 없다고 비방했다(12,1-10). 또한 적수들은 기적을 행한다고 뽐내면서 바오로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비방했다(12,12).

 13) 12,16: "나는 (생계비와 전도 비를 요구한 바 없으니)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물욕이 없는 척) 간교해서 속임수로 여러분을 사로잡았다는 것입니다"(참조 11,7-12).

 14) 12,17-18: "내가 여러분에게 보낸 이들 중에서 누군가를 앞잡이로 세워(내가)여러분을 등쳐먹었습니까?" 나는 디도에게 청하여 (고린토로 가라고 했고)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딸려 보냈습니다마는 디도가 여러분을 등쳐먹었습니까?" 바오로는 제3차 전도여행 중 에페소에서 디도 일행을 고린토 교회로 보내어,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해서 모금운동을 벌이도록 한 적이 있었다. 적수들은 이를 두고 바오로를 모함하여, 바오로가 교우들의 헌금을 착복하려 한다고 헐뜯은 것 같다.

 15) 13,3: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요구합니다"(참조 10,7; 12,19).

 

  이제 2고린 1-9장(D 서간 = 화해 편지)에서 바오로와 적수들과 고린토 교우들간의 긴장과 대립 관계를 암시하거나 명시하는 단락들을 살펴보자.

 16) 1,17: 고린토 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하고(1고린 16,5-6; 2고린 1,15-16) 또는 방문을 미룬 까닭에(2고린 1,23; 2,1-2) 바오로는 변덕스럽다는 평을 받았다.

 17) 2,17: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팔아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수한 동기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참조11,20).

 18) 3,1-2: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새삼스럽게 다시 내세워야 할까요? 혹은 우리도 어떤 이들처럼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또는 여러분이 (써 주는) 추천편지들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우리의 (추천)편지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19) 4,2-3: "우리는 간교하게 행동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 하나 하나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내세웁니다. 혹시 우리의 복음이 숨겨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멸망할 이들에게만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20) 5,11-12: "…우리는 하느님께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여러분의 양심 안에서도 밝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또다시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기회를 여러분에게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자랑할 뿐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여러분이 (대꾸할 말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참조 3,1; 10,12).

 21) 5,16: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에 따라 알지 않으렵니다. 설령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알았더라도 이제 더는 (그렇게) 알지 않으렵니다"(참조 10,2; 11,18).

 

  작은 돌 조각들을 모아 모자이크를 만들 듯, 앞에서 나열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제 바오로의 적수들에 대해 종합적 평가를 내릴 차례이다. 적수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고린토 교우들이 아니고 밖에서 온 방랑 전도사들이다(11,4). 그들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임에는 틀림없지만(11,22-23), 팔레스티나 출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인지(케제만, 바레트, 타이쎈),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인지(게오르기, 브른캄, 퍼니쉬, 랑)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들이 고린토에까지 와서 활발히 전도한 사실로 미루어, 아마도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다. 크게봐서, 바오로 사도와 같은 계열에 속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오로와는 사뭇 달리 처신했다. 그들의 처신, 그들의 바오로 비방, 그들에 대한 바오로의 비평을 취합하면 다음과 같다.

  1) 바오로는 마주 대하면 하찮지만 멀리 떨어져 쓴 편지들을 살펴보면 기고만장하다고 적수들은 비방했다(10,1; 참조 10,10).

  2) 바오로는 남이 전도한 곳에 가서 전도하지 않은 데 반해 적수들은 바오로의 전교지인 고린토를 침범했다(10,14-16).

  3) 그들은 어느 교회 또는 어느 실력자의 추천서를 지니고 왔다(3,1).

  4) 바오로와는 달리 그들은 언변도(10,10; 11,6), 건강도(10,10)좋았다.

  5) 그들은 자신들을 내세우고(10,12-18; 11,18-23; 5,12), 거드름을 피우며(11,20), 거물급 사도들로(11,5; 12,11), 참 사도들로(11,13), 그리스도의 봉사자들로(11,23) 행세했다.

  6) 그들은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자부하고(10,7), 그리스도께서 자기들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자만했다(13,3). 아울러 신앙의 지식을 과시했다(11,6).

  7) 그들은 교우들에게 헌금과 환대를 요구하고(11,20) 하느님의 말씀을 팔아먹었다(2,17). 바오로가 고린토 교우들의 물질적 도움을 사양하자, 물욕이 없는 척 간교하게 속임수를 부린다고 악평했다(12,16; 참조 11,7-12).

  8) 예루살렘의 굶주린 교우들을 위해서 모금운동을 전개한 바오로를 모함하여, 헌금을 착복하려 한다고 헐뜯었다(12,17-18).

  9) 스스로 육에 따라(세속적 기준에 따라) 자랑하는 주제에(11,18; 10,12-18; 5,12), 감히 바오로더러 "육에 따라 거닌다"고 헐뜯었다(10,2). 그러나 바오로는 절대로 육에 따라 어느 누구든 평가하지 않았다(5,16).

 10) 적수들은 바오로가 선포하지 않은,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선포하였다(11,4).

 11) 적수들은 현시와 계시를 자랑하고 바오로는 그런 신비체험이 없다고 헐뜯었다(12,1-10).

 12) 적수들은 기적을 자랑하면서 바오로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비방했다(12,12).

 

6. 고린토 후서 구조

화해 편지(D 서간 = 1-9장)

1,1-2              서두 인사와 축복.

1,3-11             환난중에 위로하시는 하느님께 감사기도.

                   마케도니아로 건너오기 전에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관해선(1,8),

                   필립 1,13-14. 20-26을 보라.

1,12-2,13           바오로가 3차 방문을 연기하게 된 사연.

                   바오로는 적수들의 사주로 고린토 교우들이 등을 돌렸다는 소식을 디도 일행에게서 전해 듣고 두번째로 고린토 교회를 방문했다. 그러나 어느 남자 교우에게 심한모욕을 당하고선(2,5-11; 7,12). 에페소 교회로 되돌아왔다. 그는 "몹시 괴롭고 마음이 답답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2,4; 참조 2,3.9; 7,8.12) 편지를 써보냈다(눈물 편지 = C 서간 = 고린토 후서10-13장). "눈물 편지"에서 바오로는 3차 방문을 예고했었다(13,2; 1,15-16). 그러나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와의 관계가 호전될 때까지 3차 방문을 연기하게 되었다(1,23; 2,1-2). 그 결과 고린토 신도들과 적수들로부터 바오로는 변덕스럽다는 비평을 받았다(1,17).

2,14-7,4            사도직에 대한 소신.

                   사도직은 더없이 값지지만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향기요(2,15) 새로운 계약의 봉사자들이다(3,6). 사도직은 영의 봉사직이며(3,8), 의로움의 봉사직이요(3,9). 화해의 봉사직이다(5,18). 사도직은 험난하지만 주님에게 거는 희망으로 지탱된다(4,7-5,10). 사도들은 하느님의 봉사자들로서(6,4) 무수한 고난을 겪어도 꿋꿋하게 봉사한다(6,1-7,4. 단, 6,14-7,1은 후대 가필).

7,5-16              디도에게서 고린토 교우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하다.

8-9장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당부.

 

눈물 편지(C 서간 = 10-13장)

10장               적수들과 고린토 교우들을 꾸짖다.

11,1-12,13          바오로가 본의 아니게 자화자찬하다.

12,14-13,10         3차 고린토 방문 계획.

13,11-13            "눈물 편지" 결어.

 

7. 바오로 이후의 고린토 교회

바오로는 57년 봄에 고린토를 떠나 필립비에서 해방절을 보내고(사도 20,6) 예루살렘에 상경했다가, 성전에서 로마군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가이사리아 총독부에서 두 해 동안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고 나서, 네로 황제에게 상소한 까닭에(사도 25,11) 로마로 압송되어 두 해 동안(60∼62년경) 가택연금 상태에서 지내면서 황제의 재판을 기다렸다(사도 28,30-31). 그 후의 바오로의 행적은 묘연하다.

  57년 봄 바오로가 고린토를 떠난 다음부터 95년경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가 고린토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때까지 약 40년 동안 고린토 교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에 분열이 생기고 지도자들(감독들, 장로들) 몇 사람이 파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와 더불어 로마 교회 사절 3명을 파견하여(65,1) 화합과 일치를 촉구했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우들더러 "복된 사도 바오로의 편지"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하는데, 클레멘스 편지를 검토해 보면, 이는 고린토 전서를 뜻한다. 클레멘스가 고린토 후서를 참고했다는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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