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8월호 <내 인생의 레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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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07-24 ㅣ No.62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나는 지금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이민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2004년 2월 19일  ꡐ2년간의 기러기아빠ꡑ 생활을 청산하고 이민의 길에 올랐다. 피를 나눈 형제들과 잊지 못할 친구, 정이 들대로 든 이웃 형제자매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동생 차에 몸을 싣고는 이역만리 미지의 세상을 향하여 출발,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에 옮겨타며 밖을 바라보니 고향산천 모든 것이 사진들처럼 눈과 머리와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손에 묵주를 들고 ꡒ저의 모든 것을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 성인께 맡깁니다.ꡓ 중얼거리며 기도를 올렸다.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 나그네길에 의지할 것은 당신들뿐이라고…. 나는 이렇게 고심되는 일이 있을 때 하느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느님을 알게 하여주신 조상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크게 두 번째로 특별히 감사를 드린 것이다. 첫 번째는 군에 갈 때였으며 두 번째가 이민의 길에 오르던 그 시각이었다.

ꡒ장손으로서 할 일도 많은데, 연로하신 어머니, 교회에 인생을 바치고 은퇴하여 계신, 몸이 불편하신 작은아버지(신부님)를 모시지 못하고 떠나는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하소서. 성모님, 저의 주보성인이신 성 요셉이시여!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부모님의 건강과 나의 조국의 안녕과 제가 몸담으려는 나라에 하느님께서 은총을 풍부히 내려주시길 빌어주소서.ꡓ

ꡒ미안하다. 집안의 모든 것을 너희들에게 맡긴다.ꡓ 말하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밟고는 동생들과 헤어져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공중에 떠오르니 사랑하는 조국 산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ꡐ하느님, 저는 미지의 세계로 떠납니다ꡑ 하며 묵주알을 얼마나 많이 돌렸는지 손이 축축하여 묵주가 땀에 흠뻑 젖었다. 넓디넓은 태평양 바다를 지나 미국 로스엔젤레스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고 나오니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오는 자식들…. 먼저 와서 생활 터전을 개척해놓은 자식들이다. 마음속으로 고맙고 대견하다. 아이들 차를 타고 달려가며 창 밖을 보니 모든 것이 새롭고 웅장하다. 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때가 되니 먼저 와서 직장을 잡은 아내와 자식들이 돌아와 반겨준다.

동서남북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집 울타리 안에서만 집안 치우기, 잔디 물 주기, 나무 가지치기… 유일한 큰 낙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이다. 혼자만 있다가 아내, 자식들이 직장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쇼핑도 나가게 된다. 이것이 매일매일의 일과였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삶을 돌이켜본다. 7대째 물려받은 신앙 속에서 60평생을 살아오며 성당, 직장, 가정밖에 모르던 나였기에 교구일이다 본당일이다, 어떤 때는 몸이 둘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보람있던 일, 절망했던 일… 모든 것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처음에는 자식들과 함께 LA 한인성당 주일미사에만 참례했었다. 아녜스성당, 바실성당으로 전전하며 4개월 동안을 정착하지 못하고 다녔다. 그런데 한국에서 교회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뛰어다니던 버릇이 있어서 좀이 쑤셨다. 사실 언어가 안 되어서 누가 말을 걸어올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니 온몸 안 아픈 곳이 없게 되었다. 보건소에서 진찰받고 약도 타 먹어보고, 병원에서 진찰도 하고 약도 지어 먹어도 별 차도가 없었다. 의사가 정신적인 것, 신경성 증상이기에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혼자 괴로웠다. 누가 이 내 마음을 알까? 그렇게 6개월을 지낸 후 머리를 깎으러 간 미장원에서 가까운 한인성당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천주교 신자를 소개해주었다. 그분을 따라 나가게 된 곳이 웨스코비나 성 크리스토퍼 한인성당이다. 처음 갔으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분이 소개시켜주는 대로 인사를 하였다. 이제부터라도 사람들을 사귀고 삶을 개척해나가야지.

한국에서는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 교구에서나 본당에서나 사회에서 누구라는 것,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실수를 하여도 ꡒ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ꡓ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여기서는 서로 두세 겹의 벽을 쌓고 바라본다. 이것이 타지 생활의 서러움인가 생각하며 외로운 개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소개받은 분이 참으로 진실하게 인도해 주시어 지역구 모임에도 참석하게 되고 레지오 마리애, 성령기도회도 소개받았다.

처음에는 천주의 성모 Pr.에서 단원들이 돌아가며 교통편(차량)을 제공해주었는데 그것이 잘 안 되어서 못 나갔다. 그런데 구세주의 어머니 Pr.에서 단원들이 돌아가며 교통편을 마련해주어 쁘레시디움에 입단하게 되었다. 매우 고마웠다. 몇 번 신세를 지다가 자식들 덕분에 단원들 신세도 면하게 되었다.

6개월이라는 공백이 있었기에 나는 3개월의 수련기간을 거쳐 2004년 11월 24일 구세주의 어머니 쁘레시디움 단원으로 성령께 다시 선서를 하였다. 이민생활이란 것이 여러 가지로 힘들며 이민 와서 오래 산 사람들은 ꡐ시간이 돈ꡑ이라고들 한다. 바쁜 시간을 쪼개 성당에서 봉사하고 레지오에 입단하여 봉사하는 단원들을 바라보면 모두가 존경스럽다. 사람들도 조금씩 사귀고 레지오 활동도 하다 보니 그렇게 아프던 몸도 많이 회복되어 가고 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속해 있는 구세주의 어머니 쁘레시디움은 초대단장 박진우(그레고리오) 형제를 중심으로 하여 기틀을 다졌으며, 지금은 3대 조태준(대건안드레아) 단장이 레지오 규율을 충실히 지키며 희생정신으로 쁘레시디움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

현재 우리 구세주의 어머니 쁘레시디움(지도신부: 이용희․사도요한)은 부단장 최태환(아우구스티노), 그리고 박진우(그레고리오), 양덕주(크리스토퍼), 김헌(베네딕토), 양철화(요셉), 이렇게 여덟 명이 성모님의 정신에 따라 신심을 쌓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며 성모님의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고 있다.

이곳의 활동 환경은 한국에서의 환경과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가정방문이나 직장방문은 방문하는 사람의 사정에 따라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방문대상자가 초청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 초상이 났을 경우 한국에서는 밤샘도 하고 시신을 모신 곳에서 계속 기도도 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저녁이 되면 장례식장의 문을 닫기 때문에 아무도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미국에서는 시신을 가정에 모실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저녁에는 돌아가신 분을 위한 기도를 각자 자기 집에서 해야 한다.

레지오의 주간 활동은 쉬는 교우 돌보기(가정에 주보 보내기 등), 사회복지시설 방문(꽃동네 봉사), 가두선교(주로 한국마켓), 상가 방문(장례식장 방문), 예비신자 세례받도록 하기, 기일 연도 바치기 등을 주로 하고 있다.

이번 부활절에는 우리 단장님이 6명을 교리반에 인도하여 4명이 세례를 받도록 했다. 여기서는 교리반에 한 명을 인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우리 구세주의 어머니 쁘레시디움은 단장님 말씀대로 기도하는 단원, 선교하는 단원, 봉사하는 단원으로서 사회악과 대적하며 본당 발전과 레지오 발전에 앞장설 것이며 개인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레지오 단원이 될 것을 다짐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모국의 레지오 단원님들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열심히 활동하려고 하는 교포 레지오 단원들을 위하여 많은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_양철화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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