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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제]현대주의적인 사상들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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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배 [worker] 쪽지 캡슐

2000-02-19 ㅣ No.531

 

여성사제직을 주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우선 그들의 주장에는 꼭 사제독신제의 폐지, 한국교회의 토착화, 주교투표제, 평신도의 성직참여가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추천하는 책들은 "교회 이대로 좋은가, 교회 순결한 창녀" 등의 진보적인 책들이며 그 뒤에는 서공석, 정양모, 이제민 등 개혁적인 신부님들이 굳건하게 뒤를 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그 진보적인 신부님들의 사상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여성사제직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반대하는 것은 여성사제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위에서 언급한 진보적인 현대주의적인 사상들을 모두 배격합니다. 그것은 제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젊은이여서가 아니라 그 사상이라는 것들이 가톨릭 안에 여과 없이 들어와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분열을 초래하고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 안에 침투하여 신앙을 좀 먹고 교회를 이간질 시켰던 사상들은 시대에 따라 존재하였습니다. 가까이에서 따져보면 인문주의에서부터 근대주의, 그리고 실존주의에서 합리주의, 그리고 현대주의적인 모든 사상들은 가톨릭 교회 안에 스며들어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교회를 주장하며 우리의 교회는 잘못되어 왔으며 시대의 정신에 맞추어 그만큼 쇄신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오고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얼마만큼 개혁되어야 하는가에 따라서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겉보기엔 맞는 말입니다. 시대의 예언자다운 외침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무엇과 비교하여 잘못되었다는 것일까요. 교회를 잘못되었다고 판단되어지는 비유의 대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민주주의’ 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멋들어지게 교회와 민주주의를 혼합한 ’교회민주주의’라는 사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과연 교회는 민주적으로 변화되어야만 그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요. ’자유와 평등’. 정말 좋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실현시켜야 할 과제입니다. 이 단어가 존재하기에 민주주의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이 단어를 접목시키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에 대해선 의구심이 듭니다.

 

여성사제직을 논할 때 분명 여성을 사제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명백한 신학적 근거는 없으며 이는 성서에도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상적 기반을 민주주의에서 찾게 된 것입니다. 마침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최상의 가치인 냥 선전되는 세상에서 그 설득력은 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점차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교회의 제도나 전례, 영적 가치관 등을 구 시대의 산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상에 여성사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인 여성이 사제를 하겠다는 이 주장을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런 수순으로 진행되어 간다면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사제독신제. 이것도 역시 명백한 신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성서에도 없습니다. 반면, 결혼한 사람도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때문에 사제독신제의 폐지도 역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 하에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대세입니다.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서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교회법은 분명 민주주의 적인 사상에 입각해서 보면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인 사고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교회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초보수적인 단체로 비추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교투표제와 본당신부 투표제. 이것도 역시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평등에 관한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근거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주교, 본당신부 임명제는 아주 비효율적이고 반시대적인 구태의연한 사고일 뿐입니다.. 교회의 주인인 신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여 우리의 목자를 뽑겠다고 하면 어느 누가 민주주의에 맛들여진 신자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현대적인 사상에서 바라보자면 주교와 본당사제의 임명은 분명 획일적이고 독재적인 것이며 민의를 저버린 관료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제도입니다. 때문에 일부 깨어 있다고 자처하는 급진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본당공동체나 사제단들은 이 제도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례로 급진적인 독일교회의 어떤 교구에서 주교를 임명할 때 독일 교회의 사제단이 이 사람만은 주교로 뽑아서는 안된다는 명단을 교황청에 제출했었던 사례도 있습니다. 교황청에서 명단 안에 있는 분을 주교를 임명하자 독일 사제단은 엄청나게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천, 낙선운동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적인 면에서는 반갑지만 교회적으론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 그 대로 본당이나 사제단에서 이 분만은 안 된다는 명단을 제출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서입니다.

 

물론 여성사제직, 주교투표제, 사제독신제의 정당성에 대해 성서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성서를 자의적으로 멋대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성사제직에 대해 "하지 말라고 성서에 나와 있지 않으니 해도 되도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합니다. 이 얼마나 현대적인 해석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낙태에 관한 윤리도 그 당시에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나와 있지 않으니 해도 된다고 주장한다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에서 진보적인 독일교회에서는 걸핏하면 교황청에 반대하여 낙태를 인정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성서에 사도바오로께서 집회 중에 여자는 조용히 하라고 했다고 해서, 머리에 가리울 것을 써야 한다고 해서 바오로 사도를 ’남존여비적’인 사상을 가졌다고 해석합니다. 마치 개신교신자들처럼 전후사정 따져보지 않고 액면그대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리한 성서구절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않거나 "그건 거기에 사용될 적절한 말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성서는 해석하는 자의 편이 되는 것이고 결국 성서에서 진리를 찾기란 불가능해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서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일반대중들에게 친근히 다가오면서 많은 이들이 성서에서 영적인 자양분을 얻게되고 하느님의 말씀이 인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논쟁 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들고 나오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성서의 해석은 분명 교도권에 위임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해석하는 자가 바로 교도권입니다. 분명 여성사제직, 사제 독신제 등에 관한 사항들은 베드로 사도좌에 의해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지역교회마다, 지방교회마다, 사제마다 새로운 해석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뒷받침으로 이용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현대주의 적인 사상을 가진 이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것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과연 그들은 공의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성서의 자의적인 해석처럼 공의회의 정신도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가톨릭 정신으로의 회귀라는 ’쇄신’이라는 단어를 진보, 개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에 관한 교령, 전례에 관한 교령 등을 자유와 평등과 개혁이라는 명제에 부합하게 해석합니다. 때문에 그만큼 교회 안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단어가 전혀 낯설지 않고 자연스럽게 된 것입니다.

 

저도 역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제가 결혼하여 어느 날 잘 살고 있는데 사제성소에로의 강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시다. 누가 저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왜 사제가 될 수 없겠습니까. 개신교와 성공회도 결혼하는데, 베드로 사도도 결혼했는데! 더군다나 세상은 민주주의 아닙니까? 저의 이러한 종교적 원의를 막는다면 교회는 썩어 있는 것입니다. 개혁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깨어있는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아내. 그녀도 역시 성소를 받았다면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될 수 없겠습니까. 여성도 사제가 될 수 있고 결혼한 남성도 사제가 될 수 있는데 결혼한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다면 이는 분명한 여성에 대한 억압이 아니겠습니까! 고자도 될 수 있습니다. 절름발이도 될 수 있습니다. 게이도 되고 레즈비언도 될 수 있습니다. 왜 안되겠습니까?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지닌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인간인데!

 

그러나 나는 사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사제가 될 만한 은총을 받을 만한 인간도 못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가 저의 사제직을 가능하게 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라는 곳,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는 그곳은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하는 나라이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아닙니다. 오직 그 나라는 하느님께서 가지고 오시고 우리에게 무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 정말 좋은 구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지 못합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께서 만드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현세의 교회에서 하느님 나라다운 교회를 만들자는 현대주의자들의 구호에 박수를 보냅니다. 저 역시 그런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는 그 나라는 결코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모이는 곳에는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희생이 꼭 필요하므로. 저는 그 희생이 저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희생이라는 것.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권위주의에 의한 억압이라 말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사랑의 수위성을 위해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많은 사도들, 그리고 교부들은 그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였고 또 많은 동정녀들도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교회와 사랑을 위해 포기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제껏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거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신의 몫을 세상의 사상에 의지하여 찾으려 한다면 교회는 갈갈이 찢기어 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더라도 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나중에 평신도 안에서 검증된 사람을 반성직자로 선출하는 제도(마치 교회의 장로제처럼)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 저라고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사제성소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에 최종적으로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면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여성사제에 대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논리로써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그대들은 위에서 말한 다양한 인간들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대들이 세상이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어져 있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억압받고 살아왔다고 주장한다면 그들도 역시 그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들의 주장이 맞다면, 그래서 사제가 될 수 있다면 모든 인간들도 사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만은 사제가 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대들의 주장은 모순된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성해방은 새로운 가모장적 권위주의의 탄생에 불과하며 계속되는 억압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보적인 현대적인 사상을 무장한 그대들은 모든 이들에게 사제직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게 이루어진 교회의 모습은 어떨지, 그 시대의 사제상은 어떠한 모습이 될는지 상상한다는 것은 매우 두렵습니다.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교회. 그런 교회를 꿈꾸면 마음이 설레야 할텐데 저는 이렇게 두렵기만 합니다.

 

여성사제를 주장하시는 분들. 하고 싶다면 하십시오. 어쩌면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여성사제직을 찬성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의 주장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과연 교회에 얼마나 유익한 일이 된다고 가정하기에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지 알고 싶습니다. 저 다음에 누가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올릴 지 모르겠으나 찬성하는 분이시라면 여성사제가 인준되었을 때 여성해방 말고도 또 어떤 것이 교회에 유익한 것이 될 것인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성사제와 교회민주주의가 실현되었을 때 막연히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교회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무마하려하지 마시고 구체적인 미래교회의 모습을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여성사제에 대한 찬반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중간적인 입장에 서 계신 분들께도 말씀드립니다. 여성해방이나, 여성사제문제는 가톨릭의 미래를 놓고 볼 때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니 매우 지엽적인 사항입니다. 이제는 여성사제에 대해 국한된 시각에서 벗어나 가톨릭 교회의 미래라는 시각 속에서 이 문제를 대하셨으면 합니다. 여성과 남성, 사제직과 평신도, 억압과 평등의 관점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와 세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셨으면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외침이 아니라 지혜라는 침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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