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화

2006년 10월 29일 세나뚜스 월례회의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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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뚜스 [senatus] 쪽지 캡슐

2006-11-01 ㅣ No.42

 

세나뚜스 월례회의 훈화25.(2006.10.29)

영적독서 : 거룩한 십자가의 왕도(王道)3.(준주성범 2권 12장)


5. 네가 감심(甘心)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십자가가 너를 지고 갈 것이고 네가 목적하는 목적지로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끊이지 않겠지만 고통이 없는 저 세계로 너를 인도하리라. 그러나 네가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면, 길만 더디고 더 어렵기만 하고 그렇다고 그 십자가를 없애지도 못한다. 한 가지 십자가를 던져 버리면 또 다른 십자가가 올 것이고, 아마 그것은 더 어려운 십자가일지도 모른다.

6. 죽는 인간이 다 피하지 못하는 것을 너만 피하려 하면 되겠느냐. 그 어느 성인이 세상에서 십자가 없이 고통 없이 살으셨느냐?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한 시간이라도 장차 당할 수난을 생각하고 괴롭게 지내지 않으신 적이 없으시다. “그리스도 수난을 당한 후 부활해서 그 영광에 들게 마련된 것이다.”(루가 24, 26) 그러니 네가 어찌 거룩한 십자가의 왕도(王道) 이외에 다른 길을 찾겠느냐?

7. 그리스도의 전 일생이 십자가였고 박해 당하신 것인데, 너는 어찌 편하게만 살려고 하고 즐거워하려고만 하느냐? 고통을 참아 나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찾는다면 너는 그르치고 또 그르친다. 이 죽고야 마는 현세 생활은 고통에 차 있고, 어디를 가든지 십자가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덕에 진보할수록 흔히 더 큰 십자가를 만난다. 그것은 사랑이 커갈수록 자신을 억제하는 고통이 더 커지는 까닭이다.

8.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십자가를 잘 참음으로 해서 큰 효과를 보는 줄을 알게 되는 까닭이다. 십자가를 감심(甘心)으로 지고 가면, 고통 중에도 하느님이 위로해 주시리라는 희망에 힘을 얻는다. 그리고 고통으로 육체가 제어되면 그만큼 영혼은 내적 은총으로 견실해진다. 또 어떤 때는 이런 용기도 나서 고통과 역경을 감수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고통과 역경 없이는 살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 더 어려운 일이라도 참아 견디면 그만큼 더 하느님께 가까워짐을 아는 까닭이다. 이런 심정은 사람이 제 힘으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의 작용이다. 허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자연적으로는 지겨워하고 피하려는 것을 정신으로 이겨 참아 보고 심지어 사랑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심정은 은총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훈화>

찬미예수님,

제가 신학교 1학년일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니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긴장을 했는지 새벽에도 잘 일어나고 기도시간에도 잘 나갔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긴장이 풀어지면서 계속 늦잠을 자고 기도시간에도 지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시간에 지각을 했는데 생활부장을 하는 선배님이, 오늘 저녁식사 후에 자기 방으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야단을 좀 맞겠거니 걱정을 하면서 선배님 방에 갔는데 선배님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서 있었고 앞으로 기도시간에 늦지 말라는 뼛속 깊이 느껴지는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에 생각에 잠겼고, “내가 왜 이러는가?”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학교의 규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밤늦게 공부를 할 수도 있었고, 운동도 하고 싶은 때에 할 수 있었고, 또 늦잠을 자면 어머니께서 깨워주시니 참 편했었죠. 하지만 신학교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해야 하며, 정해진 시간에만 운동할 수 있고, 정해진 시간에 공부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야 합니다. 하나의 틀에 내 자신을 맞춰야 하니,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1학년 때의 삶은 그에 적응하느라 매우 힘들었습니다.

평상시라면 한참 TV도 보고 놀 시간이지만 취침해야 합니다. 아침잠이 많은 저에게는 기상시간도 참으로 고역이었습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성당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죠. 미사 전의 묵상시간은 거의 졸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저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왜 이러는가?” 자신을 질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선배님한테 혼난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죠. 그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규칙에 끌려다닐 것인가? 어짜피 이곳에서 살 것이라면 규칙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내가 끌고 가며 살아보자.”

그 후로 저는 시계를 5분 빠르게 맞추었습니다. 모든 것을 5분 일찍 살아보자는 뜻이었죠. 그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서 미사시간, 기도시간, 수업시간에 조금씩 일찍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하니까 시간에 쫓기는 일도 줄어들었습니다. 때로는 생각한 것같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들이니까 다급해서 서두르는 일도 적어지며, 서두르다가 빼먹는 실수도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 안에서 짊어지게 되는 십자가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십자가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피하려고만 하다가는 오히려 더 큰 낭패를 본다고 하는 것보다, 어차피 다가올 십자가라면 기쁘게 맞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예수님을 닮는 일이라면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당장은 힘들어서 고생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통은 보람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고생은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 고통이 힘들어서 출산을 거부한다면 갓난아이가 주는 행복을 그 누가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산에 오르는 것이 힘들어서 등산을 포기한다면 어느 누가 정상에서 느끼는 쾌감, 산뜻한 공기를 맛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게 더 큰 약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선배님의 따끔한 충고를 받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늘 규칙에 끌려 다니다가 교수신부님이나 원감신부님께 끌려가서 반성문을 썼을 것이고, 또 그 일이 반복되었다면 신부도 되지 못하고 쫓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생활의 변화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참아내야 가능합니다. 변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어떻게 절제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노력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더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과 십자가의 고통이 함께 있듯이 우리 삶의 십자가와 주님의 은총이 함께 있음을 기억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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