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이 시대를 사제로 산다는 건> - 강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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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peace-maker] 쪽지 캡슐

2008-07-23 ㅣ No.6569


2008년 06년 01일 연중 제9주일                       **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 **

<이 시대를 사제로 산다는 건>

어젯밤 늦게 암으로 투병 중이신 형제님 한 분을 급히 찾아가 뵙고, 이제는 기력도 별로 남질 않아 투미해진 모습으로, 
겨우겨우 성체를 넘기시는 그 힘겨움에 눈물 한 번 찔끔 흘리고 돌아와 ‘내일 미사 강론을 어떻게 하나?’ 또 ‘오늘 교중 
미사 마치고 젊은 부부들 첫 모임 때 뭘 말씀드리지?’ 그리고 오후에는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 미사, 더구나 ‘영어도 짧은 
내가 도대체 무슨 수로 그들 앞에 서나?’

두 시를 넘겨 겨우 잠을 청해 오늘 새벽미사를 마치고 방금 전까지 또 책상머리에 붙어 있는 조그만 예수님 성화를 보며 
“제가 도대체 어떤 말을 전해야 하지요?” 하고는 컴퓨터를 켜니, 밤 사이 세상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있습니다.

쇠고기 파동으로 시작된 이 요동치는 정국이 이제는 쇠고기 문제를 넘어 국민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 정권을 향한 ‘저항의 
촛불’로 번져나가자 공권력은 그 촛불을 끈답시고 물대포를 쏘고 전경들을 동원해 군화로 짓밟고 곤봉으로 때리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세상이 어떻게 될려고 이러나, 다시 20년 전의 그 독재의 시절로 회귀하려는가... 평소 애국심도 별로 없는 사제가 
답답한 마음에 이런 저런 동영상을 넘기다가, 문득, 대학생들이 주권 없는 쇠고기 협정에 반대하여 삭발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주 옛되 보이는 여대생이었습니다. 예쁜 단발머리에 전기 바리깡으로 머리를 미는데 이 여학생, 얼굴로는 미소를 지으
면서도 어쩔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자꾸 훔쳐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겨우 스무 한 두 살? 한창 예쁨을 뽐내고 멋 
부릴 나이에, 뭘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이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온 몸의 말로, 눈물 흘리며 삭발을 하는 그 모습이, 
이런 말씀 드려 뭐 합니다만, 그 부모가 된 심정으로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촛불 끄려고 물대포에, 협박에, 난리 치지 마시고, 제발 국민들 가슴 속에 있는 <천불>을 꺼주시면 되는 일인 것을! 아무 
대책 없이 무방비로 먹어야 하는 아이들, 내 자식 식탁에 뭐 하나 맘 놓고 올릴 수 없는 어머니들, 그리고 아무리 키워봐야 
소 사료 값이 소 값을 잡아먹을 판에 문 닫을 일만 남은 농민들의 가슴에는 잔뜩 불 질러 놓고, 정작 이 가슴에 피어 오른 
불 끌 생각은 않고 그저 ‘그 초 누가 사줬고’, ‘누가 촛불시위 주동하고’, ‘누가 배후세력’인지, 그 ‘촛불’ 끄려는 일에만 급급
한 정도의 인식이 오히려 더 가슴 속 천불을 일으킵니다.

이 시대의 사제로 산다는 일이 무엇인가? 오늘 강론대에 오르면서도 내내 이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
습니다. 저도 아름다운 말과 숭고한 희망, 그리고 거룩함 가득한 언어들로 주일 독서와 복음, 신자들에게 정성 다해 설교하
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가슴에도 하나 지펴 오르는 촛불이 있으니 그것은 제가 최소한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사제로서의 ‘정체성’입
니다. 그냥 편하게 살고 싶고, 그냥 아쉬운 소리 안하고, 그저 신자들이 주시는 밥 꼭꼭 챙겨먹으며 성당이라는 이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신부요, 그렇게 살아도 사제입니다. 적당히 흰 머리도 늘고, 세월만큼 영성도 쌓여 “우리 신부님” 소리 들어
가며 대접 받고 또 때 되면 ‘어쩔 수 없이’ 골프도 배우고, ‘핸디가 몇 이니...’ 하는 소리 아무렇지도 않게 고급 식당에서 히히
덕거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살기에 제 가슴에 켜져 있는 작은 촛불 하나는 마치 날카로운 거울처럼 저 자신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제인가? 신자들에게 맘 편한 소리 해주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며, 우리 하나 나선다고 뭔 
세상이 바뀔 일이라고 그냥 상관없는 일로 덮어주면 다 세월이 해결할 일, 우리는 “우리 입에 들어올 것이나 부지런히 챙기
며 살아갑시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제 한 평생 매일 같이 미사를 하고, 아무리 제가 대과(大過)없이 그럭저럭 무난한 사제생활을 했다고 평을 누구에겐
가 듣는다 할지라도, 오늘 이 자리, 오늘 이 말씀 앞에서는 꼼짝 마라! 가 됩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저희가 얼마나 주님의 이름으로 숱한 기도를 드렸는지, 우리 자신은 결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 모셨고, 또 얼마나 그 이름 때문에 이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던지를 저는 감출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십니다. 그럼 어떤 사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주님, 주님!” 부르면서 저는 얼마나 많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을 구했는지 모릅니다. 안된다고, 되게 해 달라고, 
이것만은 꼭 지켜달라고, 이것 안 되면 당신을 영영 버릴 거라고 협박을 일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인지, 
그것이 벌인지를 몰랐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행위’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얼마나 사람의 일과 사람의 뜻과 사람의 욕심에 
멍에처럼 얽매여 있었는지요... 저 사람 때문에, 저 신자 때문에, 저 신부 때문에... 무슨 일 때문에, 어떤 상처 때문에, 오만
가지 변명과 핑계에는 재빠르면서도, 하느님이 내 결정과 내 선택의 이유와 원인에는 그다지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일관했습니다. 돌아보니 그렇습니다. 내 인생을 돌이켜 내가 과연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이루어냈나를 곰곰이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내 뜻 내 계획, 내 프로그램, 이거 하나에 이다지도 얽매여, 그야말로 놓지도 못하고 버리
지도 못하는 <전전긍긍>이, 내 인생의 이름표로 남는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이 무슨 이 세상의 법으로 무법, 불법을 가리실 분이 
아니십니다. 불법은 바로 하느님 법에 대한 불법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요, 자비의 법이며 정의와 평화의 법입니다. 

세상의 법은 대단히 교묘하기 짝이 없어서, 재벌들의 수천억 탈세에는 ‘대자대비’하면서도 없는 사람들,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 장애우, 일용직 근로자들의 외침에는 ‘엄정엄단’ 하는 속 뒤집어질 지경인지라 그다지 믿을 것도 못되지만, 하느님
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이러합니다. 하느님의 법은 <돌보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오랜 세월 속에 체득된 
하느님이요,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유일법입니다.

구약에서 모세는 물었습니다. “야훼여, 당신이 어디에 계신지, 당신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저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여주십시오.” 하였을 제, “내 모든 선을 너의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 가엾이 여긴다.”(33,19). 

야훼의 모습이 확인되는 장소는 바로 선이 이루어지는 곳,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길 줄 아는’ 그 현장이요, 그 마음이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유대교가 믿은 하느님은 바로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이었고, 그 하느
님의 일을 실천하는 선한 사람 안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는 평생을 걸쳐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그 마음을 살려내는 실천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귀한 성전입니다. 마음은 다 
그렇게 먹습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길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 마음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
다.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마음에서 기인되는 “실천”입니다. 

실천으로,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꼭 기억해두십시오. 실천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도 알고, 백날 마음으로는 하느님도 
믿고 뭐도 믿고 다 믿는다 해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기도도 실천이고 사랑도 실천이고 봉사와 희생도 실천입니다. 
십자가도 실천입니다. 마음만 먹는 것은 믿음도 아니고 뭣도 아닙니다. 마음만 가지고 결코 구원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 따라 실행하는 이는 어떨 것이라 했습니까? “모두 자기 집을 반석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의 집은 어떻게 된다구요?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1,27)

이제 저는 저의 몫을 다하였습니다. 결정과 실행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여전히 그냥 좋은 소리 한 마디 들었네... 하고 
아무런 실행도 하지 않은 것도 여러분의 탓이요, 내 인생에도 내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열매, 하느님의 뜻이 좀 이루어
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신발끈을 고쳐 매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로 작정하시는 것도 여러분의 ‘복’이요, 여러분의 
‘은총’입니다.

사제는 이것을 위해 존재합니다. 저도 제 마음 속의 촛불 하나 지피는 일이 결국 이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실천 없이 좋은 말 전하고 속편한 믿음 강조하며 헌금이나 착착 잘 거두어들이면 그만이라는 거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제로서 제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해야 함이 저의 구원에도 절실합니다.” 

지난 주일 저녁 8시 30분 KBS 스페셜에서 길 위의 신부들이라는 다큐가 소개 되었습니다. 삼성 사건으로 무지하게 욕을 
얻어먹은 정의구현 사제단의 소박한 일상을 다룬 내용이었습니다.

기자회견에 등장한 신부 더러 ‘정치 신부’네, 뭐네 떠들어댔던 사람들, 그 속에 함께 서 있던 사제의 한 사람으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이 칠순의 노인 신부가 아직도 길에서 ‘잡니다’. 대통령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 
한 자락이라도 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뭇 생명들 돌보고 가엾게 여길 줄 아는 그 마음 하나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제들은 직접 봉고를 몰며 시골길 할머니 
할아버지들 한 분이라도 더 미사에 참여시키려고 주일이면 조그만 성당 문지기부터 사무장까지 도맡아 합니다. 그런 ‘밑
바닥 신부’들이 가장 소외되고 가장 누추해진, 이제는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조차 없게 된 이들을 대신하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천이고, 그것이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들이 TV에 나와서 말하면 세상이 바뀌고 변화될 것이기 때문에 잘난
척하려고 영웅 심리에 부추겨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하고 전해야 하고 선포해야 하는 것이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잘나고 높은 사람은 그냥 둬도 잘 삽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 반대편의 사람
들이 더 많은 곳입니다. 사제가 서야 하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있는 자를 대변하고 권력자를 비호했던 사제단이 있으면 한 
번 말씀해보십시오.

평택에서 문정현 신부님과 하룻밤 천막에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칠순 노구가 비닐 위에 침낭 덮으시는데, 문득 그런 생각
이 들었습니다. 내 나이 70이 되어도 나도 이 신부님처럼 이렇게 길에 늙어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한동안 말을 않고 있다가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신부님. 외롭지 않으세요?” 그 때 그 노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외롭지. 그래도 괜찮아 우리 예수 형님도 평생 길에서 사시지 않았나? 난 다시 나도 이 길에서 살꺼야...” 
하셨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이 됩시다. 배 부르고 등 따수워서 산다는 일이 뭔지, 깨어 있는 다는 것이 뭔지, 그저 이 한 육신 잘 보위하
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얼마나 서글픈 목숨인지, 부디 여러분 모두 든든한 반석 위에 집, 여러분 신앙의 집 잘 세우셔서, 
이 세상 모진 풍파가 불어닥쳐도, 죽음의 마지막 한 파가 내 육신을 발기발기 도려내어도, 결코 끄덕하지 않는 믿음의 튼실한 
집, 잘 지으시기를, 이 시대를 아파하며 살아야 하는 이 부덕한 젊은 사제, 합장하여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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