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잘못한 형제 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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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09-03 ㅣ No.471

 

 

(연중제23주일 강론)

 

제1독서: 에제 33,7-9

제2독서: 로마 13,8-10

복음:  마태 18,15-20

잘못한 형제 구하기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연상시키는 제목!)

  

   제가 군 복무 시절에 겪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내무반의 고참병 한 사람이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신부된다고 했지? 나도 누나가 성당에 다녀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었어. 그런데 한 번은 주일에 누나와 함께 성당에 갔는데, 미사 끝나고 나오니까 신발장에 벗어 두었던 내 신발이 없어진 거야. 새 신발이었는데 말이야. 화가 나서 성당에 다시 안 나갔어. 성당에도 도둑놈이 있으면 어떻게 하냐?” (20,30년 전에 시골 성당은 마루 바닥인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성당 입구에 있는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 놓고 성당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새롭게 태어나 하느님 뜻대로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죄와 잘못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믿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고, 믿지 않은 이들에게는 교회를 비난하는 구실이 됩니다. 사실 신자들이 범하는 죄와 잘못으로 인한 문제는 교회가 처음부터 안고 있었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심각하게 잘못을 저지르는 신자들 때문에 적지 않게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1고린 5,1-13; 갈라 6,1; 2테살 3,14-15 참조).

  이렇게 교회 내의 죄와 잘못은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안겨주는데,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르침을 줍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잘못한 이들에 대한 대처는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사람 존중’의 정신이 배어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잘못한 형제를 일대일로 만나서 그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입니다. 보통은 한 사람의 잘못을 직접 일깨워주기보다는 뒤에서 흉을 보고 주위에 소문을 내는데, 이런 경우 잘못의 당사자는 회개는커녕 억하심정으로 더욱 빗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먼저 일대일의 대화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대일의 대화가 효과를 보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한 두 사람 더 데리고 가서 다시 한 번 설득하는 것입니다.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얘기하면 귀담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한 이가 회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기회를 주는 조처라고 하겠습니다. 이것마저도 실패로 끝나면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교회 공동체에 잘못한 이를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교회 공동체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면,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라도 그 사람과 거리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오로 사도는 "묵은 누룩"(1고린 5,7)이 공동체 전체를 부패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악행을 일삼는 일부 신자들을 파문하도록 지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음행을 일삼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남을 중항하거나 술치하거나 약탈하거나 한다면 그런 자와는 상종하지도 말고 음식을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1고린 5,11). 어쩌면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교회 공동체에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주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주님과 교회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이들이 다시 교회 공동체와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 중에 기억하는 것은 잊지 말아야겠지요.

 

   신앙인이 큰 잘못을 하면 당사자의 구원이 위협받는 것은 물론 교회의 신뢰성마저도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잘못을 묵인해서는 안 되고,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 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제1독서)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훈계는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정신’(제2독서) 안에서 형제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글/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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