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성당 게시판

부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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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michaelhun] 쪽지 캡슐

2001-04-28 ㅣ No.592

부활 제3주일(다해. 2001. 4. 29)

                                           제1독서 : 사도 5, 27b∼32. 40b∼41

                                           제2독서 : 묵시 5, 11 ∼ 14

                                           복   음 : 요한 21, 1 ∼ 19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친구'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학창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선생님들께서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것이 아주 당연하였습니다.  그때는 선생님이 매를 들면 당연히 맞아야 하고, 야단을 맞으면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가르쳐 주시는 데로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육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영재교육이니, 감성교육이니 아마 더 좋은 교육의 효과를 내고자 하는 여러 가지의 시도일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그것이 교육을 받는 이들을 생각지 않고 결과만을 가지고 실행된다면 그것은 실패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배우는 사람의 눈 높이에 맞추어 교육해야 한다는 눈 높이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중심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한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 중에 처음과 두 번째의 질문은 세 번째의 질문과 다릅니다.  처음과 두 번째의 질문은 자기 희생적이며 보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묻는 것입니다.  즉 아가페 적인 사랑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모습,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엽게 여기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그저 단순히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좋아하느냐 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여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 가서는 질문을 바꾸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답에 맞는 질문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질문을 이해 못한 것은 알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다고 마음이 슬픈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당신을 모른다고 자신의 목숨만을 위해 당신을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윽박지르고 책망하거나 책임을 추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하느냐?" 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이 질문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추궁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태도를 묻는 것입니다.  "네가 과거에 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어도, 네가 과거에 나를 수없이 배반했어도 '지금'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하는 물음입니다.  어쨌든 베드로 사도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물음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응답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는 앞으로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응답을 들으시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분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로 당신께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드러낼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장차 참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신 말씀입니다.  그 후 베드로의 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삶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사랑합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누구보다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느님께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 많이 하기는 했어도 그저 기도에 쓰이는 형식적인 문구나 하느님께 많이 붙이는 수식어 정도로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느님과 사랑이라는 말은 늘 붙어 다니는 말이지만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지는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떳떳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 삶 속에서 아이들의 눈 높이에 맞추는 사랑입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눈 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의 눈 높이에 맞추어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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