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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正義, justice)의 정의와 그 적용 예들.. 799_justice [교리학습_의로움] [교리학습_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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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8 ㅣ No.799

 
+ 찬미 예수님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3월 1일]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의로움/올바름’(righteousness)‘정의’(正義, justice)의 차이점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묵상 동영상(들)을 꼭 시청/청취하도록 하라. 특히, ‘정의로운 자(the just)들’ 중에서만 오로지 ‘의로운 자(the righteous)들’이 있을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21.htm <----- 묵상 동영상을 필히 시청/철취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45.htm <----- 묵상 동영상을 필히 시청/청취 요망

[이상, 2022년 3월 1일자 내용 추가 끝]
 
1. 서론
 
우리들은 평소에 자신의 생각 혹은 주장을 상대방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혹은 관철시키기 위하여 "정의(正義, justice)"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상당히 선호하는 편입니다.
 
참고: 이 글에서는 이 단어의 사용을 왜 우리들이 선호하는지에 대하여서는 살펴보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이 단어의 의미도 모르는 상태에서, 왜 우리들이 이 단어의 사용을 선호하는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정의롭다"를 뜻하는 한자 단어인 "옳을 의(義)" 글자의 의미가 "창으로 양을 찌르는" 뜻이라고 말씀하시던 분도 계시더군요. 제사 상에 올려 놓으려면 일단 죽여야 하는데, 왜 이것이 "옳을 의(義)"  글자의 뜻이라는 것인지요?
 
"목마른 사람이 결국에 우물 파더라.."고 다들 말씀하시는데, 상당히 답답하여 네이버 한자사전을 들여다 보니, 義 글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나(我)의 마음 씀을 양(羊)처럼 착하고 의리있게 가진다는 뜻을 합(合)하여 '옳다'를 뜻함. 羊(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양, 양을 바쳐 신에게 비는 儀式(의식), 나중에 바르다, 의로운 일의 뜻이 됨.
 
 
저도 한자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씀드려 "양처럼 착하고 의리있게"라고 서술된 이 사전적 정의(definition)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또  아닌 말로 그렇다고 하여 어떤 느낌이 가슴에 와 닿지도 않습니다.
 
짐승인 양이 착하고 의리있다??? <----- 이건 또 무슨 뜻인지요?
 
그러면 두번째로 네이버가 제공하는 다음의 정의(definition)는 제대로 정의를 하고 있을까요? (출처는 위의 출처와 동일).
 
義(의) ①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하고 정당(正當)한 도리(道理). 오상(五常)의 하나임 ②남과 골육(骨肉)과 같은 관계(關係)를 맺음 ③글이나 글자의 뜻. 의미(意味) ④경서의 뜻을 해석(解釋)시키던, 과거(科擧)를 보일 때의 문제(問題) 종류(種類)의 한 가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하고 정당한 도리??? 오상의 하나???
 
그런데.. 도대체 어떤 도리가 "떳떳한" 것인지요? 또 "정당한" 도리는 어떤 도리인지요??? "떳떳하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린지요?
 
예를 들어, 거짓말장이 혹은 사기꾼치고 떳떳하지 않게 처신하여 우리들이 이들을 제깍 구분 하는 것을 잘 할 수나 있었던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펼치기만 하면 그 사람이 떳떳해지거나 혹은 정당해질까요???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어떠한지요? 저와는 달리 이해가 단번에 쏙 되시는지요?
 
1-2. 성경 말씀에도, 예를 들자면, 성모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의로운 사람(righteous man)"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마태오 복음서 1,19),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지요? 혹시 위에 말씀드린 義의 네이버 사전적 정의를 적용하면,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지나친 추측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한국인으로서 네이버의 사전적 정의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분은 아마도 거의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예제(example)는, 우리말 성경 말씀을 한자사전에 근거한 자구해석을 하는 것 자체가 전혀 의미가 없을뿐만아니라, 더 나아가 엉뚱한 추측을 하게 되는 좋은 경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1-3.  "정의" 좋아하시는 분들이 특히 좋아하는 표현은 아마도 "사회 정의(social justice)"일 것입니다. 이제 몇 년이 되었습니다만, 알고보니 전과 12범 사기꾼을 두고서 모든 범죄 경력을 다 감추고는, 당시에 "의인(the just, 혹은 the righteous)"이라고 언론에서 보도하였더군요.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요?  
 
"사회 정의"의 정의(definition)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굳이 언급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점(point)"과 같이 아예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정의하지 못하는 것인지요?
 
아니.. "정의"의 정의(definition)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서, 우리가 거창한 형용사가 한 개 붙은 "사회 정의"를 논하거나 혹은 주장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어불성설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이쯤에 와서,
 
"나는 정의로움/정의(正義, justice)의 뜻을 제대로 배워 알고 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1-4.  세살 먹은 아이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에 일리(one reason)있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은 자신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이런 주관적인 정의로움을 서로가 서로에게 주장하기 위하여 "정의"(正義)를 외치는 것이 전부이라면, 아마도 정의(正義)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또한 없을 것입니다. 그냥 "외침"일 뿐일 것이니까요.
 
따라서, 정의(正義, justice)은 동일시 하지 않는 나와 너(you)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일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있어, 너(you)에는 크게 두 종류의 너(you)가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man)인 너(you)와 야훼 하느님(God).
 
그런데 사람이 하느님을 향할 때의 정의로움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할 때의 정의로움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므로, 정의를 논할 때에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또한 구분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나와 너 사이에서, 대상과 방향을 모두 고려하여도 문제가 없는 의미를 "정의"가 그 뜻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도식적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으며,
 
(i)  사람 <-----> 사람,
 
(ii) 사람 -----> 하느님,
 
(iii) 하느님 -----> 사람,
 
이런 방향성과 대상을 다함께 고려한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가 설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1-5.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구약 성경 및 신약 성경 시절의 정의(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 이후의 정의(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가 동일한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하여서도 또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6.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당시에, 비록 이들 간의 경중은 몰랐으나,  613개의 모세 율법을 이미 헤아려 놓고 있었던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의 의로움(righteousness)은 바로 이 613개의 율법들의 준수이었습니다.

즉, 이 율법들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성모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의로운 사람(righteous man)"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마태오 복음서 1,19에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이란 바로 이들 613 율법들을 잘 준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NAB 주석에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19] A righteous man: as a devout observer of the Mosaic law, Joseph wished to break his union with someone whom he suspected of gross violation of the law. It is commonly said that the law required him to do so, but the texts usually given in support of that view, e.g., Deut 22:20-21 do not clearly pertain to Joseph's situation. Unwilling to expose her to shame: the penalty for proved adultery was death by stoning; cf Deut 22:21-23.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개종을 당한, 바리사이파 유다인이었던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바리사이파가 613개의 율법들의 준수가 곧 의로움(righteousness)이라고 정의한(define) 의로움은, 유다인들의 원래의 의로움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아님을 "아브라함의 신앙의 복종"을 하나의 반례로서 들어 지적하고 있습니다(로마서 4,1-8). 
 
참고: 물론 아브라함의 예는 지금 말씀드린 하나의 반례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인 "의화(의롭게 됨, justification)"에 대한 언급인데, "의롭게 됨"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제2-2항의 후반부 및 이 글의 결론인 제3항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우선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생각되는 것부터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1. (사람 -----> 하느님)
사람들이 하느님을 대함에 있어 정의롭다함은, 하느님께 합당한 흠숭지례를 바치는 것으로 표출되는, 경신덕(virtue of religion)으로 불리는 덕이라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 제381항의 후반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CCCC 381 "... 하느님을 향한 정의(justice)는 "경신덕(virtue of religion)"이라고 불립니다."
 
비록 이 경신덕, 즉 흠숭지례로 표출되는 덕, 또한 유다교에도 그 나름대로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비록 정의/의로음을 정의하는(define) 데에 매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으나, 네이버 사전에 정의된 義 글자의 의미와 거의 같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我)의 마음 씀을 양(羊)처럼 착하고 의리있게 가진다는 뜻을 합(合)하여 '옳다'를 뜻함. 羊(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양, 양을 바쳐 신에게 비는 儀式(의식), 나중에 바르다, 의로운 일의 뜻이 됨.
 
따라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대할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는, 비록 종교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기는 할 것이나, 그래도 그런대로 분명해졌습니다: 경신례를 "하느님께 합당한 몫 만큼 제대로" 바치는 것.
 
2-2. (하느님 -----> 사람)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대함에 있어 정의로우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991항 후반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CCC 1991 "...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을 뜻한다."
CCC 1991 "... Righteousness (or "justice") here means the rectitude of divin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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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하느님의 경우에, "righteousness"(의로움, 올바름)와 "justice"(正義, 정의, 정의로움)는 정확하게 동일하나,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들 용어들의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결코 그렇지 않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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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하느님께서 사람들에 대하여 정의롭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실 때에 공정하게 베풀어주심, 즉 각자의 몫에 따라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주심을 말합니다.
 
참고: 따라서 사제들께서는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푸시려고 하심에 대하여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한 마음가짐과 함께 깊이 잘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제들이란 온 몸과 영혼을 다 바쳐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시려는 분들이시고,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람들에 대한 의로우심 때문에, 더 많은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분에게는, 사제들을 통하여, 더 많은 몫이 베풀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중요한 점 때문에, "평신자들의 신앙실천 규범은 소속 본당 주임신부님의 사목지침에 순명하는 것 단 하나뿐이다"라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말씀드리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시편 125,3에 대한 NAB 주석에서 발췌한 것으로, 바로 위에서 정의된(defined)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정의로움/의로움의 정의(definition)를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수용하는(accept) 사람들을 두고서 "의인(the just)" 즉 "의로운 자"들로 불린다고 설명하고 있는 중인데, 바로 이 내용이, 그리스도교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유다교의 의화(justification)의 정의(definition)로 생각합니다:
 
"... The just are the members of the people who are obedient to God. ..."
" ... 하느님께 순종(obedient)하는 자들은 "의인(the just)"들, 즉 "의로운 자"들로  불린다. ..."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시작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그 방법론에 때문에 유다 민족만의 구원을 위한 유다교로 처음에 시작되었으나, 바로 이 유다교의 전통에 바탕을 두어,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당신에 의하여 (천상, 지상 및 연옥에) 구현된 단 하나뿐인 참 종교이므로,
 
"이 유다교의 의화의 정의(definition)" +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something else" = 그리스도교의 의화의 정의(definition)를 이루어야 할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의화(Justification)"의 정의(CCCC 1987, 1989, 1991-1992)의 구성 요소입니다:
 
CCC 1991  이와 동시에, 의화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해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을 가리킨다. 의화와 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도 우리의 마음 안에 스며들고, 우리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게 된다.
참고: 위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해"라는 표현이 사실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 죄들의 속량(redemption)을 위하여 돌아가신 분이 바로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느님의 의로움의 구체적인 예제들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들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몸소 행하신 실천들이 신약 성경 4 개의 복음서들에 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바로 이들을 모방하고, 따르고 또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이 받아 들였음을 인정해 주시는(credit) 의로움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에,.이들을 모방하고, 따르고 또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하여야 하는 실천들에는, 특히 요한 복음서 제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구체적으로 또 여러 번이나 반복적으로 명하신 영성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 우리는 시편 1,4에 대한 NAB 주석과 시편 37,28-29로부터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자(the just)의 반대말은 사악한 자(the wicked)가 아니라 '의롭지 않은 자(the unjust)'이다.
 
28 For the LORD loves justice and does not abandon the faithful. When the unjust are destroyed, and the children of the wicked cut off,29 The just will possess the land and live in it forever.
 
다른 한편으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행동들로써 멀리하는 자들은 '사악한 자(the wicked, 악한 자, 악인)'로 불린다.
4 [1:4] The wicked: those who by their actions distance themselves from God's life-giving presence.
 
 
바로 위의 설명들로부터 우리는 "의롭지 않은 자"와 "악한 자"를 구약 성경 본문에서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2-3. (사람 <-----> 사람)
사람이 사람을 대함에 있어 정의롭다/의롭다 함은 무엇을 뜻할까요?
 
참고: 여기서 나(I)가 아닌 너(you)로서의 사람, 즉 대상인 사람이 개인(individual)과 집단(group)등으로 더 구분될 것입니다만, 이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우선 인격적 나(I)와 인격적 너(you) 사이에 정의롭다/의롭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개인이든 집단이든, 항상 적용할 수 있는 정의(definition)을 찾고 있는 것이니까요.
 
위의 1-4에서 언급한 것을 상기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면서, 우선 마태오 복음서 20,4.14-15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입니다만, 이 부분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로 불리는 비유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여기서, 색깔은 제가 입혔습니다:
 
20,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NAB) 20:  2 and he said to them, 'You too go into my vineyard, and I will give you what is just.'
...

20,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눈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질투하는(envious) 것이오?
 
(NAB) 20:13 He said to one of them in reply, 'My friend, I am not cheating you. 4 Did you not agree with me for the usual daily wage? 14  5 Take what is yours and go. What if I wish to give this last one the same as you? 15  (Or)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위의 구절들에 대한 NAB 주석들은 다음과 같으며,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2 [20:4] What is just: although the wage is not stipulated as in the case of those first hired, it will be fair.

[20:4] 정당한 바: 비로 품삯이 첫 번째 고용된 자들의 경우에서 그러하였듯이 약정된 것은 아니나, 그것은 장차 공정하게 될(be fair) 것이다. 
 
4 [20:13] I am not cheating you: literally, "I am not treating you unjustly."

[20:13] 내가 당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오: 글자 그대로, "내가 당신을 불의하게(unjustly) 대하는 것이 아니오."
 
5 [20:14-15] The owner's conduct involves no violation of justice (Matthew 20:4, 13), and that all the workers receive the same wage is due only to his generosity to the latest arrivals; the resentment of the first comes from envy.

[20:14-15] 이 주인의 처신는 정의(justice)에 대한 침범 행위를 전혀 수반하지 않으며(마태오 복음서 20,4.13), 그리고 일꾼들 모두가 동일한 품삯을 받는 것은 가장 늦게 도착한 자들 쪽으로 그의 관용(generosity)에 오로지 기인하며, 그리하여 첫째의 분개(resentment)는 질투(envy)로부터 나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우리말 번역 시점: 2023-09-23)
 
그런데, 그 명사가 정의(justice)인 이 "정당한(just)"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신약 성경이 쓰이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개념이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마땅히 구약 성경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보아야 할 것인데, 이 부분은 위의 제2-2항의 후반부를 읽어보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 제 381항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 1807항에 정의되어 있는(defined)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는,  위의 비유에서 "당신 품삯이나 가져가시오" 즉 "당신 몫이나 가져가시오"라는 표현이 매우 유의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CCCC 381 정의[justice, 의덕(義德)]는 무엇입니까?
CCC 1807, 1836

정의(justice)(*)는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몫(due)을 주기 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지(will)를 주된 부분으로서 가지고 있습니다(consists in). 하느님을 향한 정의는 “경신덕(virtue of religion, 敬神德)”이라고 불립니다).

Justice consists in the firm and constant will to give to others their due. Justice toward God is called “the virtue of religion.”
 
(*): 라틴어 어원이 ‘justus’이며 형용사가 ‘정의로운’(just)인 명사 ‘정의’(justice)의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정의(definition)와 관련하여, 가해 연중 제25주일 복음 말씀 해설에 주어져 있는 마태오 복음서 20,13-14 해설 및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justice.htm을 필히 참고하라. 또한 바로 아래의 게시자 주에 우리말 번역문이 제공된, 다음의 영문 Modern Catholic Dictionariy도 필히 참고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7월 27일]
게시자 주: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justice"(정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발췌 시작)
JUSTICE

As a virtue, it is the constant and permanent determination to give everyone his or her rightful due. It is a habitual inclination of the will and therefore always recognizes each one’s rights, under any and all circumstances. The rights in question are whatever belongs to a person as an individual who is distinct from the one who practices justice. The essence of justice, then, as compared with charity, consists in the distinction between a person and his or her neighbor; whereas charity is based on the union existing between the one who loves and the person loved so that the practice of charity regards the neighbor as another self.

정의(justice)

한 개의 덕(a virtue)으로서, 이것은 각자에게 그자의 혹은 그녀의 올바른/정당한 몫(rightful due)을 주고자 하는 변치 않는(constant) 및 항구적인 결심(determination)을 말합니다. 이 덕은 의지(the will)의 한 개의 습관적인 기울어짐이며(a habitual inclination) 그리하여 그 결과, 임의의 그리고 모든(any and all) 여건들 아래에서, 각자의 권리(rights)들을 항상 인정합니다. 해당하는 권리들은, 정의(justice)를 실천하는 자로부터 구분되는 한 개인으로서, 한 인격에 속하는 바 무엇이든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애덕(charity)과 비교되는 것으로서, 정의(justice)의 본질(essence)은 한 인격과 그자 혹은 그녀의 이웃 사이에 있는 구분을 그 주된 부분으로서 가지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애덕(charity)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결힙(union)에 근거하고 있으여 그리하여 그 결과 애덕의 실천은 이웃을 또 다른 자신(another self)으로서 간주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23년 7월 27일자 내용 추가 끝]
 
: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07항입니다. 여기서 글자에 입힌 색칠과 굵은 글씨는 제가 한 것입니다:
 
1807  정의는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를 ‘경신덕’(敬神德,  virtus religionis) 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하고, 사람들에 대한 공평과 공동선을 촉진시키는 조화를 인간 관계 안에 확립하도록 하는 것이 정의이다.성서에 자주 나오는“의로운”사람은 사고의 올바름이 몸에 배고 이웃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영세민이라고 하여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봐주지 마라. 이웃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 (레위 19,15) . “주인 된 사람들은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자기 종들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하십시오” (골로 4,1).
 
1807 Justice is the moral virtue that consists in the constant and firm will to give their due to God and neighbor. Justice toward God is called the "virtue of religion." Justice toward men disposes one to respect the rights of each and to establish in human relationships the harmony that promotes equity with regard to persons and to the common good. The just man, often mentioned in the Sacred Scriptures, is distinguished by habitual right thinking and the uprightness of his conduct toward his neighbor. "You shall not be partial to the poor or defer to the great, but in righteousness shall you judge your neighbor." "Masters, treat your slaves justly and fairly,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1836  정의는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꾸준하고 굳은 의지이다.
 
1836 Justice consists in the firm and constant will to give God and neighbor their due.
 
2-4. 정의로움(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
 
일단 정의로움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위의 제2-3항의 마지막 부분에서와 같이 정의되고(defined) 나면, 위의 서론 중의 제1-4항의 (i), (ii), (iii) 또한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justice)는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몫(due)을 주기 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지(will)를 뜻한다." 
 
(i) 하느님을 향한 사람들의 정의로움/의로움이란, 당신께 당신의 몫을 바치기 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지, 즉 경신례로서, 이 의지의 그리스도 신앙적 제 일차적 표출이 바로 천주흠숭지례입니다.
 
(ii)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정의로움/의로움이란, 당신의 사랑을 사람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베풀어주시기 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당신의 의지를 뜻합니다.
 
(iii)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정의로움(正義, justice)이란,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몫을 주기 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지를 뜻합니다.
 
참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정의로움(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숙지하신 후에 그동안 말씀드린 부분들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실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아마도 지금부터는, 정의로움에 관한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별로 헷갈리는 것 없을 것입니다.
 
2-5. 그러면 너(you)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의(definition)가, 위의 "기본 정의"위에 더 자세하게 정의되는데, 여기에는 그 대상과 역할 등에 따라
 
(i) 상호 정의[individual justice, particular justice(개별 정의), or commutative justice(상호 정의)] - 십계명 중의 일곱 번째 계명에 의하여 요청됨(: 오요한 신부님 홈페이지 제공 일곱 번째 계명에 대한 설명으로 바로가기),
 
(ii) 법 정의(legal justice) - 개인이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 등에 관한 정의,
 
(iii) 분배 정의(distributive justice) -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에 대한 의무 등에 관한 정의, 
 
(iv) 사회 정의(social justice)
 
등으로 나누어 설명되고 있는데, 이들은 정의의 적용 예제(examples)들에 해당할 것입니다.
 
참고: 이런 거창한 예제들은 아니나, 누구나 자신의 주변에서 실천할 수 있을 평범한 종류의 예제 한개를 이 글의 제일 마지막에 소개하였습니다.
 
다음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제공 용어 정의이며 괄호 안의 번호들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 번호들이니 추가로 참고하십시요:
 

JUSTICE: The cardinal moral virtue which consists in the constant and firm will to give their due to God and to neighbor (1807). Original justice refers to the state of holiness in which God created our first parents (375). Commutative justice, which obliges respect for the rights of the other, is required by the seventh commandment; it is distinguished from legal justice, which concerns what the citizen owes to the community, and distributive justice, which regulates what the community owes its citizens in proportion to their contributions and needs (2411). See Social Justice.

 

SOCIAL JUSTICE: The respect for the human person and the rights which flow from human dignity and guarantee it. Society must provide the conditions that allow people to obtain what is their due, according to their nature and vocation (1928, 1931).
 
참고: 원 정의(original justice)를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죄의 상태에서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의롭게 되는(justified) 과정에 참여하여야 하며, 이를 위한 절차가 바로 하느님과의 첫 번째 화해의 성사인 세례성사입니다.
 
참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한 우리말 용어들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을 통하여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한 번 시간을 내어, 위의 출처에 있는 용어 정의들을 모두 우리말로 번역하여 제공해 드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측에서 해주시면 더 없이 고맙겠습니다. 사실은 진작에 이런 작업을 하여 국내 교우님들께 제공해 주셨어야 할 일로 생각합니다.
 
위의 용어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의 영문 출처들에 주어져 있으니 또한 참고하도록 하십시요: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색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여기서 번호들은 CCC의 해당 항목 번호들입니다:
 
 
정의, 옳은 일
(라) Iustitia (영) Justice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 1916,2297, 2356,2413,2476,2485; 2325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1716;
정의의 정의 1807;
정의의 결과 2304;
정의의 요구 1459,2494-2495;
정의의 추구 1888,2820;
하느님의 정의 271,1040,1861,1953, 1987 ,1991-1992,2017,2543;
분배 정의 2236,2411;
국가들 간의 정의 2437-2442;
사회 정의 1928-1942,2425-2426,2832;
만사를 정의의 규범에 일치시켜야 할 평신도의 임무 909;
정의에 대한 의무 1459,1787,2401, 2446 -2447,2487;
옳은 일 때문에 당하는 박해 1716;
정치 권력과 정의 2237;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 375-376, 379 ,400,404;
정의에 따라 행하다 1697,1754, 1778 ,1787;
정의의 덕 1805,1807,2479,2484.
 
3. 결론 - 그런데 무엇이 핵심 문제일까?
 
3-1. 위의 2-4항의 제(i), (ii), (iii) 항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제(i)항과 제(iii)항은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사건 이전에,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이미 사람들이 나름대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ii)항의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charity)을 당시의 유다인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 사랑은 완전히 새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제(i)항과 제(iii)항의 경우에 있어, 이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과연  어떠한 기준을 적용하여야 비로소 다른 이들이 그들의 몫을 합당하게 가질 수 있게될까?" 하는 핵심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3-2. 우선적으로 "극히 주관적일수 밖에 없는 각자의 나의 관용(generosity)이 과연 이 기준으로 적합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정의가 당사자외 상대방에 따라 유동적이어서는 아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결국에 정의는 상대적이다"라는 매우 현실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께는 더 이상 관심이 없을 것이지만 (단, 관심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견해가 하느님 보시기에도 참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정의가 상대적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견해를 가진 분들에게 있어,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 자체가 이렇게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 의화(justification)라는 개념의 정의(definition)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선 위의 제2-2항에서 말씀드린 것을 다시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CCC 1991  이와 동시에, 의화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해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을 가리킨다. 의화와 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도 우리의 마음 안에 스며들고, 우리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게 된다.

참고: 위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해"라는 표현이 사실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 죄들의 속량/구속(redemption)을 위하여 돌아가신 분이 바로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느님의 의로움의 구체적인 예제들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들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몸소 행하신 실천들이 신약 성경 4 개의 복음서들에 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바로 이들을 모방하고, 따르고 또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이 받아 들였음을 인정해 주시는(credit) 의로움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에,.이들을 모방하고, 따르고 또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하여야 하는 실천들에는, 특히 요한 복음서 제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구체적으로 또 여러 번이나 반복적으로 명하신 영성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실린, CCC 1991을 포함하는 의화(justification)의 정의(definition)(CCCC 1987, 1989, 1991-1992)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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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성령의 은총에는 우리를 의화(義化)하는 힘이 있다.곧, 성령의 은총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마서 3,22 참조)를 누리게 해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8-11).
 
1989  성령의 은총이 작용하여 내는 첫 결실은 회개이다. 복음서의 첫 대목에 나오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마태 4,17) 하신 예수님의 선포에 따라, 회개는 우리를 의롭게 해 준다. 은총의 작용으로 인간은 하느님께 향하고 죄에서 멀어져 위로부터 오는 용서와 의화를 받아들인다. “의화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성화와 내적 인간의 쇄신도 내포한다.”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 c. 7: DS 1528.)
 
1991  이와 동시에, 의화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통해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을 가리킨다. 의화와 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도 우리의 마음 안에 스며들고, 우리는 하느님 뜻에 순종하게 된다.
 
1992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뜻에 맞는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으며, 그분의 피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속죄의 도구가 되었다. 의화는 신앙의 성사인 세례로 주어진다. 의화는 당신 자비의 능력으로 우리를 내적으로 의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의로우심에 우리를 부합하게 한다. 의화의 목적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고,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 c. 7: DS 1529 참조).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로마 3,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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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내용을 잘 요약한 것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 제 422항입니다:
 
CCCC 422. 의롭게 됨(의화)이 무엇인지요?
CCC 1987-1995, 2017-2020

의롭게 됨(justification, 의화, 義化)은 하느님 사랑의 가장 탁월한 업적(work)입니다. 이것은 자비로운 및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행위(act)인데, 이 행위는 우리의 전체 있음(whole being) 안에서 우리의 죄들을 없애주고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just)* 및 거룩하게(holy) 만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을 만하게 되었고(merited) 그리고 세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총에 의하여 실현됩니다(se réalise). 의롭게 됨은 사람의 자유로운 응답의 시작, 즉, 그리스도 쪽으로 믿음(faith in Christ)의 시작이며 그리고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과의 협조(cooperation)의 시작입니다(엮은이 번역).

 

*: 여기서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righteousness)을 그리스도 쪽으로 믿음 안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게 됨(acceptance)을 의미한다(CCC 1987).


: 라틴어 어원이 ‘justus’이며 형용사가 ‘정의로운’(just)인 명사 ‘정의’(justice)의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정의(definition)는 (i) 마태오 복음서 20,13-14, (ii) 가해 연중 제17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에 있는 CCCC 381 - 정의(justice)는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몫(due)을 주기 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지(will)를 뜻한다(엮은이 번역), 그리고 (iii) http://ch.catholic.or.kr/pundang/4/ce_justice.htm을 필히 참고하라. (iv) http://ch.catholic.or.kr/pundang/4/cr_justice.htm도 또한 참고하라.
 
: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a_ot_11_c1987.htm
 
참고: 다음은 의화(justification)의 정의(definition)를 이루는 다섯 가지의 요소(elements)들입니다:
 
The Catholic Church identifies five elements of justification, which collectively define its full meaning.
(i) The primary purpose of justification is the honor of God and of Christ;
(ii) its secondary purpose is the eternal life of mankind.
(iii) The main efficient cause or agent is the mercy of God;
(iv) the main instrumental cause is the sacrament of baptism, which is called the "sacrament of faith" to spell out the necessity of faith for salvation.
(v) And that which constitutes justification or its essence is the justice of God, "not by which He is just Himself, but by which He makes us just," namely sanctifying grace.
 
 
3-3.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4,22에서 아브라함의 신앙/믿음의 복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NAB) 22 That is why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가해 연중 제10주일의 제2독서의 한 부분인 이 구절에 대한 저의 졸저서 (제목: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I)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22절에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credited)' 것은 킹 제임스 판 영어 성경의 해당 구절에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imputed)' 것이 뜻하는 것과는 다르다. 올바른 번역은 credited인데, 이것은 imputation 단어가 비록 아브라함이 그런 대접을 받을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무조건 그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을 추론케 하기(infers)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의로움을 인정받았다(credited)는 것은 하느님을 따르는 자의 의로운 삶을 아브라함이 실제로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상 인용 끝)
 
따라서, 우리가 세례성사에 의하여 의롭게 되었다 함은,
 
세례성사 이후부터는, 우리들의 자유의지가 여전히 병들어 있기에,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게 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봐 줄 것이라는 뜻, 즉 달리 말하여,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짓게 될 죄들이 앞으로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벌하시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그만 두실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에 의하여 무조건적으로 우리들의 과거의 죄들인 원죄와 본죄에 대한 사함을 받게 될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세례성사 이후로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의로운 삶을 살아 갈 것을 일종의 신용으로서 긍정적으로 인정해 주실(credit) 것이라는 것을 뜻하며, 그 결과, 앞으로도 이러한 인정(credit)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하여 항상 그러한 신용을 지키기에 합당한 처신을 우리가 유지하여야 함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각자에 대한 credit(신용)은 그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그 어긋남의 정도에 따라 하느님에 의하여 신용이 우리로부터 단계적으로 거두어들여질 것, 즉 "의롭게 됨이라는 은총의 지위"로부터 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3-4. (결론 1)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성화(sanctification)의 개념과 관련지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의로움/(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이전에 이미 유다인들이 알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출현과 당신의 가르침,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유다인들의 정의(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 위에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의로움(righteousness)"를, 세례라는 절차를 거쳐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주: 바로 이것을 두고서 "의롭게 되었다", 즉 "의화되었다"고 합니다), 비로소 시공간을 초월하는, 즉 "상대적 정의"가 아닌, "절대적 정의"를 하느님의 자녀들이 공유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살아 있는 동안에, 성령의 인도하에,
 
(1)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기도 생활과
(2) 우리들의 성화를 도와 주는 "성사 생활"에 참여할 뿐만이 아니라,
(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우리들이 죽은 후에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 = 의롭게 됨으로서, "의화"는 가톨릭 교회의 오랜 가르침인 "성화(sanctification)"의 시작입니다. 즉,
 
하느님 -----> 사람
 
에서, 하느님께서 세례성사 중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작용(act), 즉 성화 은총의 결과,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를 받아들이게 되어,  우리가 비로소 "성화(sanctification)"로 불리우는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산자와 죽은 자의 통공에 우리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도 또한 우리들이 "이 하느님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3-5. (결론 2)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하느님의 오묘하심과 관련지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느님의 사랑은 나와 너를 동일시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하느님을 아는 자"로서 이것이 평소에 잘 되는 분들은, 자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이들도 사랑할 것이므로, 그 결과 하느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잘 퍼져 나가게 할 것이므로, 이런 분들은 별다른 가르침도 필요하지 않은 분들일 것입니다. 즉 나와 너의 동일시가 잘되는 하느님을 아는 자들은 바로 "살아있는 성인(saint)"이라는 말씀입니다.
 
(: 가톨릭 교회 안에 "살아있는 성인"은 공식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자신의 자녀가 대학 수능 시험에서 다른 수험생들을 제치고 좋은 점수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랑은, 자신의 자녀와 다른 사람의 자녀를 너무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자신의 분신인 자신의 자녀를 위한 기도이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이기적 사랑"을 추구하고 있는 좋은 예로서,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이 세상의 어머니들 다수가 "이런 사랑"을 추구하면서 이런 사랑의 추구가 하느님의 사랑을 추구하는 줄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진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어머니는 그러한 자신을 두고서 "살아있는 성인"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느님을 아는 자로서 나와 너의 동일시가 평소에 잘 되지 않는 대부분의 우리들의 경우에 있어,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정의"를 우리들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또 우리들이 이 "하느님의 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실천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하고 죄 많은 대다수의 우리들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게 하려고 하심이, 바로 하느님의 오묘하심입니다.
 
즉,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또 하느님의 사랑의 공정하심을,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하는 데에 우리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함으로써, 죄로 기울어지는 속성을 가진 우리들 자신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조용히 자리잡도록 하시는 하느님 섭리의 오묘함!
 
참고: "하느님 사랑의 공정하심"에 대한 충분한 예제들이, 성경을 포함한 가톨릭 보편 교회의 사도 전승 안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예수 그리스도 이후 20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살아 있는 상태로 우리들 모두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으로 세우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안에는 영원한 생명, 즉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3-6. 정의로움(正義, justice)이라는 정의(definition)의 적용 예제 한 개
 
끝으로, 제가 아는 교수님 한 분의 예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지금 말씀드리는 평범한 예제가 아닌 더 거창한 예제들은 이미 위의 제2-5항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분께서는 중간고사 및 기말고사 시험을 친 학생들에게 답안지의 성명란 바로 위에 자신의 예상 점수를 쓰게 합니다. 이 분의 평소 지론에 의하면, 큰 문항을 다섯 개, 각 각 20점 만점으로 출제하므로, 시험을 다 쳤을 때 즈음하면, 학생들은 자신의 점수가 어느 정도 될 것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채점을 해 보면, 다음의 세 가지의 경우가 있게 된다고 합니다:
 
(1) 학생이 스스로 평가하여 예상한 점수보다 실제로 채점한 점수가 약 5점 정도 더 나오는 경우,
 
(2) 학생이 스스로 평가하여 예상한 점수보다 실제로 채점한 점수가 훨씬 더 낮게 나올 경우,
 
(3) 학생이 스스로 평가하여 예상한 점수보다 실제로 채점한 점수가 상당히 높게 나올 경우.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1)번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며,
 
간혹가다 있는 (2)번의 경우인 학생들에게 이 교수님은 "자네는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하며,
 
역시 간혹가다 있는 (3)번의 경우인 학생들에게 이 교수님은 "자네는 자신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다.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라"는 조언을 한다고 합니다.
 
이 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학생의 성적은, 교수가 자신의 기준에 의하여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이 자신의 몫을 스스로가 찾아가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적 평가에 있어 교수의 역할은 각 학생들이 자신의 몫을 제대로 잘 찾아 갈 수 있도록 공정하게 잘 관리하는 것이다"라고
 
이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교수님은 벌써 십 수년 전부터 이러한 조언을 학생들에게 하고 계시는데, 비록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정의로움(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십 수년 전에 구체적으로 학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 정의를 잘 알고 계신 분이고 또 실천해 온 분이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신앙과 관련없는 일상의 업무 중에서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정의된 "정의로움"의 정의(definition)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적용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들께서 머리를 식히는 데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도 같아, 제가 아는 교수님의 지론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CCCC 381 정의[justice, 의덕(義德)]는 무엇입니까?
CCC 1807, 1836

정의(justice)는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몫(due)을 주기 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지(will)를 뜻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는 “경신덕(virtue of religion, 敬神德)”이라고 불립니다).
Justice consists in the firm and constant will to give to others their due. Justice toward God is called “the virtue of religion.” 
 
참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심도깊게 다루어지고 있는 사추덕들 중의 하나인 정의(正義, justice)의 정의(definition)는 로마 제국의 법학자(jurist)인 Ulpianus(228년에 죽음)가 정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음:
 
다음은 위의 자료에서 발췌한 내용임:
I also found very little mention of the Scriptures as a source of justice. The textbooks drew instead on the treatment of justice by St. Thomas Aquinas, and he in turn had drawn on Aristotle and Roman law.  The definition of justice of the Roman jurist Ulpianus (d.228 A.D.), suum cuique tradere ("to give to each what is his or hers"), became in Aquinas, "The constant and steadfast willingness to give to each person what is his or hers by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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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자료도 또한 필히 참고하라:
 
 
Later Ulpianus defines justice as an unceasing and eternal effort to give everybody their due right. Therefore the commandments of the law are the following: to live decently, not to hurt anyone, to give everybody their due[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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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매우 다행스럽게도(?) 이 글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로마 제국의 최고의 법학자로서 "로마법"에 그의 법학 이론들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법학자 Ulpianus의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가 고등학교 교과서 <법과 사회>(교학사) 11-12쪽에, 아무런 설명없이 단 한줄로 소개는 되어 있다고 하는데, 사정이 이러하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정의의 정의"를 다들 모르고 계신 듯합니다.
 
 
다음은 네이버에 실린 울피아누스에 대한 설명입니다. 클릭하여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참고 자료: http://100.naver.com/100.nhn?docid=119937 (클릭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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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추가일자: 2009년 3월 10일)
 
한학을 전공한 분들(사제들 포함)에게 지금까지 문의한 바로는, 그런 개념은 義에 없다고 합니다. 이 정의의 개념은, 예를 들어, 구약 성경 중의 레위기 19,15 이전에 이미 있었기에, 이와 같은 근거 자료의 제시 없이, 한자 문화권이 이 정의의 개념을 인지한 것이 지중해 문화권보다 "천 년은 더 되었다" 혹은 "더 오래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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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이 문제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려면, 우선적으로, 義 글자가 사용된 한문 문장으로서, 기록된 시기가 적어도 기원전 1200년 이전(즉 적어도 기원전 13세기 이전)인, 한문 문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義 글자를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정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검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지금부터 약 3200년 전에 義 글자가 사용된 한문 문장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선적으로, 다음의 확인을 하여야 하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이는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에 의하여 저술된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글자의 뜻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는 여러 문헌들 중에 가장 오래된 문헌이 주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i) 주역(周易, 易經)의 8괘(卦) 및 64괘들 중에 義 글자는 없습니다. (이미 확인 하였습니다).
(ii) 괘사(卦辭)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
(iii) 효사(爻辭)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
(iv) 주역 본문 중의 공자님의 말씀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
(v) 그리고 주역의 십익(十翼)들 중에 義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지를,
 
순서대로 찾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찾아 보아야 하느냐 하면, 주역 중의 어느 한문 문장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가, 그 최초 사용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 상당히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이 글에 이어지는 글은 다음에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께서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義 글자에 대한 전공 교수님들의 견해들 외..  (클릭하여 꼭 읽어 보도록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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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레위기 19,15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새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이 구절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정의(justice)"를 정의할(define) 때에 인용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미 찾아 본 바에 의하면, 플라톤의 정의의 정의(definition)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정의(definition)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정의하고 있는 정의의 정의(definition)로부터 모두 설명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그리스 문화에서 정의하고 있는 정의를 가지고 가톨릭 교회에서 정의하고 있는 정의를 설명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해당 설명도 그런 내용인 듯 싶습니다. 그래서, 사추덕 중의 한 개의 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정서에 있어야 하는데, 없다 보니, 학습을 하여도 이해가 잘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해부터 기회 있을 때 마다 유관 전공자들(사제 포함)에게 문의를 계속드리고 있으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신통한 답변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내용이 가나안 땅 들어가기 이전의 것이니, 적어도 기원전 1200년 이전(즉 적어도 기원전 13세기경)에 이미 정의(justice)의 개념을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알고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주의: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이미 그 당시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기록된 바와 같은 문장으로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를 이미 글로서 명기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음은 신명기 16,19입니다

너희는 공정을 왜곡해서도 안 되고 한쪽을 편들어서도 안 되며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된다. 뇌물은 지혜로운 이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이들의 송사를 뒤엎어 버린다.

여기서, 공정 = justice.
 
유다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하여, "하느님 심판의 공정하심이 어떤 것일까?"에 대하여, 옛 계약의 백성답게, 상당히 먼저 정의의 개념을 인지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문장과 대동소이안 문장으로, "로마 법전"에 편입시킨 법학자가, 기원 후 228년에 살해 당하였다고 하는, 울피아누스(Ulpianus)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은, 적어도 울피아누스가 죽었다는 기원후 228년 이전에 이미 그런 문장으로 정의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법학자인 울피아누스가 지금과 같은 문장과 대동소이안 문장으로 정의를 정의한 당사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것보다는, 울피아누가 교육을 통하여 배운 것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셨듯이, 울피아누스가 생존하였던 시대보다 무려 적어도 1100년 이전에 이미 이 정의의 개념을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알고 있었다는, 성경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증거(들) 때문입니다.
 
한학이나 유관 전공자들이 저를 대신하여 자료를 찾아 보아 준다는 생각입니다. 교리서에서 정의를 정의하면서 레위기 19,15을 인용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 때문에 그 옛날에 유다 민족이 이미 이 정의의 개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고입니다만, 다음의 자료에 주어지고 있는 레위기 기록들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정의의 정의를 주변의 다른 민족들부터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Leviticus (This Rock July 1993) (클릭하십시요)
 
다음은 설문해자주에 있는 義 글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문에 눈이 밝으신 분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보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설문해자주의 義 글자에 대한 설명 (클릭하십시요)
 
다음은 설문해자주에 있는 儀 글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문에 눈이 밝으신 분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보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설문해자주의 儀 글자에 대한 설명 (클릭하십시요)
 
좀 되었습니다만, 대한화자전의 義 글자에 대한 설명에는 그러한 개념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워낙에 온갖 설명들이 많아 읽다가 놓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여튼 돋보기 들고서 열심히 들여다 보았는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 2009년 3월 10일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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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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