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화

상급평의회[Con] 2006년 8월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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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뚜스 [senatus] 쪽지 캡슐

2006-09-07 ㅣ No.37

 

 

Allocutio by Rev. Fr. Bede McGregor O.P.

Spiritual Director to Concilium


마리아와 레지오 단원의 신심


레지오의 정신은 바로 마리아의 정신입니다. 우리들은 교본의 이 글을 곰곰이 생각해 봄으로써 항상 의미 있는 그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합니다. 물론 여기에 대한 우리들의 묵상은 횟수의 다과(多寡)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인 레지오 단원의 삶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로 마리아의 삶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선  복음서에 나오는 마리아의 삶은 어떠했을까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복음서의 마리아 모습은 바로 성령 그분의 말씀대로입니다. 마리아에 대해서 복음서가 우리들에게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의 신심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인하여 복되다.’ 믿음은 마리아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믿음은 마리아의 내적 생활 전체를 보여주며, 겉으로 드러난 마리아의 삶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마리아의 삶에서 가장 좋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매 순간 의지하는 열쇠였습니다. 당연히 교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레지오는 마리아의 겸손과 무엇보다도 그 신심을 본받고자 열망 한다. 이 겸손과 신심은 마리아에게서만 누구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여기에 비견할 사람은 결코 없다.” 우리들은 각자 이 겸손과 신심을 위하여 매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 주님! 마리아의 깃발 아래 모여 봉사하는 저희들에게 당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마리아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주소서. 이로써 저희는 세상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습관적인 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선물’이다”라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은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으로 또는 ‘마리아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선물(=믿음)을 기초로 해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완전한 의탁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 있어 자기 스스로의 존재 혹은 삶의 기초입니다. 믿음은 삶의 온갖 십자가, 힘들고 지치게 하는 일들과 실망스러운 일들을 당하고 겪는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으므로 그분의 도움을 청하고, 그분의 믿음을 닮고자 우리 마음을 모읍니다. 마리아는 태중의 아기가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임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 처형으로 죽도록 매 맞는 아드님을 바라보는 그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 이라고 믿었습니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 영보 때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모성에 대한 마리아의 순명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모성에 대한 그분의 순명에 관하여

변함없이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들을 마리아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다 아는 바입니다. 이 두 가지 순명은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전 생애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한 ‘순명’으로 시종일관합니다. 이 마리아의 정신은 바로 그분의 소유인 레지오의 정신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신심 깊은 동의가 레지오 단원의 삶에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믿음은 우리들 삶의 묵상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개인의 믿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반사적(反射的) 행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며 이 믿음에 의지하여 그분과의 대화, 즉 그분께 경배하고 감사를 드리고 그분 앞에서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청하고, 그분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할 때 우리들이 느긋해지고 마음이 편해질 수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의 관계는 묵상을 위한 중요한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믿음과 레지오 사도직 사이의 연결성을 잠깐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레지오의 창설자 프랭크 더프 형제의 저서 ‘마리아를 통한 승리’의 내용 중에 초자연적인 믿음의 힘과 효과에 관한 몇 가지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전능을 증명하도록 요구하며, 우리들을 하느님의 전능과 결합합니다. 하느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모 영보 때에 마리아에게 전달된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마리아께서 모든 선량한 레지오 단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한 사도직 과업을 책임지기 위하여 진실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신심이 깊더라도 단순히 감성적이라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프 형제의 말을 들어봅시다. “불가능이란 단어는 단지 우리 인간의 문제일 뿐이다. 하느님은 어떠한 일도 하실 수 있다. 세상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에서 가능한 것들까지 있지만, 여기에도 주목할 것은 봉사활동 중에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기울이는 정성과 노력의 양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정성을 한껏 기울이면서 그 은총을 구할 수만 있다면 세상만사 안 되는 일이 없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고, 개종시킬 수 없는 사람도 없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이끌 수 없는 사회 공동체도 없다. 우리를 도우시도록 그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구하기만이라도 한다면 성취할 수 없는 것이 없다.” 가끔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자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성이 상상할 수 있는 것에만 우리 사도직 활동을 제한하고 있는가? 혹은 우리는 진실로 하느님의 은총과 그분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뜻을 믿고 있는가?”



이제 더프 형제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가 원하는 믿음, 즉 진정한 믿음은 공허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을 의미한다. 확실히 말하지만 진실한 믿음은 행동과 실천이다. 즉 하느님과 영혼들에 대한 생각 이외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믿음; 자신과 자기 이익과 자신의 안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굳은 결심을 하면서 이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그런 믿음; 마침내 자신에게 파멸이 오더라도 밀고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믿음이다. 여러분은 이 말을 극단적인 개념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일을 추구하는 중에 우리들이 이런저런 식으로 파멸되고 몰락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거나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느냐?’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나의 대답은 ‘예’라고 하겠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대단히 부족하다고 해도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연약한 믿음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전능하심의 도움도 자유롭게 청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들은 레지오 단원의 영성에서 가장 깊은 부분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뗏세라의 마침기도에 나오는 그 믿음을 청하면서 더 많은 열정을 갖고서 기도합시다.


마리아와 레지오 단원의 신심


레지오의 정신은 바로 마리아의 정신입니다. 우리들은 교본의 이 글을 곰곰이 생각해 봄으로써 항상 의미 있는 그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합니다. 물론 여기에 대한 우리들의 묵상은 횟수의 다과(多寡)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범적인 레지오 단원의 삶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로 마리아의 삶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선  복음서에 나오는 마리아의 삶은 어떠했을까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복음서의 마리아 모습은 바로 성령 그분의 말씀대로입니다. 마리아에 대해서 복음서가 우리들에게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마리아의 신심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인하여 복되다.’ 믿음은 마리아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믿음은 마리아의 내적 생활 전체를 보여주며, 겉으로 드러난 마리아의 삶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마리아의 삶에서 가장 좋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매 순간 의지하는 열쇠였습니다. 당연히 교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레지오는 마리아의 겸손과 무엇보다도 그 신심을 본받고자 열망 한다. 이 겸손과 신심은 마리아에게서만 누구보다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여기에 비견할 사람은 결코 없다.” 우리들은 각자 이 겸손과 신심을 위하여 매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 주님! 마리아의 깃발 아래 모여 봉사하는 저희들에게 당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마리아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주소서. 이로써 저희는 세상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습관적인 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선물’이다”라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은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으로 또는 ‘마리아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선물(=믿음)을 기초로 해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따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완전한 의탁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 있어 자기 스스로의 존재 혹은 삶의 기초입니다. 믿음은 삶의 온갖 십자가, 힘들고 지치게 하는 일들과 실망스러운 일들을 당하고 겪는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으므로 그분의 도움을 청하고, 그분의 믿음을 닮고자 우리 마음을 모읍니다. 마리아는 태중의 아기가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임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 처형으로 죽도록 매 맞는 아드님을 바라보는 그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 이라고 믿었습니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 영보 때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모성에 대한 마리아의 순명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모성에 대한 그분의 순명에 관하여

변함없이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들을 마리아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다 아는 바입니다. 이 두 가지 순명은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전 생애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한 ‘순명’으로 시종일관합니다. 이 마리아의 정신은 바로 그분의 소유인 레지오의 정신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신심 깊은 동의가 레지오 단원의 삶에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믿음은 우리들 삶의 묵상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개인의 믿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반사적(反射的) 행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며 이 믿음에 의지하여 그분과의 대화, 즉 그분께 경배하고 감사를 드리고 그분 앞에서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청하고, 그분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할 때 우리들이 느긋해지고 마음이 편해질 수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의 관계는 묵상을 위한 중요한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믿음과 레지오 사도직 사이의 연결성을 잠깐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레지오의 창설자 프랭크 더프 형제의 저서 ‘마리아를 통한 승리’의 내용 중에 초자연적인 믿음의 힘과 효과에 관한 몇 가지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전능을 증명하도록 요구하며, 우리들을 하느님의 전능과 결합합니다. 하느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모 영보 때에 마리아에게 전달된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마리아께서 모든 선량한 레지오 단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한 사도직 과업을 책임지기 위하여 진실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신심이 깊더라도 단순히 감성적이라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더프 형제의 말을 들어봅시다. “불가능이란 단어는 단지 우리 인간의 문제일 뿐이다. 하느님은 어떠한 일도 하실 수 있다. 세상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에서 가능한 것들까지 있지만, 여기에도 주목할 것은 봉사활동 중에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기울이는 정성과 노력의 양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정성을 한껏 기울이면서 그 은총을 구할 수만 있다면 세상만사 안 되는 일이 없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고, 개종시킬 수 없는 사람도 없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이끌 수 없는 사회 공동체도 없다. 우리를 도우시도록 그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구하기만이라도 한다면 성취할 수 없는 것이 없다.” 가끔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자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성이 상상할 수 있는 것에만 우리 사도직 활동을 제한하고 있는가? 혹은 우리는 진실로 하느님의 은총과 그분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뜻을 믿고 있는가?”



이제 더프 형제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가 원하는 믿음, 즉 진정한 믿음은 공허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을 의미한다. 확실히 말하지만 진실한 믿음은 행동과 실천이다. 즉 하느님과 영혼들에 대한 생각 이외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믿음; 자신과 자기 이익과 자신의 안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굳은 결심을 하면서 이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그런 믿음; 마침내 자신에게 파멸이 오더라도 밀고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믿음이다. 여러분은 이 말을 극단적인 개념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일을 추구하는 중에 우리들이 이런저런 식으로 파멸되고 몰락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거나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느냐?’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나의 대답은 ‘예’라고 하겠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대단히 부족하다고 해도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연약한 믿음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전능하심의 도움도 자유롭게 청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들은 레지오 단원의 영성에서 가장 깊은 부분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뗏세라의 마침기도에 나오는 그 믿음을 청하면서 더 많은 열정을 갖고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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