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마태오 11,12 -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869_tran KH_errors [성경_번역오류] [하늘나라_개념오류]

인쇄

2010-12-09 오후 6:33: [122.128.44.*]

2010-12-10 ㅣ No.987

[내용 추가 일자: 2018년 3월 27일]

[번역 오류] [영어로 "heaven(s)" 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의]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아무리 빠르더라도, 1584년경에 한문 문화권 내의 천주교회 안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 "천당"이, [영어로 "the kingdom of heaven" 으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의]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1635년경에 한문 문화권 내의 천주교회 안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는"천국(즉, 하늘나라, 즉, 하늘 나라)" 의 옛말이라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주장입니다.  
 
2015년 8월 이전까지, 이 "천주교 용어사전"에 주어진 설명에 따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천국" = "천당", 즉, "천당"은 곧 "천국"을 말하고, 또 "천국"은 곧 "천당"을 말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2015년 8월에 들어와 처음 알게 되었기에, 바로잡습니다. 이를 위하여,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즉, 지금 읽고 계신 글]과 이 글에서 그 접속 주소를 밝히면서 읽으실 것을 요청하는 글들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다음은, 가톨릭 대사전, 전례사전, 천주교 용어사전에 주어진 "천국""천당"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에 대한 설명들인데,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차용 번역 용어인 "천국"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의 출처를 구체적으로 확인한 결과, 오류(error)의 글들입니다.
 
이 설명들에서, 마태오 복음서에서 "천국"은 "하늘 나라"를 말하므로 오류가 아니나, 그러나 나머지 문맥 안에서 "천당(heaven)"으로 반드시 말해져야 하는 바가 "천국"으로 말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커다란 오류입니다. 영어로 "heaven"으로 번역되는 표현은 반드시 "천당" 혹은 "하늘"로 교체하여 읽도록 하십시오:
 
따라서, 국내의 개신교측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kingdom of heaven(하늘 나라)"로 번역되는 표현에 대단히 충실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입니다. 

오늘 날짜로, 바로 위에서 지적한 오류를 아래의 본문 중에서 바로잡았습니다.
[이상, 2018년 3월 27일자 내용 추가 끝] 
 
+ 찬미 예수님 
 
 
마태오 복음서 11,11-15매년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입니다. 
 
특히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 11,12가해 대림 제3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복음서 11,2-11)에 바로 이어지는 절이기도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 복음서 11,11-12)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하늘 나라"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국내의 교우 여러분들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천국", 즉,"천당"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
 
 
2. (우리말 번역 개선 제안1)

그리고 공동번역 성서 및 새 번역 성경에서처럼,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라고 부정적 느낌을 가진 표현으로 번역을 하는 것 보다는,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이 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처럼,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격렬함을 경험하고 있다. 격렬한 자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중립적 느낌을 가진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자료들을 차분히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
 
참고: 매우 흥미롭게도,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전문에 걸쳐, 마태오 복음서 11,12를 인용하는 경우는, 아래의 제2-8항에서 읽을 수 있는사추덕(four cardinal virtues)들 중의 하나인 용기(fortitude, 용덕)를 설명할 때 뿐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
 
2-1. 
다음은 여러 영어 성경들 및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11,11 본문입니다. 서로 대조하면서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CEV)  From the time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violent people have been trying to take over the kingdom of heaven by force.
 
(DRB)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bear it away.
 
(ES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GNB)  From the time John preached his message until this very day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t attacks, i) and violent men try to seize it.
 
i) has suffered violent attacks; or has been coming violently.
i) 격렬한 공격들을 경험해 왔다; 혹은 격렬하게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KJV-1611)  And from the dayes of Iohn the Baptist, vntill now, the kingdome of heau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
KJVA)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Vulgate)  a diebus autem Iohannis Baptistae usque nunc regnum caelorum vim patitur et violenti rapiunt illud
 
(WEB)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zer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
 
2-2. 
다음은 성요셉 주석성서 신약의 마태오 11,12에 대한 주석입니다:
 
11,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마태오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예수님의 날)까지를 한데 묶어 하늘 나라 시대로 보았다. 그런데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즉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백성들을 방해하여 하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또 이미 하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낚아채려고 한다는 것이리라. 다른 사본에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2-3. 
다음은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개신교측 성경)의 마태오 11,12 본문입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NIV의 마태오 11,12 본문 졸번역:
세례자 요한의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손에 넣는다.
 
----------
2-4. 
다음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NAB(New American Bible)의 마태오 11,12 전문 및 주석입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9) and the violent are taking it by force.
 
NAB의 마태오 11,12 첫 부분에 대한 주석:
9 [12] The meaning of this difficult saying is probably that the opponents of Jesus are trying to prevent people from accepting the kingdom and to snatch it away from those who have received it.
 
NAB의 마태오 11,12 첫 부분에 대한 주석의 졸번역:
9 [12] 이 어려운 말씀의 의미는 아마도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사람들이 이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려고 그리고 이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로부터 이 나라를 빼앗아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말할 것이다.
 
 
게시자 주: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 11,12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주석이 NAB에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
 
2-5. 
다음은 프랑스어 Tob 성경의  마태오 11,12 본문 및 주석입니다:
 
 
Depuis les jours de Jean le Baptiste jusqu'à présent, le Royaume des cieux est assailli avec violence; ce sont des violents qui l'arrachent. c)
 
프랑스어 Tob 성경의  마태오 11,12 영어 졸번역:
For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is violently attacked; it is the violents who tear it down. c)
 
프랑스어 Tob 성경의  마태오 11,12 우리말 졸번역:
세례자 요한의 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는 격렬하게 공격을 받고 있으며, 이 나라를 헐어버리는 자들이 바로 폭력자들이다.
 
프랑스어 Tob 성경의 마태오 11,12에 대한 주석:
c) Deux interprétations majeures: 1) En accord avec Lc 13,24, où le disciple est invité à faire effort pour entrer par la porte étroite, et avec Lc 16,16, où tout homme déploie sa force pour entrer dans le Royaume, il s'agirait de la violence des justes, ou encore du Royaume des cieux qui se fraie sa voie avec violence. Cette interprétation lucanienne ne trouve ici d'appui que dans la première partie du verset, car le terme les violents désigne toujours les ennemis, les attaquants. 2) Aussi, plus probablement, Jésus vise-t-il les adversaires qui empêchent les hommes d'entrer dans le Royaume. C'est qu'en effet, par sa venue, le Royaume de Dieu suscite la violence. Certains même pensent pouvoir préciser quels sont ces adversaires: les zélotes qui veulent établir ce Royaume par les armes, ou les puissances démoniaques qui prétendent garder l'empire du monde et ainsi l'arrachent aux justes.
 
프랑스어 Tob 성경의 마태오 11,12에 대한 주석의 영어 졸번역:
c) Two major interpretations: 1) In keeping with Lc 13,24, where the adherent are invited to make an effort to enter through the narrow door, and with Lc 16,16, where every man unfolds his force to enter the Kingdom, it would be about the violence of the righteous men, or else the Kingdom of heaven which makes its way violently. This lucan interpretation finds support only in the first part of the verse here, because the term the violent always indicates the enemies, the attackers. 2) Also, more probably, Jesus aims at the adversaries who prevent the men from entering the Kingdom. It is because in effect, by its birth, the Kingdom of God provokes violence. Some people even think they can specify what are these adversaries: the zealots which want to establish this Kingdom by weapon, or diabolic potency which pretend to keep the empire of the world and thereby tears it down from the righteous men.
 
프랑스어 Tob 성경의 마태오 11,12에 대한 주석의 우리말 졸번역:
c) 두 가지 주된 해석들: 1) 신봉자들이 좁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도록 요청받는 곳인 루카 복음서 13,24와 일치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곳인 루카 복음서16,16과 일치하여, 의로운 자들의 격렬함, 혹은 격렬하게 그 길을 나아가는 하늘 나라의 격렬함에 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루카적 해석(lucan interpretation)은 오로지 이 절의 첫 부분에 있어 지지를 발견하는데, 이는 폭력자(the violent)들이라는 단어는 항상 공격자들인 적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2) 또한, 더 가능하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반대자들을 겨냥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그 탄생에 의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충돌(violence)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어떤 자들이 이들 반대자들인지를 다음과 같이 자신들이 명확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기로써 이 나라를 설립하기를 원하는 열혈당원(the zealots)들, 혹은 이 세상의 제국을 유지하기를 그리하여 그 때문에 이 나라를 의로운 자들로부터 헐어버리기를 요구하는 사악한 권력(diabolic potency).
 
----------
 
2-6. 
다음은 총 6권으로 한 질을 이루는 시리즈인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의 인터넷 각주로 제공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 11,11-12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입니다:
 
 
11. With John the Old Testament is brought to a close and we are on the threshold of the New. The Precursor had the honor of ushering Christ in, making Him known to men. God had assigned him the exalted mission of preparing His contemporaries to hear the Gospel. The Baptist's faithfulness is recognized and proclaimed by Jesus. The praise he received is a reward for his humility: John, realizing what his role was, had said,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John 3:30).
 
11.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옛 계약(the Old Testament)은 끝나게 되며 우리는 새 계약(the New)의 문턱에 있습니다. 이 선구자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도래를 알리는 영예를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을 듣기 위하여 준비하도록 하는 고상한 임무를 이미 부여하셨습니다.  세례지 요한의 충실함은 인정되며 그리고 예수님에 의하여 선포됩니다. 그가 받게 되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그의 겸손에 대한 보상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복음서 3,30)라고 이미 말하였습니다.
 
St. John the Baptist was the greatest in the sense that he had received a mission unique and incomparable in the context of the Old Testament. However, in the Kingdom of Heaven (the New Testament) inaugurated by Christ, the divine gift of grace makes the least of those who faithfully receive it greater than the greatest in the earlier dispensation. Once the work of our redemption is accomplished, God's grace will also be extended to the just of the Old Alliance. Thus, the greatness of John the Baptist, the Precursor and the last of the prophets, will be enhanced by the dignity of being made a son of God.
 
세례자 성 요한은 옛 계약(the Old Testament)의 문맥 안에서 유일하고 비교할 수 없는 임무를 받았다는 의미에 있어 가장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하여 개시된 (inaugurated by) 하늘 나라[새 계약(the New Testament)] 안에서, 은총이라는 하느님의 선물(the divine gift of grace)은 이 나라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는 자들 중의 가장 작은 이를 이전의 시대(dispensation)에 있어 가장 큰 인물보다도 더 크게 만듭니다. 일단 우리에 대한 속량(redemption)이 성취되고 나면, 하느님의 은총은 옛 맹약(盟約)(the Old Alliance)의 의로운 자들에게까지 또한 확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선구자(the Precursor)이며 그리고 (옛 계약의) 예언자들 중의 마지막인 세례자 요한의 훌륭함은 하느님의 자녀가 됨이라는 품위에 의하여 강화될 것입니다.
 
12.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once John the Baptist announces that the Christ is already come, the powers of Hell redouble their desperate assault, which continues right through the lifetime of the Church (cf. Ephesians 6:12). The situation described here seems to be this: the leaders of the Jewish people, and their blind followers, were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the way people wait for a rightful legacy to come their way; but while they rest on the laurels of the rights and rewards they think their race entitles them to, others, the men of violence (literally, attackers) are taking it, as it were, by force, by fighting the enemies of the soul--the world, the flesh and the devil.
 
12.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음을 선포하자마자, 지옥의 힘(the powers of Hell)들은 자신들의 필사적인 공격을 배로 늘리는데(redouble), 이것은 교회의 일생 전반에 걸쳐 곧바로 지속됩니다 (에페소 6,12를 참조하라). 여기서 묘사된 상황은 다음과 같은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맹목적인 주총자들은, 적법한 조상의 유산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도래하기를 사람들이 기다린 방식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려 왔으나, 그러나 자신들로 이루어진 민족이 그것들에 대하여 권한을 가진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권리들과 보상들이라는 이미 얻은 영예들에 만족하고 있는(rest on the laurels) 동안에, 격렬한 자(글자 그대로, 공격자)들이, 말하자면 (as it were), 힘으로써(by force), 영혼에 대한 적들인 이 세상, 즉 육(the flesh)과 악마와의 싸움으로써, 이것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This violence is not directed against others. It is a violence used to fight your own weaknesses and miseries, a fortitude, which prevents you from camouflaging your own infidelities, a boldness to own up to the faith even when the environment is hostile" ([St] J. Escriva, "Christ Is Passing By", 82).
 
"이 격렬함(violence)은 다른 이들에 반하여 향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대 고유의 나약함들 및 비참함들과 싸우기 위하여 사용되는, 그대가 그대 고유의 배신 행위(infidelities)들을 위장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용기(a fortitude)이며, 심지어 정황이 적대적일 때에도 믿음에까지 숨김없이 인정하는 대담함(a boldness)인, 격렬함(a violence)을 말합니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St] J. Escriva), "Christ Is Passing By", 82].
 
This is the attitude of those who fight their passions and do themselves violence, thereby attaining the Kingdom of Heaven and becoming one with Christ. As Clement of Alexandria puts it: "The Kingdom of Heaven does not belong to those who sleep and who indulge all their desires, but to those who fight against themselves" ("Quis Dives Salvetur", 21).
 
이것은, 자신의 욕정(passions)들과 싸우는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폭행을 가하는, 그 때문에 하늘 나라를 획득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바로 그러한 자들의 태도(attitude)를 말합니다. 마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다음과 같이 이것을 언급하였듯이: "하늘 나라는, 잠을 자고 있어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욕구들에 탐닉하고 있는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과 싸우고 있는 자들에게 속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Quis Dives Salvetur", 21].
 
----------
 
2-7. 
다음은 1996년 12월 12일(나해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을 위한 미사 중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강론 말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As happens a number of times during Advent, the Gospel passage presents the figure of John the Baptist. It is Jesus himself who speaks of him to the crowd: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risen no 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Mt 11:11). And he adds: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men of violence take it by force” (Mt 11:12). John the Baptist prepared the people for the kingdom of God, however only those who follow Christ become members of it. And this not without “violence” against one’s own passions and the forces of evil. It is these peaceful “men of violence” who conquer the kingdom for themselves, for others, for the world.
 
대림 시기 동안에 여러 번 있듯이, 이 복음서 구절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비유적 표현(figure)을 제시합니다. 군중을 향하여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오 복음서 11,11). 그리고 당신께서는 다음과 같이 추가로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오 복음서 11,12).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준비하게 하였는데, 그러나 오로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만이 이 나라의 구성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 고유의 욕정(passions)들과 악의 힘(the forces of evil)들에 반하는 “격렬함(violence)”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이 나라를 차지하는 이들은 바로 “격렬한 이들(men of violence)”이며, 다른 이들은, 세상을 준비합니다.
 
 
게시자 주: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마태오 복음서 11,12에 대한 해설과 같은 내용의 가르침을 주고 계심에 주목하라.
 
 
 
----------
 
[내용 추가일: 2010년 12월 11일]
 
2-8.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중에서 마태오 복음서 11,12을 인용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Reply to Objection 1. 에서의 설명을 검토하도록 하십시오.
 
 
특히 위의 제2-6항(나바르 성경 주석서) 및 제2-7항(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서의 가르침들 모두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주어진, 사추덕(four cardinal virtues)들 중의 하나인, 용기(fortitude, 용덕)에 대한 설명의 한 부분과 일치하고 있음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IIa IIae q. 140 a. 1
Whether the precepts of fortitude are suitably given in the Divine Law? 
용기(fortitude, 용덕)에 속하는 규범들이 신법(the Divine Law, 하느님의 법)에 적절하게 주어져있는지? 
 
     Objection 1. It seems that the precepts of fortitude are not suitably given in the Divine Law. For the New Law is more perfect than the Old Law. Yet the Old Law contains precepts of fortitude (Dt. 20). Therefore precepts of fortitude should have been given in the New Law also.
 
     Objection 2. Further, affirmative precepts are of greater import than negative precepts, since the affirmative include the negative, but not vice versa. Therefore it is unsuitable for the Divine Law to contain none but negative precepts in prohibition of fear.
 
     Objection 3. Further, fortitude is one of the principal virtues, as stated above (q. 123, a. 2; Ia IIae, q. 61, a. 2). Now the precepts are directed to the virtues as to their end: wherefore they should be proportionate to them. Therefore the precepts of fortitude should have been placed among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which are the chief precepts of the Law.
 
     On the contrary, stands Holy Writ which contains these precepts.
     I answer that, Precepts of law are directed to the end intended by the lawgiver. Wherefore precepts of law must needs be framed in various ways according to the various ends intended by lawgivers, so that even in human affairs there are laws of democracies, others of kingdoms, and others again of tyrannical governments. Now the end of the Divine Law is that man may adhere to God: wherefore the Divine Law contains precepts both of fortitude and of the other virtues, with a view to directing the mind to God. For this reason it is written (Dt. 20:3,4): “Fear ye them not: because the Lord your God is in the midst of you, and will fight for you against your enemies.”
 
신법(the Divine Law, 하느님의 법)의 목표는 사람이 하느님께 들러붙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런 까닭으로 신법은,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목적으로, 용기(fortitude) 및 다른 덕들 모두에 속하는 규범들을 포함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신명기 20,3.4): "두려워 하지 마라. ... 주 너희 하느님은 너희를 위하여 적들과 싸우시러 너희와 함께 나아가셔서, 너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As to human laws, they are directed to certain earthly goods, and among them we find precepts of fortitude according to the requirements of those goods.
 
     Reply to Objection 1. The Old Testament contained temporal promises, while the promises of the New Testament are spiritual and eternal, according to Augustine (Contra Faust. iv). Hence in the Old Law there was need for the people to be taught how to fight, even in a bodily contest, in order to obtain an earthly possession. But in the New Testament men were to be taught how to come to the possession of eternal life by fighting spiritually, according to Mat. 11:12,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bear it away.” Hence Peter commands (1 Pet. 5:8,9): “Your adversary the devil, as a roaring lion, goeth about, seeking whom he may devour: whom resist ye, strong in faith,” as also James 4:7: “Resist the devil, and he will fly from you.” Since, however, men while tending to spiritual goods may be withdrawn from them by corporal dangers, precepts of fortitude had to be given even in the New Law, that they might bravely endure temporal evils, according to Mat. 10:28, “Fear ye not them that kill the body.”
 
     반대 1에 대한 답변. Augustine (Contra Faust. iv)에 따르면, 구약 성경은 세속적 약속들을 포함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신약 성경의 약속들은 영적이며 그리고 영원합니다. 따라서 옛 율법 안에서는, 세속적인 소유물을 획득하기 위하여, 심지어 육체적 싸움에 있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싸워야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있어, 마태오 복음서 11,12,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에 따르면, 사람들은 영적인 싸움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의 획득으로 어떻게 도달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져야 하였습니다. 따라서, 또한 야고보서 4,7: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처럼, 베드로(Peter)는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1베드로 5,8.9):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적인 재화들로 향하는 동안에 육체적 위험들에 의하여 이들로부터 물러설 수 있기에, 심지어 새 계약 안에서도, 마태오 복음서 10,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에 따라, 그들이 세속적 악들을 용감하게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용기(fortitude)에 속하는 규범들이 주어져야만 합니다.
 
     Reply to Objection 2. The law gives general directions in its precepts. But the things that have to be done in cases of danger are not, like the things to be avoided, reducible to some common thing. Hence the precepts of fortitude are negative rather than affirmative.
 
     Reply to Objection 3. As stated above (q. 122, a. 1),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are placed in the Law, as first principles, which need to be known to all from the outset. Wherefore the precepts of the decalogue had to be chiefly about those acts of justice in which the notion of duty is manifest, and not about acts of fortitude, because it is not so evident that it is a duty for a person not to fear dangers of death.
 
----------
 
2-9.
다음은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중의 2000년 대희년 12월 12일자 (다해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연설문(제목: Address to Catechists and Religion Teachers)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연설문에서의 가르침 역시, 위의 제2-8항에서 안내해 드리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 주어진, 사추덕(four cardinal virtues)들 중의 하나인, 용기(fortitude, 용덕)에 대한 설명의 한 부분과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St. Augustine says the same thing in a much more beautiful way, interpreting John 21, where the prophesy of Peter's martyrdom and the mandate to tend, that is to say, the institution of his primacy, are intimately connected.
 
St. Augustine comments [on] the text John 21:16 in the following way: "Tend my sheep," this means suffer for my sheep.... A mother cannot give life to a child without suffering. Each birth requires suffering, is suffering, and becoming a Christian is a birth. Let us say this once again in the words of the Lord: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Matthew 11:12; Luke 16:16), but the violence of God is suffering, it is the cross. We cannot give life to others without giving up our own lives.
 
The process of expropriation indicated above is the concrete form (expressed in many different ways) of giving one's life. And let us think about the words of the Savior: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and the Gospel's will save it" (Mark 8:35).
 
----------
 
 
2-10. (번역 개선 제안2)
다음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항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79년도 회칙인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제11항 전문입니다.
 
우리말 번역문에서 인용 중인 마태오 복음서 11,12를, 공동번역 성서 혹은 새 번역 성경의 본문을 따르지 않고, 위의 제2-2항에서 언급된, 그러나 그 출처를 밝히지 않은, “다른 사본”의 우리말 번역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즉, “하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라고 번역한 부분), 특히 앞뒤의 문맥을 고려할 때에 사용 중인 어법에 있어 성경의 번역과 다르므로, 마태오 복음서 11,12를 공동번역 성서 혹은 새 번역 성경의 본문으로 교체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며, 더 나아가 이 글의 제2항에서 제안하고 있는 우리말 번역으로 개선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루카 복음서 16,8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그리고 이미 다른 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8.htm(클릭하십시오)], “더 약다” 라는 표현을 “더 현명하다” 로 교체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those "violent people of God" 
 
에 해당하는 표현은, 
 
“하느님의 줄기찬 백성”
 
으로 번역하는 것 보다는, 
 
바로 그러한 "하느님에 속하는 격렬한 사람들”
 
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이라는 생각입니다:
 
 
Jesus Christ is the stable principle and fixed centre of the mission that God himself has entrusted to man. We must all share in this mission and concentrate all our forces on it, since it is more necessary than ever for modern mankind. If this mission seems to encounter greater opposition nowadays than ever before, this shows that today it is more necessary than ever and, in spite of the opposition, more awaited than ever. Here we touch indirectly on the mystery of the divine "economy" which linked salvation and grace with the Cross. It was not without reason that Christ said that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men of violence take it by force"70 and moreover that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astute... than are the children of líght"71. We gladly accept this rebuke, that we may be like those "violent people of God" that we have so often seen in the history of the Church and still see today, and that we may consciously join in the great mission of revealing Christ to the world, helping each person to find himself in Christ, and helping the contemporary generations of our brothers and sisters, the peoples, nations, States, mankind, developing countries and countries of opulence-in short, helping everyone to get to know "the unsearchable riches of Christ"72, since these riches are for every individual and are everybody's property.
 
-----
70) Mt 11,12
71) Lk 16,8
72) Eph 3,8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위탁하신 사명에 대하여 확고한 원리이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신다. 우리는 모두 이 사명을 짊어지고 우리의 모든 역량을 여기에 쏟아야한다. 이 일은 어느 때보다도 현대의 인류에게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 사명이 오늘날 과거 어느 때보다 커다란 반대에 부딪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이 사명이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욱 필요하고, 온갖 반대를 받으면서도 어느 때보다 더욱 기대되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과 은총을 십자가에 연결시키신 하느님의“경륜(經綸)” 의 신비와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69)고 하신 말씀과 한 걸음 나아가서“세속의 자녀들이`……`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70)고 하신 말씀에는 까닭이 없지 않다. 우리는 이 꾸지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서, 교회사에 수시로 나타났었고 오늘날도 볼 수 있는“하느님의 줄기찬 백성” 처럼 되고자 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서로 돕고, 현 세대의 형제 자매들, 나라와 민족들, 국가와 인류, 개발 도상국가들과 풍요한 나라들을 돕는 위대한 사명에 의식을 갖고서 가담하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서 누구나“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71)을 알도록 돕는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 복음은 모든 이를 위해 있는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
69) 마태 11,12
70) 루카 16,8
71) 에페 3,8
-----
 
(졸번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에게 이미 부여하셨던 바로 그 임무의 안정적 원리이며 그리고 확고한 중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임무에 함께 하여야 하며 그리고 우리의 모든 힘들을 이것에 집중하여야 하는데, 이는 이 임무가 근대 인류를 위하여 이제까지보다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임무가 심지어 이전보다 오늘날에 있어 더 커다란 반대에 직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것은 이 임무가 오늘날 이제까지보다 더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보다 더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과 은총을 십자가 수난으로 연결시켰던,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신비에 간접적으로 접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 복음서 11,12) 라고 그리고 더구나 “이 세상의 자녀들이 ...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루카 복음서 16,8) 라고 말씀하셨던 바에는 이유가 없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꾸지람(rebuke)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교회의 역사 안에서 매우 자주 보아왔으며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 보는, 바로 그러한 “하느님에 속하는 격렬한 사람들” 같이 되어야 할 것임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리고, 각각의 인격(person)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 백성들, 민족들, 국가(States)들, 인류, 요컨대, 개발 중인 나라(developing countries)들 및 부유한 나라(countries of opulence)들로 이루어진, 동시대의 사람(the contemporary generations)들을 도움으로써,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 (에페소 3,8) 를 알게 되는 것을 도움으로써,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냄이라는 위대한 임무에 우리가 의식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임을 기쁘게 받아들이는데, 이는 바로 이 풍요(riches)가 각 개인(individual)을 위한 것이며 그리고 모든 이의 자산(property)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2010년 12월 11자 내용 추가 끝].

----------
 
[내용 추가일: 2010년 12월 12일]
 
3.
이상, 마태오 복음서 11,12에 대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등의 교부들의 해석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및 라칭거 추기경님(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해석들을 구체적 자료 제시와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에 근거하여, 또한 마태오 복음서 11,12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가해  대림 제3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11,2-11)의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서 특히 매년 대림 제2주간 목요일의 복음 말씀으로 마태오 복음서 11,11-15를 발췌한 이유를 더욱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3-1.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대림 제3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복음서 11,2-11) 해설 전문입니다. 특히 제2절에 대한 해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복음-마태오 11,2-11
 
     지난 주일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가 오심을 선언하는 것을 들었다. 이번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그 선언을 확인시켜 주심을 듣게 된다.
 
2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마태오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까지 세례자 요한이 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미루고 있다(마태오 14,3-12).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그의 여조카(다른 이복형제의 딸)로서 그의 이복형제인 헤로데 필립포스(Herod Philip)와 이혼한 전처 헤로디아(Herodias)와 간음에 해당하는 근친혼을 한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레위기 18,16; 20,21에 의하면 이들의 결합은 금지되어 있었다(다음의 헤로데 대왕의 가계도를 참고하라). 요세푸스의 Antiquities of the Jews(18.5.2 §119)에 의하면, 사해 동쪽 중앙 해변 근처의 황량한 모압(Moab) 언덕에 위치하는 헤로데 대왕에 의하여 건설된 마케루스(Machaerus) 요새에 [세례자 요한이 갇혀있던] 감옥이 있었다.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 가계도
 
-----
참고 자료: 여기를 클릭하시면, 신약 성경 네 복음서들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헤로데 대왕의 집안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필독하실 것을 권유합니다.
-----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여기에 언급된 방식으로 보아 그들은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속성을 묻고 있는 것으로 들리는데, 이 부분은 예수님이 엘리야와 같은 거룩한 메신저(messenger)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기는 하나, 그러나 가장 근접한 해석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자 요한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마태오 3,13-17을 보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제1독서에서 읽은 이사야 35,5-6을 상기하라. 비록 이 부분이 메시아임에 대한 공적 주장은 아니나, 이 구절들은 메시아께서 재림할 그날을 연상시키는 구약성경에서 언급하는 여러 현상들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심판과 격노의 메시아의 정체성(messiahship)에 관한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왕국을 세우는 것에 관한 것도 아니며, 선택된 백성들의 적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전쟁에 관한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축복을 베푸는 메시아의 정체성(messiahship)에 관한 것이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이러한 치유와 축복의 메시아의 정체성은 사도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메시아의 정체성이었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증언을 해 주신다. 처음에는 여섯 개의 반문적 의문(rhetorical questions)들, 그러고 나서는 그에 관한 세 개의 확언(assertions)들을 하신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당시 유다인들이 통상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은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키(Malachi)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예언이 적어도 500여 년 동안, 즉 기원전 480/ 460년부터 기원후 30년까지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예언자의 출현은 참으로 기다려졌는데,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임에, 그리고 다음의 구절에서와 같이 세례자 요한이 그 이상의 인물임에 동의하신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말라키 3,1과 탈출기 23,20을 보라. 세례자 요한은 그토록 오래 기다린, 새롭고 또 마지막 시대를 가져오실 분의 선구자(precursor)이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 구절은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들 중에서, 심지어 모세보다도 더 위대한, 최후의 그리고 가장 위대한 예언자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메시아께서 지배하기 전에 세례자 요한은 살았고 또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통치(messianic reign) 하에서의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복음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쪼일 것이고, 또 신앙의 원력(power of faith)과의 통공(communication, 하나 됨, 친교)을 이룰 것이기에, 그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한 일들을 해 낼 것이다.
 
-----
 
3-2. 위의 제11절 말씀에 이어, 즉 같은 인용 표시 " "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제12절 말씀을 하십니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제11-15절의 말씀은,
 
3-2-1. (자구적 어의/의미) 한 편으로는, 위의 제2절의 해설에 주어진 내용을 이미 알고 계시고 또 이로 인하여 세례자 요한이 죽게 될 것임을(마태오 14,3-12를 보라), 하느님이시기에 이미 알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막 태어나려고 하는 "하늘 나라"의 산고(産苦)를 당신 스스로 느끼시면서, 참으로 비통한 마음과 함께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의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2000년 대희년 12월 12일자 (다해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연설문(제목: Address to Catechists and Religion Teachers)에서 인용하신,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o)의 해설이라는 생각입니다.
 
3-2-2. (풍유적 어의/의미)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비록 구약 시절의 폭력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참으로 불의한(unjust),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잘라서는 쟁반 위에 얹히는 극도의 폭력(violence)이 행사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렇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당신을 따르는 이들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한 이후로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의지가 강생하신 성자이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현되는 데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마태오 복음서 11,12를 윤리덕들의 주된 덕들인 사추덕(four cardinal virtues)들 중의 용기(fortitude, 용덕, 굳셈)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 바와 같이, 하느님 당신 자신의 용기(굳셈)의 개입이 있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제12절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3-2-3. (윤리적 어의/의미)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으로, 교부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리고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버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교회 안에 존재해 오고 있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하여, 열심 신자들이 평소에 어떠한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3-2-4. (종말론적/신비적 어의/의미)  제12절에 이어지는 제13-15절의 말씀인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부분은, 그동안의 "옛 계약"이라는 대림 시기가 끝나고, 예수 재림의 날에 완성될 당신의 하늘 나라를 향한, "새 계약"에 의한 "메시아의 시대"의 시작에 대한 분명한 선포이기에, 매년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마태오 복음서 11,11-15)의 종말론적/신비적 의미를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드러내시는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3-3. 이상으로, 메시아의 시대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예수 성탄을 2주 앞 둔,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우리의 기다림이 희망으로 바뀌는, 대림 제3주일 직전인 대림 제2주간 목요일의 복음 말씀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특히 마태오 복음서 11,11-15를 발췌한 이유에 대한 묵상을 끝맺습니다.
 
게시자 주: 성경의 의미(The senses of Scripture)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의 가르침다음의 글의 참고 사항 3에 있으니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4.htm <----- 또한 필독을 권유합니다.
 
---------- 
 
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27시간 
 
 


2,005 1

추천

Sun_T_SOH,하늘나라,천국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