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주님 부활 대축일]빈 무덤 (요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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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4-21 ㅣ No.157

 

 

[주님 부활 대축일]빈 무덤 (요한 20,1-9)

 

베드로는 입을 열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사도10,34ㄱ.37ㄴ-43)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 (콜로 3,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부속가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믿는다. (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 (사도10,34ㄱ.37ㄴ-43)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39ㄴ-40)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백인 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갈라디아 3장 1절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9절의 '나무에 매달아'에 해당하는 '크레마산테스 에피 크쉴루' (kremasantes epi chsylu;hanged on a tree)도 신명기 21장 23절의 문장 형태와 유사하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신명21,22-23)

 

베드로는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나무에 매달리심을 신명기 21장 23절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신명기에 따르면, 사람이 범죄하여 처형당할 경우에 그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경계의 표본으로 삼았는데, 시체가 나무에 매달린 것은 그가 저주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면서 '십자가'라는 표현이 아닌 '나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저주 장차 인간들이 당할 모든 저주에서 인간들을 건지는 대속적 저주였다.

베드로는 '나무'라는 단어를 통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 24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나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한편 '매달아'로 번역된 '크레마산테스'(kremasantes)는 '걸다', '~에 달려있다'를 의미하는 '크레만뉘미'(kremannymi)의 부정(不定) 과거 분사로서 '매단후에' 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매단 이후에 죽였다는 사실이 이 부정 과거 분사형 단어에 나타나 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를 처형할 때 돌로 쳐서 죽였다. 때로 그들은 형을 집행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수치스러움과 저주 받았음을 나타내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범죄자를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아 형을 집행하였으며, 본문의 시제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0)

사도행전 10장 4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실패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가지고 번역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공공연히 보이도록 그를 내주셨다' 가 된다.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에게이렌'(egeiren; raised up)은 '에게이로'(egeiro)의 

부정(不定) 과거 3인칭 단수이다.

고전 희랍어에서 '에게이로'(egeiro)는 세가지 기본 개념으로 쓰였다.

첫째는 '깨우다', '자극시키다'이고,  둘째는 '일으켜 세우다'셋째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 라는 의미이다.

본절에서는 세번째의 개념인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는 의미로 쓰였다.

 

한편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로 번역된 '에도켄 아우톤 엠파네 게네스타이'(edoken auton emphane genesthai; caused him to be seen)에서 '엠파네'(emphane)는 '명백한', '보이는'을 뜻하는 형용사 '엠파네스'(emphanes)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나타내다', '전시하다' 를 의미하는 '엠파니조'(emphanizo)와 관련되며 신약에 단 두번 나타난다. 본절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는 이다(로마10,20참조).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를 공공연히 나타나게 하셨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르넬리우스 집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이 이방인들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유대인들이 퍼뜨린 헛소문(마태28,13)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복음 (요한20,1-9)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7)

 

여기서 '수건'으로 번역된 '수다리온'(sudarion)은 요한 복음11장 44절에서 라자로가 죽음에서 깨어나 무덤에서 나올 때 얼굴에 감싸인 채 있던 수건과 동일한 단어인 것을 볼 때, 장례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의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의 몸을 쌌던 아마포와 얼굴(머리)를 쌌던 수건은 약간 떨어진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아마포'(flax)에 해당하는 '오토니아'(othonia)는 '고운 베' 또는 '세마포'(linen)라고도 하는 천으로서 이집트(1열왕10,28)나 시리아(에제27,16)로부터 수입되어 팔레스티나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남의 천막 재료(탈출26,1)나 사제의 의복 재료(탈출28,5~8)로 사용되었다.

 

이 아마포는 눈처럼 흰색을 가지고 있어서 장례용 수의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한 복음 19장 40절에는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감싸는 데 사용한 천으로 나온다.

이것은 비싼 천이었으므로 만일에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이 아마포도 당연히 가져갔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간접적 증거가 된다.


또한 '개켜져'로 번역된 '엔테튈리그메논'(entetylligmenon; wrapped; was folded up)의 원형 '엔튈릿소'(entyllisso)는 우리말 '개키다'가 갖는 '잘 포개접다'의 의미가 아니고, 둥그렇게 말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즉 수건으로 머리와 턱을 동여맸던 상태 그대로 놓여 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부활하신 몸이 신비스런 방법을 통해 수의나 머리를 감싼 수건으로부터 저절로 빠져 나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수의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몸만 빠져 나간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러니 만일에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에서 아마포와 수건을 일일히 벗겨내거나, 벗겨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고 다시 개켜 놓은 뒤에 시신만 훔쳐 갔을리가 만무한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빈무덤 사화를 부활의 첫 메세지로 선포함으로써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믿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입니다.

복음은 “주간 첫날” 새벽에 일어난 사건을 들려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갑니다.

엄격한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유다인들은 다닐 수 없습니다.

그녀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 놀란 것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보다, 누군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다고 생각하고 이를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라고 여깁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부활은 이상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 이 일을 말하자, 두 제자는 그 이야기를 확인하러 곧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본 것들, 곧 수건과 아마포는 참으로 이상한 사건을 증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기에 부활에 대한 그분의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예고도 매우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남’, ‘다시 깨어남’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그분의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야 제자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님의 예고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밝혀 준 사건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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